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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始皇帝) 진(秦)을 망(亡)하게 할 자(者), 호맥(胡貉) [제3편]
맥(貊)[胡貉·胡貊]은, 아세아주(亞洲) 북방지대(北方地帶)의 패자(霸者)
2023년 12월 10일
○ “제3편”에서는 :
〈(1) 전한(前漢) 때의 기록(記錄)인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전한(前漢), 조조(晁錯=조착(鼂措)】의 첫머리에 기록(記錄)된 “秦 時 北 攻 胡 貉, 築 塞 河 上”〉와 (2)〈“묵자간고(墨子閒詁) 兼愛 中” 편의 : “以 利 燕 代 胡 貉 與 西 河 之 民”〉이라는 구절(句節)을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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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한(前漢) 때의 기록(記錄)인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전한(前漢), 조조(晁錯=조착(鼂措)】의 첫머리에 기록(記錄)된 〈秦 時 北 攻 胡 貉, 築 塞 河 上〉 이라는 구절(句節)에서의 “호맥(胡貉)”의 정체(正體)는 과연(果然) 누구였을까?
【晁錯(鼂措)[조조:조착] [BC 200年 ∼ BC 154年 3月6日],《史記》、《漢書》、《資治通鑑》本傳作“鼂錯”,潁川人,西漢初著名政論家】이자, 어사대부(御史大夫)였으나, 제후(諸侯)들의 영토(領土)를 줄이는 정책(政策)을 펴려 한 조조(晁措)를 치려 7 제후국(諸侯國)들이 군사(軍士)를 발병(發兵)하자, ‘기병반란(起兵叛亂)의 죄목(罪目)’으로 기시(棄市)【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市場)에서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하고 그 시신(屍身)을 길거리에 버리는 형벌(刑罰)을 말한다.】를 당했다고 전(傳)해진다.
• 東文選卷之九十九 / 論 / 이규보(李奎報)의 爲鼂錯雪寃論[위조조설원론]이 있으며,
• 東國李相國全集卷第二十二 / 雜文 : [爲鼂錯雪冤論 : 위조조설원론]이 있다. 즉(卽),
➨ 이규보(李奎報) : 爲鼂錯雪冤論 : 조조를 대신하여 억울함을 변명하는 논
東文選卷之九十九 / 論 / 爲鼂錯雪寃論 : 古之人。論漢之英明之君。則首稱文景。然以誅錯事觀之。景帝不足謂之明矣。: 조조를 대신하여 억울함을 변명하는 논[爲鼂錯雪寃論] / 이규보(李奎報) : 옛사람이 한(漢)대의 영명(英明)한 임금을 말할 때에 먼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를 말한다. 그러나 조조(鼂錯)를 죽인 사실을 본다면 경제는 밝았다고 할 수 없다. 且國政。非臣之所能專斷而行之者也。陳其利害。而取斷於君上者。臣之職也。受下之謀議。商酌可否而後行之者。君之明也。: 또한 국가의 정치란 신하로서는 감히 마음대로 결정하여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해(利害)를 설명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은 신하의 직책이고, 아랫사람의 의견을 받아 그 옳고 그른 것을 참작한 뒤에 이것을 실시하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밝음이다. 錯旣爲漢臣。患諸侯之疆大難制。欲因過削地。以尊京師。此可謂忠於國者也。: 조조는 이미 한의 신하로 있으면서, 제후(諸侯)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중앙에서 이를 견제하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그들의 잘못이 있음을 이용하여 영토를 삭감하여 중앙을 강화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국가에 충성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遂以此奏於上。上亦不能獨裁。與公卿列侯宗室雜議而後行之。則咎不獨在錯矣。: 마침내 이런 의사를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것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공경(公卿)ㆍ제후ㆍ종실(宗室)과 함께 의논하여 이를 실시하였으니, 곧 허물이 조조에게만 있다고 할 수 없다. 脫七國實爲錯而發兵者。業已用其計而致此。則是亦朝廷之恥也。宜徐觀其變。然後誅之。未晚也。: 가령 7국이 사실상 조조 때문에 군대를 동원했다 할지라도, 벌써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된 이상 곧 이는 또한 정부의 수치였으니, 마땅히 서서히 그 변화를 관찰한 뒤에 그를 죽였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錯之削諸侯。亦非不慮其反逆而策之者也。宜委以制禦之任。有不可而後誅之。亦可矣。况吳王。卽山鑄錢。煮海爲塩。爲反計數十年而後。與六國發之。則名雖誅錯。其意不在錯也。