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집을 떠나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고서 기차는 달려 달려 대구에 도착 햇다
대구에 아는 사람도 있지 않고 그러니 우선 의식주는 해결해야 되지않을 까요
그리하여 처음으로 직장이라고 들어가서 배운 일은 빠우 하는 일이 였는데요
그것 말고는 할수있는 일이 없다보니 수소문 해서 찾아간 꽃은 대구 원대공단에 있는
000공업사 지금은 이름도 기역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또 대전으로 대전에서 이번에는 서울로 사람은 나서 서울로 가고
말은 나서 제주도로 보내란 엣말 그말따라 서울로 올라 왔지요
그시절 서울 외곽 구리시 교문리에 저의 큰집이 있어서
큰집에서 서울 용산 원효로 에 도금 공장에 출퇴근을 하엿네요
출근 때에 55번 뻐스 교문리에서~~봉천동가는 시내뻐쓰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는중에 아침에 출근을 하고 보니
직원이 열명정도 되는 회사였는데 어~~회사가 보이 질 않습니다
간밤에 불이 나서 풀석 주저 않았네요
그때 저의 나이가 20세 전후 였나봐요
돈을 벌어서 어찌해볼려고 집을 뒤처 나왔지많 세상을 그렇케 만만한게 아니였습니다
월급이 나오면 얼마를 저축을 해서 4~~~5년 모아서 서울 면목동 빈공터를 임대를 내서
모터2대 를 사서 작없을 할수 있는 터를 마련하고 사람도 두명정도 마련하여 내일을 하기 시작햇네요
모든 정승을 다하였지만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고생만 죽도록하고 결국 가내공업인 공장을 처분을 하고서 그시절 싸우디 바람이 불어서 나도
저기 가면 되겟다하는 마음으로 누구 아는 이의 소개로 남광토건 싸우디 현장으로
노동자로 출국을 하엿습니다
내나라를 떠나보니 내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해가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총에 맞아서 서거하던 때에 온나라가 어수선하엿지요
그일이있고 보름도 되지 않은 사항에서 출국을 하엿어니까요
제가 출국하는 날이 11월 11일쯤이엿는데
여기서 잠깐 저의 집을 소개를 하면요
엣날에는 마누라 두고 두집 세집 살림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햇지요
저의 집이 그랫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본 마누라고요
둘쩨 세쩨 까지 있는 아버지 그러나 능력이 모지라 씨만 뿌려 낮지
그런 살림을 세 마누라와 같이 경남 거창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같읍니다
부산 가야동 산동내 방두칸짜리 셋방을 었어서요
3번마누라 이제 막 동생을 나아서 백일 도 채 되지않은 데 그곳에다
물을 풀어다노니 우리 어머니는 그날로 집은 나같어요
아마 이모님 집에 간거 같았네요
이모님 집이 부산 동구 범천동에 있었거던요
어머니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이 형제가 삼형제인데 다나이들이 있어서
얼마던지 아부지 없어도 엄마만 정신을 차리면 얼마던지 오려움 없이 살수가
있엇지만 저의 어머니는 정말 착하고 사람이 좋은 사람(1%모지라는사람)
그러니 저들 삼형제는 여기 저기 바람처럼 흘러가는 부평초가 되었네요
저는 물건 치급 둘째 마누라에 가서 살림에 도움 되라고 숙식을 하며 공장에 다니고
월급이 나오면 같다 바치는 오로지 자식들 가르치고 먹이는 일은 남의 일이 되버렷읍니다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돈 벌어오는 기계 치급 빡에는
그러니 집에 정이 들겟습니까
집을 무작정 튀처나오고 말았습니다
12월16일 씀 0상호
첫댓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