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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sports.naver.com/general/article/380/0000000573
올시즌 부산 KT와 FA 계약을 맺은 프로생활 14년차의 송영진(36). 2001년 드래프트를 통해 프로에 입단한 선수 중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는 그가 유일하다. 동기였던 김승현, 황진원, 전형수 등은 올시즌을 앞두고 대거 은퇴 선언을 했다. 그는 몸 싸움이 심한 4번 포지션(파워포워드)에서 뛰며 늘 힘 좋고 장신인 선수들과 싸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부상은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심하게 표현해서 온 몸이 종합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가 많고, 부상이 잦고, 곧 은퇴를 앞둔 선수에게 부산 KT는 왜 2년간 2억 원이란 돈을 안기며 재계약을 맺었을까. 전창진 감독은 송영진의 인내와 희생과 실력에 높은 점수를 줬다. 전 감독은 부산 KT에서 만난 선수들 중 가장 고마운 선수로 송영진을 꼽을 정도이다. “조성민보다 더 고마운 선수이냐”는 질문에 “당연하다. 영진이는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선수이다. 영진이의 그런 희생 덕분에 감독인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2001년 신인 드래프트에선 1라운드 1순위로 창원 LG에 입단했을 만큼 뛰어난 스타플레이어였지만, 정작 프로에서는 부상 속출과 외국인선수의 활약에 가려 그는 2인자, 조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송영진은 인터뷰를 통해 조심스럽게 그동안 털어내지 못했던 농구인생의 아픔에 대해 밝혔다.
송영진은 왜 정신과 상담을 받았을까?
대학 농구 최고의 유망주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던 송영진이 프로 데뷔 후에 보인 모습은 기대 이하였다. 2년 차에는 평균 출전시간이 12분 15초에 그쳤을 만큼 송영진의 부진은 농구인들에게 의혹을 안겨줬지만, 당시 송영진은 인터뷰에서 “모든 건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다”라며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김태환 전 감독과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 전 감독은 송영진의 중앙대 은사였다. ‘무적함대’ 중앙대 농구부를 지휘하며 김주성과 송영진의 고공 농구를 앞세워 2년간 48전 44승으로 중앙대를 대학 농구의 정상에 올렸던 우승 청부사였다. 송영진이 대학농구연맹전에서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할 때도 김 전 감독은 송영진의 스승이었다. 송영진은 프로에서 LG 감독을 맡게 된 김 전 감독과 다시 조우했고, 스승 밑에서 새로운 기지개를 펴려고 했지만, 대학 시절과는 달리 김 전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녹아들지 못하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선 말하기가 여전히 어렵고 조심스럽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팀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고, 그 다음은 감독님이 원하는 플레이를 하지 못하면서 압박감이 심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코트에서 뛰는 것 보다 선수단 생활에서 부대끼는 부분에 대한 부담이 훨씬 더 심했다. 그 증세가 구토로 나타났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다가도, 양치질을 하다가도, 또 식사를 하다가도 구토를 했다. 결국엔 트레이너와 함께 병원을 찾았는데, 위 내시경을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내시경 검사를 하던 의사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정신과였다. 이유 없이 구토를 반복하는 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하더라. 그 후엔 매주 정신과를 찾아 상담을 하며 치료를 병행했었다.”
(2003년 송영진 트레이드 요청 기사 첨부)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1050177
“트레이드해달라. 다른 팀에서 새 출발하고 싶다.”
창원 LG의 포워드 송영진(25)이 갑자기 트레이드를 요청해 구단측이 당황하고 있다. 송영진은 최근 연봉협상 과정에서 트레이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영진은 “2년 동안 LG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며 “군대도 면제받은 만큼 다른 팀에서 새롭게 농구생활을 하고 싶다”고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대 시절 원주 TG의 김주성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던 송영진은 2년 전인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LG에 의해 1라운드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큰 기대를 모았으나 용병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데 실패해 그동안 벤치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게다가 올 연봉협상에서 송영진은 구단의 삭감 조치에 실망하며 다른 팀에서 선수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트레이드를 요청하기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측은 송영진의 지난 2년간 성적이 계속 부진해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LG의 한상욱 차장은 “송영진과의 연봉협상이 잘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식으로 트레이드를 요청받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그러나 트레이드를 요구할 경우 구단은 이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차장은 “송영진이 자신의 연봉삭감 방침에 불만을 품고 트레이드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렇다 해도 연봉을 삭감해야 한다는 구단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종별대회 참관차 대구에 온 김태환 LG 감독은 송영진의 트레이드 요청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선수의 장래를 위해 트레이드가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감독은 “몇몇 구단을 상대로 송영진의 영입의사를 타진해보기는 했으나 아직 이렇다할 반응은 없다”며 “언제든지 송영진을 영입하겠다고 나서는 구단이 있을 경우 트레이드 성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KTF로의 이적, 농구인생의 터닝 포인트!
