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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묵상글 들 ( 대림 제1주일 금요일. - 누구에게나 하시는 질문, 믿느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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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누구에게나 하시는 질문, 믿느냐?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달라는 두 눈먼 이에게 믿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하시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믿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믿지 않고는 한시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믿는 것과 잘 못 믿는 것이 있거나
옳게 믿는 사람과 그릇되게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도 비슷한 얘기를 했듯이
자기나 인간을 믿는 사람이 있거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우상을 믿거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힘을 믿거나 하느님의 힘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돈이면 다 된다고 믿거나
하느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오늘 눈먼 사람들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치유를 더 믿거나
인간의 치유를 더 믿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도 눈먼 사람들은 더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을에 오셨을 때
주님을 찾아온 이들은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 둘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셨는데도 그리고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주님을 찾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왜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들도 아마 눈 뜨고픈 갈망이 있었을 것이고 그만큼 시도도 있었을 겁니다.
용한 의사가 있다는 말을 믿고 찾아간 적도 몇 번 이상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 다 허사가 되고 난 뒤 믿지 않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들도 여전히 믿기는 믿는데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것일 겁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온 이들도 마찬가지로 의사를 믿었던 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똑같이 자기들의 믿음이 허사가 된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가망성이 있다고,
주님께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망성과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가망성이 없다고 믿는 순간, 아무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믿다가 또 인간을 믿다가
가능성을 믿지 않게 곧 불가능성을 믿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신과 인간을 믿다가 허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른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은 하느님께 눈을 돌려 눈을 뜨게 된 이들인데
우리도 하느님께 눈을 돌려 눈을 뜨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흐의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듣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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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이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 27,1, 오늘 화답송 후렴).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9,27)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의 암흑을 벗어나 보게 하소서.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하게 하소서.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하고,
보게 되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나를 먼저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보게 하소서.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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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눈이 열렸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엇을 갈망한다면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하시며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성경말씀 읽기와 미사참례, 성체조배, 개인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5,15-16). 그러므로 믿음으로 갈망하십시오.“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 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하고 말하며 다빈치의 훌륭함을 칭찬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요.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세상 것을 찾고 즐기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육적인 눈 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진짜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더 잘 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각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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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성당에 신문홍보를 가면서 가까이에 있는 포트워스 한국순교자 성당의 신부님도 만났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은 구역장 모임에 저를 초대하였고, 혹시나 해서 신문과 구독신청서를 가져갔습니다. 신부님은 구역장들에게 본인이 구독료를 내 줄 터이니 신문구독을 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달라스 성당뿐만 아니라 포트워스 성당에서도 신문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니 포트워스 한인성당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달라스 한인성당이 깔끔하고, 세련된 서양식당 같다면 포트워스 한인성당은 구수하고, 정감 있는 맛 집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설날에는 세배 온 신자들에게 세배 돈도 넉넉하게 주었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점심 밥값도 내 주었습니다. 땅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같았습니다.
달라스 성당의 신부님은 신자들을 공평무사하게 대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많기에 어느 한쪽 편을 들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난의 향이 천리를 가듯이 신부님의 공평무사함은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12시 영어미사는 미국 신부님이 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손님 신부님이세요?’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영어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눈에는 손님신부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미국신부님이 오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부님이 영어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영어로 강론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2년이 지나면서 이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신부님에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팬데믹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팬데믹으로 주일학교 아이들과 소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듯이 신부님의 진중한 마음은 신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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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너무나 행복한 지네가 있었습니다. 친구도 많았고, 자기가 있는 곳은 지네에게 쾌적함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을 것도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항상 “행복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두꺼비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지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행복한 지네야, 너는 어느 발 다음에 어느 발을 내딛는 거니?”
