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최수모 친구의 자전적 이야기
<우리 오매에게 나는 신앙이었다>
경상북도 상주, 소백산맥의 끝자락, 낙동강이 굽이굽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 마을에서 나는 태어났다. 1948년 2월 18일(음) 동트는 새벽이었다. 그곳은 상주군 낙동면과 청리면, 선산군 무을면, 즉 2개 군, 3개 면의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등을 맞대고 경계를 이루는 해발 700여 미터의 오지였다. 행정구역은 상주군 낙동면에 속했다. 각각 20호 내외의 두 동네가 내이실, 외이실로 나뉘어 안팎으로 자리 잡고, 서로 형님 동생 아저씨 아주머니 사돈 등등 이런 관계로 지내면서, 모두 친척처럼 지내는 곳이었다.
우리 오매가 외이실 에서 1922년 개띠 해에 태어나 내이실로 시집 온 것은 1937년 꽃다운 이팔청춘 열여섯 살이었다. 신랑인 우리 아버지도 겨우 한 살 위였다. 지금에 비추어 보면 철없는 중고등학생 정도였으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긴 농경 시절엔 그 나이면 소중한 노동력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내이실, 경사진 분지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19호 중 수정(水晶)리 맨 아랫집 1022번지였다. 샘터는 저 멀리 집 앞 경사진 논두렁길을 따라 백여 미터를 더 내려가야 있었다. 벼를 심는 논은 거기서 다시 한참을 더 내려가는 곳에 있었고, 앞산 고개 너머에도 논은 있었다. 밭은 산허리를 두 번이나 돌아가는 골짜기와 앞산 등성이의 처진 끝머리 음달에 있었다. 우리 마을은 눈이 많이 오는 해에는, 4월 초까지 녹지 않는 곳도 있었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새댁에겐 고생길이 훤한 최악의 입지였다.
두려움과 설렘과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했을 새댁은, 앞으로 닥칠 매서운 시집살이의 한파를 짐작도 못 했다. 논밭의 입지가 악조건인 것, 물동이를 이고 지고 오고 갈 길이 먼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봉사 삼 년, 아니 그 곱절도 넘는 인고의 세월 동안 겪게 되는 설움과 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그렇게도 부지런하고 효성스러운 우리 오매에게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2대째 장손에게 맏며느리로 시집온 우리오매에게는 결정적 치명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운명의 십 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곱게 보아줄 부처님 같은 시부모는 없었다. 조용하고 깐깐한 성격의 할머니는 삼남 일녀를 쑥쑥 낳아 집안을 그득하게 일구었으니, 그런 시어머니 밑에서 지낸 우리 오매에게 그 십 년은 한 맺힌 세월이요, 설움과 눈물의 세월이었다. 시앗 후보가 결정되는 상황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우리 오매에게 기막힌 운명의 반전이 찾아왔다! 구박과 눈치와 설움의 세월 십 년 만에 드디어 내가 태어난 것이다. 갓 태어난 나를 보신 우리 오매의, 멘트는 바로 이 말씀이었다.
“붓 대롱같이 뽀얀 고추를 달고 쏙 나왔다!”
