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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해의 반이 갑니다. 지난 것들을 씻어주랴 한바탕 장마가 온답니다. 짜증나고 아프고 힘들었던 것들 다 씻어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꿈을 싣고 출발한 한해였지만 글쎄, 그만한 보람이 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직 반이나 남았으니 다시 일어나보고 싶습니다. 살아있으니 움직여야지요. 지난 한 주간 아프고 슬픈 소식을 담고 이 달을 마무리합니다. 어서 슬픔을 이기고 새롭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남은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니까요. 다만 힘차게 일어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행여 그것마저 아끼려고 요리조리 핑계 대며 빠져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경우 여태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눈꼴사나운 가진 자들의 만행을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한 주간의 장마가 예보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연례행사이기도 합니다. 단지 큰 피해 없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준비하고 대비하였는지 지나보면 알게 됩니다. 여전히 입으로 다하고 있는지 정말 실행하고 있는지 말이지요. 하도 말잔치가 성행하고 있으니 무엇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좀 반대하거나 맘에 거슬리는 말만 내놓으면 빨갱이 딱지 붙이려 하는 불행한 우리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이런 세대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보낼 것이 없어서 쓰레기나 보내는 불쌍한 북한을 보며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그 많은 폭탄과 핵무기를 먹거리로 바꾼다면 저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겨뤄봤자 게임도 안 될 것입니다. 두 다리로 서있을 힘도 없을 테니 말이지요.
후반전을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힘찬 출발. 시동을 걸어봅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2024년 6월 29일 김종우 목사 드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 : 10)
<드라이브>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표적으로 정치인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입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입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영상까지 동행해야 그나마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런 재주를 가지지 못하면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있어도 감히 입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이 그렇게 발달하여 그 재주만 있다면 그리고 입심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야말로 웬만한 벤처기업인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유튜버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실시간 방송으로 온 세상을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 놀랍기만 합니다. 많은 유튜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많은 시청자를 동원하여 그만큼 돈으로 환산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문 구독자 수를 가지고 신문사의 가치(?)를 환산해내는 방법이나 시청자의 수를 가지고 그 방송프로그램의 가치를 따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만한 광고 효과를 기대하고 가치를 정하는 것이지요. 그에 따라 관여하는 업체나 사람들의 값이 매겨집니다. 그러니 드라마나 예능방송을 방영한다면 자연히 시청률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입니다. 인기와 더불어 바로 돈과 연결되니 당연한 일입니다. 방송국이나 신문사 또는 언론매체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됩니다. 직업인이 된 개인 유튜버야 당연한 일입니다.
영상과 더불어 말이 따라갑니다. 문제는 소위 실시간 방송이 전개될 때 실시간 댓글이 오르게 됩니다. 아니면 직접적인 대화도 가능할 것입니다. 즉 말이 오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냥 지나가듯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심을 담은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서양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총에 맞은 상처는 치료가 가능해도 말에 맞은 상처는 치료가 어렵다.’ 몸의 상처야 흔적은 남을지라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 당사자를 괴롭힙니다. 아주 오래 갑니다. 어쩌면 평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통으로 원한을 품게 되고 나아가 복수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안으로 새기면 자신을 해칩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고통을 밖으로 분출하면 타인을 해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본능으로 우리는 어떻게든 분노를 해결하려 합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말이지요. 그것을 분출하지 않고 스스로 소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이겨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흔히 곪아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든 남이든 해를 입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이 사람을 잡습니다. 아무리 말조심을 외쳐도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도 우리 정치계에서 오가는 말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기 시작한 유튜버가 어느 날 모임에서 나왔는지 그 속에서였는지, 아무튼 깨어나니 주변이 캄캄했습니다. 마침 자신의 스마트폰이 작동을 합니다. 불을 켜고 주변을 확인해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통화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한유나’ 자기가 자신의 승용차 트렁크에 갇힌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실시간 방송을 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것도 억지 같은 조건을 댑니다. 한 시간 내에 6억 5천을 벌어들이라는 조건입니다. 웃기는 소리라고 치부하려 하지만 자신을 어디에 버릴 것을 화면에 띄워줍니다. 폐차장. 그곳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경찰에 신고합니다. 콧방귀를 뀝니다. 요즘 인기 좀 얻으려는 괴짜 유튜버들이 괜스레 경찰을 동원하여 애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냐고 묻지만 건성입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도 먹통입니다. 어쩌면 그것도 실시간 그대로 방영되고 있으니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스릴을 맛보게 해줄지도 모릅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에게 연결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생명의 위험이 점점 차오르고 있음에도 어디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무용입니다. 방법을 찾습니다. 트렁크에 갇혔을 때 탈출방법을 검색하여 알아냅니다. 트렁크를 열기는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는 납치범인 운전자가 고속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역주행합니다. 더 큰 공포가 닥칩니다.
