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유종인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가지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꽂아 쓰자고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유종인 시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면서 문단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 『수수밭 전별기』『교우록』 『사랑이라는 재촉들』 『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
산문집 『염전―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 『산책―나를 만나러 떠나는 길』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등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