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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르카 여행10 - 대성당 앞에 조각상과 연못에 바다를 보고 예쁜 골목길을 걷다!
어제 5월 14일 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de Mallorca 에서 기차를 타고 소예르 Soller 를 보고는
발데모사 Valldemossa 를 거쳐 팔마로 돌아와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집" 을 찾아 보았으며 5월 15일 오늘은 발렌시아 에 가기 전에 시내를 구경하려고 합니다.
람블라스 La Rambla 거리에서 걸어서 마요르광장 Placa de Major 에 도착해 명품숍을 보고
Pl del Mercat 시티투어 버스 정류소와 Placa de Carlesi 광장을 지나 레이니 광장
Placa de la Reina 에 이르러 알무다이나 궁전과 대성당에 도착해 예쁜 정원 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정원에서 대성당 쪽으로 올라가니 여긴 주변 시가지에 비해 높은
지대로 옛날에는 언덕 이었지 싶은데.... 사방이 확트인게
전망 이 좋은데 우선 보이는게 대성당 아래쪽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 입니다.
여기 대성당 아래 바다 공원 Parc de la Mar 과 사이에 길게 펼쳐진 해안
산책로를 현지인들은 파세오 마리티모 Paseo Maritimo 라고
부르는데.... 팔마 해수욕장 Playa de Palma 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그 너머로 푸르디 푸른 지중해 바다 가 펼쳐지고 부두에는 보트며
요트 들이 정박해 있는 평회로운 모습을 보는데 특히나 요트 는
돛을 내린지라 마스트 가 하늘로 향해 빽빽하게 늘어선 모습이 장관입니다!
팔마 마요르카의 대성당 까떼드랄 Catedral de Mallorca 은 1229년 이슬람 교도들로 부터
마요르카섬을 탈환한 기독교 아라곤의 왕 하이메 1세 (카탈류나어로는 지우메 1세) 는
다음해 부터 팔마 시내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고딕양식의 대성당 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 에서 일어나 시리아 다마스크스에 도읍을 둔 옴미아드
왕조 이슬람 사라센인 들이 이역만리 이 머나먼 스페인땅 을 침략해 게르만족의
서고트왕국을 멸망 시키는 것이니....... 그 이유 를 찾아 보자면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스페인땅에 훈족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달아나던 게르만족들이 프랑스를 남하
하다가 그중 한 무리인 서고트족 은 415년에 프랑스 툴루즈 에 서고트왕국 을 세운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507년 반달족이 휩쓸고 간 톨레도에 도읍 하고 스페인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북아프리카 모로코 세우타의 통치자 훌리안 백작은 자기 딸을 욕보인 서고트 왕국
로드리고 왕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마호멧의 후계자들 이
다마스커스에 건국한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의 이슬람 사라센인 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마침 이집트와 튀니지를 지나 알제리 에 접근하던 이슬람 사라센인 들은 얼씨구나
좋다고 하고는 지중해를 건너서 스페인 땅을 침범 했으니....
711년 스페인 과달레테 전투 에서 서고트왕 로드리고를 전사시키는 대승 을 거둡니다!
이후 이슬람 사라센인 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는 스페인을 통치하는데 그치지 않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침입해 파리 서쪽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프랑크왕국과
전투 를 벌여 패하고는... 스페인 본토와 인근에 마요르카섬 등을 7백년간 지배했던 것입니다.
여기 대성당 까떼드랄 Catedral de Mallorca 주변에는 이런 저런 조각품 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중에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어머니 가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이라 한참 동안이나 쳐다 봅니다.
이 조각상 을 보자니 불현듯 떠오르는게 있으니, 구한말 조선에서는 남자아이 를 낳은
여자들은 평소에 젖가슴을 드러내고 다녔으니... 조선 여자들이 한복의 특징과
가난, 문화적 관습 때문에 "젖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모습이 프랑스인 샤를 루이
바라 에게는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양반댁 마님은 아니고 평민 들이지요?
당시 여자들이 결호생활에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소박 을 맞고 쫃겨나는 것이었는데,
소박의 원인 으로 가장 큰게 조상의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낼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니.... 아들을 낳은 여자들은 비로소 안도 하고 동네방네 자랑할만 했던가 봅니다?
