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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이다. 일반적으로 중동 국가로 분류되기보다는 남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로 분류된다. 수도는 카불(다리어·파슈토어: کابل, Kabul)이며, 주요 도시로는 칸다하르(کندهار, Kandahar), 헤라트(هرات, Herat), 마자르이샤리프(مزار شریف, Mazar-i-Sharif)가 있다.
옛날부터 국기가 상당히 자주 바뀐 것으로 유명하다. 역대 아프가니스탄의 국기. 124년간 22개. 대략 6년마다 한 번씩 바뀐 꼴이다. 이 나라가 예로부터 얼마나 혼란스러운 국가였는지 알 수 있는 지표다. 영국령 때는 주로 검은색이었다. 1931년부터 1973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를 제외하면 내전기에 거의 3년마다 한번씩 국기(11개)가 바뀌었다. 돌고돌아 다시 비슷한 문양으로 돌아오는데 근 30년이나 걸렸다. 참고로 1996년부터 1997년까지의 국기는 진짜 하얀색 국기였다. 또한 이때는 탈레반 지배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후 샤하다가 들어간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국장은 채색된 형태와 흑백 형태가 존재한다. 국기상에서는 후자를 흰색 단독 형태로 변형하여 사용한다. 관련 영상 1, 관련 영상 2. 상단에는 아랍어로 쓰인 샤하다인 لَا إِلَٰهَ إِلَّا ٱللَّٰهُ مُحَمَّدٌ رَسُولُ ٱللَّٰهِ('알라 이외의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 타크비르인 اللّٰهُ أَكْبَر('알라는 위대하다.'), 떠오르는 햇빛 문양이 있다. 중간에는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키블라와 미흐라브(벽감), 이맘이 설교하는 민바르(설교대), 아프가니스탄 국기가 게양된 이슬람 성원이 있다. 그 하단에는 이란력으로 ۱۲۹۸(1298년, 서력기원의 1919년)이 표기되어 있으며, 이는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으로 독립한 시기를 의미한다. 주변부는 밀과 리본이 감싸고 있으며 리본 중앙에는 다리어·파슈토어로 افغانستان('아프가니스탄')이 표기되어 있다.
2021년 탈레반의 집권 이후 국기와 국장이 바뀌는 게 사실상 확정되었다. 이후 8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재건국 선포 및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102주년 기념과 함께 새로운 국기가 발표되었으나, 탈레반 측에서 부정했다.
힌두쿠시 산맥에 인접해 있으며, 대부분이 고산 지대이자 메마른 지역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이 동고서저 또는 북고남저이기 때문에 카불이 위치해 있는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쪽이 지대가 가장 높다. 그 중에서 누리스탄주, 바다흐샨주가 지대가 가장 높아서 해발고도 6,000~7,000m를 자랑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고산들이 죄다 이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무려 7,492m의 높이를 자랑하는 아프가니스탄 최고봉 노샤크 산 또한 바다흐샨주 안의 와칸 회랑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 반해 지대가 낮은 지역은 북부 아무다리야강 유역과 서남부 쪽의 넓은 사막지대 밖에 없다. 관련 사진.
한국군 소속으로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채수문 예비역 대령은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을 지나며 본 풍경을 말하길, '이 전쟁을 미국이 이긴다는 소리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높고 복잡한 산들만 봐도 쏙 들어간다.' 힌두쿠시라는 이름부터가 힌두교인들이 죽어간 무덤이라는 뜻인데, 괜히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며 소련도 괜히 고전한 곳이 아니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현대 미군조차 위성장치를 비롯한 장비들이 이 산과 고원 지대에 올라가면 먹통이 되는 관계로 이곳에 대대로 살던 지역민들이 없다면 들어가지도 못하는 곳이다. 이해가 안 간다면 실화 기반 영화 론 서바이버에서 주인공 일행이 전화 한방을 못 때려서 그 생고생을 하다 겨우 한명만 살아남은 것을 떠올리자. 그러니까 장갑차나 전차 등 차량은 절대로 못 들어간다. 험난한 산악길을 오로지 헬리콥터만 타고 이동해야 하는 현실이다.