: 하물며 오왕(吳王)은 산에 가서 돈을 만들고 바닷물을 구워서 소금을 만들어 가면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 지가 수십 년이나 된 뒤에 6국과 더불어 군대를 일으켰으니, 명목은 비록 조조를 죽인다는 것이나 그들의 목적이 조조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苟其勢。可以抗京師。則雖急斬錯以謝。祇自示中國之輕耳。終不爲罷兵明矣。苟不能以區區七國。能抗京師。則雖不誅錯。其若子何耶。: 만일 그들의 세력이 중앙과 대항할 수 있었다면 곧 아무리 빨리 조조를 베어서 사과하였다 할지라도 다만 중국의 약점을 보여줄 뿐이요, 그들이 마침내 군대를 중지하지 않을 것은 명백하며, 만일 7국의 작은 힘으로 중앙과 겨룰 수 없었다면 곧 아무리 조조를 베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천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其誅之也。雖斷自上心。猶爲不可。况聽其讎者之讒。以戮忠臣。內爲袁盎復讎。外爲諸侯報仇。其不明。孰大焉。: 그를 죽인 것이 비록 임금의 마음으로 결정된 것이라도 오히려 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 원수가 되는 자의 참소를 듣고 충신을 죽여 안으로는 원앙(袁盎)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밖으로는 제후를 위하여 원수를 갚았으니, 그 밝지 못한 것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있는가. 又使中尉。紿載行市。是欺臣也。以天子而斬一鼂錯。何必誑耶。是亦非人君之政也。過孰甚焉。: 또한 중위(中尉)를 시켜 조조를 속여서 수레에 싣고 가다가 거리에서 형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를 속인 것이다. 천자로서 조조 한 사람을 베는데 하필이면 속임수를 썼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것도 임금으로서의 처사가 아니다. 잘못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있는가. 惜也銳於爲國遠慮。而反受誅戮。鼂錯之寃。不亦甚乎。以文帝之踈斥賈誼。較諸此則彼特過之小小者耳。애석하다. 조조는 국가를 위하여 멀리 염려함을 급히 서둘렀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으니, 조조의 억울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문제(文帝)가 가의(賈誼)를 멀리하여 배척한 것을 이것과 비교한다면, 저것은 다만 조그마한 잘못에 불과하다. 况誼之斥也。未幾復徵。傅上之愛子。而其策雖未盡見用。其所採而施於世者。亦多矣。則不可謂大失其志者也。: 더구나 가의는 배척을 당한 지 얼마 후에 다시 부름을 받아 임금의 사랑하는 아들을 가르쳤으며, 그 계책이 모두 쓰이지는 못했으나, 채용되어 세상에 실시를 보게 된 것도 많았으니, 그 뜻을 크게 잃었다고 할 수 없다. 然後世猶以不大用爲之寃也。況如錯者乎。: 그러나 후세에서 오히려 크게 쓰이지 못했다 하여 그를 위하여 억울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조조와 같은 경우이겠는가. 予是以譏景帝之不明。以此雪錯之深寃也。嗚呼。有努力扶我身者。誤而少失其手。則未及踣地。而敢怒斥耶。: 이러므로 나는 경제(景帝)의 밝지 못함을 비난하여 이것으로 조조의 깊은 억울함을 변명하는 것이다. 아, 애써서 나의 몸을 부축한 사람이 잘못하여 잠깐 손을 놓쳤다면, 곧 자기가 땅에 넘어지기도 전에 감히 그에게 노하여 배척할 수 있겠는가. [原文+飜譯文, 出處 : 고전번역원DB]
➨ 漢文帝劉恆【前203年∼前157年7月6日,漢高祖劉邦第四子,母薄姬,漢惠帝之庶弟。西漢第五位皇帝 (前180年11月14日-前157年7月6日在位),在位23年,享年46歲】때의 인물(人物)로 ‘조조(鼂措)=조착(晁錯)’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晁錯:文武兼備,因上《言太子知術數疏》,闡述為君王當如何駕馭群臣百姓,由太子舍人擢升為太子家令,上《言兵事疏》,一論慎選將領,二論用兵之道,三論漢與匈奴各有千秋,四論以夷制夷[79]。再上《守邊勸農疏》,《論貴粟疏》。
四論以夷制夷 :《漢書•爰盎晁錯傳》:今降胡義渠蠻夷之屬來歸誼者,其眾數千,飲食長技與匈奴同,可賜之堅甲絮衣,勁弓利矢,益以邊郡之良騎。令明將能知其習俗和輯其心者,以陛下之明約將之。即有險阻,以此當之;平地通道,則以輕車材官制之。兩軍相為表裏,各用其長技,衡加之以眾,此萬全之術也。
➤ 조조(晁措 : 鼂措)는, 군주(君主 : 景帝)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으로 각지(各地)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각(各) 제후(諸侯)들의 영토(領土)를 줄여 황제(皇帝)의 친정(親政)을 공고(鞏固)하게 하려는 정책(政策)을 펴려 하자, 각지(各地)에 있던 7개 나라가 기병(起兵)하자, 경제(景帝)가 어리석게도 자신(自身)의 충성(忠誠)스러운 신하(臣下)였던 “조조(鼂措)=조착(晁錯)”을 동시(東市)에서 기시(棄市)형에 처했다는 것은 군주(君主)로서 잘못된 처사(處事)였다는 것을 이규보(李奎報)가 날카로운 문체(文體)로 꾸짖는 것이 위의 내용(內容)이다.
