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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텃골에 와서☆]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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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골에 와서]
이 명 시집 / J.H.CLASSIC 014 / 도서출판 지혜(2017.09.15)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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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골에 와서
이 명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
불을 품고
바람벽에 기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나무들은 또 얼마나 선한가
버려져 있는 나무보다 선택되었다는 마음에 안도하듯
틈새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장작은 서까래까지 닿아 있고
영혼들은 자유로운데
언제부터 나무들은 제 몸을 태울 생각을 했을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속에 남아 있는 한 톨의 습기마저 돌려드리며
세월을 둥글게 말아가고 있다
나는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
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 있다
사람들은 왜 거기까지 갔느냐고 말을 하지만
뜨거운 것이 사랑이라면
부풀어 오르는 것은 그리움이라 해야 하나
처마 아래 장작 곁에서
고요히 부풀고 있는 한 독의 술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발화를 기다린다
동해바다
이 명
산중턱
능선과 능선이 가지런히 흘러내려 대야가 되고
‘바다는 세숫물이 되었다
반야용선처럼 배가 떠 있고
새벽마다 물은 붉게 데워지는데
언제였던가,
따뜻한 세숫물 한 대야 떠 놓고 당신을 기다린 것이
또 다른 도시
이 명
도시 하나를 발견했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흙을 헤집고 다녔다
벌이 잉잉 대고 풀벌레가 요란하게 노래하고
나비가 춤추고
잠자리 행렬이 줄지어 비행했다
게아재비가 생각에 잠긴 듯 물위를 서성거렸다
고양이가 밤마다 출몰했다
봉분은 단아했다
유난히 봉분 주위로 새들이 모여들어 지저귀고
햇빛은 찬란하게 빛났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침묵은 깊어지고
고요히 숨죽이고 있던 것들이 눈을 뜨고
풀들이 둥그스름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쉼 없는 소리에
녹색의 지붕이 마침내 들썩인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산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했지만
어느새 여름이 다 가고 나무는 물들고 하늘은 청청하다
나는 이 도시에서
장중한 음악에 귀를 적시며 나무를 쟁인다
밭의 진화
이 명
고추 모종에서 귀를 발견했다
바람이 얼마나 수다스러웠으면 허리가 부러졌을까
쓰러진 모종 하나,
지지대를 세우고 묶어주었더니 귀가 돋아났다
귀는 내 발자국 소리에 쫑긋 빛났다
밤새 아픔을 참고 견딘 흔적이 마르지 않고 남아있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저 모종은 아직 너무 어려서
세상의 그늘을 분멸하지 못하지만
하도 산중의 소리가 궁금해 귀부터 생겨난 지라
성장하면서 비오는 소리를 들으면 먼 데를 생각하고
꽃이 피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다거나
별이 움직이면 곰곰이
그 소리를 따라가며 몸을 돌리기 위해 귀부터 생겨난 거라
키가 자라 줄기가 강해지면 귀는 점점 사라질 것이지만
나는 한 포기의 모종, 안부가 궁금해
새벽마다 내려가 유심히 살펴본다
어린것이 내 숨소리에 안도하다가도
바람 한 줄기에는 소스라친다
중심을 잡고 다시 꼿꼿하게 세워주는데
어딘가에서 조곤조곤, 그늘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린다
말귀도 밝아지는 걸까 내 귀가 뚫린 것 같다
단단한 배후
이 명
대한을 며칠 앞두고
베란다 화분에 심어 놓은 산철쭉 한 그루
느닷없이 꽃을 피우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밑동에 사슴벌레 한 마리 죽어 있다
다른 회분들은 죽장처럼 고요한데
문상하듯 바라보자
활짝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꽃은 겨우내 지지 않았다
풍장이 끝날 때까지
그것이이 꽃의 조문이라는 것을 나는 짐작조차 못했다
삶이 조문이라는 것을 새까맣게 몰랐다
눈부신 황홀
이 명
동틀 무렵 아카시아 숲속
오색딱따구리 한 마리, 나무를 쪼며 분주히 오르내리고 있다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불그스름한 앞치마를 둘렀다
바다에는 배가 떠 있고
가지마다 불을 켠 듯, 나무도 온통 하얀 초롱을 주렁주렁 내걸었다
공중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는 도마 소리
당신이 오시려는가
감자꽃
이 명
한 여인 적시던 바다
이랑마다 별은 뜨고 눈물 같은 별은 뜨고
꽃이 피고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연한 보랏빛이다
꽃은 왜 또 피어나
눈물같이 피어나 너울이 되나
숨어있던 생각들로 밭은 온통 환하다
바람 한 점 없어도 물결이 이네
옛사람이 고랑을 넘어오네
한 여인 적시던 푸름, 환하게 요동치네
절정
이 명
울지 마라, 새야
그물에 걸린 새를 보며 울지 마라, 새야
저 붕긋한 것들이 모두 무덤이란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그때 울어라, 새야
바다에는 창문이 없단다
그래서 하염없이 부푸는 거란다
비가 내리고
내리는 비는 물이 되고
물속에 잠겨서 더욱 깊은 물이 되나니
육중한 것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넘어야 할 것이 한계령뿐이겠느냐
울어라, 새야,
소리 내어 크게 울어라, 새야
내 속에 바다 하나 생길 때까지 실컷,
울어나 다오
보헤미안 블루
이 명
산중턱 걸려 있는 바다는 한 잔의 칵테일,
슬픔을 아는 자의 것이다
능선과 능선이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려 술잔을 만들고
거기에 담겨있는 바다
술잔은 언제나 반잔의 바다로 채워져 있다
나머지 반은
때로는 먹구름이
때로는 뭉게구름이 바람과 함께 들어와 있다
맑은 날에는 하늘이 여백을 메워주고 있다
술잔 속으로
아침마다 태양이 떠올라 술은 서럽도록 붉고
풍랑이 이는 날에는
한 배 가득 울적함을 부두에 부려 놓도 배는 산중으로 들어온다
바다는 깊어지고
배는 목이 마르고
뱃사람들은 막막해서 나는, 한 잔의 칵테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서러움에 목이 멘 어부에게는 테킬라 선 라이즈를
눈물이 마른 어부에게는 블루문을
사랑을 잃어버린 어부에게는 섹스 온 더 비치를 준비해 두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낮, 다시 또 방파제에 너머로 미끄러져 가는 저, 한 척의 배
어쩌면, 임 선장의 문어 잡이 통발어선 아니면
최선장의 광어 잡이 그물배일지도 모른다
나무들의 장례식
이 명
폭풍우에 쓰러진 참나무 그루터기에서 구름버섯이 피어났다
염殮을 하듯 몸을 층층이 감싸고 있었다
주변에는 국화꽃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조문하듯
웅크리고 있는 하늘소 뒤로 산개미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살아있는 가지들은 고요했다
잎들은 소리 지르지 않았다
하얀 꽃에 둘러싸인 주검, 환했다
뒷산을 내려오며 나는 그 곁에 돌탑 하나 세워주었다.
