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57/옛글]‘어린 왕자’의 독후감
어제 서가書架를 정리하다 우연히 찾은 ‘원고지 글’에 대하여 쓴 글을 지인 몇 분에게 카톡으로 보냈더니 “문청文靑(문학청년)이었구먼” “그때부터 문재文才가 넘쳤군요”라는 칭찬 겸 격려가 잇달았다. 문청, 문재라? 글쎄. 소설가도, 시인도 못되고, 심지어 수필가도 못된 주제에 무슨 문청이란 말인가? 어림짝도 없는 일. 꼭두새벽에 댓글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다가 불쑥 고교앨범 속에 있을지도 모를 ‘학보學報’생각이 났다. 있었다. 4면짜리 낡아 너덜너덜해진 <전라고학보>. 1975년 12월 24일자 창간호. 그 속에 맨처음 활자화된 나의 글 한 편이 실려 있었다. <어린 왕자>를 읽고 쓴 독후감인데, 지금 생각하면 글도 아니었다. 나의 중학교때 절친인 친구가 창간호 신문을 만든다며 원고 청탁을 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 덕분에 게재된 것이다. 예비고사를 끝낸 즈음이었다. 아무튼, 다시 한번 익숙한 워드 솜씨로 전문을 기록해 놓아야겠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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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감동>
오직 멋과 우정 그리고 참된 신념으로 44세의 짧은 생애를 일관한 비행사이자 행동문학가인 佛人 쌩 떽쥐베리의 유명한 우화체 소설 ‘어린 왕자’를 읽고 그 감동을 적는다. 작자는 이 작품 외에도 페미나상을 탔던 ‘인간의 대지’와 ‘야간비행’ ‘성태’ 등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신비주의 계열의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과 비교된다.
우리 어린 왕자와 함께 우주여행을 떠나자. 작자는 맨처음 모자(?)-보아뱀이 코끼리를 소화시키는-의 그림으로 어른들의 썩은 상상의 한계를 제시하고 있다. 사하라사막 한복판에 기관 고장을 일으켜 불시착한 이 비행사의 곁에 소유성 B-612에서 왔다는 어린 왕자가 다가와서 양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자 속의 양이 들어있다’고 그려준 그림을 ‘양이 잠자고 있다’고 알아보며 기뻐하던 왕자, 바오밥나무 몇 그루로 쪼개질만큼 조그만 혹성, 그러기에 날마다 그 나쁜 씨를 없애기 위해 청소를 하며 악은 어릴 때부터 뽑아버려야 한다고 했지. 화산을 하나의 굴뚝으로 여기던 왕자, 하루에도 석양을 마흔네 번이나 봤다는 왕자는 조금만 움직여 황혼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이 최고라고 했지. 그의 별에는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재채기를 하던 오만한 장미꽃도 있었다.
왕자는 세상을 알기 위해 우주여행을 떠난다. 맨처음 별에는 하품까지도 명령하고 떠나겠다는 왕자의 말에 다급하게 대사로 임명하노라는 권위로 가득찬 절대군주가 있었고, 다음 별엔 술 먹는 것이 부끄러워 술을 먹고 잊으려 한다는 모순덩어리의 술고래 어른이 있었다. 또한 수학 계산 밖에 모르는 상인의 별. 그러나 왕자는 이런 모든 어른들은 ‘버섯’‘속물’이라 중얼거리며 여행을 계속한다. 자기의 가치기준에 따라 1분마다 한번씩 가로등을 점멸해야 하는 점등인의 별, 왕자는 지리학자의 말대로 지구로 향한다.
지구는 왕이 111명, 지리학자 7000명, 상인 90만명, 주정뱅이 76만명, 허영쟁이가 3억명으로 된 거대한 별이라고 했다. 어린 왕자는 사하라사막에 서서 지구는 소금에 절여 있고 사람들은 상상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다고 탄식한다. 이리와 만난 왕자는 이리를 길들인다. 이리는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하며 기술 만능인 현대에서도 친구를 만드는, 친구를 파는 사안들은 없다고 말한다. 또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지 않으니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왕자는 자기가 1년 전에 내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꽃뱀의 독으로 무거운 육체의 껍질을 벗고 자기의 고향, 즉 영원으로 복귀한다. 작자 자신이 40여세에 신비한 죽음이 되었듯이 많은 애절한 얘기를 남긴 채, 작자는 맨 끝에 왕자가 떠난 자리를 다시 그려 왕자를 다시 보거든 연락을 해달라고,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고 절규한다.
특히 전편의 곳곳에 원색 그림이 삽입되어서 약 120여페이지를 읽는 동안 저절로 동화되어버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대강의 줄거리였다.
나는 이 책장 여백마다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왕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감히 말한다. “어른들은 숫자 외엔 관심이 없어”“어린이들이 어른의 아버지라는 진리를 모두가 망각해버리고 있다”“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버섯이야. 버섯”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숨어 있어서이듯, 나에게 조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물을 찾으려 서서히 걸어가겠어”작자는 양을 위해 그려준 부리망에 가죽을 그려주길 잊어버려서 양이 꽃을 먹지 않았을까? 라는 우스꽝스러운 수수께끼로 모든 의문을 해결하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20C의 과학문명에 반기를 들고 순수한 인간성의 회복을 외친 참신한 휴매니즘을 기조한 작품이기에 40년대의 작품이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붐을 이루는 까닭이다.
우리가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영혼이 너무 아름답고 또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이다. 그가 입은 의복이 낡았다고 천문학자의 위대한 발견을 일축해버리고 그가 가진 재산의 다과로 인격을 단정해 버리는 둔화한 현대의 어른들에게 신랄하게 재고의 여지를 던져주는 사회고발적인 책이며, 자라나는 우리들에게 한없는 상상을 북돋아주며 생활의 척도가 되어 줄 평생에 잊지 못할 동화책이었다. 우리가 극한 상황에서도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새벽을 기다리는 무구한 마음에서이며 저마다의 가슴에 ‘자신의 별(양심)’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숫자를 경멸할 줄 아는, 중요한 점은 마음으로 보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생활을 창조하며 미래로 나아가자는 책이기에 그 순수한 감정의 파장은 오래오래 잊지 못할 양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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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지금도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삶의 척도를 제시하며 동심을 잊지 말고 살기를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닐까. 영문판으로 읽다가 ‘tame(길들이다)’는 단어를 발견하고 얼마나 좋아했었던가.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어를 친구에게 배워 프랑스판 어린왕자‘Le petit prince’를 읽었던 기억도 새로웠다. 기록이 남아 있었으므로 이런 추억을 곰새길 수 있어 좋았다.
첫댓글 우천의 감성충만의 근원은 바로 독서일세, 어린왕자를 통해 고교시절의 우천이 이해가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