이 멘트는 나중에도 무수히 많이 반복되었다. 이 말 외에 우리 오매가 평생 입에 달고 사신 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또 무엇이었는고 하니, “조선 없는 우리 아들” 바로 이 말씀이었다. 어릴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무려 십 년 동안 자식이 없던 맏며느리의 설움과 한을 한 방에 날려준, 조선 천지에 비교할 데가 없는 귀한 우리 아들, 뭐 그런 의미로 이해하게 된 건,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자식이 없는 동안의 설움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우리 오매의 노래는 평생 한탄조 일색이었다. 우리 오매는 노래라고 해야 정식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자작의 넋두리 수준이었지만, 노래 부를 때의 표정은 항상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고 곡조 또한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오매가 노래를 부를 때면 괜히 분위기가 어색함을 느꼈다. 어떨 때는 소름이 돋았다. 무슨 기막힌 한탄이 터져 나올지 항상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오매를 기사회생시킨 나는 젖을 실컷 먹을 수가 없었다. 내 밑으로 여동생들이 쌍둥이를 포함하여 셋이나 연이어 태어나는 바람에, 엄마의 젖을 모두 빼앗긴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가끔 맛도 없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젖을 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배고프고 슬퍼서 많이 울었다. 나의 젖을 빼앗아 먹은 내 여동생들은 태어나서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홍역으로 다 죽었다. 못된 가시나들! 살아 있으면 모두 집합시켜 놓고 이 ‘조선에 없는 오빠’가, 저거 신랑들 보는 앞에서 꿀밤이나 하나씩 쥐어박아 주는 건데…….
젖먹이 시절의 나는 외갓집 어른들의 손바닥 위에서, 그분들의 박장대소와 함께 크고 작은 볼 일을 다 보았단다.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기억에 없다. 유년 시절의 나를 할아버지에게 맡긴 우리 오매는 산으로 들로 신나게 일하러 다녔다. 우리 오매는 늘 식사 장소가 부엌 바닥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겸상하는 일번 밥상을 방안으로 들여보내는 일은 오매에게 즐거운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웃에서 보내온 맛있는 반찬이나, 제사 지낸 조기의 통통한 가운데 토막은 늘 할아버지 상에 올라왔고 그것은 곧 내 차지였음을 우리 오매는 알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종종 할아버지 등에 업혀 노인들이 경쟁하듯 담배를 피워대는 동네 사랑방엘 자주 갔다. 할아버지의 등은 불편했다. 그것은 언제나 할아버지가 사랑방에 가시면서 길가에 널린 돌들을 치우거나, 쇠똥이라도 만나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소쿠리에 주워 담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허리를 굽히시거나 많이 움직이시니 내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 않으려고 더러 울었고, 때로는 항거의 표시로 등에 업힌 채로 뒤로 벌렁 자빠지는 시늉도 했다. 그러나 불만의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글쎄 나에게 밑이 터진, 고추가 다 보이는 바지를 입히고 가시는 것, 그게 싫었다. 사나이 이미 너댓 살인데 어찌 밑이 터진 바지를 입힐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창피했고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런데 거기엔 참으로 묘한 뜻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사랑방에 모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책없이 나의 고추를 보자고 졸라 대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추 한 번 보여 주면 내가 좋아하는 곶감을 주었고, 한 번 더 보여 주면 밤을 주는 것이었다. 고추를 보여 준다고 해도 어차피 밑 터진 바지이니, 앞을 보고서서 다리를 약간 벌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싫증이 나면 다음 날은 입을 한 번 딱 벌려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요청받은 레파토리를 무리 없이 연기(?)했다. 그렇게 하면 대추가 내 주머니에 빵빵하게 쌓여 갔다.
우리 오매가 시집온 후 십 년 만에 어렵사리 태어난 나는, 사랑방 노인들의 구경거리, 사랑 거리가 되었다. 언제나 화제가 되었다. 나의 밑 터진 바지에 달린 단 하나의 주머니는 할아버지의 지시였는지, 아니면 우리 오매의 회심의 작품이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우리 오매의 비장의 한 수였다면 아마도 우리 오매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조선에 없는 우리 아들의 붓 대롱 같은, 귀하디 귀한 고추를 어찌 공짜로 보신 답니까? 어림도 없지요!”
그러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적령기가 되었는데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왕복 이십 리의 학교 길은 산골짜기를 오르내려야 하는데, 여름에 비 오면 급류를 열두 번 건너야 하고, 겨울에 추우면 얼음 언덕을 열두 번 건너야 하니 귀한 손자를 험지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끈질긴 주장과 할아버지의 묵시적 동의로 아홉 살이 되어서야 입학할 수 있었다. 1956년
동네 친구 두 명과 함께였다.