두터운 책
이 명
군립도서관 책장에서 하저ㅗ대 바다를 꺼냈다
검푸른 표지를 가진 한 권의 책은 내용이 깊다
갈매기는 유유자적 화선지 위를 날고
그러나
풀리지 않는 생각들은 정리하기 위해 찾아가 뒤적여보는 책장
하조대 바다에서
하륜과 조준의 이야기는 서문일 뿐,
파도의 문장에서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이 한창이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두루마리
풀기 어려운 생각의 끝,
수평선 너머
붉은 해를 삼키고 토해내는 바다가 있다고 한다
글자들이 뼈를 묻는 백사장이 있다고 한다
감전
이 명
잔설 남은 산기슭에
내가 생강나무 꽃으로 피고 있을 때
꽃그늘로 들어온 것이
그냥 지나가는 한 마리 사슴인 줄 알았는데
그게, 그대일 줄이야
비바체, 당신의 빛
이 명
싱크대 문 안쪽에
나란히 꽂혀있는 몇 자루의 칼
당신이 베어낸 절벽이 푸르듯이 바다는 푸르고
숨어 빛나는 칼의 눈도 푸르다
도마 위에 누워 있는 방어의 등도 푸르고
방파제 앞바다
죽은 것처럼 흘러가는 한치의 몸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것도
어둠이 아니고서
슬픔이 아니고서야 어찌
푸른색이 배어나올 리 없지, 저 몸에서
시선은 바다를 향해 있고
푸른빛은 서서히 내게로 스며들어 접시처럼 부서지는 것일 게지
당신과 나,
단면이 같듯이
부서져서 희망이 되는 것일 게지
어둠 속, 아득히 별은 빛나고 나는 바다를 생각하고
가오리는 부두에서 몸을 말리며 밤마다 웃는다
자월도 엽서
이 명
말라죽은 개살구나무 한 그루 베어버리자
직박구리 집이 무너졌다
빈집에서 호랑거미 몇 마리 우르르 몰려나왔다
변명은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귀양 온 사람이 첫날밤 보름달을 보며 자신의 억울함을 한탄하니 갑자기 달이 붉어지고 바람과 폭풍우가 일어 하늘도 자기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자월도라 했다는 섬, 그 섬에 갔다
밤중에 달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국수
이 명
니모키 트레임에서 내가 마카로니 국수였을 때 그대 속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대 속은 넓고 따뜻했다 길이 복잡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요하고 적막했다 어딜 가나 석양 같은 불그스레한 풍경이었다
외딴 방 한 구석에서 창밖을 내다본 적도 있었고 어느 끝없는 길가에서는 이정표처럼 돌탑이 서 있는 것도 보였다 돌탑은 어둠인 것 같아 보이는 대로 재거하였는데 그 뿌리가 깊어 죽순처럼 돋아날 기세였다
구불구불 산길 사이를 지나다 길을 잃었는데 헤매던 중 동굴이 있었고 연못이 있었고 연못가 바위틈에서 옷 한 벌 보았는데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대, 더러는 날더러 나무꾼이라 그러더니 아직도 속에 날개옷을 품고 있었구나 언젠가 그대 떠나는 날을 위해 벗어놓은 그대로 못 본 척 고이 두고 나왔다
내 모습 이미 흔적 없이 녹아내릴 즈음이었다 랜싱호숫가였다
꽃에 물들다
이 명
오월에 피는 꽃, 성도화를 아십니까?
꽃이라 부르기에도 너무 벅찬 당신,
당신은 대한민국의 빛나는 육군 소위였습니다
임관한지 4개월 만에 당신은 산화하고 꽃이 되었지요
1970년 5월 13일 21시 25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 각개전투장에서
꽃 한 송이
너무나 충격적으로 피어났습니다
별이 한없이 청청하게 빛나는 밤이었습니다
그 밤 어둠 속으로
별꽃 하나 캄캄하게 떠오르고
그곳에 진한 붉은 꽃 한 송이 피어났죠
그 별꽃 이름이 성도화라는 것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당신은 가고
꽃은 피고
꽃 중의 꽃, 성도화
지고지순의 꽃말로도 당신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울산에서 영천으로
영천에서 화천으로
다시 또 화천에서 동작동까지
청운의 푸른 꿈이 한 줌의 재가 되기까지
당신이 거침없이 걸어간 길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혁혁한 순백의 길
하지만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젊은 나이에 순직하라 했나요
나 외에 다친 사람은 없느냐?