조선 여자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풍조가 만연해서일까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화가
로 불리는 이인성 은 1934년 선전에서 특선을 한 "가을 어느 날" 은
짙푸른 하늘 아래 해바라기, 옥수수 등 식물이 서있고 전면에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 과 상고머리 소녀가........ 다소곳이 서 있는 그림 입니다.
사진을 찍은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루이 바라 는 1888년 부터 다음해까지 서울
에서 부산까지 조선을 종단 했는데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대원군과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 민비의 권력 싸움이 있던 우리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서 샤를은 민속학적인 관점에서 조선기행 이라는 책 을 남겼습니다.
"왠지 조선은 머지않아 이웃나라를 따라잡게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역사적으로 자신
들이 가르쳐 왔던 일본인들 에게 산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뒤져있지만 윤리적인
우월함 덕분에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그들을 따라 잡고 결국엔 저만치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인 우월함” 이란..... 노인에 대한 공경심 과 가족애 를 보고 한 말인데 프랑스인들이
좁은 논둑길에서 노인을 만났는데 일행으로 앞서가던 군인이 노인에게 길을 비키기
위해 물이 있는 도랑속으로 내려서는 것을 보고 저자도 응겁결에 말을 길 옆 물이
있는 도랑으로 몰았으니 "조선은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 이 강했던 사회인게 인상적이라?
"조선인 특유의 가족제도와 강한 연대성, 그로 인한 끈질긴 노동력 과 지난 몇년 동안
이룩한 놀랄 만한 발전상을 감안하면 나의 이런 생각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리라. 저 가도에 늘어선 전봇대들이 말해 주듯 문명의 연결선 들이 조선
이라는 나라의 땅덩어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갈 그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은 것이다."
샤를 은 삼촌이 이웃으로 부터 손가락질 받지않기 위해서 고아가 된 조카를 결혼시키고
집과 가구를 장만해 주는 사실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서양의 화성 음악에
익숙했던 저자는 조선의 단선율 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 관현악(판소리) 에
관해 악평 을 하지만 대구 관찰사가 정중하게 접대해준 것에서 감사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자연경관이 아름아웠던지 알프스 와 비교하기도 하고 특히 청명한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글 이 몇차례 나오며.... 특히 정월 돼지날
(亥日) 에 세번에 걸쳐 담근다는 조선의 술 삼해주(三亥酒) 를 맛보고는
중국 일본 술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프랑스에 술을 가져가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샤를보다 6년 늦은 1894년에 세계일주 여행중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비숍여사 는
남한강을 따라 충주 단양 과 북한강변을 따라 금강산 을 여행했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지폐나 금화, 은화 가 없었던 조선에서 돈을 가지고 다니는게 힘들었다는데.... 당시
상평통보는 돈 가치 가 없었으니 경비로 바꾸자 엽전이 한가마니 니 어떻게 다닐 것인가?
비숍여사는 나룻배 를 한척 빌린후 하인 을 여려명 고용하는데 엽전 한가마니를 나룻배 에
부은후 그 위에 가마니를 깔고 사람이 앉아서는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배에다
밧줄 10개 를 연결해 마을에서 스무명 정도 일꾼 을 사서 강변을 따라 일꾼들이 배를
끌면서 단양까지 올라가는데 숙박하면 먼저번 일꾼은 돌려 보내고 새로 일꾼을 고용 합니다.
금강산 을 갈때는 통역과 밥과 빨래며 노새를 몰고갈 하인을 여러명 고용하는데, 여사가 탈
노새, 돈 가마니를 실을 노새, 여사의 옷과 휴대품을 실을 노새, 솥이며 그릇을 실을
노새, 쌀이며 부식을 실을 노새등 6마리 를 빌리는데 마을에 묵으면 노랑머리가
신기하니...... 동네 여자들 이 몰려드는데,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방에 까지 들어와서는....
비숍여사의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을 만져보고 옷 상자를 열어 꺼내 보는지라 쫓아내고 문을
잠그면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밤새 들여다 보는데, 몽둥이 로도 안되니 육혈포 를
쏘아 쫓아야 잠을 잘수 있었다는데... 강원도 관아에는 수령은 서울 다니러 가버리고
아전들만 남아 하루종일 투전판을 벌이니 아침저녁 북 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나요?