기후는 주로 건조기후로 건조하고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며,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탁한 공기로 인해 호흡기 질환 등이 자주 유행하는 편이다. 해발 1,791m의 고지에 위치한 카불의 경우 1월 평균기온 -2.3℃, 7월 평균기온 23.7℃에 연강수량은 312mm이다. 겨울에는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가끔 영하 20도 이하도 기록되기도 한다. 이는 여름도 마찬가지로 평균기온은 서울보다 약간 시원하나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카불의 역대 최저기온은 -26.2°C이다.
산이 많고 나라 자체가 넓은지라 기온 편차도 꽤 큰데, 중부 산지의 차그차란(چغچران, Chaghcharan)의 경우 1월 평균기온이 -9.4℃로 모스크바(-6.5℃)보다도 더 춥고, 심지어 영하 46도가 기록된 적도 있다. 반면 서부 사막 지대에 있는 자란지(زرنج, Zaranj)의 경우 7월 평균기온은 35.0℃로 미국의 피닉스(34.9℃)와 비슷한 수준이며, 가장 높게는 영상 51℃까지 기록된 바 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록된 최고 기온은 2009년 8월 파라(فراه, Farah)에서 기록된 49.9℃이고, 최저 기온은 1964년 1월 샤흐라크(شهرک, Shahrak)에서 기록된 -52.2℃라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넓은 영토에 걸맞게 기후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이는 고도가 큰 역할을 하는데, 중북부 산악지역은 고지지중해성기후가 나타난다. Dsa, Dsb, Dsc 기후 모두 나타나며 일부 고산에서는 툰드라 기후마저 나타난다. 반면 남서부 저지대는 대부분 사막으로, 여름에는 무섭도록 기온이 치솟는다. 와칸 회랑이라고 알려진 북동부의 산악지대와 바다흐샨 주는 겨울이 매우 길고 미칠듯이 춥고, 영하 40도가 기록되기도 한다. 고도로 인해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보다 국토 평균기온이 낮은 나라이다.
저격의 명소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때 카를로스 헤스콕이 세운 세계 초장거리 저격 기록은 한동안의 긴 공백 끝에 이 나라에서 네 번이나 깨졌다. 맥밀란 Tac-50이 이 나라에서 한 전투에 두 번, 이후 또 저격 기록을 갱신 및 1위를 다시 차지했고, L115A3도 기록하는 등, 진짜 저격의 명소인가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AK-74로 무장한 소련군들을 무자헤딘전사들은 구식 리-엔필드 소총으로 800m 이상의 거리에서 저격함으로써 불리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사기를 크게 꺾어두었다. 워낙 험준한 고산 지대라 대규모 화력은 이동시키기도 어렵고 체력 안배도 쉽지 않은 곳인지라 자연히 저격수들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의 무덤이 되었다. 이에 소련은 고심 끝에 스페츠나츠 저격수를 3배나 늘리고 민간인 마을에 마구 보복하는 등 갖은 수를 썼지만 국제 여론까지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무자헤딘 측은 소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현재 저격 최장거리 기록도 저격수의 이름이 밝혀진 기록에 한해서는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들어진 기록이다. 현재 1위 기록(3,450m)은 현역 복무중인 특수부대 JTF-2 소속이라 신상이 비공개이기 때문이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에 활약한 머스킷인 제자일이 만들어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은 힌두쿠시의 높고 척박한 산들과 복잡한 지형때문에 외지인은 물론 탈레반 조차 접근하기 쉽지 않은데 특히 해발고도 6,000~7,000m의 고산들이 위치한 북동부 누리스탄주와 바다흐샨주는 탈레반은 아예 접근을 못하고 현지인들도 모르는 곳이 허다했기 때문에 특이한 일도 있었다. 예전에 미군은 정보도 지도도 없는 채로 이 근방을 헬리콥터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한 마을과 마주쳤다. 그러자 마을에선 난리가 벌어졌다고 한다. 헬리콥터가 착륙하자 총을 쏴댔는데 미군도 대응하려고 보니 총들이 그야말로 골동품인 20세기 초반에 쓰던 총이었고 살의보단 경계로 쏴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현지인 통역을 통하여 설득하고 보니 이 마을은 이방인이 온지 수십여년이 넘었으며 전기도 탈레반이 뭔지도 모르는 마을이었으니 헬리콥터도 자동차도 아예 몰랐다고 한다. 그만큼 척박한 곳이라 사람들이 먹는 것은 듣보잡 채소를 길러 먹거나 마을에 얼마 안 되는 가축을 아주 드물게 먹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통조림이나 인스턴트 음식은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오랫동안 고립되었기에 말도 꽤 다르게 변모되어서인지 통역인도 한참 대화에 고생했다고 한다. 대개 파미르인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고립된 부족들은 다행히 탈레반의 폭정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은 참상은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한다.
