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를 다룬 다양한 예술 콘텐트가 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소재로 한 콘텐트는 많지 않다. 다만 현대음악 작품들 중에는 일본인들을 희생자로 표현한 경우가 있다.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주기적으로 독일 때리기를 반복하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여러 권부에 포진해 있는 유대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미국 문화산업의 실력자들도 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문화 콘텐트로 표현한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 등지에서도 독일군의 만행을 소재로 다양한 문화 콘텐트가 만들어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나라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이며 핵무장한 강대국들이다. 게다가 구매력도 있다. 이들 나라에서 제작된 영화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은 독일 군대가 자행한 잔혹한 민간인 학살, 특히 유대인 학살을 다룸으로써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무관했던 나라들의 국민마저 울게 하거나 분노하게 만든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피아니스트]의 제작에는 독일도 참여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메인 테마는 특히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로 잘 알려져 있다.
클래식 음악계 역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만행을 표현하는 데 예외가 아니었다. 현대음악을 개시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유대인이었는데, 1933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작곡한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살육을 강렬한 소음으로 표현했다.
[모세와 아론], [콜 니드라이] 등 쇤베르크의 작품들은 당당한 유대인 고백으로, 그 이전까지 유대인임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던 이 작곡가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문제 제기이자 자기 위로이기도 하다.
쇤베르크의 손자 랜돌(E. Randol Schoenberg, 1966~)은 미국 변호사로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반환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클림트는 자신의 유대인 후원자 아델레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의 상속자였던 그녀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이 그림을 비롯한 재산 대부분을 나치 독일이 장악한 오스트리아 정부에 빼앗기고는 미국으로 간신히 도망쳤다.
1998년 노년의 알트만은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숙모를 그린 이 그림을 돌려달라는 반환소송을 계획했고, 쇤베르크에게 맡겨 2006년에 승소했다. 소송 대상은 오스트리아 정부다. 이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우먼인 골드]다.
격렬하고 기괴한 소음으로 전쟁 표현
▎영화 [피아니스트] 포스터.
1976년, 폴란드의 현대작곡가 고레츠키는 [교향곡 3번]에서 공감의 미학을 표현했다. 성악이 들어간 이 교향곡은 참담하고 절절한 내용을 노래한 선율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끌려가기 직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유대인 소녀가 벽에 쓴 낙서가 포함되어 있다. ‘슬픔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교향곡은 고전음악으로서는(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음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꽤 많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는 현악4중주곡 [서로 다른 기차](Different Trains, 1988)로 전쟁을 표현했다. 2차 대전 중에 라이히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기차를 탄 적이 있다. 유대인인 그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만일 자기가 유럽에 있었다면 홀로코스트 기차를 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강렬하면서 섬뜩한 이 작품을 작곡하게 만들었다.
라이히는 현악기들만의 단순한 리듬과 단순한 음악적 동기를 계속 반복하는데, 여기에 사이렌 소리를 포함한 전자적 소음들을 곁들여 불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음악은 마치 좀비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듯한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려는 의도는 독일 작곡가들을 비켜가지 않았다. 우도 치머만은 나치 치하에서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당한 대학생들을 그린 오페라 [백장미](Weiss Rose, 1967)를 작곡했다. 홀로코스트 및 반(反)나치 음악은 이 외에도 꽤 있다.
독일의 만행이 이렇듯 끊임없이,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고발되고 표현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의 만행은 상대적으로 덜 고발되며 덜 표현되는 것 같다. 일본이 만행을 저지르지 않아서 그런가? 어쩌다 제작된 영화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영화 관련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지도 못했다.
천만 관객이 찾았던 영화 [암살]은 사실에 기초한 측면이 약한 데다가 일본을 응징한다는 이야기를 다루어서 그런지 일본 국민의 반성을 유도하지는 못했다. 영화 [밀정]도 한국에서만 인기를 끌었을 뿐, 국제적 파장을 불러오지 못했다.
일본의 전쟁과 관련한 현대음악은 좀 있다. 러시아인으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피해 파리로 망명 왔던 스트라빈스키는 이후 미국으로 다시 한번 거처를 옮겼다. 1942년 뉴욕의 필하모닉 심포니 협회로부터 작곡을 의뢰받아 1946년에 완성한 [3악장의 교향곡]에는 직접 ‘전쟁 교향곡’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 곡은 2차 대전 중 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화를 표현했다. 1악장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행한 초토화 작전을 표현했고, 3악장에서는 독일군의 행진과 연합군의 승리를 표현했다. 이 교향곡의 1악장이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최초의 고전음악 혹은 현대음악상의 기록이다. 이 유대인 작곡가는 1악장을 작곡하기 위해 일본을 다루었던 다큐멘터리를 참조했다.
스트라빈스키 이후 서구 작곡가들은 전쟁을 일으켰고 양민을 학살했던 전범국 일본보다는 원자폭탄의 희생자 일본인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 대표적인 경우가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다. 1959년 작곡한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Threnody to the victims of Hiroshima)는 현악기들만으로 연주되는데, 격렬하고 기괴한 소음은 유례가 없을 정도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예술적 현대음악에는 이미 수많은 실험과 혁신이 있었지만, 이 곡의 자극적 음향은 특히 주목할 만했다. 현악기들은 화음이나 선율이 아닌 고밀도의 음 덩어리(Cluster)를 형성하는데, 이 음 덩어리는 음의 높낮이라는 연속적 공간 속에서 자유로이 낙하하거나 상승한다. 이 음악 이후 음덩어리를 이용한 작법이 한동안 유행했다. [히로시마의 애가]는 고통과 공포, 충격 속의 슬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펜데레츠키는 이 곡으로 단번에 극도로 전위적인 현대음악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름의 대중적 성공도 누렸다. 그런데 이 작품보다 먼저 쓴 작품이 있었다. 1958년, 구소련의 작곡가 슈니트케는 오라토리오 [나가사키]를 작곡했다. 당시 25살 학생이었던 슈니트케는 모스크바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이 곡을 작곡했는데, [히로시마의 애가]와 달리 이 곡은 대중적 성공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작곡가가 살아있을 때 연주조차 되지 못했다.
2006년, 작곡가 사후 8년에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입법 수도 케이프타운에서 연주됐다. [나가사키]는 구소련의 정부 검열 과정에서 ‘형식주의적(formalistic)’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원자폭탄이 터지는 과정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음악은 강렬하기보다 침착하고 초연한 느낌을 준다. 1958년이었다면, 피폭된 나가사키 사람들의 항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모던한 작품이었다.
그 밖에 캐나다의 머레이 샤퍼(Murray Shafer, 1933~)가 작곡한 [애가](Threnody)와 프랑스 작곡가 장 클로드 리세의 컴퓨터 음악 [리틀 보이](Little Boy) 등이 일본과 ‘관련한’ 현대음악들이다. ‘Little Boy’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이름이다. [리틀 보이]는 이 폭탄을 투하했던 미국인 비행사의 죄책감과 악몽을 표현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이글거리는 화염, 초토화된 두 도시, 수십만에 이르는 사상자. 이것은 분명 참상이자 재앙이었다. 사상자 일본인들의 고통에 인류는 같이 아파해야 한다. 동시에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국, 민간인에게 가한 일본군의 범죄 역시 제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작곡가들이 동아시아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음악도 작곡해야 균형이 서지 않을까.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