이런 당시(當時)의 충직(忠直)한 신하(臣下)로,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관리(官吏)였다는 것이 후세인(後世人)들의 평가(評價)다. 이러한 분이 기록(記錄)한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 내(內)의 기록(記錄)은 그만큼 신뢰(信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1)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 [晁錯(鼂措), 西漢] :
《➨ 秦時北攻胡貉,築塞河上 ➊,南攻楊粵,置戍卒焉。其起兵而攻胡、粵者,非以衞邊地而救民死也,貪戾而欲廣大也,故功未立而天下亂。且夫起兵而不知其勢,戰則為人禽,屯則卒積死。➨夫胡貉之地,積陰之處也,木皮三寸,冰厚六尺,食肉而飲酪,其人密理,鳥獸毳毛,其性能寒 ➋。楊粵之地少陰多陽,其人疏理,鳥獸希毛,其性能暑。秦之戍卒不能其水土,戍者死於邊,輸者僨於道。秦民見行,如往棄市,因以讁發之,名曰「讁戍」。先發吏有讁及贅壻、賈人,後以嘗有市籍者,又後以大父母、父母嘗有市籍者,後入閭,取其左。發之不順,行者深怨,有背畔之心。凡民守戰至死而不降北者,以計為之也。故戰勝守固則有拜爵之賞,攻城屠邑則得其財鹵以富家室,故能使其衆蒙矢石,赴湯火,視死如生。今秦之發卒也,有萬死之害,而亡銖兩之報,死事之後不得一算之復,天下明知禍烈及己也。陳勝行戍,至於大澤,為天下先倡,天下從之如流水者,秦以威劫而行之之敝也》
➊ 〈秦 時 北 攻 胡 貉, 築 塞 河 上 : 진(秦)나라 때에 북(北)쪽의 ‘호맥(胡貉)=호맥(胡貊)’을 공격(攻擊)하여. 하상(河上)【‘하(河)=황하(黃河)’의 위쪽 즉(卽) 상류지대(上流地帶)】에 성채(城寨)를 쌓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 〈진(秦)나라를 망(亡)하게 할 자(者)는 흉노(胡)라고 하여, 시황제(始皇帝)는, 부소(扶蘇)를 감독관(監督官)으로, 몽념(蒙恬)은 30만∼50만【기록(記錄)에 따라 30만, 40만, 50만이라고도 하였다.】대군(大軍)을 통솔(統率)케 하여 하남(河南)【황하(黃河) 이남(以南) 땅(地)】에 있었던 흉노(胡)를 토벌(討伐)하고 장성(長城)을 쌓도록 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북(北)쪽에 있었다는 ‘흉노(匈奴) 즉(卽) 오랑캐(胡)’가 바로 “호맥(胡貉)=호맥(胡貊)”이라고 칭하는 ‘맥족(貉族)=맥족(貊族)’이었다」라는 사실(事實)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누구도 이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곧 『대한민국(大韓民國)은, 1948년 정부수립(政府樹立) 이후(以後), 지금 오늘까지, 국민(國民)들은,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공부(工夫)는 스스로 알아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라는 이야기다.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 「“호맥(胡貉)=호맥(胡貊)”은, “효기(梟騎)를 파견(派遣)하여 한왕(漢王) 유방(劉邦)의 건국(建國)을 도왔다」라는 것으로 말미(末尾)를 장식한다.