1919년 8월 19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970년대 말부터 내전 상태가 고착화된 세계 최빈국이자 후발 개발도상국이다. 반세기 동안 초강대국과 2번 싸우고 내전이 3번 터졌으며 정치체제가 6번 바뀔 정도로 정세가 혼란스럽다. 그에 걸맞게 국호도 반세기 동안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독특하게도 당대 최강대국이였던 영국, 소련 그리고 미국까지 아프간을 침공했다가 물러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제국의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것을 아프가니스탄이 강대국들을 상대로 당당히 승리했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들 국가들은 적어도 초기 목적이였던 기존 아프간 정권을 박살내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전쟁의 양상은 기존 아프간 정권이 먼저 해당 국가에게 밉보일 짓을 하게 된게 빌미가 되어 침략당하고 침략국들은 초창기의 목적이였던 아프간 정권을 무너뜨리는데는 성공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 구태여 총칼로 억눌러가면서까지 반드시 자기 편으로 묶어둬야 할만큼 매력적인 지역은 아니였기 때문에 결국 뒷처리를 미적지근하게 하다가 산 속에 숨어서 농성하는 게릴라들에게 질려서 철수할 뿐이지, 만약 이들 국가들이 작정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갈아엎을 생각으로 군대의 규모와 질을 정비해서 단단히 찍어눌렀다면 충분히 점령하고도 남을 상황이였다.
게다가 외세를 몰아낸게 자신의 손으로 이룩한게 아니라 그냥 여러 게릴라들 때문에 질린 공격자가 물러난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게릴라들은 자기가 외세 침략을 막아낸 영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프가니스탄의 실권을 독점하려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돌리곤 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 했다.
경제는 말그대로 총체적 난국에 와있다. UN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1인당 GDP는 668달러로 세계에서 14번째로 가난한 나라라고 하며, 심지어 북한보다도 조금 낮은 정도이다. 인간개발지수는 0.374로 끝에서 13번째로 앙골라와 에티오피아보다도 낮다. 험한 산악지대가 가득해서 개발이 힘든데다가 내전중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지만 부패가 너무 심하다보니 정부관계자들이나 토호들이 중간에 빼먹는 금액이 너무 커서 나라발전이 안 이루어진 이유도 크다. 오죽하면 아프간인들도 그간 선진국들로부터 받은 원조자금의 반이라도 제대로 쓰여졌더라도 아프가니스탄이 적어도 인도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보다는 잘사는 국가가 되었을것이라고 한탄할 정도이다.
사실 아프간은 중세에는 동서 교역으로 번영을 누리던 지역이었지만 사막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한 대항해시대로 인해 육로를 통한 동서 무역이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문맹률이 증가하고 종교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후진 지역으로 추락하였다.
물론 탈레반의 종교 극단주의로 인해 나라가 가난해졌다고도 볼 수가 있지만 빈곤 문제 때문에 탈레반 같은 종교 극단주의가 득세한다고도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웃나라인 타지키스탄은 종교 극단주의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술한 문제로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이다. 그나마 러시아가 지원을 많이 해줘서 최소한 나라 꼴은 유지하고 있다.