어쩌면 이 한 시간의 방송이 바로 영화 이야기에 그대로 반영된 듯합니다. 이야기는 묘하게 돌아갑니다. 트렁크에 동행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체인 줄 알았는데 살아 있고 아는 사람입니다. 놀람과 반전이 이어지며 머릿속 추리해오던 것이 혼란을 겪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단순히 돈을 뜯고자 벌인 강도짓인가?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는 듯하더니 범인이 칼을 들고 다가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동기가 드러납니다. 고속도로 역주행으로 많은 신고가 들어간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경찰들이 쫓아옵니다. 실시간 스트리밍, 비로소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 ‘드라이브’(Drive)를 보았습니다.
정산할 때 옵니다
우리가 다 알고도 막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국가라고 해도 막지 못합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막지 못합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세월입니다.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 해의 반을 보내며 후회가 있고 아쉬움이 있게 마련이지요. 부족한 인생들임을 깨닫는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하루를 지내도 아쉬운 마음이 있는 법이고 한 주간을 지내면 그 아쉬움이 조금 커집니다. 그리고 한 달을 넘길 때는 좀 더 커지지요. 그리고 1년을 보내고 나면 그 아쉬움은 한결 크게 마음을 누릅니다. 왜 그럴까요? 시간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다가오는 새해에 더 크게 기대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새해가 더 이상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1년의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우리네 인생도 시작이 있었으니 또한 끝이 있습니다.
이제 한 해의 반환점을 도는 때가 되었습니다. 마 24장에는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관해서 길게 말씀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24 :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 앞의 내용을 보면 사실 제자들은 성전에서 나오며 예수님에게 성전의 웅장함을 말씀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지요.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짐작했지요. 아,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는구나. 그래서 감람산에 올랐을 때에 질문합니다. 3절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 끝에 대하여 길게 말씀해주십니다. 이어 25장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잘 알고 있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열 처녀 비유이고 둘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물론 각각 말씀하시는 뜻이 다릅니다.
이제 달란트 비유를 보겠습니다. 일단 잘못된 것부터 바로잡기를 바랍니다. 여태 우리는 이 말씀을 ‘달란트 비유’라고 들어왔습니다. 달란트는 본래 ‘재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재능 비유’가 아닙니다. 15절 보겠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만약 달란트를 ‘재능’이라고 말한다면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재능을, 또는 금 두 재능을 ---’ 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말씀대로 주인의 금을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맡기셨다는 뜻이지 재능을 ‘재능대로’ 맡기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는 각자에게 맞도록 주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주신 것이 아니라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나중에 그것이 잘 관리되었는지 결산을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달란트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14절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여기서 어떤 사람은 곧 주인을 말합니다. 주인이 떠날 때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떠나기 전 종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맡겼습니다. 무엇을 맡기셨나요? “자기 소유를” 맡기셨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 오면서 가지고온 것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 와서 다 얻은 것 즉 받은 것입니다. 맡겨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고전 4 :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혹시 세상에 올 때 옷을 입고 오신 분 있습니까? 우리 모두 알몸으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받은 것이고 주인에게로부터 맡겨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바로 이 생각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이 묻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그렇지요. 모두 여기, 세상에 와서 받은 것들입니다. 처음 생명부터 그렇습니다.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거두어갈 때 우리는 이의 없이 내놓아야 합니다. 반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그냥 내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우리 것인 양 버팁니다. 시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아닙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주어진 그 시간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즉 관리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살아왔나요? 우리 것도 아닌데 우리 것처럼 살아오지 않았나요? 어쩌면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나 하나만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쾌락을 위해서, 나 혼자만의 낙을 위해서 펑펑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시간이든 물질이든 우리는 맡겨진 것을 사용하는 것이고 따라서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합니다. 우리는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1895년 아담스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과가 없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안식년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길에 사과 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 경북 대구가 사과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100여 년 전 선교사 한 사람이 이 땅에 사과 씨를 뿌린 결과입니다. 씨앗은 심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금은 사용해야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마 25 :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그렇습니다. 언젠가 우리 주님과 회계할 때가 옵니다. 우리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만날지 거기서 만날지 그것은 모르지만 주인과 만나서 결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 주인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인에게 받은 것 가지고 주인과 회계 즉 결산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차이를 발견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16 - 17절 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그들은 ‘바로 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즉 그 금을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무엇입니까? 순종의 차이입니다. 바로 가서 장사를 한 종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땅에 묻어버린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바란 것은 어느 쪽입니까? 당신이 맡긴 금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문을 남기기는커녕 다 날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그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24 - 25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이 종의 말에서 특히 강조되어 들리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주인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멘!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알고 믿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그 차이와 같습니다. 물론 부모가 처음부터 엄하고 무섭고 냉정하게 자식을 키워왔다면 자식은 부모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엽다고 하지요. 제대로 된 부모라면 우선 자식을 사랑할 것입니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자기 자식을 보는 그 감격을 느끼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요? 