➨ 이런 기록(記錄)을 보면 : 당시(當時)의 북방(北方)에서 북적(北狄)이라고 부르던 흉노(匈奴)는, 바로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사실(史實)을 기록(記錄)한 분이 『晁錯(鼂措), 기원전(紀元前 : BC) 200年∼BC 154年』을 살아온 관리(官吏)였다는 것이 그 기록(記錄)을 신뢰(信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➋ 〈夫胡貉之地,積陰之處也,木皮三寸,冰厚六尺,食肉而飲酪,其人密理,鳥獸毳毛,其性能寒 : : 호맥(胡貉)의 땅은, 날이 계속 흐린 곳에 있는데, 나무껍질(木皮)은 3촌(寸)이며, 얼음두께가 6척(尺)이나 되며, 고기를 먹고 타락(駝酪)을 마시는데, 그 사람들은 새나 짐승의 솜털과 털로 촘촘하게 꿰매는데, 그 본성이 추위에 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설명(說明)은, ㊀「글란국지(契丹國志) 호교함북기(胡嶠陷北記)」, ㊁「新五代史, 四夷附錄 第一, 契丹)」, ㊂「資治通鑑 202권 唐紀 18. 高宗 咸亨 4年(673)」, ㊃「讀史方輿紀要, 山西, 瓠(盧瓜)河」에도 똑같은 내용(內容)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즉(卽),
➋-1) 「글란국지(契丹國志) 호교함북기(胡嶠陷北記)」[胡嶠陷北記 : 同州郃陽縣令胡嶠,居契丹七年,周廣順三年,亡歸中國,略能道其所見]
《云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 전하기를, 글란(契丹)의 선대들은, 상시 회흘(回紇)의 노역(勞役)을 하게 되자, 뒤쪽의(북쪽) ‘흑거자’ 로 도망을 가, 처음 수레와 장막 치는 것을 배웠다. 또 북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는 소다리와 같았다. 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그 땅은 몹시 추운데, 물을 “호하(瓠河)”라 한다.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두께가 2척이며, 봄과 겨울(秋冬)에는 얼음이 철저하게 얼어붙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상시 불을 지펴, 얼음을 녹여 마신다. 東北至韈刼子,其人髦首,披布為衣,不鞍而騎,大弓長箭,尤善射,遇人輒殺而生食其肉,契丹等國皆畏之。》라고 하였고,
➋-2) 「新五代史 / 四夷附錄 第一, 契丹)」 : 《云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 : 전하기를, 글란(契丹)의 선대들은, 상시 회흘(回紇)의 노역(勞役)을 하자, 뒤쪽의(북쪽) ‘흑거자’ 로 도망을 가, 처음 수레와 장막 치는 것을 배웠다. 또 북쪽에, 우제(牛蹄)돌궐(突闕)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는 소다리와 같았다. 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中略. : 그 땅은 몹시 추운데, 물을 “호로하(瓠蘆河)”라 한다.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두께가 2척이며, 봄과 겨울(秋冬)에는 얼음이 철저하게 얼어붙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상시 불을 지펴, 얼음을 녹여 마신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➋-3) 「資治通鑑 202권 唐紀 18. 高宗 咸亨 4년(673년)」: 《閏五月,燕山道總管,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 : 윤(閏) 5월, 연산도(燕山道) 총관(總管)이며, 우령군대장군인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 반군【高駒驪 復興軍】을 “호로하(瓠蘆河)” 서(西)쪽에서 대파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胡嶠曰 : 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 :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흑거자의 북쪽이며,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으며, 사람의 신체는 소다리와 같다. 그 땅은 심히 춥다. 물 이름이 “호로하(瓠蘆河)”이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두께가 2 척이나 되는데, 가을과 겨울엔 철저하게 얼어, 항상 얼음을 녹여, 물을 마신다. 당서(唐書) 유인궤(劉仁軌) 전에, 이 ‘호로하(瓠蘆河)’는 고려(高麗)의 남(南)쪽 지경이며, 신라(新羅) 칠중성(七重城)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➋-4) 「讀史方輿紀要, 山西, 瓠(盧瓜)河」 : 《瓠(盧瓜)河,在漠外. : “호(로과)하(河)”는 막외(漠外)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호하(瓠河)=호로하(瓠盧河)=호과하(瓠瓜河)”였다는 뜻이다. 그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有寒水,曰瓠(盧瓜>)河,夏秋冰厚三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雲. : 호교(胡嶠)에 따르면 : 흑거자(黑車子)의 북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는데, 사람들의 신체가 소다리이며, 그 땅의 물은 차가운데, 이르기를 『호(로과)하(河)』이다.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두께가 3척이며, 봄과 겨울(秋冬)에는 얼음이 철저하게 얼어붙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상시 불을 지펴 얼음을 녹여 마신다고 전한다.》하였다.
➌ 위에서 말하는 ‘호맥(胡貉)=호맥(胡貊)’의 땅에 대한 설명(說明)은 :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는 서한(西漢)의 조조[晁錯(鼂措) “BC 200年 ∼ BC 154年 3月 6日] 시대(時代)의 것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며, 그 나머지는 대부분 ‘수백(數百) 년(年) 후대(後代)’의 ‘호교(胡嶠)의 함북기(陷北記)’를 인용(引用)한 것들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勘案)해보면 「똑같은 기후대(氣候帶)에서 살고 있었던 종족(種族)과 부족(部族)을 지칭(指稱)한 것」이라고 판단(判斷)이 된다.
이러함에 요사(遼史)【요(遼)나라 역사서(歷史書) : 글란(契丹:거란)】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기를 : ➥〈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 요(遼)나라의 그 선대(先代)는 글란(契丹)인데, 본래 선비(鮮卑)의 땅으로, 요택(遼澤) 가운데에서 살았다〉라고 하였으며,
예지(禮志) 고의(古儀)에서 이르기를 : ➥〈遼本朝鮮故壤,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蓋有存者 : 요(遼)나라는 본시(本是) 조선(朝鮮)의 옛 땅에서, 기자(箕子)의 팔조지교(八條之敎)의, 유풍(流風)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옛 풍속(風俗)으로, 이 모두를 가지고 있다〉라고 한 것이다.