이 한 마디로 간단히 요약되는 당신,
당신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육군 소위였습니다
당신이 있어 5월은 더욱 맑고
당신이 있어 우리의 봄은 갈수록 화창합니다
당신이 있어 오늘도 신록 푸른 꽃길을 걸었습니다
오월의 꽃, 당신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해도
당신이 있어 이 강산과 바다와 하늘은 더욱 푸르게 빛납니다
별꽃나라
저 수많은 별들 중에서 유난히 빛나는 꽃별 하나
동작동 서쪽 6번 묘역, 군번 500243 앞에서
머리 숙여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직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불굴의 용기를 가진 당신
날이 갈수록 텅 빈 우리의 외롭고 쓸쓸한 가슴을 달래주소서
이 미약한 조국을 지켜주소서
님이여, 영원불멸하소서!
기사문 꽃새우
이 명
화영호 갑판 위
빠른 템포의 음악이 흐르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흐르고
선율 따라 가볍게 뛰어오르는 이사도라 던컨
혈소판 감소증도 잊어버리고
울긋불긋
너무도 아름다워 서러운 곳에서 동백이 피어나듯
피는 꽃, 꽃 한 송이
해변 월세방
이 명
벽속에 새가 있다
누군가 종이컵으로 막아놓은 구멍에서
새벽마다 소리가 들린다
새는 종이컵을 부리로 쪼며 소리를 높이고
나는 그 소리에 깬다
스스로 벽을 가진 새
바다에는 창이 없었고 내 속의 새는 울지 않았다
새장 문을 열어 놓았지만 새는 어리둥절 한참 후에야 낮게 날아갔다
새장에서 새는 지워지고 내 안에 새 한 마리 들어왔다
생각이 물결인 양 부풀어 오르는데
갑자기 벽이 조용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자
천진난만하게 몇 마디 속삭여주는
깊고 깊은 먼
북명北溟의 파도 소리
새는 나더러 깨어있으라 한다
언제나 깨어있으라 한다
스스로 벽을 가진
그와의 더부살이가 즐겁기만 하다
뚝지
이 명
가슴에 잇는 동그란 빨판, 저것은 분화구다
유난히 하얀 그 속,
켜켜이 쌓인 주름도 보인다
성동호가 걷어 올린 둥글고 검은 덩어리
무중력으로 떠 있는 듯하다가
세찬 물살에 기우뚱거리다가
수조 바닥이거나
투명 유리벽이거나
고무 대야 어느 곳에 달라붙어도
가부좌 틀고 앉은 수도승처럼 편안하다
멍텅구리라 불리면 어떻고
심퉁이라 한들 무슨 상관있겠는가
저 힘으로 바위를 잡고 한평생 버텨왔을 것이다
활화산처럼 살고자 했을 것이다
속이 터져 생긴 상처의 흔적일지라도
무언가를 힘주어 잡을 수 잇다는 것은 좋은 일
가슴에 분화구 하나쯤은 가져도 좋을 일
삶의 끈, 놓치지 않는다면
사랑의 무게
이 명
집을 덮칠 수 있다는 말에
뒷산 기슭 참나무 한 그루 베었다
밑동을 자르고 보니 오십년은 족히 넘었다
땅벌들이 잉잉대고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물들의 삶도 사랑하면서 살아보고자 했으나
나는 늘 생각만으로 그쳤다
토막 내서 화목 더미에 쟁이는데
아로마 향이 짙게 밀려왔다
눈물이었다
강물 같은 눈물이었다
지워버리려 했지만
이미 처서가 지났는데도 몸이 달아오르고
땀이 쏟아지고
생각뿐인 사랑이 내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물기를 버릴 것이다
거짓이라도 좋구나, 가볍게 타오를 것이다
기분 좋은 날
이 명
이른 아침 맛있는 찌개를 끓여놓았다고 빨리 내려오라는 엄여사의 전화를 받고 산길을 내려오는데 살찐 고라니 두 마리 나타나 서로 뒹굴며 장난치며 달려온다 흠칫 놀라 멈추자 껑충거리며 서로 희롱하며 산기슭 너머로 사라졌다 베ㅐ가 부른 것을 보니 새끼를 밴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이 사리진 능선에서 오색딱따구리 문을 두드리고 실바람이 불어오고 머나먼 송네 피오르 냄새가 풍겨왔다
먼 데 사람이 소식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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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텃골에서 기사문의 삶을 주로 하여 다섯 번째 시집을 상재한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의 삶이 즐겁다. 아침마다 햇살이 반갑게 맞아주고 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부른다. 흙에 씨를 뿌리니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힌다. 산중턱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때로는 한 잔의 술이고 때로는 대야에 담긴 세숫물이다. 태양도 추위를 피해 겨울에는 남으로 가고 여름에는 무더위를 피해 북으로 온다.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두고 바람과 마주선다.
양양 그리고 기사문, 텃골이라는 말, 이제는 사랑스럽다. 험한 바다와 싸워온 기사문의 사람들, 그들은 강하다. 험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지금도 365일 태극기를 계양해놓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이 책이 조그만 위안이라도 됐으면 한다.
