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선에 고래가 산다 / 류흔
30분 넘게 잠영을 하던 고래가 숨을 쉬러 박차 오른다
힐끗, 보라매 카센터 간판을 본 것도 같은데 신대방이다
고래, 본인 입장에선 신대륙이어야 폼 날 텐데 신대방이라니 이 노선에는 신촌이 있고 신천이 있고 신림도 있지 신도림이 있고 신당이 있고 신답이 있지 마지막으로 신설동이 있는데, 그건 최근에 신설된 역일 것이다 신字 돌림 문중을 주유하는 고래여 잠실에는 누에를 뱉어놓고 사라진 고래여 들르는 족족 인어 떼를 삼켰다가 틈틈이 게워내는 고래여 너의 해적인 내가 오늘은 술이 과하구나 나는 뚝섬에나 내려서 보물을 숨길 테니 너는 또, 어느 항구를 찾아가거라
넉넉한, 오늘밤은 달이 두 개로구나 고래고래 불러보는 고래여!
― 제3회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달아실. 2021)
* 류흔 시인 1964년 경북 안동 출생. 2011년 시집 『꽃의 배후』 발간하며 작품 활동, 2011년 <시산맥> 재등단. 시집 『꽃의 배후』,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당선소감]
하루는 '시를 쓰는 시간과 시를 쓰지 않는 시간'으로 나뉩니다. 그런 하루가 하루하루 흐르더니 어느새 6년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더는 잃어버릴 것이 없을 만큼 많을 것을 잃었고, 더는 얻을 것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세속생활과 맞바꾼 시 쓰기. 대립각을 세운 둘 사이에서 '먹고사는' 문제로 기준 삼거나 섣불리 구분 지어선 안 되는 그 무엇을 저는 감히 '문학에의 추종, 혹은 맹목' 으로 정의합니다.
배울 스승이 없었으므로, 문우(文友)도 문법도 미래파도 과거파도 경향도 사조도 몰랐습니다. 서점 바닥에 주저앉아 시집을 읽거나, 구립도서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과년(過年)한 문예지들을 실어오거나, 강인한 선생님 거처하시는 <푸른 시의 방>, 마경덕 선생님 가꾸시는 <내 영혼의 깊은 곳>, 또한 고경숙 시인께서 애써 양식하시는 <사유의 전복> 등등, 이런 곳의 눈먼 시들을 슬쩍 훔쳐와 주린 배를 속여 왔습니다.
다다익선과 자급자족의 시 쓰기. 그러니까, 밥 먹고 시 쓰기. 일어나서 시 쓰기. 오줌 눌 때 시시, 하기. 방금 완성한 시를 소리 내 읽고 나서 빙그레 웃거나 쫙쫙 찢거나 마우스를 꾹 눌러 지워버리는 행태를 반복하기. "나만 좋으면 돼" 라고 중얼거리기. 전생의 나는 누에고치였었나, 스스로 가두며 쓰기. 이런 스타카토의 문체 속에 포함되기. 아, 그리고 첫 시집 내기.
첫 시집 <꽃의 배후>를 출간한 것은 의도한 기획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지만 그간 써온 시를 누군가에게 한번은 보여주고 싶어 모처에 제출했는데 덜컥 선정됐고, 창작지원금으로 시집을 내야한다는 조건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거듭거듭 후회하며 원고교정을 하고, 출간된 시집을 지인에게 전달하고, 일면식조차 없는 문인께 시집을 부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라는 반문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저는 시 쓰기를 천형으로 받아들였기에 작품 이외의 여러 문제들, 일테면 독자와의 만남, 다른 시인과의 교류, 작품발표(또는, 그 지면), 출간 같은 문제는 정말이지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집을 출간하는 문제를 일으켰으니 한 번 더 문제 일으킨들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시산맥을 엿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시 산맥이 험준하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튼튼한 자일과 촘촘한 바람막이를 입고 앞서 출발하신 분, 이미 종주의 끝자락에서 성취의 땀을 닦고 계신 분, 그리고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의 하산주를 들이켜고 계시는 풍류객까지, 막 기슭의 초입에 들어선 제가 얼마큼 잰 걸음으로 올라야 그분들을 만나 뵐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부터 떼겠습니다. 초행길인 저를 불러주신 고마운 분들께서 시산맥의 어둡고 울창한 길목마다 푸른 리본 매달아주시길 기대하오며.