우습게도 소련과 기나긴 전쟁으로 소련군 전차라든지 온갖 장비가 고철로 남아 한때 이걸로 팔아먹었다.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던 채수문 중령의 회고를 봐도 아프간 산지 곳곳에 소련 전차가 남았는데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제 헬기나 온갖 장비가 남아서 90년 초반만 해도 고철로 활용되던 베트남이랑 똑같았다.
마르코 폴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푸른색'이라고 부른 보석, 라피스 라줄리의 최상품은 바로 이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다흐샨 주에서 나온다. 자그마치 6000년 동안 라피스 라줄리를 캔 사르이상그(سر سنگ, Sar-i Sang)라는 광산도 있다. 그 외에도 철이나 망간, 여러 광물자원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으며 힌두쿠시 산맥 쪽에는 우라늄도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어서 미국은 핵 관련 문제만으로도 100% 완전 포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다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탈레반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손을 뗄 가능성이 확실하다.
석유가 나긴 하지만 생산량이 극히 미미한 수준이고, 현재 미국 자본이 파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을 잇는 오일 파이프라인을 아프가니스탄에 놓기 위한 지속적인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사실 매장량이 적다기보단 채굴 기술이 없는 것에 가까우며 어쩌면 또 하나의 기름덩어리 땅일 수도 있다.
2016년 유럽연합(EU)과 아프가니스탄이 공동 주최한 "아프간 지원 회의"에서 유럽연합은 2020년 아프가니스탄에 52억 달러를 지원키로 결정하였다.
유엔 세계식량기획은 아프간에서 극심한 가뭄이 들면서 320만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2018년 11월 27일~28일까지 제네바에서는 아프간 지원을 논의하는 콘퍼런스가 열렸다.
미국이 아프간 재건을 위한 쓴 돈이 150조원이 넘는다. 관련 기사.
아편 생산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국이다. 이미 17세기에도 아편 재료인 양귀비 재배로 알아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1960년대 안정적인 생활을 할 당시에도 시골 지역에선 여러 생필품 부족 및 생활난으로 양귀비는 활발하게 재배되었으며 왕실이 금지하려고 했으나, 금지했더라면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굶어죽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금지를 전면 취소할 정도로 양귀비가 생활에 깊숙히 들어온 곳이 많다.
결국 단속한다고 해도 마약은 민병대의 주요 수입원 1등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부분 소비되는 아편 계열의 마약은 아프가니스탄산이 많다.
덕분에 한때는 전세계 아편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지역을 골든 크레센트 즉 황금 초승달 지대라고 한다. 실제로 탈레반은 이 황금 초승달 지대를 장악한 것을 이용해 외국, 특히 파키스탄, 이란 마피아와 마약을 거래하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역할을 하며 장사를 해먹고 있다. 그 덕분에 탈레반은 수익을 이용해 서방국가 부럽지 않은 수준높은 무장체계를 갖출수가 있었다.
아프간의 아편 생산량이 많은 이유는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꽃이 건조한 기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건조한 아프가니스탄의 기후와 맞아 떨어지고, 또 양귀비가 각종 해충에 강해서 다른 농산물보다 재배하기 쉽기 때문에 농부들이 유혹에 빠진다.
또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적발이 힘든 점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치안 부재 상태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은 완벽한 아편 생산지가 되었다.
재배 지역은 헬만드 주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도 칸다하르 주와 파라 주 같은 여러 지역이 엄청난 수를 재배하고 있다.
정부의 자금확보를 위한 독려
과거에는 탈레반이 아편 생산을 금지하였지만, 탈레반이 축출된 이후로부터는 자금 확보를 위해 아편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미국은 아편 생산을 금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 농부에게 보조금 지원 형식으로 공식적으로는 많은 양의 아편 농장을 일반 농장으로 바꾸고 있고 또 세계적인 곡물 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다고 여겼으나 문제는 이 조치가 실제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양귀비를 재배하다가 밀을 심은 이들이 한탄하길 "양귀비꽃 재배로 받은 돈 절반을 겨우 버는데 누가 미쳤다고 이걸 재배하겠는가!?" 라고 할 정도로 밀은 돈이 안되는 상황이다.