2017년 8월 노염지절에, 바다 시 마을 동해서실 명련재에서
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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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 詩集 [※텃골에 와서※]
[ 해설 ] -
생성이면서 소멸인 삶의 접점과 욕망
김병호 시인. 협성대 교수
서정시에 능한 시인들은 대체로 사물의 표면보다는, 사물 안에 퇴적되어 있는 시간과 지층의 이면에 집중한다. 그들은 실재적인 모습의 편린 속에서 기억의 지층에 아득히 묻혀 있는 존재를 복원하고 이를 개진하는 것이 서정 시인의 직무라고 스스로 믿는다. 이명 시인은 시가 마치 자기 생의 형식인듯, 오래된 시간의 축적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고 확산되어가는 어떤 것들을 자신의 현재형으로 삼는다. 그리고 오랜 축적과 빛나는 한 순간의 결합을 절묘하게 포착해 삼는다. 그는 시적 대상을 시간화하는 특유의 관성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명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텃골에 와서』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시인이 세계를 응시하고 그것들을 의미화하는 기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시집『텃골에 와서』는 도시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적 기준을 ‘텃골’과 ‘동해바다’로 비유되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찾고, 자신의 체험적 자연 세계를 투명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는 구태의연한 안빈낙도의 자세가 아니라 자연을 살피는 인식주체의 위치와 삶의 방식에 대해 치열한 반성적 태도를 엿보여 준다. 사물과 일상에 감추어져 있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시인의 그윽한 음성은 그동안 우리 시가 잊었던 서정의 목소리이며, 시인은 기억의 노래를 되살리는 귀한 의미를 생래적으로 알고 있는 듯 싶다. 그의 음성에는 오랜 시간의 퇴적과 함께 끊임없이 갈구하는 근원에의 투시 욕망이 녹아 있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소멸해가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탐구를 거두지 않고, 그 속에 은폐된 삶의 존재 방식을 꿰뚫고자 하는 시인의 투시 욕망은, 시인의 시가 시작되고 결국은 시가 가닿는 마지막 자리가 된다.
풍부한 서사를 내장하고 있을 법하지만 허투루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그저 무심하게 흐른 시간을 사물에 채색하는 방식이 그만의 시적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삶은 온종일 태극기가 펄럭이는, 험한 바다를 앞에 놓고 살아가는 텃골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텃골을 배후로 삼는다. 그런 그의 삶은, 원초적 총체성이 여러 군데 균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 특유의 건조한 통찰을 통해 나르시시즘이라는 치명적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있다. 시인은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여름이 가고/또 가을이 가고/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텃골에 와서」), “혁명을 꿈꾸며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삶은 또 왜 그리 난해했는지”(「깻묵」)를 되돌아보고, “세상의 그늘을 분별하지 못하지만/하도 산중의 소리가 궁금해”(「밭의 진화」) 생긴 귀를 발견하고 “말귀도 밝아지는 걸” 깨닫게 된다. 즉 시인에게 ‘지금’은 오랜 시간의 흐름이 온축되어 있는 충만한 현재형이다. 시는 이명 시인의 삶에서 어떤 완성된 형태를 상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늘 자기 반성적 문맥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해 가고, 그 방향을 가늠하는 과정의 어떤 것을 변증하고 있는 삶의 또 다른 형식이다.
기골이 장대한
문어 잡이 통발서선 임 선장이
젊은 시절 하조대 해수욕장에서 장사할 때 사용했다는 등燈
20여 년 동안 창고에 고이 간직해 온 진공관 등을
산중턱 외딴집 앞마당에 세워두고 간다
온종일 땀 흘리며 돛대처럼 세워놓고 내려갔다
산중턱은 외로운 곳이라고
등 근처에서 매미는 쩌렁쩌렁 울고 잠자리가 떼로 날았다
새들이 지저귀고 채송화가 만발했다
어둠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이 밝아지듯이
지난날을 반추하며 고개 숙인 등
한때는 길이었을 빛을 돛대 끝에 매달고
밤에는 등도 배가 되어 솟는다
전생을 짚어주던 늙은 선사의 눈빛같이, 등대같이
어둠을 지우며 나아가는 배
대륙을 지나고 사막을 지나고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말들이 달려가고 풍랑이 일고
밤하늘은 문득
가스통 바슐라르처럼 깊다
몰두할수록 환한 바다
은하銀河를 건너 가물가물 등은 계속 항해 중이다
-「임스 램프Limm's lamp」전문
이명 시인의 작품들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식하거나 혹은 가치의 불확실성, 사회와 개인 간의 간극을 인식하면서 세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예리한 비판적 태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자신의 실존적 정당성을 공룡과 같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안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시인은 삶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삶의 역동성을 그려내기 보다는 오히려 간과했던 고답적 삶의 자세, 혹은 삶의 지혜에 집중하고 있다. 합리화와 생산성을 표방한 경제, 사회, 문화의 급속한 변화보다는, 정신의 황폐함 속에서 정신의 공동화를 대체해 줄 거처를 마련하는데 몰두한다. ‘동해 바다’나 ‘텃골’ ‘기사문’이 그렇다. 시인은 동시에 구체적 삶을 지배하는 풍경 안에서 다다를 수 없는 시원始原에 대한 동경을 형식화의 원리로 삼는다. 시인에게 동경은 그 자체가 행복이며 비극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대와 자신의 구체적 삶을 지배하는 양태를 지닌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인에게 동경은 운명과 같다.
“은하銀河를 건너 가물가물 등은 계속 항해”해 갈 때, 등은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다. 산중턱 외딴집에 있지만, “한 때는 길이었을 빛을 돛대 끝에 매달고”“대륙을 지나고 사막을 지나”며 항해를 멈추지 않는다. 삶의 현장과 전면적으로 대결하기보다는, 현실적 문맥에서 떨어진 자리에서 관조적 태도를 취한 것이라는 비판의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화자가 보여주는 경지는 단순한 회피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치유해야 할 대상, 위로받아야 할 삶이 도처에 존재할 때, 화자의 내면 속에 구심적으로 고착된 동경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것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현실과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상처받은 자아를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문어 잡이 통발어선 임 선장이” 가져온 진공관이 “20여 년 동안 창고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는 진술은 단순히 진공관 등에 대한 설명이 나이다. 화자는 20여 년의 세월동안 자신의 빛을 내지 못했던 자신과 감정적 연대를 시도한다. “어둠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이 밝아지듯이/지난날을 반추하며 고개 숙인 등”은 화자가 자신의 맨얼굴을 들여다보고,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동안의 삶의 여로를 되돌아보면서, 반성을 통해 다시금 무엇을 이루거나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즉 존재적 물음과 의미적 지향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여덟 번째 연이다. “밤하늘은 문득/가스통 바슐라르처럼 깊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비유하는 세계가 바로 화자가 가닿고자 하는 동경의 세계이며, 생성이면서 소멸인 접점이다. 삶에 대해 매순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세계, 이러한 거리감이 이명 시의 존재 이유이면서 또 다른 가치라고 보여진다.
