*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526-6에 난곡(蘭谷) 최철견(崔鐵堅)이 1546년(명종원년) 건립한 고택이다. 임란때 병화를 입지 않았다. 1809년 보수 이래 현재까지 보수를 거치면서 17대(1990년 현재) 종손이 살고 있다.
* 경북지방유형문화재제80호로 지정하면서 고택을 창건한 사람의 인적사항을 조선시대 문신, 청주부사, 전라도사로 소개하고(지식백과등도 같다) 있으나 오류이다.
* 또 어떤 글에는 최철견은 학행이 뛰어나 경주부윤의 천거로 청주목사와 전라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임란때 전라도사로 있던 몽은(夢隱) 최철견(崔鐵堅,1548~1618)은 전주최씨이고그는 임란때 사민(士民)과 함께 결사항전하여 전주를 수호하고 1592.10 수원 독산산성에서 권율장군이 불리한 전황중에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뒤에 수원부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에 대하여 난포 최철견(1525~1594)은 영천최씨14대손이고청주목사와 전라도사를 지낸바 없고(그 정도의 고위직에 올라가려면 과거에 급제해야 된다) 향리의 유력자이었다고 추측된다. 난포는 임란때 67세임에도 의병을 모아 경산 아화산성등지에서 왜구와 전투를 하였느데 전주에서 결사항전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영천최씨는 6대손 최무선이 왜구를 토벌할 목적으로 화약 총포제작을 한 이래로 대대로 화약제조의 맥을 이어왔고 이순신의 해전에도 이용되었다. 난포는 같은 자인출신으로 14대손인 성재 최병문(1557~1599)과 함께 의병대장 권응수의 휘하에서 영천읍성 탈환전(임란 4대 대첩중 하나)과 경산 아화산성 전투에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최병문은 전투에서 화약을 사용하여 공을 세웠고 한성부우윤에 추증되고 자인의 충현사에 제향되었다. 그가 타던 말안장은 보물747호로 지정되었다. 이에 대하여 난포와 손자 증손자는 모두 임란의병장으로 최병민과 함께 싸웠지만 그보다 못한 선무원종공신록에 3등급으로 등재되었다. 난포가 청주목사를 지낸 경력이 있었으면 벼슬을 추증받았을 것이나 그런 문헌이 없다.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하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좀 더 책임있는 고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2. 오백년 역사를 지닌 고택
* 조선의 풍수는 일본 총독부의 의뢰에 따라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이 地官전기응(이왕직 참봉)의 자문아래 1931년 저술한 책인데 많은 풍수학인들이 한번씩 읽어 보는 책이다. 양택 길지로36곳의 예를들었는데 그 중 22번째로 이곳을 지적하고(발복지를 예로 든 것이고 혈처의 등급순위를 말한 것이 아니다)지형이 부용화(芙蓉花)이며 구한말정부에서 특사를 보내어 택지를 시찰한 적이 있다고 한다.
* 한편 조리형이므로 100년을 주기로 하여 한 세대가 재산을 모우고 다음 세대는 다 써버리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창건(최철견), 발전(고택증축), 쇠퇴(고택일부가 채권자에게 넘어가다), 복원(고택복원), 재도약(관광)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3. 간산
* 주산에서 혈처까지 행룡 여정(旅程)이 을자(乙字는 之字보다 각도가 급하다)형이다. 청룡은 두텁지만 백호는 낮고 안산은 강하며 수구는 열려있다. 비보로 마을 입구에 방풍림을 심었으나 수구를 보완하기는 역부족이다. 평지에 낮게 떨어지고 와(窩)로 생겼기 때문에 볼품없는 부용낙지보다는 조리형이다.
* 고택 행룡---
* 냉정하게 본다면 이 혈은 수구가 짜여주지 않아서 중등중급에 턱걸이 할 등급이다. 오백년간 부침(浮沈)을 하면서 이어져온 것은 후손들이 혈처의 역량을 잘 흡수하고(전성기의 재산은 일천석이라 한다) 고향을 지키려는 성향이 강한 덕택이라 하겠다.(2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