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을 단행한 뒤부터 더욱 거세게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듣지 않았다.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과 병인·신미 양요를 거치며 양이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일본에서는 더욱 정한론이 들끓었다. 유신 삼걸의 하나라는 사이고 다카모리은 직접 조선에 들어가 국교를 수립하겠다며 사신 파견을 자원했다. 사이고는 조선이 자신을 죽이든, 수교 요구를 거부하든 전쟁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다.
사이고의 계획은 성사될 뻔 했다. 1873년 각의(내각회의)는 사이고를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의결했으나 단서를 달았다. 서구 제국과 불평등 조약을 고치고 문물을 배우러 떠난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올 때 확정하자는 단서는 일본 정계의 내분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구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내치에 우선할 때라며 사절 파견과 정한론을 반대한 것이다. 10월 중순께 국무총리격인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사이고의 손을 들어줬다.
오쿠보 등은 즉각 사표를 내고 공작에 들어갔다. 1873년10월24일, 일본 왕 무스히토(메이지)는 내치파의 비밀 상소문을 재가했다. 정한론은 이로써 일단락됐으나 실은 새로운 파문의 시작이었다. 먼저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에서 5명의 중신이 사표를 내고 정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한파를 따라 중앙공무원으로 변신했던 사무라이들도 정한파를 따랐다. 정한파는 정한당과 우국당을 조직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쿠보 등 내치파가 조선 침략을 주저한 이유는 무엇일까. 네 가지 불가 이유를 들었다. ‘내치의 정비가 급선무이고, 재정난으로 해외 정복에 나설 여유가 없으며, 교전을 틈 타 영국이나 프랑스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서구 열강이 일본에 대해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데 유독 조선의 무례만 탓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치파는 정말 한국의 사정을 이해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한론을 둘러싼 정쟁이 끝난 지 2년도 안돼 내치파는 윤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강화도 조약과 조선의 개국, 망국으로 이어진 윤요호 사건을 주도한 정부가 바로 오쿠보의 내각이었다. 정한론 논쟁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혐한과 친한의 갈등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잡느냐를 놓고 벌인 혈투였다. ‘정한론의 주도권을 쥐는 자가 일본의 권력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상대 정파에게 정한론이라는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내치 우선을 주장했던 오쿠보야말로 정한을 실행하고 성과를 낸 진짜 정한론자였다.
즉각 조선을 치자던 정한론자들도 마찬가지다. 윤요호사건으로 강화도조약이 맺어졌으니 정한론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정한론 미수용을 이유로 사직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7년 반란을 일으켰다. 무사 집단을 중심으로 삼은 사이고의 정병 4만명은 농민 출신의 징집병 7만명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부상 당한 사이고가 항복 권유를 마다한 자결한 뒤 370여명의 사무라이들이 감행한 최후의 돌격은 톰 크루즈가 주연한 2003년 개봉작 ‘라스트 사무라이’에 녹아 있다. 세이난(西南)전쟁으로 불리는 이 반란을 끝으로 일본은 내란을 마치고 현대화 가도를 내달렸다.
정부군이 하루평균 탄약 32만2,000발, 포탄 1,000여발을 소비한 세이난전쟁은 일본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연간 세수가 4,800만엔인 상황에서 4,100만엔이 투입된 세이난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은 세금을 올리고 종이돈을 마구 찍어댔다. 필연적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일본에 양극화의 씨앗을 뿌렸다. 세이난 전쟁과 강화도 조약에 앞선 대만 출병에서는 미쓰비시 같은 민간업자들이 기선 운용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인명 피해도 컸다. 정한파가 일으킨 반란인 세이난 전쟁과 사가(佐賀)의 난 전사자만 1만5,800여명에 이른다.
대만 출병이 조선보다 쉬웠다는 점에서 택한 차선책이었다고 보면 정한론과 조선의 존재는 일본 현대사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아는 타자와 관계 속에 정립된다는 점에서 정한론은 일본의 근대화를 향한 국론 집결과 방향 설정의 진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목할 대목은 조선을 치자는 상소를 올리고 자결한 사무라이와 조선을 나중에 치자는 상소 후에 할복한 사무라이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전자와 후자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의명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기와 순서만 달랐을 뿐 조선을 치자는 원론은 동일했다는 점이다.
우리도 그러한가. 어떤 당파든 국가 이익을 위해 당론을 결정한다고 강조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의명분보다는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국민적 공분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는 후안무치란. 타자인 일본을 보자니 더욱 한숨이 나온다. 근대적 정한론의 원조 격인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는 아베 총리와 2011년부터 중·고교 교과서에 ‘진무 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집어넣는 우경화 분위기, 개화기 외국 언론처럼 한일 군사동맹을 부추기는 국제 정세까지···. 어지럽고 두렵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역사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학은 때때론 핵물리학처럼 위험할 수 있다.’ 일본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써먹은 삼한정벌설과 그 연장선인 정한론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정녕 정한론은 이젠 사라졌을까. 그리고 ‘삼한의 대왕은 일본의 개’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