나는 벌레다
왜 이 산중에 와 있느냐고 묻지 마라
와서 보니 벌레들이 많더라
동쪽, 비늘 있는 벌레와
서쪽, 날개 있는 벌레와
남쪽, 털 있는 벌레와
북쪽, 껍질 있는 벌레와
중앙에는 털이 없는 벌레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기하더라
꿋꿋이 자기 할 일만 하는
생각이 깊을수록 행동은 신중하더라
힘을 과시할 일도 없이
나는 중앙에서 저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왜 이 외딴 곳에 와 있느냐고 묻지 마라
무심코 풀숲을 기어가던 민달팽이를 만났다
저도 놀란 듯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마음을 비운지 오래인 것 같았다
어느 것 하나 두려움이 없는 것이 좋았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부러웠다
무엇엔가 골몰할 때는 그지없이 적막하지만
처녀들의 환생인지
무슨 신바람이 났는지
날아다니는 것들의 수다스러움에 나도 생각이 깊어졌다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
여기서는 날개 없이는 날아다닐 수 있겠더라
무덤은 고향이더라
저들이 누군가의 환생인 걸 알았다
나의 후생이라는 것도 알았다
-「벌레 사숙」전문
시적 주체가 작품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정립해 간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의미보다는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고립감, 소외의식, 혹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혼란, 균열과 함몰에 대한 불안에 가깝다. 시는 본질적으로 몸과 정신, 욕망과 규범, 나와 세계 사이의 발생하는 불일치를 가장 예민하게 수용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궁극적으로 시적 주체를 세계의 중심으로 상정하는 서정 양식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내면적 초월은 어디에 가닿는 것일까? 현실의 세계에서 의미 있는 가치가 부재하는 것을 깨달은 주체가 삶을 견디는 방식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철저한 외면과 무관심하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초월과 자기 극복에 대한 노력이다. 하지만 이명 시인은 이 두 가지 방식 모두를 탐색하고 있다. 화자는 “왜 이 산중에 와 있느냐고 묻지 마라”며 ‘벌레’와 ‘민달팽이’의 생존 방식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모색한다. “힘을 과시할 일도 없이” “꿋꿋이 자기 할 일만 하는/생각이 깊을수록 행동은 신중”한 벌레의 모습은 화자의 이전 삶을 반증하는 풍경이 된다. 권력(힘)의 치열함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전개한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고, 그럴수록 삶의 방식과 행동은 진중하기보다는 허둥지둥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자는 벌레의 모습을 통해 그동안 사회적 관계 양식 속에 길들여져 있던 자기 삶에 대한 반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타자화하고, 타자화된 존재를 통해 더욱 깊은 자기 이해의 길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긴 시간 동안의 생각 끝에 가던 길을 씩씩하게” 가는, “마음을 비운지 오래인 것 같”은 ‘민달팽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런데 화자의 시선은 이쯤에서 그치지 않고, 고향을 ‘무덤’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가닿게 된다. 세상을 벗어나 산중 고향으로 돌아온 화자는, 욕망은 어떤 대상이나 타자가 아니라 욕망하는 행위 자체임을 이미 깨닫고 있다. 세상의 욕망이 인간을 점점 더 깊은 좌절과 고립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것임을 깨닫고, 두려움 없이 서로 사이좋게 공생하는 벌레들이 자신의 후생이라 믿고 싶어진다. 주체의 환멸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자신을 통해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화자의 은밀한 욕망은 화자에게 삶의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수만 하늘은 바다다
하늘 가득 물결이 밀려온다
북쪽에서부터 질서정연하게 밀려오던 물결은
천수만 하늘에서 부서져 노을파도가 된다
붉게 채색된 한 폭의 풍경화
어둠이 내리면 어둠 속에서
물결은 그리움처럼 낱낱이 뭍으로 내려오고
자석마냥 나를 흡입해 간다
혹한은 더욱 멀고 아득한 것이어서
물결은 시베리아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인데
물결 되어 떠난 사람 물결 따라 돌아오고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늘도 바다라서 저녁에는 붉어지고
나는 물결을 타고 자작나무 숲으로 떠난
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바다에서
나는 물결이 되고 어둠이 되는 것이다
-「가창오리 떼」전문
시집 전반에서 시인은 외로움을 언어의 깊은 심연으로 이르게 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라는 미학적 장치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아니라 시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각이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생래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시인은 해질녘 밤하늘의 풍경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들을 통해 스스로 고독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선험적 상실로 시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창오리 떼」에서 화자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재생시키고자 하는 대상은 “물결 되어 떠난 사람”이다. 그래서 “천수만 하늘은 바다다”라는 화자의 인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비감悲感은 부재라는 비극, 그리움의 감정으로 이어지고, 화자는 이러한 기억과 부재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인위적인 통로를 만들어야만 했다. 바로 ‘바다’다. 화자는 “어둠이 내리면 어둠 속에서/물결은 그리움처럼 낱낱이 뭍으로 내려오고/자석마냥 나를 흡입해 간다”고 고백한다. 불가항력의 마력이다. 자기 존재를 넘어선 존재를 지향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실재에 대한 갈망이나 욕망이 아니다. 자신의 현존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전략일 수도 있다. 화자가 “물결이 되고 어둠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한 간절함이며 끊임없이 그가 있는 ‘저편’을 향한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붉게 채색된 한 폭의 풍경화”는 철저하게 현재의 시간을 유폐적 공간으로 치환하고자 하는 화자의 욕망이 반영된 프레임이다. 그 닫힌 공간 곳에서 화자는 더욱 극명하게 부재를 실감하며, 나아가 그에게 다다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 따라서 “물결 되어 떠난 사람”이라는 부재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의미를 넘어, 현존의 의미와 가치를 배가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화자가 여기에 있다는 현존성과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현재적 가치의 의미를 정교하게 구축하게 된다. 화자가 부재의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에게 가닿으려는 행위는 실존의 의미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의지보다는 “자석마냥” 화자를 “흡입해”가는 철저한 그리움의 깊이를 차마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어둠이 되는 것이다.”
