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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창세기 28:10~22
우리가 지난 몇 시간 동안 창세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이는 잘 꾸며진 연극이나 연속 방송극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아마 이 내용의 연속극을 잘 각색을 하고 연출을 하면 수백 만명의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들 중에 하나인 야곱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배 안에 있을 때부터 싸웠지만 세상에 태어나서도 계속 그 싸움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 어머니와 마음이 맞아서 그의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이고, 배반합니다. 사실 그것은 야비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도 눈이 멀고 죽어 가는 늙은 아버지를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늙은 아버지 이삭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사냥꾼 에서에게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성실한 에서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사냥하러 들로 나아갔습니다.
아버지와 에서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리브가는 그녀의 남편을 속이고 야곱이 축복을 얻도록 음모를 꾸몄습니다. 리브가는 들짐승이 아닌 염소 두 마리를 잡아 그것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리브가는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히고 그의 손과 팔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 그를 에서로 착각하게 하여 축복을 받도록 했습니다.
야곱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갈 때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이삭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약삭 빠른 야곱은 얼른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했습니다. 어서 일어나 앉으셔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축복하소서.” 그래도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때 야곱이 뭐랬습니까?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을 만나게 해서 나가자마자 잡게 해주셔서 이렇게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눈은 멀어서 안 보여도 귀는 아주 멀지 않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삭은 이상한 마음을 금하지 못해서 야곱에게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자.”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 가까이로 나아갔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삭은 자기를 속이는 아들 야곱의 손을 만져봅니다. 왜냐 하면 에서는 손에 털이 많고 야곱은 털이 없이 매끈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만지며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 했습니다. 이미 리브가는 이삭이 손을 만져볼 것을 짐작하고 야곱의 손에 털을 붙여 주었기 때문이 이삭이 분별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염소고기 요리를 에서가 들에서 잡아온 짐승 요리인줄로만 알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에서에게 하려던 축복을) 마음껏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그의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형 에서가 짐승을 잡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생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자기가 받을 축복을 대신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이삭대로 놀랐고 에서는 동생 야곱의 야비한 행동에 이를 갈았습니다. 창세기 27장 34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가 받을 복을 빼앗았구나” 했습니다. “아버지 그래서 그 이름이 야곱이 아닙니까? 그가 나를 속인 것이 벌써 두번째입니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내가 배고파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 약점을 틈타 빼앗았지요. 이번에는 내가 받을 복인데 아버지를 속여 가며 빼앗았습니다. 그 놈이 그런 놈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위해 빌 복을 남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유감스럽게도 축복은 하나뿐이며 그의 동생이 그것을 가져갔으니 이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도둑 맞은 축복을 에서에게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에서에게 간접적인 축복을 했습니다. 창세기 27장 39-40절입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가만히 읽어보면 축복이라고 말할 것이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나름대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에서는 너무나 화가 나서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렇게 되니까 형제간의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험악하게 하기까지 가운데서 역할했던 어머니 리브가는 이러다가 결국 아들 둘을 다 잃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야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야곱을 도망시키게 되었습니다.
예측 못할 불행을 피하기 위해 리브가는 이삭에게 야곱을 리브가의 친족으로부터 아내를 구하게 하자는 핑계로 메소포타미아로 보내게 합니다.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리브가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그랬습니까? 아니면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방법과 그 자신의 때에 이러한 일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었을까요? 리브가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을 지키시게 하려고 하나님을 조정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리브가와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지 않았다면 축복은 장자 에서에게 갔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야곱과 리브가처럼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도울 방법들을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이야기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어리석은 꾀로 인해서 형 에서의 노가 무서워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될 때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생각이 앞질렀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으니 이제는 아버지가 섬기시던 하나님도 떠나게 되었고, 다시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땅에서는 영원히 이방인이 되며, 축복 받은 사람들과 상관이 없어지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야곱의 신앙이 성숙한 자리에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잔꾀에 쉽게 동조한 것만 보아도 그의 신앙이 자라지 못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가정의 보호를 떠나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웠고 초조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 자신은 이제 완전히 버림을 받아 광야에 던져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야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가 가는 곳에 따라가고 계셨습니다. 이 사실은 야곱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돌을 베개하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밤에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모든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발 우리들 사이에 와 주십시오”라고 졸라댄다고 교회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를 찾고 계시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판에서 잠든 야곱의 꿈 속에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꿈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꿈은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강력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상상했던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꿈을 꾸는 능력, 하나님을 그 꿈의 일부가 되게 하는 능력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요셉도 꿈을 꾸었고 그 꿈대로 되었습니다. 바로 왕도 꿈을 꾸었고 그 꿈대로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밤에 꿈을 꾸었고 그대로 했습니다. 꿈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아직 완전한 정의는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신통한 꿈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 중에는 꿈에 갈보리 교회에 나가라고 지시해서 나오신 분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제가 듣고 있습니다.
야곱은 꿈 속에 사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말씀하시는데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야곱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하셨던 것과 똑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주신 말씀 1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 가정 책상 앞이나 벽이나 냉장고에 우리 눈에 자주 띄는 어느 곳에 써서 붙여 놓아도 좋을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임마누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이삭과 함께 야곱과 함께 그리고 우리와 함께 아니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얼마나 고마운 약속입니까?
1.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후렴)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2.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3.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4.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말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야곱이 그 아버지와 형에게 대하여 행한 일은 부끄러운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끄러운 행위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사실 야곱이 두려움과 초조 그리고 긴장 속에서 밤하늘의 이슬을 맞으며 돌을 베게 하고 잠이 들었을 때 그의 잠자리에도 하나님의 팔이 감싸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아름다운 꿈이야말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에게는 한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잠이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는 눈을 떠서 새 빛을 보았습니다. 고난의 밤, 두려움의 밤, 초조의 밤은 지나가고 광명한 대낮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여기 계셨는데 내가 알지 못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높은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낮은 땅에도 계십니다. 자연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산과 바다, 나무와 물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만물이 주를 찬양합니다.
1.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후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2.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는구나!” 이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 속에 계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역사를 주장하신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하고 의심스러울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연 하나님이 여기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셨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재앙이 있습니다. 이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수레바퀴의 한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편 23편 말씀은 우리 믿음의 노래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가깝던 친구는 나를 배신하고 떠났어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십니까? 심지어 나를 낳은 부모는 혹시 나를 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면 아침에 눈을 뜰 때 찬미 소리와 함께 하나님을 뵙게 되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에도 그의 사랑의 날개 아래 편히 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 것을 믿으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아니합니다. 오락이 죄는 아닙니다. 취미 생활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하나님 앞에서 즐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 여기 계신 것을 믿고 말하게 되면 마귀가 좋아할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어려운 환경 가운데 빠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 것을 믿게 된다면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