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늑대입니까? 양입니까? 미드 멕과이어
늑대와 어린양 이야기 어느날, 한 젊은이가 등산을 하고 있었는데 계곡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서 내려가 보았더니 어린 늑대 새끼가 길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었다. 불쌍한 생각에 그는 어린 늑대를 집으로 데려와 좋은 음식과 좋은 집을 지어주고 잘 길렀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그는 늑대 새끼를 우리에서 풀어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 놀도록 하였다. 늑대 새끼는 곧장 멀리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에게 달려 갔다. 늑대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양들의 흉내를 내면서 뛰어 놀려고 노력하였다. 풀밭에 이리 저리 뒹굴기도 하였으며, 풀에 코를 들이대고 먹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늑대는 “나는 여기에 있는 양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늙은 양이 말하기를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란다.” 이에 늑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다. “나는 양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양이 되려고 하고 있답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늑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많은 헌금을 내며, 자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이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어린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양으로 변할 수 없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늑대를 양으로 재창조해주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늑대를 양으로 만드실 수 있다. 늑대와 양의 이야기는 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여기서 새것은 진짜 새로운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새것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마음속에는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슬쩍 말로만 새것이 되었다고 불러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옛것을 새것이라고 거짓 선언하는 분이 아니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새것이란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을 또한 양떼로 표현하고 있다. 타고난 본성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늑대이고,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누가복음 10:3.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라” 마태복음 15:19. 마음의 냇물이 맑게 되려면 먼저 마음에 있는 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행위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늘에 들어가고자 힘쓰는 자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율법주의적인 종교, 즉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자는 매우 깊은 자기 기만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본성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가 자신과 죄에 대해서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으면 결국에는 잃어버린바 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변화를 위한 방편들을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거기에는 생애의 변화가 일어난다. 죄악을 즐기고자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동기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의 자리를 채운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함으로써,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하게 된다. 아무도 짐을 덜어주는 손을 보지 못하고, 아무도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이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임하게 되는데, 그 능력은 죄인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새겨놓는다. 그리하여 하늘은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들 교회 안에는 마땅히 진짜 양들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거짓 목자 뿐만 아니라 거짓 양들이 너무나 많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가짜 양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종종 진짜 양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가짜 양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진짜 양들은 혹시 자기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가짜 양이란 실제에 있어서는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를 말한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단의 대리자들을 가리켜서 “양의 가죽을 쓴 이리”라고 지적하고 있다(마태복음 7:15). 얼핏 보면 양인데, 자세히 보면 그 하는 말과 행동이 늑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상한 양들은 대개 이러한 말을 한다.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이런 것을 하면 죄가 되나요? 그 정도는 괜찮치 않나요?” 그들은 자신이 양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늑대의 일을 하기 위해서 구실을 찾는다. 그들은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기도회에 참석하며 각종 교회 활동에 열심이지만, 그들의 마음과 품성과 모든 행위의 동기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이라는 사실을 전혀 반사하고 있지 않다. 늑대의 기질인 부정직과 부도덕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기적인 집사와 돈과 명예를 사랑하는 장로와 교회를 정치와 행정으로 다스리려는 목사가 다 그러한 부류이다. 사교적 모임과 스포츠 게임과 정치에는 열을 올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교세의 확장과 교인들의 숫자에만 신경을 집중한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양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은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가짜 양들은 자신이 당연히 먹어야 할 풀 이외에 다른 음식을 더 좋아한다. 성경은 오래 읽지 못하면서 다른 소설책들이나 텔레비젼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본다. 자신의 신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을 찾기 보다는 늑대의 본성을 즐겁게 만드는 자극적인 것들만을 찾는다. 양이면 당연히 풀을 뜯음으로써 만족해야 하는데, 양이라고 말하면서 죽은 말고기를 달라고 요구한다면, 누가 그를 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마음을 받는 거듭남을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새로운 생애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우리는 늑대의 본성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양의 본성인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잔인하고 사나운 늑대의 성품과 온순하고 순결한 양의 본성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양과 늑대는 그 본성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겉모습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많은 양들이 마치 늑대와 같은 옷과 화장을 하고서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자신은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는 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양의 옷을 입기 보다는 늑대, 즉 옛 사람이 좋아하는 치장을 하고 다니는 것은 왠 일인가?
