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을 받은 책을 읽으면서 상을 받을 만 하다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드는 경우가 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바로 그렇다. 책을 읽고 나서 부제가 ‘어떤 2막의 사적(私的) 회담과 진혼가(鎭魂歌)’임을 알면 더욱 더 그럴 듯 하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 혹은 연극을 보고 나서 현대 사회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일생을 직장에 바친 뒤 버려지는 세일즈맨을 보고 현대인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우리는 모두 다 소모품이다.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인간이라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한순간 쓸모를 갖다가 낡으면 물러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다를 뿐.
왜 하필이면 세일즈맨일까. 그건 외형 때문일 것이다. 세일즈맨은 그 직업상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어야 하고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물건이 잘 팔릴 뿐 아니라 직업 특성상 현대의 온갖 정보, 적어도 자신의 직업에 관한 한 최신 정보에 숙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그런 그의 자신감은 금새 태도에 반영된다. 억지로 오기로 자신을 세우려드는 일처럼 힘든 것은 없다. 자신뿐 아니라 남들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일. 오기는 금방 바닥난다.
물건을 파는 일은 곧 자신을 파는 일과 같다. 그럴듯하게 치장한 외모로 호감을 얻고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빌려온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저당 잡히고 세월을 미리 가져와 만들어낸 허구다. 그건 윌리에게는 집과 같다. 윌리는 모든 물건을 대부 받아 사들인다. 수십 년 간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집뿐 아니라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냉장고도 월부로 사들인다. 사는 동안 집은 낡고 삐꺽거리며 냉장고는 할부가 끝나자마자 고장나 새로 사야 한다. 윌리의 인생은 저당 잡힌 인생, 월부 인생이다. 어디 윌리만 그럴까.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윌리는 끊임없이 알라스카로 떠난 형, 벤을 떠올린다. 벤은 그에게 투자의 대상, 크게 한탕 할 수 있는 꿈의 상징이다. 형과 떠나는 대신 그는 세일즈맨을 택했고 그러면서도 씨앗을 뿌려 텃밭을 가꾸는 소박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식 사고방식으로 일관했던 그는 쓸모가 없어졌다. 아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얼렁뚱땅 살아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호탕함과 외모로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그는 아들들에게 누누이 강조한다. 옛시대에는 통용되었던 그의 철학은 뿌리가 굳건하지 않기에 점점 그는 허물어진다. 그것이 현대인의 비극일까. 현대적일 수 밖에 없는 요소가 곳곳에 보이지만 어쩌면 그보다는 더 심각한 인간 본연의 문제가 아닐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구 시대의 사고를 고집하기에 도태된다는 것은 어느 세계나 어느 시절이나 당연하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거나 읽은 사람이라면 후에 다니엘 월레스(Daniel Wallace) 의 빅 피쉬를(Big Fish: A Novel Of Mythic Propotions) 를 읽으면서 혹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빅 피쉬를 보면서 상당한 유사점을 찾아냈을 것이다. 세일즈의 죽음이 철저하게 현실로 일관했다면 다니엘 윌리스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너무도 가슴아파 또 다른 환상을 곁들인 빅 피쉬를 쓰지 않았을까. 팀 버튼은 세일즈맨의 죽음이 너무 비참해 환상을 곁들여 빅 피쉬를 만들었을 것이다. 빅 피쉬와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만큼 많은 부분에서 서로 겹친다. 너무도 닮은 희곡과 소설, 그러나 보는 시각이 다르고 결론이 다르다.
세일즈맨인 두 아버지, 그들은 평생 집을 떠나 물건을 팔러 돌아다닌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이 적당히 즐기면서 생의 어두운 면을 이용하면서 돌아다녔다면 다니엘 윌리스의 세일즈맨은 환상을 마시면서 돌아다닌다. 아서 밀러의 주인공 윌리가 집에 돌아와 큰소리쳐대듯, 자신에 관한 모든 것과 아이들에 관한 진실에서 눈을 감아버리고 달콤한 순간순간으로 진실을 외면하듯 빅 피쉬의 세일즈맨 또한 달콤하고 유쾌한 환상을 주변인들에게 늘어놓아 듣는 이를 즐겁게 한다. 윌리가 아들의 기를 세워준답시고 억지로 긍정적인 면들만을 보듯 빅 피쉬의 아버지는 아들의 탄생도 보지 못한 순간을 환상으로 모면하려 한다. 기실 두 사람은 뛰어난 세일즈맨이 못된다. 그들 둘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면 좋은 면만을 보려하고 좋은 일만을 말하려 하며 아픈 일, 어려운 일에는 애써 눈을 감는 것이다.
윌리의 아들 비프는 깊은 철학 없는 아버지의 방침을 따른다. 외모만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의 인식만을 중시하는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비프는 남의 물건에 손대고 그리고 낙제 당하며 결국에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실패자의 길을 걷는다. 빅피쉬에 나오는 세일즈맨, 에드워드의 아들은 다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허황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윌은 자신만의 길을 걸어 자리를 잡으며 아버지의 환상이 진짜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따지는 극히 이성적인 길을 걷는다.
빅 피쉬가 보기 편하다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보는 내내 지속된다. 일상이, 내가 숨기고 싶었던 비겁함이 사정없이 쏟아져 나와 가끔 부끄럽고 가끔 가슴아프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다. 저 무대 위에 펼쳐진 삶은 거짓없는 생이라는 것을. 결코 보기 좋을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세일즈맨의 죽음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위협하며 쥐어뜯는 것이다.
첫댓글고등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 일부가 나옵니다. 다음 수업 때는 희야님 글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삶이라고나 할까요? 죽음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족과 결부시켜 택해야만 하는 삶... 그것도 의지라고 한다면 의지일 수는 있겠지요.
첫댓글 고등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 일부가 나옵니다. 다음 수업 때는 희야님 글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삶이라고나 할까요? 죽음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족과 결부시켜 택해야만 하는 삶... 그것도 의지라고 한다면 의지일 수는 있겠지요.
갑자기 부담감이 팍 밀려오는데요. 가끔 이런 책은 고등학생들에게 너무 무겁지 않나 생각해요. 제가 이해가 느려서일까요?
언젠가 읽었던 책을 희야님을 통해서 다시.....여전히 커피콩을 볶으면서 잘 지내시지요?^^
얍! 콩 볶으면서 잘 지냅니다. ^^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커피 야그 정말 재밌었는데, 영화 야그도... 이젠 늙어서 글자가 빡빡하게 많으면 따라 읽지도 못하니 원...쩝...
갑자기 학창시절로 돌아간거 같아요,,,여고 독서실에서,, 아무생각없이 읽고는,,, ㅎㅎ이 책을 다 보았노라고 말했더랬죠,,, ㅎㅎ 겁도 없이 말이죠,,,
희야님, 세일즈맨의 죽음과 빅 피쉬를 연결시켜서 글을 써서 세일즈 맨의 죽음을 더 확실히 알게 되면서 빅 피쉬라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일석이조의 얻음이 있네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