➍ 江漢集 13권 / 신도비(神道碑) : 당고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2천호신라국상장군 김공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 幷序] 본문(本文)을 보면,
칠중하(七重河)는 : 경기도 파주 임진강의 옛 이름이다. 임진강의 흐름이 굴곡이 심한 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표하(瓢河)는 : 임진강을 말한다.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군인들이 칠중하(七重河)의 굴곡진 흐름을 보고 마치 표주박이 굴러다니는 것 같다고 해서 「호로하(瓠蘆河) 또는 표하(瓢河)」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에서 인용(引用)한 고전(古典)을 보면 : 「임진강(臨津江)은 곧 칠중하(七重河)요, 호로하(瓠濾河)=호로하(瓠蘆河)요, 또 표하(瓢河)」라고 하였으니, 「칠중하(七重河)=호로하(瓠濾河)=호로하(瓠蘆河)=표하(瓢河)=임진강(臨津江)」이란 말과 같다.
➤➤➤ 그렇다면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는 서한(西漢)의 조조[晁錯(鼂措) “BC 200年 ∼ BC 154年 3月 6日” 시대(時代)의 것이므로, 한반도(韓半島)에서는 제2차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났었다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夫胡貉之地,積陰之處也,木皮三寸,冰厚六尺,食肉而飲酪,其人密理,鳥獸毳毛,其性能寒 : : 호맥(胡貉)의 땅은, 날이 계속 흐린 곳에 있는데, 나무껍질(木皮)은 3촌(寸)이며, 얼음두께가 6척(尺)이나 되며, 고기를 먹고 타락(駝酪)을 마시는데, 그 사람들은 새나 짐승의 솜털과 털로 촘촘하게 꿰매는데, 그 본성이 추위에 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이곳의 땅(地)”이,
태평양(太平洋)판과 대륙(大陸)판이 서로 격(擊)하게 충돌(衝突)하여, 지진(地震)과 화산(火山) 폭발(爆發),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인하여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우뚝 변(變)해 버렸다”라는 것을, 과학적(科學的)으로 증명(證明)해야 하는데, 이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절대적(絶對的)인 몫이다”
이 정도(程度)도 증거(證據), 증명(證明)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멸(自滅)해야 한다. 그건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우롱(愚弄)한 최소(最小)의 “죄의 값”이다.
➎ “맥(貊)•맥(貉)•예맥(濊貊)•예맥(穢貊)•예맥(獩貊)=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는 뜻이고, 여기에는 “소수맥(小水貊)•양맥(梁貊)•휴혼제맥(休溷諸貉)”등의 지파(支派)들도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중국(中國)에서의 ‘맥(貉)=맥(貊)’에 대한 설명(說明)이며,
이들은 바로 하(河)의 상류(上流)【황하(黃河) 상류(上流)】로부터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수천(數千) 년 이어져 군림(君臨)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북방민(北方民)인 “호맥(胡貉)•호맥(胡貊)”이 당시(當時)의 시황제(始皇帝)를 노리니, 이에 격분(激憤), 격노(激怒)한 시황(始皇)은 대장군(大將軍) 몽념(蒙恬)에게 이들을 치게 하니 “하남(河南) 곧 황하(黃河)의 남안(南岸) 땅을 개척(開拓)하고 이곳에 하새(河塞)라고 불리우는 요새(要塞) 즉 장성을 쌓았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내막(內幕)이다.
사견(私見)이지만 : ‘시황(始皇)’에 의해 망(亡)한 연(燕)나라의 복수극(復讎劇)이 펼쳐져 “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奏錄圖書,曰亡秦者胡也”라고 하여, 시황(始皇)의 격노(激怒)로 인하여 진(秦)나라는 곧 망(亡)하게 되며, “호맥(胡貉)•호맥(胡貊)”은 또 날쌔고 용감무쌍(勇敢無雙)한 효기(梟騎)를 보내어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립(建立)토록 지원(支援)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筆者) 주(注) : B.C, 215年, 즉(卽) 진시황(秦始皇) 32년에, 바다로부터 돌아온 연(燕)나라 사람인 노생(盧生)이, 귀신의 일(事)이라 하며 녹도서(錄圖書)를 바쳤는데, 그 서(書)에서 이르기를, “진(秦)을 망하게 자는 호(胡)다”라는 말이 있었다. [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奏錄圖書,曰亡秦者胡也] 라고 하였으니,
결국(結局) 이로 말미암아 「시황(始皇)은, 수십만(數十萬) 대군(大軍)을 징집(徵集)하여 북방(北方)으로 보냈으니, 진(秦)나라를 망(亡)하게 한 자(者)는 바로 연(燕)나라 사람 노생(盧生)이었다」라는 것이고 그는 조국(祖國) “연(燕)”의 복수극(復讎劇)을 펼친 것이다.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라는 말이 결코 헛소리가 아님이 증명(證明)되는 것이다.】
● 중요(重要)한 것은 : “맥(貊)•맥(貉)•예맥(濊貊)•예맥(穢貊)•예맥(獩貊)=호맥(胡貉)•호맥(胡貊)”은 곧 “구려(駒麗)=구려(駒驪)”였고, “고구려(高駒驪)였다”라는 사실(史實)이다.
