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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섬에는 시인의 집이 있다
양문규
처음 바다를 본 건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였습니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경주 1박 2일 여행을 마친 후 늦은 저녁 부산역 근처 여관에 도착하였는데요. 바다가 없는 충청도 내륙에서 자란 나는 바다가 있는 도시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깐 잠들었는데 꿈속에서도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었습니다.
해운대에 도착하자마자 넓은 백사장을 거닐기보다 먼저 바닷물이 짠 가 맛봤습니다. 소금이 짜다는 걸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직접 바닷물이 짠 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해운대 바닷물은 그야말로 큰 소금창고였습니다. 그 물로 다 소금을 만들면 어머어마한 부자가 될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해운대를 자주 찾게 되었는데요. 살아가는 동안 내 속에 소금이 필요할 때면 한걸음에 부산 해운대를 찾아갔지요. 구도의 삶을 살고자 한때 금정산 범어사를 찾았던 연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바닷가는 자주 찾는 여행지 중 한곳입니다. 그러나 좀처럼 섬에 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는데요. 물론 서울생활 때 인근의 강화도를 자주 드나들기는 하였지만 섬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섬은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내 속에 자리한 탓이 크겠지요. 아무튼 배를 타고 섬에 간 것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의 박운식 시인과 충북문학기행 일환으로 기획된 보길도를 찾은 게 처음입니다. 그 이후 구절초를 보기 위해 소매물도를 다녀온 게 전부이지요.
초도(草島)를 같이 여행하자 제안한 사람은 여수의 김진수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여수시 섬마을 체험 일환으로 ‘주말에 만나는 섬마을 사람들’을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이번 기행은 글 쓰는 문인들로만 팀이 꾸려졌다는 전화를 받았지요. 그리고 올 때 혼자 오기 무료할 테니 몇 명 동행해서 내려오라는 거였습니다. 어찌할까 고민할 틈도 없이 일주일 지날 즈음 다시 김진수 시인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여객선 예약 때문에 빨리 답을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때 난 천태산 영국사 주지 김상두(청원) 씨가 고소한 법적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생명·평화·시가 어우러진 삶의 향연 천년 은행나무와 함께하는 행사로 바쁘기도 하였지요. 비록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는 끝났지만 아직 ‘천태산 은행나무 걸개 시화전’이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천태산 은행나무를 잠시 뒤로하고 머리를 식힐 겸 초도를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김진수 시인한테 전화를 넣었습니다. 초도로 들어가는 첫 여객선이 오전 7시에 출발하니 전날 내려오라는 김진수 시인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이 된 화순 정윤천 시인 등과 여수수산물특화시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여여산방을 떠났는데요. 화개장터에서 김용길 시인을 태우고 여수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7시가 좀 넘어서였습니다. 늦가을의 남도 여행길은 아직도 오색단풍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여수는 미항답게 먹을거리도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여수에 가면 요즘 서대회가 제철이니 무조건 이 회를 맛보고 오라는 가까운 지인의 귀띔이 있었는데요. 김진수 시인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이 서대회로 유명한 식당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우리는 소주를 곁들여 배를 불린 후 다음날 초도행을 위해 숙소로 들었는데요. 집 나온 시인들이 그냥 고분하게 잠잘 리가 없겠지요. 가까운 포장마차 들러 딱 한잔만 한다는 게 그만 늦은 시간까지 미주에 빠지고 말았는데요. 보도 듣지도 못한 바다 생선으로 입이 즐거웠습니다. 역시 여수는 미항이기 앞서 주(酒)항입니다. 여수를 갈 때마다 술독에 빠지니 어찌 여수를 주항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른 아침인데도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 가운데 ‘주말에 만나는 섬마을’ 팀도 함께하였는데요. 멀리 인천에서 밤기차로 내려온 최종천, 박일환 시인 등도 보였고요. 아주 오랜만에 김용만 시인도 만날 수 있었지요. 그는 김용택 시인의 동생으로 그가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할 때 서울에서 가끔 만났는데요. 오랜만에 얼굴을 대하니 반갑기가 그지없었습니다. 현재 그는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고향 임실로 돌아가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게 소원이라 했습니다.
초도로 가는 바다 위에는 많은 섬들이 즐비하였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그리움을 꼬옥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석상 같았는데요. 배는 2시간 가까이 달려 초도에 닿았습니다.
지북산 몰랑에 뻐꾸기 울면
산비둘기 구구대는 장사슴목골
달랑 한마지기 옹사리밭에
아부지는 들컹들컹 쟁기질하고
어무니는 쪼락쪼락 풋콩을 딴다
가다 한 모금
또 가다가 한 모금
촐랑촐랑 줄어가는 막걸리심부름
한 쪽박 샘물로 덧채우던 아이가
아지랑 묏등 앞에 발갛게 엎드렸네
한 사발 거뜬 비우신 아부지
“오늘 막걸리는 왜 이리 싱겁다냐?”