입학 후 1·2학년 동안은 할아버지께서 우려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났다. 통지표에 나타난 연간 결석일 수가 사십일 내지 오십일이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가지 못하고, 겨울에 너무 추워도 가지 못했다. 운동회라도 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가야 했다.
3학년이 되기 직전, 우리 부모님은 큰 결단을 내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일은 작은아버지 형제에게 맡기고, 나의 교육을 위해, 기차가 다니는 청리면 소재지 학교 옆으로 이사를 결행한 것이다. 소위 맹모삼천지교의 제일 탄을 실행했다. 다행히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곧잘 하는 축에 속했다. 그것이 우리 오매에게는 또 다른 에너지가 되었다.
타지로 이사한 우리 집은 아직 땅 한 뙈기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는 새벽같이 나가서 남의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래도 철없는 나는 우리 오매가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우리 오매가 즐거우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중에서도 나는 우리 오매가 품삯인지 보너스인지 고구마를 얻어다가 쪄 줄 때가 너무나도 좋았다.
우리 부모가 알뜰살뜰 남의 일을 해서 처음 땅을 한 마지기 샀을 때, 우리 오매는 그 논에 벼를 심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를 심었다. 그 귀한 논에는 당연히 주식인 벼를 심어야 했건만 나를 위하여 기꺼이 고구마를 심은 것이다. 심고 가꾸고 캘 때까지 우리 모자는 항상 함께했다. 수확한 고구마는 싹이 수북이 날 때까지 나를 위해 보관되었고, 새벽같이 일 나가실 때면 고구마를 한 광주리 쪄서 부엌문 위에 걸어 놓았고, 껍질이 살짝 탄 그 꿀맛 같은 고구마를 나는 목에서 꾹꾹 소리가 나도록 잘도 먹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 다닐 무렵 알뜰살뜰 모아 땅을 몇 마지기 더 샀다. 더욱이 집도 옮겼다. 동네 어귀 외딴집에서 동네 한가운데 큰집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무럭무럭 자라면서 상을 몇 번 타서 갖다 드리는 사이,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함과 알뜰함으로 눈부신 재산 불림을 한 것이다. 이사한 큰 집은 감나무가 열한 그루나 빙 둘러싸고 있는 멋진 집이었다. 이 또한 홍시를 좋아하는 ‘조선 없는 우리 아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때 우리 오매는 새벽같이 남의 감나무 밑 홍시를 주워 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고 그중 깨진 홍시는 내 차지였던 것이다.
이사 후 첫해 가을에 나는 창피한 사고를 쳤다. 이른 가을이 되어 단단해진 땡감이 벌에 쏘이면, 이 가지 저 가지에 주홍빛 홍시가 탐스럽게 늘어 간다. 나는 울긋불긋한 홍시에 반해서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쉴 새 없이 즐겼다. 몇 개인지 세어 보는 것은 나에게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욕심의 후과는 혹독했다. 점잖은 말로 변비였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따갑고 아프기만 할 뿐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만능 맥가이버였던 아버지께서 꼬챙이로 해결했다. 어엿한 중2의 예상치 못한 실수였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었고, 아버지의 사랑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중학교를 마친 나는 가까운 상주를 놔두고 머나먼 김천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 고등학교에 대한 주변의 평판과 권유가 있었고, 마침내 부모님의 두 번째 결단으로, 우리 중학교에서는 나 혼자 김천의 사학 명문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그 학원의 동문의 일원이 된 것은, 내 인생에서 자랑스러운 운명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나는 우리 부모의 맹모삼천지교 실행 세 번째 결단으로,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니 동네에서 대학생 1호였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20~30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부농도 대학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넉넉한 땅도 없이 순전히 몸으로 때운 우리 부모는 무슨 배짱과 열정으로 서울까지 유학 보낼 생각을 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서울에서의 나의 대학 시절은, ‘조선에 없는 아들’에 대한 우리 오매의 희생과 사랑이 화룡점정(畵龍點睛) 하였다. 아버지는 혼자 고향에서 살림하고, 농사짓고, 남의 일도 하는 기러기 아빠가 되었고, 우리 모자는 서울시 성산동 뚝방길 무허가 판자촌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모래내에서 한강 쪽으로 0.5~1 킬로미터 정도의 지점이었으니 지금의 월드컵 경기장과 마포구청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거기서 나는 신촌의 대학까지 버스로 통학했다.
