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낮게 뜬 구름을 품은 바다 위로 기분 좋은 훈풍이 불고 있었다.
쾌청한 날씨 속에 하얀 배 한 척은 V자 궤적을 그리며 목적지로 항해하고 있다.
선내 확성기를 타고 나온 묵직한 목소리가 갑판을 타고 물살까지 울린다.
" 훅, 훅. 마이크 테스트. 선내에 알립니다. 본 병원선 현재 위치 매야도 남방 3마일~
추서도 도착 예정시간 1시간 전입니다. 각 부서 양지하세요. 오늘은 물때가 안 맞아서 선착장에
배를 직접 댈 순 없고, 보트 내려서 들어갈 겁니다. 갑판장은 조타실에 좀 올라오시고- 이상입니다. "
군청 소속의 병원선은 선장 이하 의료팀과 운항팀으로 이루어진 승무원들을 태우고
한 달을 주기로 군청 관할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며 섬사람들의 보건과 위생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오늘의 첫 진료지는 추서도. 마을어업을 하며 한때 번성했지만 도시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에
현재는 위상이 예전만 못한 평범한 낙도(落島)였다.
추서도 도착이 가까워졌다는 방송에 맞춰 병원선 수석 간호사인 유진은 조타실로 올라가고 있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요동을 즐기듯 리듬에 맞춰 사뿐사뿐, 선상 생활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출장 진료를 위한 준비도 하고, 섬에 들어갈 보트 팀도 구성하고, 기분좋게 커피도 한 잔씩 돌릴 참으로.
" 수고하십니다~! 추서도 벌써 다 와가네요, 추서도 어르신들 파스 엄청 좋아하시는데-
무슨 만병통치약인 줄 아시더라구요. 통원치료를 하셔야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맘이 좀 그래요. "
" 오, 우리 수간호사 유진 씨. 뭐하러 올라와? 의료팀 일도 바쁠거면서. "
" 아이, 벌써 다 해놨죠. 이제 다들 일이 손에 익어서… "
" 이야. 우리 의료팀 잘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갈수록 잘 하면 어떡해? 덕분에 일할 맛은 나네. "
" 커피 한 잔 타볼까요? 어떠세요? "
" 오! 완전 좋지. 일항사요, 우리 유진 씨가 커피 한 잔 타주신다는데- 생각 있어요? "
" 아우, 그럼요. 너무 좋죠. "
밥 먹을 때도, 일할 때도 늘 좁은 배 위의 공간을 나눠써야하는 병원선 일은 바쁜데다 힘들기까지 했지만
사람 사이의 감정싸움에 얼굴 붉힐 일이 없으니 모두가 내색없이 웃으며 근무할 수 있었다.
누구는 침이라도 뱉은 뒤 내어준다는 커피 한 잔이지만 유진은 귀찮은 마음 하나없이 정성을 기울였다.
" 선장님, 15분 전 방송 슬슬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 커피 한 잔 하고 방송하지. 굳이 일찍 안 해도 미리 준비는 다 해놨을거야. "
항해사들끼리의 잡담 뒤에 달그락거리는 잔 소리가 섞였다.
선원들을 위해 정성껏 타온 여러 잔의 커피가 쟁반 위에서 내는 소리.
배가 좌로, 우로 천천히 흔들릴 때마다 커피 잔도 이리 달각, 저리 달각대고 있었다.
2.
책상에 놓인 쟁반 위에 잔이 여럿 올라와있고, 마지막으로 선장의 커피잔이 놓였다.
" 유진 씨, 잘 마셨어! "
" 감사해요. "
선장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문 채 조타실 왼쪽으로 나와 솔솔 부는 바람을 마주했다.
" 에구. 생각보다 바람이 부네. 담뱃불아, 붙어라- 참, 근데 유진 씨! "
쟁반을 들고 내려가려던 유진은 조타실 너머 들려오는 선장의 부름에 열린 조타실 왼쪽 문으로 나왔다.
" 네- 선장님. "
" 유진 씨 고향이 매야도라고 그랬지? 지금 저 뒤에 지나가고 있잖아. "
" 네, 매야도 맞아요. "
" 거기 지금도 사람이 살던가? 사람 소식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
"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
" 희한하네- 유진 씨 어릴 때 매야도 분교 다녔을 것 같은데. 맞아? "
" 아시네요, 분교 있었어요. 매야도 살 땐 다녔죠. "
" 학교까지 있던 섬이 어쩌다가 무인도가 된걸까? 딴 섬이면 모를까… 꽤 큰 섬이었는데. "
" … "
해꽃이 때문이에요.