집을 덮칠 수 있다는 말에
뒷산 기슭 참나무 한 그루 베었다
밑동을 자르고 보니 오십년은 족히 넘었다
땅벌들이 잉잉대고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물들의 삶도 사랑하면서 살아보고자 했으나
나는 늘 생각만으로 그쳤다
토막내서 화목 더미에 쟁이는데
아로마 향이 짙게 밀려왔다
눈물이었다
강물 같은 눈물이었다
지워버리려 했지만
이미 처서가 지났는데도 몸이 달아오르고
땀이 쏟아지고
생각뿐인 사랑이 내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물기를 버릴 것이다
거짓이라도 좋구나, 가볍게 타오를 것이다
-「사랑의 무게」전문
시인은 빈 자리에 대한 응시를 멈추지 않는다. 시집 곳곳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묻어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위 작품에서 화자는 “생각뿐인 사랑”에 애절해한다. 이것은 단순히 그리움이나 외로움을 표상한 것은 아니다. “지워버리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바라보는 자기 시선과 자기 인식이 수반되어 있다. 시인은 ‘사랑의 무게’를 혹은 그에 대한 감정을 사물을 통해 형상화하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감정을 내면화하면서 매우 적절하게 이미지화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가 더 큰 매혹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토막 내서 화목 더미에 쟁이는데/아로마 향이 짙게 밀려왔다.” ‘아로마 향’은 화자의 심리적 대타 의식이 반영된 사랑의 또다른 관성이다. 상실한 사랑에 대한 애틋함은 “강물 같은 눈물”로 전이되고 종국에는 “거짓이라도 좋구나, 가볍게 타오를 것이다”라는 진술에까지 이르게 된다. 화목이 되어 태워지려면 습기를 제거하고 건조해져야 하는데, 화자는 기꺼이 눈물을 버릴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결코 이루질 수 없는 거짓임을 알지만, 이러한 거짓 고백을 통해 내면의 갈등 깊이를 보여준다. 이는 자기 응시의 정직성에서 비롯된 태도로서 서정의 본질에 육박하는 성찰의 힘을 지니게 된다. 화자가 지향하는 사랑과 삶의 자세는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이나 사랑의 기존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 반향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통해 주체의 내면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려는 자세에 시적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뒷산 기슭의 참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면서, “미물들의 삶도 사랑하면서 살아”보려 했던 화자의 의지를 다시 되돌아보는 태도는 결국,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 혹은 세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서정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지점이며, 더불어 이명 시인의 시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벽속에 새가 있다
누군가 종이컵으로 막아놓은 구멍에서
새벽마다 소리가 들린다
새는 종이컵을 부리로 쪼며 소리를 높이고
나는 그 소리에 깬다
스스로 벽을 가진 새
바다에는 창이 없었고 내 속의 새는 울지 않았다
새장 문을 열어놓았지만 새는 어리둥절 한참 후에야 낮게 날아갔다
새장에서 새는 지워지고 내 안에 새 한 마리 들어왔다
생각이 물결인 양 부풀어 오르는데
갑자기 벽이 조용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자
천진난만하게 몇 마디 속삭여주는
깊고 깊은 먼
북명北溟의 파도 소리
새는 나더러 깨어있으라 한다
언제나 깨어있으라 한다
스스로 벽을 가진
그와의 더부살이가 즐겁기만 하다
-「해변 월세방」전문
시를 통해 드러나는 시인의 자기 인식에는, 시를 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함께 스스로를 넘어선 그 무엇에 대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과 자신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며, 자신의 경계 밖을 향한 심정적 열망은 시인의 또 다른 욕망이기도 하다. 자신을 넘어서 존재를 지향한다는 것이 항상 물리적 실재에 대한 갈망이나 규범적 질서 세계에 대한 도전, 혹은 위반의 욕망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벽속에 갇힌 새, 새벽마다 구멍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곳에서 나오기 위해 “종이컵을 부리고 쪼”던 새는, 화자의 현존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 가능하게 하는 매개이다. 화자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거나, 혹은 내부 깊숙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닿을 수 없는 시원에 대한 시선을 구체화한다. 앞서 읽은「임스 램프Lims lamp」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지금 여기’의 의미를 모색하고 자기 존재를 탐색하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결국 “새장에서 새는 지워지고” 벽안에 갇혔던 새는 화자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실존의 공간이 이동하게 된 것이다. 화자와 새는, 세계와 자아의 일체감을 형성하며 내성적 자기 인식의 깊이를 확보한다. “새는 나더러 깨어있으라 한다/언제나 깨어있으라 한다”는 화자의 전언은 그가 의식하고 지향하는 세계가 이미 그 안에 농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화자가 오래도록 그리고 지속적으로 집착하고 매달리는 의미적 상징인 “벽을 가지 새”는 자신의 생이 진행되는 순간 조우한 대상들의 여러 존재 형식에 대해 용납하고 승인하고 이를 열려 있는 자세로 보여주려는 데에 있다. “스스로 벽을 가진”그가 화자의 또 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있는 동그란 빨판, 저것은 분화구다
유난히 하얀 그 속
켜켜이 쌓인 주름도 보인다
성동호가 걷어 올린 둥글고 검은 덩어리
무중력으로 떠 있는듯하다가
세찬 물살에 기우뚱거리다가
수조 바닥이거나
투명 유리벽이거나
고무 대야 어느 곳에 달라붙어도
가부좌 틀고 앉은 수도승처럼 편안하다
멍텅구리라 불리면 어떻고
심퉁이라 한들 무슨 상관있겠는가
저 힘으로 바위를 잡고 한평생 버텨왔을 것이다
활화산처럼 살고자 했을 것이다
속이 터져 생긴 상처의 흔적일지라도
무언가를 힘주어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
가슴에 분화구 하나쯤은 가져도 좋을 일
삶의 끈, 놓치지 않는다면
-「뚝지」전문
이명 시인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내면을 반추하는 동기를,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부여받는 데에 있다. 풀벌레, 잠자리, 딱따구리, 깻묵, 장작, 고추모종, 애벌레, 사슴벌레, 왕파리, 생강나무, 멍게 등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자기 삶의 원리로 환치하고자 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이는 서정의 일반적 원리이기도 하지만 이명 시인에게는 더욱 돋보인다. 위 작품에서 화자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삶은 부유하는 것이다. “무중력으로 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세찬 물살에 기우뚱거리”기도 하는 것이 화자가 바라보는 자신의 삶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실체가 아니라 관며의 표상이며, 단지 그가 놓여 있는 환경을 전면적으로 의미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화자는 ‘뚝지’라는 구체적 실물을 등장시킨다. 자신의 삶이 가진 두 가지 층위에서 체험의 영역을 확보하고 관념과 추상에서 벗어나려는 의도 때문이다.