그곳을 한 번씩은 와본 친구들은 왜 내가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단다. 그들은 대개 서울의 명문고를 나온 중상류층 출신이거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집안 출신들이었으니 당연히 최소한 하숙 생활하며 대학을 다녔으니 내 형편을 알 수 없었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고향에 두고 온, 감나무가 열한 그루나 둘러싸고 있는 멋진 고대광실이 모두 내방이요 나의 왕국이었으니, 판자촌에서 다니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맥가이버 아버지의 창의와 열정으로 축조된 그곳이 나에게는 유토피아였다. 자유와 방종의 일학년, 쇼펜하우어에 몰입하여 지내다가 학사경고를 받은 이학년, 그저 그런 삼학년, 현상 논문 도전으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졸업반, 그 판자촌에서도 대학생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의 촌스러운 대학 생활 중, 희생과 열정과 부지런함과 아들 사랑의 화신이었던 우리 오매는, 본인 이름도 쓸 줄 모르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생선 장사의 길에 나섰다.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오매는 번호도 잘 기억하기 어려운 노선버스를 갈아타고 노량진 수산시장엘 가서, 커다란 붉은 플라스틱 광주리에 각종 생선을 가득 채우고, 한강을 건너 마포까지 와서는, 거기서부터 걸어서 신촌, 합정동, 망원동을 거쳐 모래내로 순환하는 고난의 행상을 반복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마포까지 한강을 건너는 버스를 태워주지 않으려는 기사와의 실랑이는 다반사요, 남의 집 대문을 기웃거리다가 개에게 물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가끔씩 아들이 다니는 대학 앞을 지나다니는 자부심과 즐거움에 비하면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 우리 오매가 해 준 임연수어구이와 알이 꽉 찬 도루묵찌개를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아들의 먹는 모습이 즐거운 오매도 덩달아 맛있게 드셨다. 나는 그 이후 그런 맛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무거운 생선 광주리와 씨름한 우리 오매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비녀로 쪽을 진 머리는 주변머리를 모아 겨우 말아서 지탱한 것이었다.
오매의 앞치마 돈주머니에서 나온 꼬깃꼬깃한 돈은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비리지만 빛나는 그 구겨진 돈은, <사뮤엘슨 경제학 원론>, <신용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의 책을 사는 데 쓰였다. 철없는 아들은 때때로 책값을 부풀리고 삥땅하여 극장에도 자주 갔다. 나는 고교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반 타의로 학생 입장이 금지된 김천 아카데미 극장엘 갔다가 발각되어 정학을 맞았던 충격이 있었는데,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자유방임의 생활을 통해서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 오매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돈을 줄 때마다 그저 즐겁고 기쁜 표정이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나의 철없던 모습과 우리 오매의 고생이 오버랩되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컴퓨터 자판을 볼 수가 없다. 잠시 휴지로 눈을 닦고 코를 풀어 변기에 던지고 물을 내리고선 한숨을 돌린다.
나는 1972년 초 대학을 마치느라 그동안 입영 영장을 여러 번 연기했다. 졸업식을 앞두고 있는데, 이제 더는 연기가 불가능한 마지막 입영일은 졸업보다 더 빨랐다. 나는 대학 졸업 후에 입대가 가능한 장교로 군대 생활을 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붙은 장교모집 벽보에는 공군 학사장교 모집이 가장 빨랐다. 그러나 복무 기간이 사병으로 가는 것보다 일 년 반 이상 길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이었다. 다행히 시험에 붙어서 1972년 3월 6일 입교하여 5개월 동안 엄혹한 장교훈련을 맛보게 된다.