말을 할까 잠시 머뭇거리다 유진은 이내 마음 속으로 집어삼켰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매야도에 살던 사람이 아니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이 이야기를 이해시키려 누군가에게 열변을 토할수록 멀어져가는 마음을 바라보던 기억만 다시금 떠올랐다.
죽을 때까지 마음에 담고 가야할 매야도의 숨은 이야기.
' 해꽃이… '
유진은 선장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천천히 멀어져가는 매야도를 바라봤다.
악몽처럼 남아있는 기억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평온해보여 더욱 유진의 마음을 흔들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꿈틀대고 있었다.
저주스러운 그 눈동자가 다시금 유진의 눈꺼풀 위로 비비적대고 있었다.
3.
" 딱 한 점만 묵으봐라 안 카나, 아 어데 나쁜긴가 싶어가 그라요? 공짜배기로 준다캐도? "
동네 할매들이 또 우리 집에 와서 우리 할매한테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 아이, 낸 회를 못 묵는다캐도 자꾸 그래샀노? 안 묵는다 안 카나! "
할매는 매야도 토박이였지만 섬사람답지 않게 생선회를 꺼렸다.
먹지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즐기진 않으셨다. 이번엔 아예 입에도 대기 싫은 모양인지 못 먹는다는 말까지 둘러대셨다.
" 우찌 그렇노? 이거 봐라, 요래 한 점 묵으면 되는기지, 그기 그리 어렵나? "
꼬올딱! 매끈히 식도를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회 한 점을 삼킨 동네 할매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햐아아, 오- 온다! "
또 시작이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에 질 세라 다른 할매들도 게걸스레 회를 주워먹곤 먼저 먹은 할매처럼 몸을 약간 부르르 떨었다.
" 직인다, 참말로 직인다- "
할매들의 눈동자가 흐리멍덩해졌다. 이따금씩 검은자가 서로 마주 보기도 했다.
정상적인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과 비슷하다곤 생각했지만,
그땐 '환각'이란 단어를 몰랐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떠올리길, 그때 할매들은 '환각'에 빠져있었다.
" 듭다아아, 와 이리 덥노 "
동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남의 집 마당에 웃옷 아래옷 속옷까지 훌러덩 벗어버리곤
젖 달라는 아기처럼 손을 삐죽 앞으로 내민 채 알몸이 된 할매들이 줄줄이 해안가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 봐-아라, 이리 좋은 거를 와 안 묵어- 와 안 묵냐고- "
할매들이 그 지경이 되면서까지 칭찬하는 회 한 줌이 접시에 담긴 채 놓여있었다.
우리 할매는 환각에 취한 할매들이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접시를 들어 담장 너머로 던져버렸다.
" 어데 정신 나간 년처럼 흉보일라고 이걸 묵노? 남들 욕하그로! 유진이 니는 함부로 먹지 마라. "
" 지는 안 먹어예. "
" 니 이게 뭔지나 아나? "
" 해꽃이. "
" 우째 알긴 아네. 먹는 거 아이다. 알긋제. "
누구는 '해꼬시'라고도 했고, '해꽃이'라거나, '해깔'이라고도 불렀다.
저마다 부르는 이름은 조금씩 달랐던 그 생물은 겉보기엔 해삼과 비슷했다.
다만 해삼과 틀린 점은 눈깔이 붙어있단 것. 덕분에 머리와 꼬리가 제대로 구분이 된다는 점.
꼭 사람 눈알만한 눈깔이 머리에 덩그러니 달린데다 얼마나 눈알을 정신없이 굴려대는지,
해안가에 물이 빠지며 잠겨있던 바위가 드러나면 바위에 온통 눈알이 다닥다닥 달린 채
저마다 사방팔방을 뱅글거리며 쏘아보는 게 몹시 흉물스러웠다.
다른 섬과 어업권 문제로 다퉈 사이가 소원한 탓에 서로 왕래가 뚝 끊긴 데다
섬 주위에 암초가 여럿이라 매야도 뱃사람들이 아니면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해안으로 들어올 일도
없었기에 매야도의 '해꽃이'는 오로지 매야도만의 생물이었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바위에 붙어있기 시작한 눈알 달린 기괴한 바다 생물을 먹기 시작한 건
겨우 한 달 남짓으로, 그간 사람 눈깔을 하고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니 입맛이 돌지 않아 아무도 먹질
않다가, 막상 썰어놓으니 해삼 비슷하다며 시험 삼아 누군가 먹어본 것을 시작으로 결국은 물질하는 할매들
사이에 특히 해꽃이 회가 유행처럼 퍼져있었다.