화자는 “멍텅구리라 불리”고 “심퉁이라” 불리는 ‘뚝지’가 “가슴에 있는 동그란 빨판”을 가지고 “바위를 잡고 한평생 버텨왔을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화자 역시 “활화산처럼 살고자”했음을 감추지 않는다. “삶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도 밝힌다. 그런데 화자는 뚝지에게 켜켜이 주름이 쌓이 빨판이 있듯, “속이 터져 생긴 상처의 흔적”이 자신에게는 빨판이자 분화구라고 진술한다. 화자가 처해있는 삶의 현재와 그가 추구하고 있는 정향점을 동시에 보이면서 화자는 관념만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이해되고 승인되고 싶은 욕망을 행간에 녹여놓는 것이다. 특히 화자는 “수조 바닥”이나 “투명 유리벽”아너 “고무 대야”와 같은 경험적 세계 속에 미학적 경험을 투과하여 세계와 주체의 대결을 보여주려 한다.
“무언가를 힘주어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만 진술하지, 독자에게 더 이상의 이해를 구하진 않는다. 이는 화자가, 세계에 놓인 간극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면서 근본적 본질을 환기시키는 전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삶에 대한 궁극적 지향점, 소망적 으지 정도로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화자 자신의 존재론적 입지와 현재적 삶에 대한 각성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에 분화구 하나쯤”갖는 일이 “가부좌 틀고 앉은 수도승처럼 편안”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는 차원은 분명 화자의 치열한 자기 반성적 인식과 의지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명 시인은 세상의 삶을, 작고 보잘 것 없는 그늘과 어둠에서 시작한다. 침묵하고 있다는 생각하던 것들의 숨은 소리와 그것들의 호흡을 온전히 찾아내고 존재의 방식을 새롭게 구현해 시로 옮겨낸다. 이때 시는 삶에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시인의 본원적으로 닿고자 하는 세계로 시인을 인도하게 된다.
얼기설기 시인의 몇 작품을 함께 읽어본 바와 같이, 시인은 그저 아름다웠던 지난날에 대한 감상적 추억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무심한 시간의 흐름과 그 안에서 서서히 소멸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들, 그리고 소멸되어 가는 것들이 결국 다다를 수밖에 없는 그곳에 대한 쓸쓸한 예감을 시로서 노래한다. 시류에 편승하여, 사물의 존재형식을 개선하거나 그것들을 새로운 가지 체계로 이끌려는 기형적 모험을 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가 가까이 놓고, 매양 바라보고, 마음을 보태는, 대상들의 표면에서 새어나오는 감각적 매혹에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외형 이면에 존재하는 생의 또다른 형식을 투시하려는 시적 욕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번 시집「텃골에 와서」는 이명 시인이 지닌 삶에 대한 의지와 생각과 태도, 그리고 시작법이 놀라운 일관성으로 나타난 귀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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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텃골은 우리나라 농촌 어디에나 있는 사람 사는 골짜기를 이르는 보통명사다.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때의 아름다운 옛 이름이다. 이명 시인이 깃든 텃골은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삼팔선의 동해 시발점이 잇는 곳이고 타관이다. 이 시집은 그곳에서 조석으로 스스로에게 묻는 안부이자 갓 텃골 주민이 된 시인의 절제된 텃골 사용설명서다. 표제작인「텃골에 와서」에서 보듯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는 그 집에서 불을 품고 바람벽에 기대어 순서를 기다리는 여유와 담담함은 그의 상당한 삶을 질주에 바치고 얻은 자유이다. 거기서는 시인의 집이자 장작이다. “장작은 서까래까지 닿아 있고/ 영혼들은 자유”로우므로 그는 오로지 저 자신으로 사는 게 일이다. 겨울이 찾아와 눈이 길을 묻더라도 “처마 아래 장작 곁에서/ 고요히 부풀고 있는 한 독의 술”이 있는 한 그는 일생의 겨울을 날 것이다. 한 독의 술이야말로 그가 살아온 삶과 사유와 고투의 언어들이 괴어 익는 그의 문학이 아니겠는가. 그를 주민으로 맞이한 이웃과 숲과 골짜기와 바람과 비는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려 왔다. 그들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의 일부로 새롭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 시인의 일, 그러한 기대와 즐거움으로 텃골의 지가가 너무 오를까 봐 걱정이다.