그 소 웃음소리 지금도 들리네
―김진수, 「풀섬 아이」(『시평』, 2007)
초도는 조도(鳥島)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77킬로미터, 거문도(巨文島)에서 북쪽으로 18킬로미터 해상에 위치합니다. 주변에는 솔거섬·안목섬·말섬 등의 작은 섬들과 손죽도(巽竹島)·평도(平島)·광도(廣島) 등의 큰 섬들이 산재해있기도 하는데요. 본래 이 섬은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속했으나 1895년 돌산군 삼산면에, 1914년 여수군에 편입되었는데요. 여수군이 1949년 여수시로 승격됨에 따라 초도는 여천군으로 이관되었고, 1998년 여천군이 여수시로 통합되면서 여수시 삼산면에 편입된 곳입니다. 초도 주위는 삼십 리이고, 읍포(邑浦 ; 대동)·이성(利成 ; 의성)·진막(鎭幕 ; 진막)의 세 마을로 현재 500여 명의 주민이 살림을 이루고 있답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섬 중앙의 상산봉(上山峰 : 338.7m)을 최고점으로 하여 동서·남쪽으로 작은 곶(串)이 뻗고, 그 사이에 작은 만(灣)이 이루어진 북서 해안에 위치한 대동(大洞)마을입니다. 이곳은 김진수 시인이 태어나 태를 묻은 곳으로 마을회관 앞에는 그의 생가가 반듯하게 서 있었습니다.
김진수 시인은 스스로를 망망대해 남녘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작은 섬에서 모진 바람과 거친 파도만이 몰아치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랐다고 토로합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수평선 너머 육지를 한없이 동경하며 도시생활을 꿈꾸어 왔다는데요. 중학교 졸업 이후부터 줄곧 초도를 떠나 도시생활을 했다지만 여전히 김진수 시인은 갯바람소리가 정겨운 섬사람처럼 보입니다.
김진수 시인은 그동안 도시생활을 하면서 도시산업화 자본의 생리를 따라잡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 번의 사업 실패로 부모님께서 피땀 흘려 손수 일구어놓은 전답을 팔아야 했다는데요. 더욱이 생가까지 경매당하고 다시 찾는 지난한 과정을 설명할 때 그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습니다. 집안의 오래된 밀감나무는 황금빛 열매를 여실히 키우고 있었는데요. 아마도 이 밀감나무는 김진수 시인의 삶의 내력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환하게 우리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른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관계로 배가 무척 고팠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과음한 탓으로 속도 온전하지 못하였는데요. 마을회관에 준비하는 점심이 마냥 기쁘게만 느껴진 게 나뿐만은 아니겠지요. 거기다가 모든 음식재료가 초도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니 그야말로 초도만의 전통적인 식문화를 제대로 맛볼 기회를 얻은 거지요. 음식보다 더 고향 사람들의 훈훈한 정을 나눌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군침이 절로 도는 연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여러 해산물 가운데 가장 입맛을 돋우는 건 당연 쏨뱅이국이었는데요. 생전 처음 대하는 음식인 데다 속을 푸는데 이만한 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점심식사를 마치고 김진수 시인과 함께 대동마을을 돌아봤습니다. 마을회관을 지나 골목초입에는 일반음식점 간판이 걸려있고, 좀 더 들어가니 슈퍼와 연쇄점이 이웃하여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집들은 지붕이 낮았으며, 집을 에워싸고 있는 돌담이 지붕 높이와 같았는데요. 그것도 부족한지 지붕에 줄을 치고 돌을 매달아 놓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거친 바닷바람에 온전하게 집을 지키기 위한 지혜겠지요.
김진수 시인의 마을자랑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동마을은 물이 풍부해 보리·콩·고구마 등의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바다는 수산자원이 풍부해 멸치·갈치·고등어·민어·넙치·쥐치·문어·낙지 등이 많이 잡혔을 뿐만 아니라 김·미역·톳·청각·우뭇가사리 등의 해초 등도 많아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고 하는데요. 그 중 특산물로 전복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대동마을 북서쪽에 대동해수욕장이 있고, 남서쪽에 정강해수욕장이 있으며, 여수에서 하루 2회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초도는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어른들은 자신과 같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도회지로 유학보내는 게 당연시했다는데요. 더러는 초등학교 때 아예 여수나 광주, 심지어는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네요. 골목을 돌 때마다 이집 큰아들은 서울의 명문대를 나와 교수가 되고, 저집 아들은 역시 서울대를 나와 어느 큰 기업의 중견사원이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여수시장 역시 초도 출신으로 초도를 빛낸 인물 가운데 한 분이라 자랑이었지요.
김진수 시인의 초도 사랑은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마을 민속신앙을 비롯해 민속놀이 등 전통과 관련된 것을 비롯해 순우리말의 골짜기 지명 등을 끝도 없이 전해주는데요.‘우대미, 알대미, 사장, 웃당, 아랫당, 안툿거리, 샛터몰, 양지짝, 음달, 이미골, 사슴목골’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지명을 어찌 다 기억하라고 그러는지 나는 그만 “형, 알았으니께요. 다음 뭐 재미있는 초도만의 놀이는 없나요?” 했더니, 그는 “아따 뭐가 그리 급한감, 알았당께.” 하며 여유를 부렸습니다.