➤➤➤ ‘시황제(始皇帝)’가 두려워했던 북방지대(北方地帶) “호(胡)”가 바로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던 “맥(貊)”이었음은 곧 “구려(駒麗)”를 말하는 것이며, 아세아주(亞細亞洲)【구라파(歐羅巴)+아세아(亞細亞)】의 북방지대(北方地帶)의 패자(霸者)였다는 것이 바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이 확인(確認)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否定)할 수 없는 사실(史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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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자간고(墨子閒詁) 兼愛 中” 편의 : 〈以 利 燕 代 胡 貉 與 西 河 之 民〉이라는 구절(句節) 속의 “호맥(胡貉)과 서하지민(西河之民)”에 대해서 고찰(考察)해 보고자 함이다.
➨ 「묵자간고(墨子閒詁) 兼愛 中」 편에서 이르기를 :
〈以 利 燕 代 胡 貉 與 西 河 之 民〉이라 하였는데, 그 말인즉 “호, 맥【胡, 貉=胡貉】은 서하(西河)의 백성(百姓)들”이라고 한 것이다(西河之民).
또, 그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兼愛 中 : 以利燕代胡貉與西河之民 : (注) : 畢云:「『貉』,《非攻中》作『貊』,是。疑《左傳》云:『狄之廣莫,于晉為都』,廣即少廣,莫即貊也」 案:畢說非也,貊,貉之俗,《說文·豸部》云:「貉,北方豸穜也」職方氏有九貊,漢書高帝紀,顏注云:「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考工記,鄭注云:「胡,今匈奴」〉라고 하였다.
「맥(貉)」은 : 「서하지민(西河之民) 즉 서(西)쪽 하(河) 땅의 백성(百姓)이다.」라는 뜻이다.
A.D 1,900년 이후(以後)의 실증사학(實證史學) 역사해설(歷史解說)인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맥(貉), 맥(貊)」은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 강릉(江陵) 땅에 있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게 웬일?
◆ “서하(西河) 땅이 동북방(東北方)”이라면 :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남부지방(南部地方)에 옛 중국왕조(中國王朝)들이 있었다』라는 뜻이 되는데, 그곳은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다.
‘서하(西河)란 서(西)쪽에 있는 황하(黃河)’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맥(貉)은 중원(中原) 대륙(大陸)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 라는 것을 명백(明白)하게 증명(證明)해주는 내용(內容)이다.
왜곡(歪曲), 조작(造作)되지 않은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
○ 왜곡(歪曲)되지 않은, 조작(造作)되지 않은 조선사(朝鮮史)에서의 “말갈(靺鞨)”은, 동구라파(東歐羅巴)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서방(西方) 종족(種族)이다. “말갈(靺鞨)”은 곧 “마자르[Mazar/magyar]로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다.
이러한 이들이 “2 만리(萬里)”을 뛰어넘어 “반도(半島) 땅에 왔다”라는 것 자체(自體)가 난센스(nonsense)다【1. 터무니없는 생각, 허튼소리 2. 허튼수작, 말도 안 되는 짓 3. 아무 의미가 없는 말】
『호로하(瓠蘆河)는, 고구려(高駒驪) 망후(亡後), 당군(唐軍)과 고구려부흥군(高駒驪復興軍)과의 격렬(激烈)한 싸움이 벌어졌던 격전장(激戰場)이었다』 또 『호로하(瓠蘆河)는, 고구려(高駒驪) 망후(亡後), 신라(新羅)가 당군(唐軍)을 몰아내려 전쟁(戰爭)할 때, 신라(新羅)와 당군(唐軍) 간의 격전장(激戰場)이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호로하(瓠蘆河)는 고구려(高駒驪)의 남(南)쪽 경계(境界) 땅에 있었으며, 신라(新羅)의 칠중성(七重城) 북(北)쪽 지역에 있었다』라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해설자(解說者)들은 주석(注釋)에서 말하고 있다. 곧 ‘호로하(瓠蘆河)는 임진강(臨津江)’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常識)을 벗어나는 기록(記錄)으로, 반도(半島) 허리를 흐르는 임진강(臨津江)을 머릿속에 그려 넣으면 결코 이해(理解)할 수 없는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당(唐)이 점령(占領)한 고구려(高駒驪) 땅 안에서, 고구려(高駒驪)의 잔존세력(殘存勢力)과 말갈병사(靺鞨兵士)들이 고구려부흥군(高駒驪復興軍)이 되어, 점령군(占領軍)으로 주둔(駐屯)하고 있던 당(唐) 우령군 대장군 이근행(右領軍大將軍李謹行)의 군대와 호로하(瓠蘆河) 서(西)쪽에서 격전(激戰)을 벌였으나, 고구려부흥군(高駒驪復興軍)이 패(敗)하는 바람에 나머지 여중(餘衆)들은 신라(新羅)로 도주(逃走)했다』라는 이야기다.