송영진은 LG에서 4시즌간 평균 6.0점, 1.8리바운드에 그쳤다. 1순위의 명성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면에 2001년 드래프트 당시 3순위로 지명됐던 김승현은 한국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성장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더욱이 김승현은 ‘오빠부대’를 형성하며 최고의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드래프트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면 프로에서의 두 사람은 극명한 길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송영진에게 KTF로의 이적은 농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2005년 시즌을 마치고 FA 자격을 얻어 창원 LG와 계약한 현주엽의 보상선수로 KTF에서 LG의 송영진을 지명함으로써 송영진은 LG를 떠나 당시 추일승 KTF 감독 밑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
“KTF로의 이적은 모든 걸 묻어두고 새로운 도약을 꾀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이적이었다. 더욱이 추일승 감독님은 자신감을 상실한 나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워주시며 꾸준히 선발 출장시키셨다. 당시 추 감독님을 만나게 됐던 부분이 농구 선수로 롱런할 수 있었던 출발점이었다고 본다.”
송영진은 추일승 감독에 이어 전창진 감독을 만나면서 제대로 된 날개를 달았다. 자신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한 전 감독 밑에서 송영진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궂은 일을 도맡으며 팀에 헌신했다. 조성민이 팀의 에이스였다면 송영진은 ‘믿을맨’이었다. 조성민이 외곽에서 3점슛을 터트린 배경에는 송영진의 역할이 컸다. 30대 중반의 이 선수를 가리켜 후배들은 투혼의 상징으로 불렀다.
“병원 가는 일이 훈련하는 시간 못지않게 많다. 양쪽 무릎이 닳고 닳아서 퇴행성 치료를 받고 있는 터라 은퇴하기 전까진 안고 가야 할 것 같다. 사실 이번 FA 계약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동기들처럼 은퇴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 무릎으로 좀 더 버텨야 하는지를 놓고 생각을 거듭했다. 그때 전창진 감독님이 한 마디로 정리를 해주시더라. ‘야, 뭐가 복잡해?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거지’. 감독님께서 베테랑에 대한 예우를 해주셨다. 은퇴 후에는 코치직 자리도 보장해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동기 김승현과의 치열했던 경쟁
“프로 초창기에 승현이가 부러웠다. 천부적인 실력을 갖고 인기몰이를 하는 승현이의 존재감이 엄청난 크기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의 마지막만큼은 그 친구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서로 포지션도 틀리고 농구 색깔에도 차이가 있지만, 김승현은 내가 넘어서야 할 대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잘할 때, 열심히 뛰고 있을 때 긴장감을 형성하는 반면, 승현이가 잠시 선수 생활에서 물러나 있거나 구설에 오르거나 이렇게 은퇴를 하고 난 뒤엔 재미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송영진은 중앙대 시절에 ‘덩크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프로 들어선 그가 덩크슛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송영진은 덩크슛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한다. 프로 입단 후 덩크슛을 날렸다가 실패한 후 감독으로부터 심하게 야단을 맞은 후론 자신의 농구인생에 ‘덩크슛’이란 단어를 지워버렸다는 것.
“프로 초창기에 어두운 터널과 계곡을 건너면서 주저 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까지도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사회 생활도 그렇지만, 운동선수도 어떤 감독을, 어떤 코치를, 그리고 어떤 동료 선수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온도차가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은 길게 봐야 하는 것 같다. 아무리 지독한 어려움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걸 극복하느냐, 아니면 포기해버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참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 이것이 운동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송영진과의 개별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팀의 최고참 선수인데, 기자가 너무 늦게 찾아갔다는 미안함이 앞섰다. ‘빅맨’ ‘빅스타’의 그늘에 가려 2인자로 존재했던 그이지만, 그는 팀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며 희생을 서슴지 않았다.
송영진이 인터뷰에서 이전의 아픔을 끄집어낸 것은 아마도 그 기억들을 완전히 지우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도 이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테니까.
2014년 인터뷰 이후 송영진 행적
2015년 은퇴
2015년~2018년 부산KT 수석코치
2018년 미국 유학
2019년 연세대 코치
2020년~2022년 휘문고 코치
2022년~2023년 수원KT 수석코치
2023년~현재 수원KT 감독
10년 전 현역 막바지에 인터뷰했던 이영미 칼럼을 소개하였습니다.