할배들은 배 나가거나 바깥일 하러 나가고, 할매들은 집에 있는 할매가 아니면 거진 잠수해서
해삼, 전복, 소라 같은 걸 따는 물질을 했는데 그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란 말인가.
숨을 참은 채 물살을 견디며 기력을 온통 빼고나서 참 먹을 적에 자양강장제 삼아 해삼 하나씩 썰어먹던 것이
그렇게 어느 날의 시도 이후로 해꽃이로 바뀐 것이다.
해꽃이라는 생물은 생김새 자체도 기괴했지만 먹고 난 뒤의 신체 반응도 기괴했다.
사람이 꼭 해꽃이라도 된 것처럼 눈깔을 바로 못 보고 뱅글뱅글 돌리면서, 발음이 어눌해졌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옷을 발가벗은 채 꼭 해안으로 다가가 드러눕게 되는데,
아마 해꽃이를 먹으면 몸에서 참을 수 없을만큼 열기가 돋는 모양이었다.
그 열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열을 내보내기 위해 옷을 벗고 땀을 흘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할매들이 물질하다 말고, 혹은 멀쩡히 마을에 모여있다가도 해꽃이 하나만 썰어 먹으면
해안에 온통 발가벗은 채 다닥다닥 붙어서 뒹굴거리는데, 텔레비전에 나오던 바다코끼리떼처럼 느껴졌다.
정말 짐승떼라도 되는 듯이 '우우~' 하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광경을 보노라면
같은 사람이라는 것조차 이상해지면서 기분이 나쁜 쪽으로 묘해졌다.
4.
" 학교 가나~ "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해안에 발가벗은 채 뒹굴며 아픈 개처럼 끙끙대던 동네 할매가
그렇게 멀쩡해지니 꼭 그 모습이 비정상이고, 해꽃이에 취해있는 모습이 정상인 듯 여겨졌다.
" 예에. "
" 그래, 공부는 안 힘들고-? "
" 예? 헤헤- 네, 재밌어예. "
" 와 안 힘들어, 힘들지. 할매 다 안다. 잠깐만 기다리라. 줄 기 있어가 그란다. "
동네 할매가 준다는 게 뭔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 자아- 유진아, 하나 묵어봐라! 해삼도 아닌기, 해삼이 아니라 산삼보다 더 좋다카이! "
할매가 들고 나온 건 잘린 채 끈적거리는 액을 뚝뚝 흘리는 해꽃이 반 토막이었다.
이미 죽어서 운동을 멈춘 눈깔과 내 눈이 코 앞에서 마주쳤다.
" 할매, 저 이거 안 먹어요. "
" 와 안 묵어, 어른이 주시면 묵는기다! "
할매가 이상했다. 해꽃이를 먹은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되는 건가,
집요할 정도로 남에게도 먹이려 들었다.
" 저 학교 가야해요! 안녕히 계세요! "
할매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어린 나였기에 기운이 쌩쌩해서 그런 상황이 오면 재빨리 피할 수 있었다.
5.
" 자, 모두 도시락 뚜껑 열어볼까? "
선생님의 말씀에 모두 조심스레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형형색색의 반찬 속에 흐물거리는 무언가가 드문드문 보였다.
" 눈 달린 해삼이 들어있다, 손 들어볼까? "
해꽃이가 들어있는 도시락을 가져온 아이들이 울상이 되어 손을 들었다.
그나마 배불리 먹기도 힘든 와중에 도시락 한 켠을 해꽃이가 차지한 탓이다.
" 눈 달린 해삼이랑 닿은 반찬은 절대 먹지 말도록 하고. 혹시 할머니가 집에서 해삼을 드셨다, 손 들어보자. "
해꽃이 도시락의 주인들 대부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 부끄러운 게 아니야. 좀 더 번쩍 들어봐. "
고사리 같은 주먹 몇 개가 숨어있다 슬그머니 들어올려졌다.
" 선생님도 이웃에 해삼을 드신 분이 계셔서 하는 말이야. 너희도 대충은 알지?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주신다고 해도
절대로 먹으면 안 돼. "
전교생이 모여있는 교실, 그 와중에 반을 넘는 인원이 풀 죽은 표정을 한 채 손을 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젓가락을 들고 일일이 도시락 속의 해꽃이를 골라주고 계셨다.