또한 『이근행(李謹行)이 성(城) 밖 “호로하(瓠蘆河) 서(西)쪽으로 나가 격전(激戰)을 치루 있을 때”에, 또 다른 고구려부흥군(高駒驪復興軍)【고구려(高駒驪) 잔존세력(殘存勢力)과 말갈병사(靺鞨兵士)들】이, 당군(唐軍)의 주둔지(駐屯地)였던 벌노성(伐奴城)을 치고 포위(包圍)했으나, 이근행(李謹行)의 처(妻)가 성(城)에 주둔(駐屯)하고 있던 당군(唐軍)들을 지휘(指揮)하여 항전(抗戰), 고구려부흥군(高駒驪復興軍)이 퇴각(退却)하고 말았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더더구나 이러한 전투(戰鬪)가 벌어졌던 호로하(瓠蘆河)는, “여름과 가을(夏秋)에도 얼음두께가 2∼3척(尺)이나 두껍게 얼어붙은 혹한(酷寒)의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며, 이곳은 고구려(高駒驪)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고구려부흥군(高駒驪復興軍)과 연산도(燕山道) 총관(總管) 이근행(李謹行)이 격전(激戰) 을 치룬 때가 서력(西曆) 673년(年)이다〉 이때는 고구려(高駒驪)가 망(亡)하고 난 뒤 5년째 되던 해의 일이며, 『말갈(靺鞨)은, 고구려(高駒驪)에 복속(服屬)되어 고구려(高駒驪)의 일원(一員)이 되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 해 주는 것이다.
말갈(靺鞨)의 여러 종족(種族) 중에서 대부분(大部分)은 고구려(高駒驪)에 복속(服屬)되어 일원(一員)이 되었고, 일부(一部)는 당(唐)에 의탁(依託)하기도 했다. 연산도(燕山道) 총관(總管) 이근행(李謹行) 역시(亦是) 당(唐)에 귀부(歸附)한 말갈족(靺鞨族) 출신(出身)이다.
당(唐)에서는 이때도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전술(戰略戰術)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전략전술(戰略戰術)은, 고금(古今 :古往今來)이 똑같은 것이다.
➨ 신당서(新唐書)에서 말하기를 :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東拒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高麗. 中略. :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묘예(苗裔) 곧 후손(後孫)이다. 한(漢)의 낙랑(樂浪) 땅에서 살았는데, 횡(東西) 천리(千里)요, 종(縱:南北)으로 3 천리(千里)인데, 동(東)쪽으로 장인(長人)국에 닿고, 동남(東南)쪽엔 일본(日本), 서(西)쪽에 백제(百濟), 남(南)쪽은 바닷가이며, 북(北)쪽은 고구려(高駒驪)이다. 중략(中略). 長人者, 人類長三丈, 鋸牙鉤爪, 黑毛覆身, 不火食, 噬禽獸, 或搏人以食;得婦人, 以治衣服, 其國連山數十里, 有峽, 固以鐵闔, 號關門, 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 장인(長人)은, 사람의 일족(一族)으로 키가 3장(丈)에 이르는데, 톱니 이빨에 갈고리 손톱을 하고, 검은 털이 몸을 덮고 있으며, 음식은 익혀 먹지 않고, 금수(禽獸)를 씹어 먹거나, 혹은 사람을 때려잡아 먹는다. 부인(婦人)을 얻으면 그저 의복(衣服)이나 짓게 한다. 그 나라는 산(山)이 수십(數十) 리에 연달아 이어져 있어, 협곡(峽谷)이 있어 쇠문(鐵闓)으로 굳게 닫혀 있는데, 관문(關門)이라고 부른다. 신라(新羅)는 항상 궁수(弓手) 수천(數千) 명을 주둔(駐屯)시켜 지킨다》라고 하였다. 이게 신라(新羅) 땅의 지세(地勢) 형편(形便)이다.
위 기록(記錄)대로라면 :
➊ 「신라(新羅)의 동남(東南)쪽은 바다(海)가 아닌 육지(陸地)로써 일본[日本, 倭]과 접경(接境)하고, 동(東)쪽 역시(亦是) 육지(陸地)로써 장인(長人)의 나라와 경계(境界)하고 있고, 서(西)쪽은 백제(百濟)요, 북(北)쪽은 고구려(高駒驪)이다. 남(南)쪽만이 바닷가(瀕海)이다.」라는 이야기다.