하기야 불장난으로 임신시켜서 원치 않는 아이를 낳게 되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의 분신 같은 자기 씨를 보면 마음이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신기하잖아요? 놀랍지요. 경외감이 들 것입니다. 사랑스럽지요. 어떻게 키울 것인가 두렵기는 하지만 내 자식이라는 생각에 일단 애착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로 우리를 만드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우리 한 생명 한 생명을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놀라운 과정을 시편 기자가 노래합니다. 시 139 : 13 - 14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래서 사랑하십니다. 처음부터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만드사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사랑하기에 죄 가운데 빠진 인생을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희생 제물로 기꺼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영원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세상 부모는 혹시 자식을 학대할지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나를 부르셨습니다. 왜요? 사랑하시기에. 나 같은 존재 부르지 않아도 하나님 손해 날 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찾아오셨습니다. 부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셨습니다. 죄의 무덤에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왜요? 오직 사랑하시기에. 그래서 성경이 증거합니다. 롬 5 :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그런데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기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또 사랑이어야 합니다.
지금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경직시킵니다. 공포에 사로잡히면 몸이 굳어집니다. 마음도 경직됩니다. 무엇을 하려는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집니다. 하려는 시도조차 막아버립니다. 이 종은 자기가 받은 한 달란트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당장 가서 땅에 묻어버립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두려움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다 한들 실패할 것입니다. 두려움 이상의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다른 두 종은 분명 달랐습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금을 받기가 무섭게 달려 나가서 신나게 장사하였습니다. 일을 할 때 좋아서 하는 것과 억지로 하는 것의 효과는 다릅니다. 한참 ‘펀 경영’이 유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자기 직원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왜요? 그 직무수행 효능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산력이 증가되고 기업의 이익이 증대됩니다. 투자한 이상의 효과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다섯 달란트 가진 자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기는 것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딤후 1 :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주인을 잘못 알고 있는 종이 실패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면 실패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요1서 4 : 18 - 19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래서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늘 우리를 안심시키고 평안하게 해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여태 버티고 있는 것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빌미로 우리가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욕되게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기꺼이 당신의 귀한 소유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유익을 남겨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인의 칭찬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주인은 똑같이 칭찬을 합니다. 마 25 : 21절과 23절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그러니 어느 쪽을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자 여기서 그 종들을 칭찬하는 말 가운데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종은 충성하는 종입니다. 그리고 충성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따라옵니다.
또 한 가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에게도 두 달란트를 남긴 자에게도 칭찬의 말씀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성은 수치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충성입니다. 즉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합격, 불합격이 아닙니다. 이번에 불합격하면 다음에 합격할 수도 있습니다. 좀 늦어진다고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먼저 합격했다고 그 기쁨을 더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내년에 인생 끝장낼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합격 불합격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최선을 다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더 큰일을 맡기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그러므로 빨리 하고 늦게 하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생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재능과 시간을 받았습니다. 재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나 똑같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 “각각 그 재능대로” 금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다 다릅니다. 받은 것으로 충성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심는 대로 거두게 됩니다. 갈 6 : 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그 거둔 것을 가지고 주인과 회계해야 하는 때를 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 날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날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날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는 질타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칭찬을 듣기 원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우리가 모두 그러한 자식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다시 한 해의 후반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그 날은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이런 날들이 모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 즉 결산할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시기에 그 말씀을 알고 신앙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주여! 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을 알려면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알고 신앙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몰라도 그냥 믿으면 되는 거야, 이런 어리석은 말은 하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로 마귀의 속삭임이지요. 모르면 지옥입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잘 알아야 합니다. 자기 혼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까지 망합니다. 이런 미친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알아도 똑바로 철저하게 알도록 합시다. 기본적으로 질문해 봅니다. 하나님이 몰라도 되는 성경은 뭐하라고 주셨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똑바로 알고 신앙하라고 그 많은 사람들을 시켜서 만들고 지키며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성경을 쉽게 지니고 볼 수 있다는 것만도 감사하며 열심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고, 포기하고 미루는 자들은 천국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앙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기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편하자고, 신이 있다면 복이나 달라고 자기 좋을 대로 신앙하겠다는 말이지요. 우리 하나님이 그런 자들까지 구원해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딤전 2 :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다시 말합니다. 모르면 망합니다. 어리석은 신앙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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