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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lee/eros(1923)
문성준
본 글은 지젝과 들뢰즈의 책을 다소(?) 차용했습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항간에 화자가 되었던 적이 있다. 현 리움미술관 관장이자 삼성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씨가 관련된 비자금 사건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해 난데없이 <행복한 눈물>뿐만 아니라 리히텐슈타인과 여타의 팝아트까지 도마에 오르게 되었었다.
이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은 비자금보다도 도대체 리히텐슈타인이 누구이며, 단지 크게 그려놓은 만화일 뿐인 것처럼 보이는 <행복한 눈물>이 어째서 그런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가 되어야 하는가 였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그리고 조금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관련 논문이나 월간미술 같은 전문 잡지를 통해 그 의미를 접하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에 떠다니는 물음표를 지우기가 막막하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된 게임의 법칙, 즉 “철학을 하지 않고서는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라는 법칙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장 르누아르의 영화 “게임의 규칙 (The Rules of the Game)” 속 앙드레처럼, 우리는 현대 문화 규칙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모든 게임이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규칙을 깨뜨리는 이는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라는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철학을 해야만 미술을 ‘읽을’수 있는 현재의 추세에 소심한 반항인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즉, 진중권이 <이매진>의 서문에 썼던 것처럼 이것은 그림에 대한 평론이 아닌 그저 담론의 놀이일 뿐이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일자(One)로서의 유일부동의 존재를 주장했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 네 가지 역설(paradox)로 더 유명한 그의 역설 중 첫 번째인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역설”은 어쩌면 이 그림을 감상하는데 좋은 힌트를 제공한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관계가 그림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화살표의 관계를 설명하는 우화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조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제논의 이름이 나왔을 때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파울 끌레의 에로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큰 화살표는 아킬레우스로 볼 수 있으며, 그보다 (원근적으로)앞서 있는 작은 화살표는 거북이다.
두 개의 화살표 속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흔히 꿈에서 체험하는 경험과 유사하다. 꿈 속에서 주체인 나는 점점 더 가까이 대상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지만(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다는 말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에 비해 그랬던 것처럼 대상보다 ‘나-주체’가 더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석하게도 웬만해서는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것은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로 대변되는, 주체가 대상에게 끊임없이 접근하는 꿈의 알레고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이런 접근 불가능성을 우리는 파울 끌레의 에로스에서 볼 수 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리비도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제논의 패러독스는 바로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각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화살표를 끝없이 쫓아가는 큰 화살표처럼,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결코 욕망의 대상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욕망의 대상과 원인을 놓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주위를 맴돌거나 어렴풋이 흔들리는 그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전부다. 요컨대 끌레의 화살표는 우리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하든 결코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역설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두 화살표의 관계는 ‘회화’라는 장르적 장치가 적극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만일 이 화살표 두 개가 움직이는 그림이거나 조형물이었다면, 그것은 배치와 한계(움직이는 그림은 절대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젠가 욕망의 대상을 획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면의 캠퍼스에는 그러할 가능성이 없다. 회화에는 시간성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마치 종이에 쓰인 방정식의 수식처럼(논리에는 역사/시간이 결여되는 것과 동일한 구조로) 말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관계로 설정된다.
어쩌면 이러한 욕망에 대한 추구, 즉 에로스는 탄탈로스나 시지푸스의 존재 양태와도 닮아있다. 지겹게 굴러 떨어지는 바위처럼, 손끝에서 맴도는 과일처럼 우리는 영원히 대상을 갈구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의 대상, 즉 다다를 수 없는 환상은 우리(자아, 주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가 조작(사실 여부를 제쳐두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함께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흥미로운 반응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분노의 대상이 자신들(시청자)을 속인 PD나 제작사, 배우 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상(정글에서의 생존 과정이 실제라는)을 깨버린 내부 고발자(소속사 대표)를 향한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불합리하다. 어째서 속인 사람이 아닌 사실을 말해 준 사람에게로 분노가 향하는가?