그 순간 지네는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발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어떻게 걸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발이 꼬여서 도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많은 발을 가지고도 발이 꼬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네에 모습에 이런 글을 지었나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모습이 자주 엿보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을 품으면서 가장 쉬운 걷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 될 수 있게 된 지네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자주 체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평소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문을 품는 순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심이 생깁니다. 똑바로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관계가 꼬여 넘어지고 맙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삶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고 있나요? 주님께 불평불만 하면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이 외침은 믿음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예, 주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는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주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했고, 최고의 결과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의심과 의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꼬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꼬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평상시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었다면, 마치 땅을 걷는 것처럼 편안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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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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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14)
무지의 인간,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무지로 인한 온갖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불가에서의 탐진치(貪瞋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三毒)도 바로 무지의 인간임을 말해줍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눈먼 두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으로 무지의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참 많이도 강론 주제로 등장한 무지입니다. 동방영성에서 제가 배운 귀한 가르침이 마음의 병이라 칭하는 무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병은 마음의 무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원죄原罪나 불가에서 말하는 무명無明도 바로 무지한 인간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지식이나 정보의 결핍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마음의 무지입니다. 언젠가 소개한 마음의 병인 무지에 대해 다시 나눕니다.
첫째 망각입니다. 마음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늘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에 영적 훈련의 수행들입니다.
둘째, 마음의 딱딱함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해도 도저히 마음을 뚫을 수 없습니다. 즉 세상사에 빠지는 것, 육체적 쾌락에 집중하는 것, 부에 사로잡히는 것, 셋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세 욕망들입니다.
셋째, 눈멈입니다. 마음이 완고함으로 고통받을 때,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고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할 수도 없는데 이것이 눈멈입니다. 눈떳다고 하나 탐진치貪瞋癡에 눈먼 영적 소경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사람이 우리 무지한 인간을 상징합니다.
넷째, 무분별입니다.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모든 마음의 병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병들이 솟아나는 우선적인 병은 무지와 하느님의 망각입니다. 사람이 내적 자아를 만나 안에 있는 신적 실재를 발견할 때, 이들은 저절로 마음의 병들로부터 치유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참나를 발견할 때 무지의 치유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의 치유입니다.
이래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이래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두 소경은 우리 눈먼 무지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싶은 갈망의 믿음은 근본적 영적 욕구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도 결국은 무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한 공부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복음의 두 눈먼 소경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쁜 소식, 복음인지요!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이사29,17-19)
그날이 바로 예수님과 만나는 오늘입니다. 바로 대림시기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합니다. 두 눈먼 소경은 눈은 멀었지만, 내적 눈은 주님께 대한 갈망의 믿음으로 열려 있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내적 갈망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무지의 눈은 열립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우리가 미사 시작하면서 바친 자비송입니다. 참으로 집요하게 자비를 청하는 두 눈먼 소경에게 주님은 묻습니다. 소원이 간절하면 문답도 짧고 순수합니다. 예수님과 두 눈먼 소경의 대화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혼자가 아닌 도반처럼 함께 한 두 눈먼 소경들이 상징하는 바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예, 주님!”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간절한 믿음의 갈망에 주님을 만나 은총으로 무지의 눈이 열린, 두 소경입니다. 사람들의 불건전한 호기심을 경계한 주님은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라고 단단히 이르셨지만, 눈이 열린 두 소경은 기쁨에 벅차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리니 복음 선포자로 돌변합니다.
두 눈먼 소경의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의 믿음이 있어 주님을 만났고 마침내 믿음과 은총이 만남으로 눈이 열린, 개안한 두 소경입니다. 한 두 번 주님과의 만남으로 무지의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가야 비로소 무지의 치유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날로 눈이 열려가는 ‘개안開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을 만나 강론할 때 제목은 무조건 ‘개안의 여정’으로 정합니다. 불가의 용어이지만 개안이란 뜻도 좋고 무지에서 벗어나는 개안은 평생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육안의 시력은 날로 떨어져 어두워지더라도 영혼의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 자체이신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와 겸손, 자기를 아는 지혜에 날로 무지의 병은 치유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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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2. 대림 제1주일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대로>
마태오 9,27-31 (눈먼 두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믿는 대로>
우리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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