당제를 지내는 언덕을 내려와 초등학교를 돌아보고 마을회관에 당도하였을 때였습니다. 마을을 마을답게 수놓고 있는 느티나무 아래 한창훈 소설가가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현재 거문도에 거처를 두고 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날 김진수 시인의 부탁으로 큰 삼치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손수 낚시로 잡은 삼치라니 우리 모두는 큰 박수로 환영하였습니다.
오후 3시 전후 저녁 반찬 겸 술안주를 마련하러 대풍해수욕장으로 갔습니다. 넘실대는 푸른 파도가 ‘바다’다, 연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는데요. 해수욕장은 모래 대신 몽돌로 바닥을 치고 있었지요. 일행 중 어떤 사람은 기이한 몽돌을 줍는데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일행은 톳나물, 보찰(거북손), 참고동, 배말(삿갓조개)을 줍기에 바빴습니다. 누군가는 돌문어를 손으로 잡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나는 해산물 채취보다는 몽돌을 줍는데 정신을 판 덕에 지금도 아기 손을 닮은 몽돌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쪼무락거리며 놀고 있답니다.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만찬이었습니다. 마을부녀회에서 준비한 음식도 풍요로운데 거기에다 거문도에서 막 잡아온 삼치까지 곁들이니 이보다 더 큰 상이 어디에 있겠는지요. 우리 일행이 잡은 갖가지 해산물들로 어디에 젓가락을 대야할 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맛나게 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시 낚싯대를 들고 마을 앞 방파제로 나갔는데요. 일부는 마을회관에 남아 먹을거리를 내준 어머니들과 지화자 좋다 노래자랑을 하였지요. 나는 김용길 시인과 함께 고기 잡으러 방파제로 나갔지요.
바람이 세서 그런지 낚시가 잘되지 않는다고 김진수 시인은 푸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일행 중 몇 명은 돔이며, 볼락, 쏨뱅이를 제법 낚아챘는데요. 그 중에서 낚싯대 없이 낚싯줄로만 된 낚시로 쑥쑥 고기를 잡아내는 김용길 시인은 정말 선수였습니다. 그가 방파제로 싸놓은 거대한 시멘트덩이 틈 사이로 낚싯줄을 넣기만 하면 손바닥만한 물고기가 파다파닥 올라왔는데요.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아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밤이 깊은 줄도 모르게 낚시에 빠져 있다가 내일을 위해 마을회관 숙소에 들어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초도 일주도로를 따라 산책하였습니다. 진막리, 정강리를 돌아 다시 초도로 돌아오는 길인데 약 2시간가량 걸렸지요.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었습니다. 전날 한창훈 소설가가 진막리 마을까지 내려가면 대동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아름다움을 또 느낄 거라 했지만 다음을 위해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산책길에 해국, 예덕나무, 정금나무, 보리수 넝쿨 등을 두루 살피면서 소일했습니다. 모두가 제 고향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식물들인데요. 바위 위에 다소곳이 앉아 꽃을 피우고 있는 천년초는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타고 올라 주렁주렁 매달린 하늘수박은 마치 달덩이처럼 보였는데요. 하늘수박은 김용길 시인이 몇 개 따주어 먹어보기도 하고, 또 몇 개는 집에 가지고 와 장식으로 걸어두었지요. 초도에는 해산물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식물의 보고이기도 하였습니다.
1박 2일의 초도 여행을 마치고 여수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경이었습니다. 김진수 시인의 아내가 손수 운영하는 ‘거북수산’에 들러 아버님께 드릴 회를 샀는데요. 내가 지불한 돈의 액수보다 푸짐하게 회를 담아주어 여간 고맙고 미안한 게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아내도 시인을 닮아 맘이 풍성했습니다.
김진수 시인은 천성이 시인입니다. 그러니 무슨 사업을 잘 해낼 수 있겠는지요. 여러 번의 사업 실패로 고향의 땅은 잃고 지금은 작은 ‘거북수산’을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그를 만난 것이 여간 행복한 게 아닙니다. 느려터진 ‘거북’이름의 작은 공간이지만 한식요리사 자격뿐만 아니라 그 어렵다는 복요리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초도의 시인, 그가 떠주는 회는 고향의 밀감나무가 선사하는 그대로 따듯함을 더해주었습니다. 더군다나 팔팔한 활어회가 주문택배로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니 반갑기도 합니다. 가끔 김진수 시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형, 회 한 접시 영동.”하며 전화를 넣습니다. 그러면 바로 “응, 그라재.” 그의 느릿하고 구수한 웃음소리가 따라오지요.
초도, 풀섬에는 아직 시인의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수에는 갯바람소리 정겨운 풀섬 아이가 ‘거북수산’에서 푸른 파도소리를 들려줍니다.
─반년간지 『시에티카』 2014년 · 상반기 제10호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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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가을 초도를 다녀왔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지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움 그 자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