하지만, 이런 반응이 당연히 일어 날 수 있고,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이유는 바로 ‘그곳(정글)’에 있고자 하는 시청자의 욕망과 환상을 고발자가 깨버렸기 때문이다. 이 환상은 시청자를 시청자로 남아있게 해주는 장치, 즉 그들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왜곡된 또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부 고발자는 현실과 환상의 공간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접합할 수 있었던 장소를 그들에게서 박탈해 버린 것이다. 즉, 그곳(정글)에 다다를 수 없음으로써 자신들이 시청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을 고발자는 치사한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시청자의 지위를 박탈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글은 뭔가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을 ‘일상 속의 자신’으로 남아있게 해주는 스크린이자 동시에 절대로 봐서는 안되는 것을 차단하는 막이었던 것이다.
다다를 수 없는 작은 화살표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눈을 돌려야 할 부분은 계단형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는 중심에서 보자면, 한색(寒色)에서 난색(暖色)으로 확장되며 상하로 보자면 큰 화살표의 끝(머리 부분)을 기점으로 채도(彩度)가 점점 떨어진다. 그리곤 작은 화살표의 끝에서 한 차례 주춤 했다가 다시 다소 밝아진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앞서의 설명과 억지로나마 이어 보자면 회화라는 장르적 한계의 극복이다. 멈춰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두 화살표는 비로소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될 수 있다.
그림은 태생적으로 멈춰있다. 이것을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 현재로서는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애당초 그리되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그림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이고 많이 사용 되는 것이 원근법(遠近法)이다. 파울 끌레의 그림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화살표 두 개가 이런 원근법의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평면적이게 보이지만 층위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화살표를 일직선으로 배열함으로써 그림에는 입체감과 동시에 운동이 생긴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겹친 두 개의 피라미드의 채도와 형태 변화이다.
운동이란 공간 안에서의 이동이다. 그런데 매번 공간 안에서 부분들이 이동할 때마다 전체 안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쉽게 예를 들어 본다면, A와 B라는 대상이 있다면 이것만으로는 운동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이에 네러티브가 개입되면 그것은 운동이 된다. 즉, A는 굶주려있고 B에는 음식이 있다고 하였을 때 A는 B에 이르며 이것은 운동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변하는 것은 A나 B뿐만이 아니라 그 둘을 포함한 전체도 마찬가지다. 각 개별의 특질적 요소가 전체 안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전체의 요소도 변하는 것이다.
즉,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에게 이르는 동안 변화한 것은 그 둘을 포함한 전체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큰 화살표가 작은 화살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변한 것은 그 둘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배경 또한 마찬가지이며, 이것을 피라미드의 채도 변화가 표현한다. 각각의 화살표의 시작점에서 시작되는 변화는 그 둘로 하여금 변하는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매번 공간(전체) 안에서 부분(화살표)들이 이동할 때마다 전체 안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설명과 에로스에 대한 로멘스적인 성향과 더불어 해석 해 볼 수도 있다. 에로스라는 제목에 맞게 욕망의 대상으로 향하는 시선(큰 화살표 끝. 방향)이 대상을 향한 마음이며 그로인해 주위의 모든 것이 밝아진다는 사랑의 위대함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화살표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 변화는 ‘시작’은 가장 밝고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러지는 사랑의 한 단면을 나타내기도 한다. 반면, 작은 화살표는 그 스러진 큰 화살표의 마음이 그에게 이르렀을 때에야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사랑의 일반적인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두 가지 해석 중 어떤 것을 택하느냐는 관객의 선택이다. 따로 해석할 수도 있고, 동일한 시각으로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혀 다른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그저 ‘내’ ‘담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행복한 눈물>을 위시한 팝아트들이 ‘소비자’의 삶 속에 파고든 일상의 모든 것들을 소재로 차용하여 상품과 광고, 텔레비전과 영화, 만화책과 연예인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 속해있던 모든 것들을 ‘미술’로 변모시키고 소위 고급문화와 평범한 일상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었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실상 대중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미술에서 멀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씁쓸함이 아직 남아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다면 즐기기라도 하자는 것이 팝아트의 기본적인 태도라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소수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것을 그들이 다분히 의도했음은 가끔 나와 같은 일반 대중을 분노케 한다.
그럼으로써 가끔은, 아니 아주 자주 리히텐슈타인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보인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