1776년 3월 영조가 죽고 정조 가 왕위를 이었는데 집권당인 노론 벽파 는 새 왕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해 뜻을 관철시킨 집단이라 두려움에 왕을 죽일 계획을
세우니 이듬해 자객 전흥문과 강용휘 는 궁궐 앞 보신탕집에서 개 한마리 를 잡아먹고
경희궁 으로 잠입했는데 건물 아래 암살단 50명은 궁궐 경비대 에 걸려 죽고 둘은 잡힙니다.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의 아들 홍상범 이 사주한 일인데 가담한 이유를 전흥문은 말하기를
"강용휘가 돈 1500문과 여자 노비를 주며 일하자고 요구했기에 승낙을 했다."
(1777년 정조실록 1년 8월 11일) 왕을 암살하는 청부 살인 대가가 1500문(푼) 15냥
이니 당시 노비 한명 가격이 다섯냥 이라... 그럼 노비 4명 값이면 살수 를 구할수 있었네요?
비숍 여사는 가치없는 살평통보 엽전 때문에 가지고 다니느라 고생했다지만... 이건
약과 이니 10년이 지난 1904년 5월 러일전쟁 취재차 미국 사진기자 로버트 던
(Dunn) 이 조선에 왔으니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 (Collier's) 소속으로 한양에서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구리타 (Kurita) 라는 일본인 안내인에게 환전 을 부탁합니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 는 구리타 말에 미화 150달러 를 건넸는데, 150달러는 2018년 현재
4,050달러로 한화로는 440만원 정도(미연방준비은행 소비자물가 통계) 인데 석양
무렵 묵고 있던 호텔 사동이 던에게 뛰어왔다. 큰일 났다, 구리타가 돈을 들수가 없다고???
*** 미화 150달러 , 현재 가치 4,050달러, 한화 440만원 정도 가치의 상평통보 ***
1904년 6월 4일 미국 주간지‘콜리어스’ 에 실린 사진이니 러일전쟁 종군기자 로버트 던
이 서울에서 150달러를 바꾸고 받은 산더미 같은 엽전 이 신기하다며 보낸 사진이니
이 사진 한 장에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경제 상황 이 다 담겨 있는데, 엽전이라 부르는
상평통보 1개는 1문, 한푼으로 사진에 나오는 돈이 모두 얼마인지 세어볼 엄두를 냈을까?
"1개 부대가 있어야 운반할 수 있는 돈이었다. 돈 몇줄을 들고 2주 취재를 마치고 왔다.
그 사이 장정 스무명이 밤낮으로 내 재산을 지켰다. 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일당 을 지급하고 나니 돈더미가 눈녹듯이 사라졌다." 열다섯 냥이면 청부 살인까지
할수 있던 조선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조선 경제가 완전히 망해버린 것입니다?
푸른 바다 부두에는 배가 한척 정박해 있는데 그 모습이 특이한게 앞면에 반원형 으로
창이 유난히도 많이 달려 있으니... 그럼 저것도 일종의 유람선 인가요?
우리 앞에 여자가 두명이 나란히 서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곱슬 머리
머리카락 때문인지...... 사람의 형상 이 참으로 특이하게 보입니다!
인공 연못에 분수 가 터져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대성당쪽으로 걸음을 옮겨 정문에
이르니 아작도 문은 굳게 닫힌지라 정면 파사드와 문의 조각 들을 찬찬히 구경합니다.
그리고 한 모퉁이를 돌아가니 이런 뜬금없이 왠 옛날 대포람? 아마도 대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알무다이나 궁전 Palacio Real Almudaina 때문 일테지요?
그러고는 대성당으로 찾아 갔더니 아직도 문을 열지 않은지라..... 성당을 한바퀴
돌면서 뒷골목을 구경 하는데 유럽의 대성당들은 마치 견고한
철옹성 요새 를 방불케 하니 성당 문만 닫으면 들어갈 방법 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는 대성당 주변 에 이리저리 얽힌 예쁜 작은 골목 들을 둘러보는데.....
이 도시 팔마 거리 는 개방적이고 밝은 분위기 로 여행자들이 미로처럼 뒤얽혀
있는 좁은 거리로 이루어진 구시가지의 매력 에 몰입 하게 된다고 합니다.
첫댓글 사진이 배꼽이 나오네요 ㅋㅋ
아? 사진이 안보이는군요?
방금 다시 복구했습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가라치코 넵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아.... 보이시나요?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