나는 이백 수십 명의 동기생 중 유일하게, 훈련을 받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관보를 받고, 이박 삼일의 특박을 나간 행운아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나를 업어 키우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었는데, 장례가 끝난 두어 달이 지난 뒤에서야 알았었다. 아버지께서 나의 학업에 지장을 준다고 일부러 연락을 안 하신 것이란다. 나는 방학이 되어 고향을 방문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할아버지의 혼을 모셔놓은 볏짐 움막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통곡을 참을 수 없었다.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통곡이 한참 동안 이어졌고 아버지는 그때 그 충격과 회한을 오래도록 입에 담으셨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즉각 나에게 관보를 치신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 내내 우리 오매는 마치 시집살이의 한을 털어 내기라도 하듯 슬피 우셨다. 그러나 나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혹독한 훈련으로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겪고 있었던 탓일까, 하여튼 매우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오히려 왕성한 식욕과 몽둥이의 멍 자국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동네 일호 대학생에 이어 동내 일호 장교가 되었고, 공군 장교복 차림으로 집에를 드나들던 시절 또한 주변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논밭에서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멋진 공군 장교복을 입은 싱싱한 청년의 모습에 구경이라도 난 듯 일손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것이 또 우리 오매에게는 자랑이요 기쁨이었다. 당연히 중신애비가 드나들었고 장가를 가야 한다는 독촉이 성화같았다. 나는 우리 오매의 간절한 소망을 무작정 거역할 수 없었고, 친구와 함께 그의 사촌 동생을 선보고 나서 보름 만에 약혼하고, 약혼한 지 보름 만에 결혼했다. 1974년 4월 8일 공군 정복을 입은 채였다. 그것이 우리 오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제대 후 직장을 다니던 나는 1980년대 초반에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서 삼대가 같이 살았다. 그런 중에도 오매는 아들 사랑에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남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별났다. 내가 우리 오매를 모시는 게 아니라 오매가 계속 나를 돌보는 격이었다.
우리 오매는 마누라에게 내가 뭘 잘 먹는지 자주 강조했다. 이웃에서 고기 섞인 음식을 가져오면, 절대로 안 드시고 아들 준다고 보관한다. 술과 고기를 포식하고 저녁 늦게 귀가하는 나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권한다. 고기는 이미 굳어 있다. 먹는 시늉을 해보기도 하지만 이미 나의 배는 공간이 없다. 오매는 남아서 굳은 고기를 뒤늦게 드시고는 식중독에 걸린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응접실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우리 오매가 옆에 앉으시더니 호박씨를 까서 몇 개씩 쌓이면 슬며시 내게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습관처럼 무심히 잘 받아먹었다. 뒷날 나는 그날의 일로 아내에게 시샘과 부러움 섞인 놀림을 받았다.
2019. 2. 24.(일) 法 海
첫댓글 최수모 친구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우리들 가난했던 자화상이 비칩니다.
가난과 시대의 고통을 놀라운 인내와 의지로 헤쳐가며 수모 친구를 길렀던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읽으며,
여러 감회가 스쳐갑니다. 우리 시대 어머니들에게 눈물의 헌사(獻辭)를 아니 바칠 수 없습니다.
수모 친구의 이 글도 그런 마음으로 쓴 글이라 여겨집니다.
고인인 자서전 완성 및 발간도 못한 형편인것 같습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잘읽었습니다.
올려준 박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수모씨의 자서전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언제 읽지?' 그랬습니다. 나만 고생한 줄 알았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수모씨 오메의 자식 사랑에 가슴이 짠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자판을 두들길 수 없었다는 그 마음에 백 번 동감합니다.
이제 하늘에서 오메를 만났겠지요!
그 동안 못다한 정담, 마음껏 나누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