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 왕은 힐기야와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에게 자신과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며 현재 유다의 종교 윤리적 상황과 종교 전통이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 백성에게 계속해서 요구하신 것으로 요시야는 들음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지 확인합니다.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참다운 갱신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시야는 성전 수리를 명령할 만큼 이미 경건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율법을 듣자 당장에라도 심판을 받을 것처럼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호와께 묻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평가하고 안일하게 살지는 않습니까?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홀다 선지자가 율법책을 확증해줌(14-20)
개혁은 마음의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처음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회개는 곧 개혁의 출발점입니다. 회개 없는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의지한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개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4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14-20)
요시야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선지자 홀다입니다. 홀다는 여선지자이며 살룸의 아내로 살룸은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이며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홀다가 성전 하급 관리의 아내라고 말해주는 것은 결혼한 여자를 소개하는 관습적 구문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성의 신도시인 둘째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장소적 배경은 그녀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지자였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왜 여선지자인 홀다에게 갔는지에 대한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나 스바냐 선지자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포함된 왕의 대규모 사절단이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홀다는 무척 잘 알려져 있고 국가의 신임을 받는 예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의 말을 홀다에게 알렸고 홀다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홀다의 예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유다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으로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여호와를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에게 분향했다는 것은 히스기야를 제외한 유다 모든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분향하게 한 우상숭배의 죄를 말합니다. 또한 손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정신인 공의롭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인 죄도 지적하십니다.
종교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 모두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요시야 왕 개인에 대한 예언으로 요시야 왕이 유다가 빈 땅이 되고 저주거리가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비하며 웃을 찢는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께서 요시아의 말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요시야의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한 후에 웃을 찢은 것을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상태와 진정성을 보신다는 의미다.
11절에서 요시야가 옷을 찢는 겉모습만 서술했다면 19절에서는 요시야의 옷 찢는 행위 이면의 속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요시야의 회개는 이전에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히스기야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의 기도도 들으시고 요시야는 임박한 심판을 보지 않고 평안히 선조들의 묘실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히’란 말은 논란거리입니다.
요시야는 애굽과의 전쟁 중에 갑작스럽게 전사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평안히’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요시야는 평안히 죽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임박한 심판 속에서 요시아는 심판을 다 보지 않고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평안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끝나고 심판은 이제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아무리 경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동안 유다가 쌓아온 죄가 너무 커서 요시야 한 사람의 회개로는 심판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 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며 그러나 심판 중에도 여호와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개혁은 공허하며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개혁가가 아닌 개혁의 말씀이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의 창조를 허용하는 일, 그것이 개혁의 출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