10년 전에 이 기사 보고 진짜 감동 또 감동이었던 기억이 나는데
어제 KT의 파이널 진출을 보니 정말 송영진 감독이 어쩌면 선수시절 못이룬 꿈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시련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올린 송영진 선수.
지도자로서도 빛을 보지 못했지만 휘문고 코치로서 줄곧 내실을 다지다가
끝내 다시 프로무대 감독으로 돌아와서 파이널 진출의 성과를 만들어낸 송영진 감독.
물론 역시 감독 초년생이고 아직도 수원 팬들의 완전한 신뢰를 받은 건 아니지만
파이널 진출 자체만으로도 송영진 감독의 감회가 새로울 거 같습니다.
아쉬운 건 연고지가 이전되면서 송영진 감독이 선수시절 수많은 영광을 쌓아올린 사직실내체육관을 원정팀으로 찾게 된 부분인데
사직실내체육관을 홈코트로 사용하며 챔프전과 4강PO, 6강PO 등등 부산팬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가
원정팀 감독 자격으로 사직실내체육관을 방문하는 기분이 궁금하네요.
부산의 농구팬들의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된 송영진 감독의 사직 원정의 결과가 궁금해집니다.
첫댓글 당시 국내 빅맨이 없던 KT에서 오세근, 함지훈, 하승진 등을 얇은 프레임으로 육탄방어 하면서 쏠쏠히 3점도 넣어줬죠.
전창진 감독이 조성민을 혼내긴 해도 송영진을 혼내는건 거의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미 120% 해주고 있다고 생각되어서였겠죠.
송영진 지금 시대였으면 살도 안찌우고 그냥 3점도 더 많이 쏘고 했을텐데 아쉽
송영진 김동우 정훈 같은 장신 윙맨 가능성있던 선수들은 너무 아깝죠
제가 응원했던 KT는 조성민 보다도 송영진의 팀이였습니다.
제스퍼 존슨과 찰스로드가 본인의 기량을 국내에서 끌어 올린것도 저는 송영진의 역할이 중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대학시절 그 화려하던 플레이는 접어두고
묵묵히 보이지 않는곳에서 스크린, 수비, 리바운드등 감초 역할을 하는것을 보고 농구를 보는눈이 많이 넓어졌어요.
감독으로써는 화려하게 꽃피길 응원하겠습니다.
ㄹㅇ kt의 전성기 시절은 조성민의 활약도 있지만 언제나 궃은일 묵묵히 해주고 리바,수비 하면서 공격에서도 제몫해준 송영진이 있기 때문이긴하지
BQ는 떨어져도 그냥 우직함 그자체
저는 BQ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요. 궂은 일을 하지만, 굉장히 영리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했습니다.
97학번 드래프티 가운데 가장 오래뛴 선수였죠..
당시 3순위였던 김승현의 활약이 워낙 강렬해서 송영진이 많이 비교당하고 혹평도 들었는데 LG 시절 무리하게 살을 찌우다 이도 저도 아닌 선수로 끝나는줄 알았는데 추일승 감독이 현주엽의 보상선수로 KTF에서 잘 썼고 전창진 감독 밑에서 외인 수비를 전담하는 궂은 일을 맡았죠.. 내외곽 가리지 않고 공격에서도 넓은 범위의 슛레인지로 큰 도움이 되었고요.. 가늘고 긴 활약을 펼치며 정식 감독 첫해 파이널 진출을 이끈 역대 7번째 감독이 되었는데(김진 01/02 동양 - 전창진 02/03 TG - 문경은 12/13 SK - 김영만 14/15 동부 - 추승균 15/16 KCC - 전희철 21/22 SK) 첫 시즌에 파이널 우승을 만들어내는 4번째 감독이 될지 지켜보겠습니다..!!
감독으로서도 플옵에서 계속 좋아지고있는거 같습니다.
그당시 케텦팬으로서 그시절이 그립네요
신기성 포가에 황진원 조성민 김도수 박상오 송영진 등 추일승의 포워드 농구.. 비록 우승을 차지한 적은 없지만 맥기 리치와 함께했을때 파이널 갔던 시즌은 살면서 농구장을 제일 많이 갔던 시즌입니다..ㅎㅎ
비록 원정 감독으로 사직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서로 좋은 경기 만들어주었으면 하네요😊
황진원 박상오는 겹친적 없지 않나요?
추일승 포워드 농구의 핵심이었죠 상대 4번을 3점 라인까지 끌어내고 새깅 나온다 싶으면 여지없이 3점 터트려 줬죠.
리치 맥기 시절에 우승했어야 해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