양은 울타리를 좋아한다 양은 목자가 쳐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양은 자신을 가두어 놓은 울타리에 대해서 불평하는 대신에 오히려 고마워한다. 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경건하게 보존해 주는 울타리인 율법과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쾌락을 포기하라는 율법과 계명의 요구를 귀찮고 얽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면, 자신의 인생이 바짝 마른 모래 사막처럼 변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쩐 일인가? 참 목자인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울타리, 즉 율법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지배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늑대에게 양과 같은 생활을 강요할 때에 늑대는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겠는가! 그러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기는 원치 않지만,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하는 쾌락과 재미를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굉장한 손해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밤이 되면 숲속을 다니면서 힘없는 토끼와 사슴들을 해치는 늑대를 생각해 보라. 늑대는 그러한 일들에 쾌감을 느끼고 생의 환희를 느낀다. 늑대는 그러한 종류의 일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푸른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그들과 같은 평화로운 삶을 생각해 보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운다. “나는 저 양들처럼 울타리에 갖혀서 살 수 없어. 거기에는 아무런 낙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 양들의 생활은 너무나 재미없고 무미건조해.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바보같은 결정을 하였어.” 사실상, 그의 말은 사실이다. 밤에 다니기를 좋아하는 늑대와 같은 짐승들은 낮에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늑대가 양이 되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풀을 뜯어 먹는다면, 아마도 소화불량에 걸릴 것이다. 늑대가 양이 되고 싶다고 해서 가시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살면, 그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얼마 안가서 신경쇠약내지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오직 진짜 양만이 울타리 속에서 참된 안전과 평화를 느끼면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계명이라고 불리우는 울타리 안에서만 참된 안전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계명이 하라고 명한 것과 하지 말하고 명한 것들을 금하고 행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늑대가 울타리 밖에서 만족을 얻는 것처럼, 양도 울타리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양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벽으로 보이지만, 늑대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가두워 놓는 감옥소의 높은 장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늑대들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양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서 세워놓으신 울타리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토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늑대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책망을 기록하고 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 . .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이사야 30:8.
양이 늑대와 결혼할 수 있나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비그리스도인과 가지는 교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단 결혼한 다음에 늑대를 양으로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린도후서 6:14~15. 자신은 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어린 양이 늑대와 결혼한다는 것. 정말로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사단은 어린 양이 늑대와 결혼하여 살면서 그의 신앙이 변질되거나 포기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이 자신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을 가진 양을 찾아서 결혼하여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살게 되기를 소원하신다. 그대는 목자의 말을 들을 것인가? 양은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여 그 말에 순종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양이 걷는 길과 늑대가 걷는 길 진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거짓 그리스도인이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동행한다면, 그는 얼마 안가서 세상의 흉내를 내면서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 육체는 우리가 한번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다고 해서 완전히 육체의 본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저지되고 지배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본능이 좋아하는 쾌락을 멀리해야만 한다. 육체적 본능이 요구하는 것을 멀리하고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사는 길을 성경은 좁은 길이라고 부른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그대는 지금 육체의 본능이 요구하는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대는 넓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서 속히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그분께서 그대의 양심에 호소하는 바대로 순종하라. 양은 자신의 주인인 목자의 음성에 따라서 움직이며, 늑대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가 이끄는대로 움직인다. “너희가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참된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해서 그 길에는 기쁨과 보람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길이 비록 가파르다고 할지라도 중간에 쉼을 취할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으며 샘터가 마련되어 있다. 그 길에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보람과 행복이 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라. 넓은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항상 쉽고 평안함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길에도 어려움과 양심의 가책이 있으며, 더이상 가지 말고 되돌아가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길을 걷기로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받은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늑대처럼 살다가 결국에는 멸망당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비록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고,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들이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하루는 어떤 아이가 부모와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의 설교 중에 나온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아버지에게 하였다. “아버지, 아버지는 양이야? 늑대야?” 제1부의 글을 마치면서,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그 아이의 질문을 다시 던지고자 한다. “그대는 양입니까? 아니면 늑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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