국제 밀값이 올라봐야 정작 그들에게 돌아온 돈이 기대 이하였고 부정부패가 워낙 횡행하고 교통망이나 인프라도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어 중간업자들 및 정부요인들이 그 수익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심각한 공권력의 부정부패
더구나 밀이나 석류 같은 합법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팔러갈 때 검문소를 지나칠 때마다 경찰들과 군인들이 뇌물을 요구하니 열 터진 사람들은 밀이나 석류를 죄다 엎어버리는 시위를 벌일 정도로 썩은 공권력도 마약 퇴치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아편이라는 것이 원래 음지에서 거래되는 것을 볼 때 아직도 많은 아편 농장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 아니라, 단속해야 할 현지 경찰들과 군인들도 많은 수가 연루되어 있다보니 이들이 뇌물도 받고 단속도 무마시키며 아예 겉으로는 밀이나 다른 곡물을 심고 잘 안 보이는 험난한 곳에는 한가득 양귀비를 키우는 곳이 허다하다.
게다가 미국과 국제안보지원군이 허구한 날 탈레반 자금줄을 끊고자 지원하는 돈도 단속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 돈의 대다수가 부패한 아프간 정부에 의해 횡령되어 극히 일부의 주머니로 들어가 사라지며, 단속 수준도 뇌물을 못 바치는 집안, 가장을 잃고 이거 재배로 벌어먹는 집안의 밭을 급습하여 무작정 양귀비를 베어버리는 것인데 이런 행위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 탈레반이 아니라 이젠 자체적으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할 정도로 증오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9년 마약단속 경찰 트럭이 지뢰에 터져 23명이 죽기도 했고 양귀비 밭에 지뢰를 심어두기도 하여 단속 경찰이 죽는 경우도 종종 터진다.
더불어 마약 단속반의 적발에 불만을 품고 탈레반으로 들어가버리는 이들까지 생겨나서 아프간 정부와 미국의 고민을 늘리고 있다.
마약 단속반의 불법행위
아프간 경찰의 마약 단속에 대하여 되려 아직도 많은 아프간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사람을 죽이려는 미국에게 매수된 매국노들의 짓으로 여기며 증오하는데 아프간 마약 단속반들이 위낙 깡패짓을 하고 다녀서, 현지인들에겐 도적이라고 악명이 높기에 아이들이나 여자들이 마약단속반들에게 돌팔매질을 할 정도로 단속이 어렵다.
양귀비꽃의 생필품화
더불어, 마약 단속을 넘어서 재료가 되는 양귀비꽃이 생필품이 되버린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주식인 빵이나 식용유나 비누 같은 생필품을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골이 가득한 아프간에서 양귀비가 모든 걸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양귀비는 꽃잎은 과거 오스만 제국이나 여러 지역에서 잼을 만들어 먹었고 씨앗을 갈아서 빵으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거니와, 식용유로도 만들 수 있으며 마약을 추출하고 남은 줄기는 말렸다가 장작으로 쓰며 남은 재는 비누로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마약을 다 파는 게 아니라 아프간의 병원들은 의약품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 처한 곳이 많다보니 비상약으로 쓰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용거래와 가뭄
아프가니스탄에서 낙농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세라 체이스(Sarah Chayes)는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재배 요인을 텔레반의 강압이나 높은 가격 때문이 아니라, 신용거래와 1990년대의 가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아프간인들에게 돈을 빌릴 루트는 친척을 제외하면 아편상밖에 없다. 그리고 아편상은 대출을 해주고 아편으로 대금을 치루도록 요구한다. 한편 과일나무는 과일을 맺기까지 5년이 걸리고, 한번 흉작이 들면 그 폐해가 수십 년씩 이어진다. 반면 아편은 땅에 심기만 하면 그해에 바로 수확할 수 있어서 과일나무에 비해 유리하다. 199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에 가뭄이 발생해 수많은 농민이 피해를 입었고, 그 경험 때문에 아편을 많이 재배한다는 것이다.