― 이상국. 시인
시인의 삶은 온종일 태극기가 펄럭이는, 험한 바다를 앞에 놓고 살아가는 텃골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텃골을 배후로 삼는다. 그런 그의 삶은, 원초적 총체성이 여러 군데 균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 특유의 건조한 통찰을 통해 나르시시즘이라는 치명적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있다. 시인은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텃골에 와서」), “혁명을 꿈꾸며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 삶은 왜 그리 난해했는지”(「텃깻묵」)를 되돌아보고, “세상을 그늘을 분별하지 못하지만/ 하도 산중의 소리가 궁금해”(「밭의 진화」) 생긴 귀를 발견하고 “말귀도 밝아지는 걸” 깨닫게 된다. 즉 시인에게 “지금”은 오랜 시간의 흐름이 온축되어 있는 충만한 현재형이다. 시는 이명시인의 삶에서 어떤 완성된 형태를 상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늘 자기 반성적 문맥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해 가고, 그 방향을 가늠하는 과정의 어떤 것을 변증하고 있는 삶의 또 다른 형식이다.
― 김병호. 시인. 협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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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명 시인∥
∙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 2010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
∙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시 「분천동 본가입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시집으로『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벌레문법』『벽암과 놀다』가 있으며,『텃골에 와서』는 다섯 번째 시집이다.
∙ 2013년 ‘목포문학상’을 수상했다.
∙ 장작은 뜨겁고, 장작은 불 타오른다. 성자도 뜨겁고, 성자도 불 타오른다. 시인도 뜨겁고, 시인도 불 타오른다. 이명 시인은 어둠을 밝혀주는 불과, 지혜로서의 불과, 생명이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불이 되기 위하여 그 모든 욕망을 다 버리고, 그토록 간절하고 뜨거운 그리움으로 “한 독의 술”이 되어간다. 술도 뜨겁고 뜨거운 불이고, 사랑도 뜨겁고 뜨거운 불이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장작이 되고 성자가 되는 ‘시인의 길’이 이처럼 아름답고 멋진 「텃골에 와서」로 완성된 것이다. 시인의 삶은 최고- 최선의 삶이며,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의 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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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 불을 품고/ 바람벽에 기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나무들은 또 얼마나 선한가// 버려져 있는 나무보다 선택되었다는 마음에 안도하듯/ 틈새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장작은 서까래까지 닿아 있고/ 영혼은 자유로운데/ 언제부터 나무들은 제 몸을 태울 생각을 했을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속에 남아 있는 한 톨의 습기마저 돌려드리며/ 세월을 둥글게 말아가고 있다// 나는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 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 있다// 사람들은 왜 거기까지 갔느냐고 말을 하지만/ 뜨거운 것이 사랑이라면/ 부풀어 오르는 것은 그리움이라 해야 하나// 처마 아래 장작 곁에서/ 고요히 부풀고 있는 한 독의 술/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발화를 기다린다
-이명 [텃골에 와서] 전문
그 옛날 임산연료 채취시절에는 땔감이 매우 귀했고, 처마 밑에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놓은 집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장작은 부유함의상징이며, 행복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식량이 육체적인 에너지라면 장작은 인간의 외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라고 할 수가 있다.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는 것은 그 어떤 엄동설한도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이 되고, 이 따뜻함 속에는 부유함과 행복이 아주 고소하고 달콤하게 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 시인의 [텃골에 와서]의 시적 화자는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집”을 보면서, 성자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데, 왜냐하면 나무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장작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버려진 나무는 그냥 썩어가는 나무에 불과하지만, 장작의 길을 선택한 나무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불 태우며, 그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해줄 수가 있는 것이다. 장작의 길은 성자의 길이고, 성자의 길은 금욕의 길이다. 금욕의 길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속에 남아 있는 한 톨의 습기마저 돌려드리며/ 세월을 둥글게 말아가고 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최고- 최선의 길이며, 이 최고- 최선의 길은 그 모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시인의 길이다. 성자의 길은 시인의 길이고, 시인의 길은 ‘나’를 불태움으로서 그 모든 것을 다 살리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인과 성자의 길은 최고-최선의 길이며, 이 시인과 성자들이 있기 때문에, ‘가족공동체’, ‘사회공동체’, ‘국가공동체’, ‘지구공동체’가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버팀목으로서 그 체제를 유지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명 시인의 [텃골에 와서]의 시적 화자는 “나는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 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 있으며, 그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깨닫는다. 모든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그 궁벽한 오지까지 갔느냐고 묻지만, 그러나 그는 그 버림받음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죽음’으로서의 시인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장작은 뜨겁고, 장작은 불 타오른다. 성자도 뜨겁고, 성자도 불 타오른다. 시인도 뜨겁고, 시인도 불 타오른다.
이명 시인은 어둠을 밝혀주는 불과, 지혜로서의 불과, 생명이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불이 되기 위하여 그 모든 욕망을 다 버리고, 그토록 간절하고 뜨거운 그리움으로 “한 독의 술”이 되어간다. 술도 뜨겁고 뜨거운 불이고, 사랑도 뜨겁고 뜨거운 불이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장작이 되고 성자가 되는 ‘시인의 길’이 이처럼 아름답고 멋진 [텃골에 와서]로 완성된 것이다.
시인의 삶은 최고- 최선의 삶이며,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의 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울지 마라, 새야/ 그물에 걸린 새를 보며 울지 마라, 새야/ 저 봉긋한 것들이 모두 무덤이란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그때 울어라, 새야/ 바다에는 창문이 없단다/ 그래서 하염없이 부푸는 거란다// 비가 내리고/ 내리는 비는 물이 되고/ 물속에 잠겨서 더욱 깊은 물이 되나니// 육중한 것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넘어야할 것이 한계령뿐이겠느냐// 울어라, 새야,/ 소리 내어 크게 울어라, 새야/ 내 속에 바다 하나 생길 때까지 실컷,/ 울어나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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