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駒驪)와 장인국(長人國)과 왜국(倭國)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신라(新羅) 땅은, 한(漢)의 낙랑(樂浪) 땅으로, 횡(橫)【동서(東西)】으로는 1천(一千) 리요, 종(縱)【남북(南北)】으로는 3 천리(千里)가 된다【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라고 하였다.
➋ 신라(新羅)의 동(東)쪽 곧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동(東)쪽엔 바다가 아닌 ‘장인(長人)’들이 사는 나라가 있었고, 이곳은 수십(數十) 리에 걸쳐 협곡(峽谷)이 있어, 그곳 좁은 협곡(峽谷)에 철문(鐵門)을 세우고, 수천(數千) 궁노수(弓弩手)가 ‘일 년(一年) 365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장인(丈人)들이 침구(侵寇)하여 백성(百姓)들을 때려잡아 먹는 것을 막기 위해 궁노수(弓弩手) 수천(數千)을 365일 주둔(駐屯)시켜 입구(入口)를 지켰다는 이야기다.
➌ 반도(半島) 땅 :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동(東)쪽 어느 땅에 장인(長人)들이 사는 나라가 있었는가? 「이건 반도(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도(半島)라는 이름 자체(自體)가 삼면(三面)이 바다에 접(接)한 땅을 지칭(指稱)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현세(現世)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의 땅, 경상도(慶尙道)! 이곳 땅 어느 곳에 수십(數十) 리에 걸친 협곡(峽谷)이 있어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궁노수(弓弩手) 수천(數千)을 주둔(駐屯)시켰다는 것일까? 그러고도 신라(新羅)인들의 후손(後孫)이라는 말이 나오겠나? 역사(歷史) 공부(工夫)를 좀 하자!
또 “동남(東南)쪽의 왜(倭)의 땅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이냐?” 동남(東南)쪽 바다(海) 위[海上]에 집을 짓고 왜(倭)가 살았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바다(海)이지, 땅(地)이 아니지 않은가?
또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남(南)쪽의 경상도(慶尙道) 땅도 ‘맥(貉)=맥(貊)’이 날쌔고 용감(勇敢)한 효기(梟騎)를 보내어 도왔다는 유방(劉邦)의 한(漢)나라 땅이었다는 이야긴가?
『평양(平壤)이 낙랑(樂浪)이라는 말은 또 무엇이고 경주(慶州)가 낙랑(樂浪)이라는 말은 또 무엇이고, 계림(雞林)이 낙랑(樂浪)이라는 말은 또 무언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땅이라는 또 무엇이고… …』
당(唐)의 입장(立場)에서 바라보면 : 『백제(百濟) 침략(侵略)과 점령(占領), 그리고 수년(數年) 이곳 땅을 통치(統治)』, 『60∼70년(年)에 걸친 수십회(數十回) 고구려(高駒驪) 침략(侵略), 점령(占領), 수년(數年)간이나 이 땅을 통치』, 『신라(新羅)와의 18번의 대규모(大規模) 전투(戰鬪)를 겪었으니, 반도(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훤하게 궤 뚫어 볼 수 있을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것이 명확(明確)한 표현(表現)이다. 즉(卽)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라고 보는 것이 백번(百番) 타당(妥當)한 말이다.
따라서 혹(或) 『신구당서(新舊唐書) 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은 반도(半島) 땅에 대한 정보(情報)가 없었기 때문에 잘못 기록(記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버려도 좋다는 뜻이다.
○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가, 어떤 집단(集團)이, 어떤 세력(勢力)이 거짓과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를 “강제적(强制的)으로 주입(注入), 암기(暗記)토록 하여 세뇌(洗腦)시킨 것인지를 알 필요(必要)가 있다”』
모르면 백전백패(百戰百敗)하기 때문이고, 또 그걸 알면 매듭을 풀 수 있는, 기회(機會)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AD 1,945年 8월 15일 이후의 미군정(美軍政)과 AD 1,948年 미국(美國)을 등에 업고, 탄생(誕生)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권(政權)이다”』
이것이 당시(當時)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選擇)이었는지는 모르나, 결과적(結果的)으로 “한민족(韓民族)”에게는 지울 수 없는 굴레가 되었고, 치유(治癒)할 수 없는, 치유(治癒)될 수 없는 “치욕(恥辱)”이 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를 어떻게 원상복구(原狀復舊) 시킬 수 있겠는가? 아마도 불가능(不可能)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많은 나라(國家)와 땅(領土)과 민족(民族), 부족(部族)의 명예(名譽) 등의 문제(問題)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해(理解)한다거나 양보(讓步)를 한다는 것은, 곧 자신(自身)들의 현재(現在)를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숨 나오는 이야기요, 참 답답한 이야기다. [4편(篇)으로 계속(繼續)됩니다]
2023년 12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