결론
단순히 양귀비를 불태우거나 훼손하는 단속이나 다른 농작물을 대신 심으라는 종전의 행위는 일절 도움이 안된다. 그렇게 해봐야 들어오는 돈이 더 적고 무엇보다 위에 열거한 생필품 자체를 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즉 저런 문제까지 다 해결해야지 마약 단속에 도움이 되는데 열악한 곳에 물자를 수송하는 문제도 어렵지만 애써서 겨우 수송해봐야 물자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 이므로 양귀비가 많은 지역에서 재배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미국은 양귀비들을 아예 돈주고 사서 불태우는 작전까지 구사했다가 비난 여론에 밀려 포기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군 내부에선 차라리 우리가 양귀비를 사는 게 괜히 헛돈 버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주장이 거센 상황이다.
참고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의 이복아우이던 아흐마드 왈리 카르자이(احمد ولي کرزی)의 별명은 마약왕이었다. 카르자이가 파키스탄의 전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파키스탄이 마약 유통을 단속 못한다고 불평하자 무샤라프가 어이없어하며 "당신 동생이나 잘 단속하쇼"라는 비웃음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중에 왈리 카르자이는 나에겐 마약이 있기에 아무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자신만만했다가 2011년 7월 12일 경호원들이 배신하여 총알 수십여 발을 맞고 끔살당했다. 그리고 탈레반이 경호원들을 매수 및 협박했다고 발표하면서 여전히 헬게이트 아프가니스탄을 증명해버렸다.
결국 현 정부든 탈레반이든 권력층이 마약 거래에 깊이 관련되어 있고 저런 생활 문제가 깊숙히 들어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약 재배가 사라질 일은 영원히 없어 보인다. 특히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4년도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생샨량은 약 6,400t을 기록하여 지난해보다 재배량이 17% 늘었는데 이는 사상 최대의 재배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2017년에 아프간 정부와 유엔에서 공동으로 양귀비꽃 재배조사를 한 결과, 아프간 내 양귀비 재배면적이 87%나 늘어나는 등 전년에 비해 급상승했다.
사회
2020년대 초기인 현재 상황을 요약하자면 2020년대에 강림한 가장 거대하고 대표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샤리아를 공식 법률로 하는 것을 지지하는 국민 여론이 무려 99%나 될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특히 시아파 근본주의 신정국가인 이란에서 만든 드라마 가지고도 저질이니 퇴폐적이라고 까대는 나라이니 말이 필요할까. 물론 이란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나라들과 견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슬람 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이란은 여전히 중동에서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에서 그나마 순위권 안에 드는 나라이기도 하다. 사실 아프간 내에서도 차이가 있기는 해서 카불과 같은 북동부 지역으로 가면 나름대로 개방적인데 반해 서부나 남부 지역으로 갈수록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다.
보수적인 여론이 강하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 무조건 꽉 막혔냐면 사실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 2000년대 탈레반이 물러난 이후로 텔레비전 수상기가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적어도 인도 영화나 해외 드라마 같은 것도 볼 수 있게 된데다가 언론의 자유가 생각보다는 잘 보장이 되어있는 편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다.