먹어야 한다는 어른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어른들 아래 매야도 학생들은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해꽃이를 먹지 말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있는 터라
온전한 반찬이 담긴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해꽃이 도시락을 가져온 아이들의 눈치 속에 젓가락을 들고 깨작깨작대며,
그 날의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6.
" 학교 다녀왔습니다… "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낯선 인기척이 마당에 가득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어안이 벙벙한 채 집 마루를 살피니 동네 할매들이 다 옷을 벗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할매 어디 계시지, 혼자 계셨을텐데, 우리 할매…!
할매를 찾아 내 눈이 해꽃이라도 된 듯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찾았다, 우리 할매가 해꽃이 할매들 사이에 양팔이 붙들린 채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대고 있었다.
" 쳐묵으모 좋아가 웃음이 헤실헤실 나온다는데 와 안 묵어? 우-후후- "
" 맥여라, 고마 맥이뿌라- "
어눌한 말소리들과 함께 누군가의 손이 할매의 입을 억지로 틀어 벌렸다.
" 이이익, 안 뭉응다, 안 뭉응다고, 케겍! "
안 먹으려고 반항하는 할매의 입 속으로 다른 손이 해꽃이를 들이밀었다.
우저적, 으적, 으적,
수많은 손이 할매를 붙잡고, 입을 벌리고, 턱을 억지로 움직여대며 해꽃이를 씹어삼키게 만들었다.
할매는 끝까지 반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럿을 이기기엔 힘없는 아낙일 뿐이었다.
할매를 구하고자 책가방을 내던진 채 필사적으로 할매들 사이를 뚫으려 했지만
국민학생인 내 완력으론 해꽃이 할매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조차 무리였다.
들어간다 한들 저 수많은 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들어가긴커녕 오히려 할매들 사이에 끼여버린 채 우리 할매를 쳐다보는 내 눈과,
결국 해꽃이를 억지로 삼켜버린 우리 할매의 눈이 마주쳤다.
할매의 눈빛에 순간 슬픔이 스치더니 이내 통제를 잃고 흐트러졌다.
" 오올치… 유진이 할매 온다, 온다… "
할매들의 중얼거림이 지나고, 우리 할매가 귀찮다는 듯 옷을 훌렁훌렁 벗어 마당에 이리저리 집어던졌다.
그리곤 모든 할매들이 해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글우글, 바글바글…
그 뒤를 쫓아 '할매! 할매!' 외치며 우리 할매를 구하고자 달려가려는데 커다란 손이 날 꽉 붙잡았다.
설마 해꽃이를 먹이려는 손인가 싶어 오금이 저려왔지만 손의 주인은 할매가 아니라 이장님이었다.
" 함부로 따라갈 생각 하지 말그라! 니도 저래 된다! "
" 이장님, 놔주세요, 우리 할매 찾아야 해요, 데리고 올 거에요… "
" 아직까진 괜찮으니까 염려마라. 한 번 묵은 걸론 안 돌아삔다. 제정신 찾아서 집에 돌아오면
문 꼭 걸어 잠궈라. 유진아, 우리 섬이 망할 건 갑다… 사람이 짐승 노릇을 하고 있으니… "
" 이장님, 어떡해요, 우리 할매 어떡해요…? "
" 죽은 것도 아닌데 울 거 없다. 아직까진 사람 구실할끼다. 대신 너거 할매 다신 저기 보내지 마라.
그래도 지금 따라가는 건 안 된다. 니 저거 따라갔다가 쪽수에 밀리면 니도 저 꼬라지 되는기라.
저 우라질 년들이라야 곧 세상 뜰 거니까 저런 꼴 보여도 되지만 니는 학생이고 어린 아가 아이가.
니들만큼은 저렇게 되선 안 된다. 알긋나. "
" 이장님… "
" 괜찮다, 아가. 괜찮다- "
이장님의 품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흐느꼈다.
바깥과 지리적, 사회적으로 격리된 매야도에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몹시 무서웠다.
7.
" 유진아, 학교 가그로 일어나라~ "
다정한 할매 목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잠에 들기 전까지 얼마나 울었던지 눈곱이 잔뜩 끼어 눈을 바로 뜰 수 없었다.