- 류흔
[심사평] 가능성의 지평을 떠도는 낯선 풍경들
이 땅의 시인들은 아직도 시의 주소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더듬더듬 시의 집을 찾아간다. 그들은 때때로 황량한 들판을 헤매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캄캄한 동굴에 갇혀서 오래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은 기성이나 신인이나 조금의 편차가 있을 뿐 동일하다. 길을 오랫동안 찾아 헤매본 시인들은 길 찾기가 더 이상 새롭지 않거나 조금은 지쳐있어서 방향감각이 무뎌있는 경우가 많고, 처음으로 길을 찾아 나선 신인들은 좌충우돌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다가 아예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길마저 낭떠러지나 미로에 닿아있는 경우가 많아서 위태롭기 그지없다. 나 역시 십 수 년 전에 폐차장 근처에서 시의 길을 모색한 적이 있지만, 그 길 역시 시의 집으로 난 올바른 길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즈음에서 문득,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한 엘리어트의 말이 시의 나침반이 되어 미세한 시간의 바늘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시인의 길은 이렇듯 어차피 미로이다. 따라서 방향을 조율하거나 걸음을 빨리하고 늦추는 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몫이다. 어떤 시인은 산행을 좋아하고 어떤 시인은 바닷길이나 광야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 역시 그들의 몫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아직도 그 미로 같은 시인의 길을 함께 걷겠다고 용감하게 따라 나서는 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시산맥 쪽으로 난 시인의 길에 통참하고 싶어하는 일군 신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자 모인 곳은 인사동 영빈회관이었다. 우리는 1차 모임이 끝난 후 2차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수많은 응모작 중 예심을 거쳐서 최종심에 올라온 다섯 분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들 작품은 공통적으로 시의 길을 찾아 헤맨 흔적이 많이 보이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트라우마를 형식적 기교를 통해서 밖으로 표출하거나 서사적 삶의 안쪽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엿보였으나, 총체적으로 균형 잡힌 방향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최종심에 올라온 김혜경, 강미화, 강혜경, 정무릇, 류흔의 작품들을 여러 번 돌려 읽으면서 김혜경, 강미화, 강혜경의 작품들을 일차로 제외했다. 이들 작품은 전체적으로 작품이 고르지 않거나 소재가 지나치게 낯익어서 개성이 약하고, 시의 울림이나 맥을 짚어내는 감각의 예리함이 떨어져서 평범한 표현에 머문 감이 있고, 대상을 시인의 의식 속으로 깊이 있게 내면화하는 힘이 부족해보였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정무릇과 류흔의 작품을 재차 심도 있게 논의한 결과 현실적 삶을 시 속에 끌어들여 능청스러운 언어로 갈무리하는 솜씨가 돋보이는 정무릇의 작품들은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약간은 장황한 면도 없지 않으나 주체나 사물의 어떤 국면을 통찰력 있는 시안(詩眼)으로 예리하게 포착하여 패기있는 언어로 부조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류흔을 당선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정무릇의 작품들은 현실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무리 없이 형상화하는 솜씨가 장점이지만, 그것이 때때로 통속적인 한계를 노출하여 별로 새롭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 시인은 앞으로 구체적인 삶의 서사를 보다 응집력 있는 언어로 갈무리해서 통속성을 넘어서는 시의 지평을 확보한다면 오래지않아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제3회 시산맥 신인상 당선자로 선정된 류흔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고르고, 그동안 갈고 닦은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이 많아서 다른 응모작들과 쉽게 구별 되었다. 류흔의 작품들 중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정물」,「돌」,「나는 문외한이다」,「사진」,「2호선에 고래가 산다」 등 5편이다. 「정물」은 ‘조용한 사과 세 개’와 ‘날카로운 과도’와 ‘두 가지 정물을 깔고 앉은 쟁반’을 하나의 통합된 그림으로 스케치하는 과정을, 시 쓰기나 삶의 과정으로 비유해내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시의 문면에 시인의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는 힘이 느껴지고 그 발상법이 기성과 닮아있지 않아서 신선하다. 하지만 시인의 감정이나 사유가 지나치게 절제된 감이 없지 않아 시가 드라이하게 느껴질 위험이 있다. 이에 반해 「돌」은 사물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통찰을 구체적인 삶의 국면에 연결시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이고 언어를 다루는 솜씨도 일정 수준에 올라있으나, 그것이 후반부에서 응집력 있게 마무리 되지 못하고 쓸데없이 길어진 약점이 보인다. 「나는 문외한이다」는 시인 자신의 삶의 이면을 문외한으로 은유하고 있는 작품으로,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 일탈의 전문가였던 시적 화자의 양면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특히 사람들이 시적 화자를 바라보는 눈의 피상성을 통해 존재의 상반된 이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과 「2호선에 고래가 산다」는 앞의 작품들에 비해서 스케일이 크지 않지만 언어적으로 절제되어 있고 응집력이 있어서, 이 시인이 시의 정공법에도 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은 소품으로서의 느낌이 있지만 류흔의 일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장황함을 훌륭하게 극복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류흔의 작품을 평하자면, 기성에 물들지 않은 풋풋함이 시의 전체적인 문면에 드러나 있고, 의욕이 지나쳐서 드러나는 장황함도 신인으로서의 가능성과 패기를 담보해주는 것이어서 미덥다. 이제 가능성의 지평에 첫 발을 내디딘 만큼 앞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시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오르시기를 기대한다. 류흔 시인의 제3회 시산맥 신인상 당선을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시산맥>이 시의 집을 새롭게 찾아가는 시인들의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
- 심사위원: 박남희(글), 이영식, 이성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