문제는 탈레반 세력이 여전히 큰 세력으로 잔존해있기 때문에 이들이 방송사와 언론사에 테러를 저지른다거나 기자, 영화감독, 배우들한테 살해 협박과 테러를 저지르거나 기자, 배우한테 압박을 가하는 일이 많다. 대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유명 배우이자 100편이 넘는 영화들을 찍은 영화감독인 살림 샤힌(Salim Shaheen)만 해도 과격 무슬림들로부터 비종교적 액션 영화를 제작한다는 이유로 끊임없는 살해협박을 받고 있으며, 스튜디오에 로켓포 공격이 날아와 스태프 9명이 죽은 적이 있다. 선정적인 프로그램을 내보낸다는 상투적인 이유에서부터 정치인 비리를 폭로할 때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는 일까지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부패상이나 전후 막장 치안과 정치 상황이 국내, 해외에 잘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공이 크다. 아프가니스탄 기준으로 제법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는 톨로TV나 1TV 등 상업 방송국의 시청률이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데다가, 페르시아어 위성방송이나 인도/파키스탄 방송도 꽤 흥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 예멘, 카타르 같은 중동의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들보다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애초부터 아프간은 원래 인도문화권이었던 관계로 인도 대중문화가 인기인지라 어느 정도 서구화된 인도를 동경하며 문화적으로 개방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장노년층들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은 여전해서 갈등이 나름대로 있는 편이다.
아프간 사회의 병폐인 막장 치안이나 명예살인, 관료들의 부정부패나 기업들의 결탁 등 사회부조리와 부패상을 널리 알리고 인도 영화나 터키 드라마 등을 편성하거나 서구나 파키스탄, 인도 음악도 틀어주고 물론 한국 기준으로는 심심하지만 개방적인 프로그램들을 많이 방영하는 등 아프가니스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많이 하기에 TV가 아프가니스탄에 끼치는 영향은 꽤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의 보급률이 나름대로 높으나, 인터넷은 국토의 대다수가 산지인데다가 인프라를 까는데 드는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인해 쓰는 사람이 적다. 그나마도 사용자들이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인터넷 속도도 느리며 요금도 비싸다. 하지만 사회부조리를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하기 때문에 TV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맡는다.
2015년 1월 이후로 여성 가수 뮤직비디오 제작 및 공중파 송신이 가능해졌으나, 가슴골이나 다리가 조금만 보여도 모자이크 처리를 할 정도로 검열이 심하다.
그나마 권투에 한해서는 여성이 니캅이나 히잡을 벗고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이다. 태권도도 허용은 되지만 히잡은 하고 뛰어야 할 정도로 검열이 심하다. 그래도 과거 탈레반 시절 때에 비해 정말 많이 나아진거다. 그때는 두 종목 모두 여성이 할 수도 없고, 걸린다면 하거나 가르쳐 준 사람까지 동반 처형될 각오를 해야 했다.
마약, 범죄, 전쟁 등의 문제로 사망하거나 마약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상당하고 교통이나 치안 등의 문제로 인해 세계적으로 평균 수명이 중하위권이다. 남성이 58살, 여성이 62살 수준에 불과하다.
아프간에서 테러가 계속 일어나면서 온라인 쇼핑이 성행하고 있다고 로이터와 톨로뉴스 등 아프간 내 매체가 보도했다.
2021년 중반부터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과 카불을 점령하면서 아프간내 여성 인권이 추락할 우려를 낳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903년 바라크자이 왕조 시기이다. 바라크자이 왕조는 유럽 각국의 원조를 받아 전국에 근대식 학교를 설립했다.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시기에도 근대식 교육 시설이 확충되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아프가니스탄 내에 대학이 없어서 중등학교 졸업자들 중 진학 희망자들은 인근 국가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야했다. 1932년 카불에 카불대학이 설립되면서 유학 수요를 상당수 흡수하였다.
모하마드 자히르 샤는 교육 발전에 큰 관심을 두었다. 모하마드 자히르 샤 치하에서 교육 예산이 크게 증가해 학교 시설이 크게 증가했고, 각 주에 대학을 설립해 고등교육 전반적인 학력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는 여성의 교육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1978년에만 카불대학 입학생의 40퍼센트 가량이 여성이었고, 농촌에서도 수 만명의 여성이 문해력 프로그램에 등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1년만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교육 기반을 파괴하고, 교육 인력 이탈을 가져왔다. 교사들은 전쟁을 피해서 인근 국가로 탈출했고, 이들은 꽤나 고급 인력이었기 때문에 인근 국가에서도 큰 문제 없이 받아들여줬다. 교육시설의 파괴는 지방 지역에서 극심했는데, 이렇다 할 근대적 건축물이 적은 지방 지역의 특성상, 학교 시설이 군 주둔시설로 징발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교육 기반은 탈레반 집권 시기 거의 궤멸적 파괴를 겪었다. 탈레반 정권은 여성에 대한 교육을 금지하고, 근대식 학교를 탄압하며, 이슬람 종교 학교인 마드라사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탈레반 집권 시기 120만명의 남성 학생이 교육을 받았지만, 교육 받은 여성 학생 5만명도 되지 않는다.