" 할매…? "
눈곱을 떼기도 전에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옷을 단정히 입은 할매가 몹시 반갑고, 어제 알몸이 되어 해안가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모습이 겹쳐보이자
한편으론 두려웠다.
" 혹시 배고프면 고구매 삶아넣었으니까 묵고, 도시락도 묵고 하그라. "
가방에 고구마를 정성스레 넣어주시는 할매가 비로소 우리 할매라고 느껴지자 비로소 할매를 꼬옥 안았다.
" 할매, 다시는 그거 묵지 마세요. "
할매도 그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 하모. "
대문을 꽉꽉 눌러 닫은 채 학교로 향하려는 순간 언뜻 '유진이 할매~'하고 부르는 이웃 할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시간이 늦어 지각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가야 했다.
동네 할매 한 사람 정도야 맨정신인 우리 할매를 어찌 할 수 있으려고.
할매도 안 드신다고 했고. 그렇게 생각해버리곤 길을 나섰다.
'유진이 할매-'하고 부르는 그 소리에 우리 할매 군침이 꼴딱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8.
[ 해양기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 경남서부앞바다,서부먼바다, 동부앞바다,동부먼바다, 남해연안앞바다에 ]
[ 이 시각부로 풍랑특보가 발효되었습니다. ]
[ 기타 피해가 예상되는바 소중한 인명과 재산에 피해가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 . . ]
라디오 소리가 겨우 들릴 정도로 창밖엔 엄청난 돌풍이 불어 창문이 깨질듯 떨고 있었다.
교무실에 다녀온 선생님께서 모두에게 말했다.
" 얘들아. 오늘 학교 지금 마칠 거니까 다들 집에 가도록 하렴. 시험은 다음에 치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 바닷가 절대 가지말고. 비 그칠 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마. "
바람 소리가 무서웠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선생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싸둔 책가방을
챙겨들었다.
빨리, 빨리 가자…
9.
이럴수가,
" 할매! 할매! "
없어,
" 할매! 어디 계세요! "
미친 사람처럼 집 구석구석을 헤집었지만 할매는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마침내 마당으로 다시 달려오다 밟은 말캉거리는 물체,
화들짝 놀라 발 아래를 쳐다보니 그건 익숙한 생물…
해꽃이…
10.
" 할매! 할매! "
바람 소리가 마치 절규처럼 들려왔다, 우우우, 하늘이 울고 있었다.
강하게 부는 맞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할매를 찾아야 해, 그 마음으로 해안가까지 기억에 의지해 쉬지 않고 달렸다.
내 몸 하나를 가누는 것조차 어려웠다.
우우우- 바람 소리 속에 다른 울음소리가 섞여 있다.
간신히 눈을 뜬 채 멀찍이서 해안을 쳐다보니, 바다코끼리떼처럼 다닥다닥 할매들이 모여있다…!
할매들 근처로 높은 파도가 철썩대고 있었다.
" 할매! 할매! "
할매들을 데려가려는 듯 아귀를 벌려대는 파도 탓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들리지 않나봐, 할매를 찾아야 해, 해안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압도적인 공포ㅡ.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뭐야, 저 높은 파도는…!
해일…
" 할매! 할매! "
몸이 굳어버려 그 자리에 서서 울부짖는 게 고작이었다.
해일이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집채를 집어삼킬 만한 높이였다.
" 할매 "
할매들은 해일이 오는 줄도 모르고 발가벗은 채 해안을 뒹굴고 있었다.
" 할매! 안 돼요ㅡ! "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어린 나의 외침은 무력하기만 했다.
마침내 해일이 굉음과 함께 해안을 덮쳤다.
" 안 돼애애! "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파도가 내 발 앞까지 밀려오더니,
곧장 갈고리처럼 해안가의 모든 걸 쓸어내려 가 버렸다.
" … "
거짓말…
해안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사라졌다.
할매들도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한참 뒤에야 울음이 터져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절규하고 있었다.
11.
" 이 빌어먹을 세상! "
노모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이장님이 매야도 선박들 쓰려고 타 놓은 기름을 바다에 콸콸 뿌리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이던 매야도의 바다가 검게 젖어가기 시작했다.
" 죽어뿌라, 다 뒤져뿌라! 이 개 같은, 으흑흑- "
여기저기 붙어있던 해꽃이들이 꿈틀거리며 바위에서 떨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미처 도망가지 못 하고 기름을 뒤집어 쓴 해꽃이는 뿌직, 뿌직 토를 하며 뒤집어졌다.