탈레반이 패퇴한 후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선 교육 재건 정책을 펼치고 있으나, 수십년 간 파괴된 기반과 정권의 부정부패로 재건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3년 통계에 의하면, 남성의 57퍼센트, 여성의 86퍼센트가 문맹이지만, 경제적 문제로 인해 교육 의지가 적고, 숙련된 교원층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교육 여건을 확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탈레반 집권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근대식 학교에서도 종교 교과를 개설하고 지역 성직자가 학교에 방문해 종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다만, 교육 예산은 지속적으로 점증하고 있어, 교육 여건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2006년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카불에 아프가니스탄 아메리칸 대학교(The American University of Afghanistan)가 설립되었고, 2010년대는 전국 단위의 대학 재건 계획을 진행해, 남부에는 칸다하르 대학교, 동부에는 낭가르하르 대학교와 호스트 대학교, 서부에는 헤라트 대학교, 북부에는 발흐 대학교를 지방 거점 대학교로 선정하고, 대대적인 재건을 실시했다. 이들 대학은 각 지역의 수위 대학으로,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집중적인 예산 지원을 받으며, 지역 내 대학의 교원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초등학교 취학자는 2001년 1백만명에서 2016년 920만명으로 증가했고, 같은 시기 여성의 취학율은 0%에서 37%까지 뛰어 올랐다. 교육 시설 측면에서도 같은 기간 5천 개가 넘는 학교가 신설/재건되었다. 또한, 적극적인 교원 확보 정책을 펼쳐 같은 기간 교원의 수가 7배까지 증가했다. 다만, 중등학교를 졸업한 경우 무검정으로 초등학교 교사로, 대학이나 중등학교를 졸업한 경우 중등학교 교사로 임용한 경우가 많아, 교원의 질적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단적으로, 대학 교원 중 박사(PhD) 학위 소지자 비율이 5%도 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수위 대학은 아프가니스탄 아메리칸 대학교로 미국인 교수진을 갖추고 영어로 강의가 진행된다. 이 대학에는 아프가니스탄 유일의 MBA 과정이 개설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성적 우수자에 대해선 미국 내 대학원 무상 유학 기회가 주어진다. 이외에도 카불대학교를 비롯한 5개의 지역 거점 대학교의 입학 경쟁이 치열하다. 이외에도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50여 개의 대학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내의 대학은 고등교육부에서 담당하는데, 현재 최우선 현안 과제는 석사 및 박사 과정의 확대이다. 하지만 재정적 문제도 큰 문제이지만, 긴 혼란 기간 동안 고등 교육 인력의 유출이 극심한 상황이라, 대학원 과정의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정적으로 대학원을 운영하고 졸업생을 배출하는 대학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10개 대학 내외이다. 2014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체 대학 교원 5,006명 중, 30%가량이 석사 학위 소지자이고, 박사 학위 소지자는 3.8%였다.
인력이 없어서 대학 교육을 확대하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교육 기반만큼은 철저히 보호하고자 했던 에티오피아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에티오피아는 전국 단위로 사범대학을 운영하여 교육 기반을 확대하고, 대부분의 국공립대학에서 대학원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상황이다.
현재 탈레반이 재집권에 성공하자 의료, 행정, 과학, 운동, 방송 등 각 분야의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탈레반 탄압을 피해서 해외로 망명하는 등 국가에 필요한 인재유출이 심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