해면이 기름 범벅이 되자 해꽃이들은 수면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 했다.
매야도 사람들 모두 자신의 어머니 아니면 아내, 동생, 친구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다.
마을이 송두리째 통곡의 섬이 되버렸다. 삶은 비틀렸다.
그에 분노한 사람들이 스스로 매야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흉인 해꽃이가 희생양이 되었다.
이장님처럼 기름을 바다에 뿌리거나, 일일이 터트려 죽이거나-.
자주 보이던 해꽃이가 열이면 열 모조리 매야도 사람들의 손에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할매를 눈 앞에서 잃은 뒤 무기력해져있던 나도 발밑에 굴러다니던 해꽃이 한 마리를 발로 밟아 터트렸다.
기름 범벅이던 해꽃이가 찌이익- 찍, 토를 해대며 부들거렸다.
매야도는 죽음의 섬이다.
우린 모두 이 섬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 뒤 당연히 경찰이 대규모 실종 사건 수사에 착수했지만,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건 그야말로 실종이었으니까. '해꽃이' 때문이라고 이장님이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그 많던 해꽃이가 죄다 죽어버린 탓에 '눈 달린 해삼' 이야기는 미치광이 헛소리가 되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거짓말이 아니라예'하고 맞장구치며 조사 담당관을 닦달했지만
조사관은 '어휴, 알겠습니다. 실종이네요. 실종. 이런 일은 처음인데… 뭐 조사는 더 해봐야 아는 거고,
이장님. 바다에 누가 기름을 잔뜩 버린 것 같던데요.'하며 결국은 죽은 사람들 조사가 아니라
해양오염 조사를 하더니만 이장님을 잡아가 버렸다.
그렇게 마을이 통째로 와해 되어버렸고,
유일한 혈육이던 할머니를 잃은 나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시설로 보내졌다.
할매를 보살피지 못 했던 죄책감…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간호사가 되었고,
이렇게 오늘날 병원선에 타고 있다.
할매들을 진료하고 있으면 그 날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으니까.
매야도, 그리고 해꽃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 마음 한 켠이 몹시 죄어왔다.
할매를 지키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워…
" 자, 닻도 놓았으니까 보트 내려서 출발하세요. 특이한 환자 있으면 보트에 태워서 선내 의료실로 오도록 하고,
매번 하는 거니까 입 아프게 말 안 하겠습니다. "
선내 방송이 울리자 겨우 괴로운 회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잊자, 환자 보러 가야 하는데 내가 우울해져선 안 돼.
" 유진 씨- 얼른 타세요! "
먼저 탄 이등 항해사와 의사 선생님, 막내 간호사가 나를 불러댔다.
나는 애써 힘차게 대답하며 보트에 올라탔다.
" 내립니다. "
갑판장이 크레인을 조종하자 보트가 바다에 내려졌다.
12.
" 발 조심해요. "
" 네엣. "
먼저 내린 동료들의 염려 속에, 막내 간호사가 내민 손을 잡고 선착장에 올라섰다.
이등 항해사는 능숙하게 보트를 매어두고 있었다.
오랜만에 와본 추서도의 풍경을 구경할 틈도 없이 멀리서 다급한 표정의 할아버지가 뛰어오고 있었다.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할아버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 할아버지- 뛰어오시다가 더 다쳐요, 어디가 편찮으신데요~? "
할아버지는 거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 헉헉, 지가 아픈 게 아니고예, 섬 반대편에 가보이소, 큰일났심더!
지금 해양경찰 헬기도 딴데 가있어서 요까지 오는 데 시간이 무진장 걸린다는데 이를 우짜면 좋노!
선생님들 밖에 없십니다, 빨리, 빨리 좀 가줍시더! "
" 천천히 말씀을 해보세요, 어떤 상황이에요? "
그러자 할아버지가 거의 울부짖으며 대답했다.
" 몰라예, 몰라예, 이게 뭔지 모르겠어, 할매들 여럿이 더위를 잡쉈는가
발가벗고 해안에 드러누워 있는데, 다들 사람 말귀도 못 알아묵고 눈까리가 요래 되가지고,
이상해예, 뭘 잘못 먹었는 것 같습니더, 살리주이소, 아이고, 선생님들 사람 좀 살리주이소! "
다른 선원들은 빨리 가보자며 나보다 앞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비틀거렸다.
해꽃이다…
첫댓글 헐 이게 끝이야..?
정말 공포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