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요한1,1-18
뱀의 본성을 거스를 두 노를 젓고 있는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개자란 뜻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말은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표현될 때는 생각과 분리되어
소리로 진동합니다.
이는 큰 희생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려면 생각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때 상당히 위험합니다.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당할 때는 그 말을 한 사람도 무시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기 전에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율법은 목적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원죄의 영향으로 우리의 본성은 사랑과 반대로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율법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보기만 할 뿐 뒤로 후퇴할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노가 필요합니다.
한 개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입니다.
은총은 보는 것이고 진리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들음으로써 우리는 동물의 본성을 거슬러 창조자의 본성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들음은 말씀의 전례와 같고 말씀을 봄은 성찬의 전례와 같습니다.
윌마 루돌프의 삶은 역경을 극복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어머니 블랑쉬 루돌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40년 6월 23일 테네시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조산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22남매 중 스무 번째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마는 4살 때 근육 약화를 일으키고 심한 경우 마비를 일으키는 질병인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이 질병으로 인해 그녀의 왼쪽 다리와 발은 약해지고 기형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는 걷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블랑쉬는 인종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의료 서비스가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간 치료를 위해 윌마를 업고 50마일 떨어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서 그녀는 또한 윌마의 약한 다리를 하루에 네 번 마사지하는 등 물리 치료 기술을 배우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윌마에게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12세가 되자 그녀는 다리 보호대를 벗어났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농구를 하고 육상 경기를 하며 빠른 속도로 주목받았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100, 200, 400미터 육상 경기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녀는 단일 올림피아드에서 이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라는 사랑으로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반드시 은총과 진리를 요구합니다.
블랑쉬는 딸 윌마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말로도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윌마는 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버리지 않고 ‘감사’의 감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만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노를 잡고 젓기만 하면 완전한 감사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단 5분씩이라도 양쪽 노를 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후퇴합니다.
은총과 진리로 감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숙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의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탄생하신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성당에서 구유를 감사 일기로 꾸민 이유가 이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 내려오신 하느님!
4년 전 근처 낚시터에 유기된 작고 예쁜 믹스 강아지 두 마리를 구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 강아지는 뒷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동물병원에서 큰 수술과 재활을 마친 후 입양을 보냈습니다.
동생 강아지는 저희 수도원에서 입양했는데, 이곳에 적응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안정되고, 영양 섭취도 잘 되서 그런지 인물도 살아나고 털에 윤기도 반질반질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서울로 입양간 언니 소식이 없길래, 잘 지내고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언니 강아지의 부고장이 날아온 것입니다.
예쁜 꽃들 한 가운데 언니 강아지의 영정 사진이 있는 걸 봐서 장례식까지 잘 치렀나 봅니다.
4년 여간 행복하게 지내던 언니 강아지가 얼마전 산책나갔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장례를 잘 치렀고 화장해서 납골당에 잘 모셨다고, 사별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노라고...
언니 강아지의 부고를 들은 저는 갑자기 저희 집 식구가 된 동생 강아지 바둑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혈육인데,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둑이를 불렀습니다.
품에 안고 알아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제가 그랬습니다.
“바둑아! 이제 너 어떡하냐? 서울 간 언니가 며칠전 세상을 떠났단다! 교통사고로. 누구든 언젠가 다 떠나는거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여기서 잘 살아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고 몸을 흔들었지만, 바둑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저 멀뚱멀뚱 저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바둑이하고 말이 좀 통했으면 참 좋을텐데...참 안타깝다.
내가 강아지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가 되었으면...
그럼 언니 소식도 전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을텐데...
만일 말이 통하게 되면 언제나 궁금했던 질문 한 가지, 털도 그리 많지 않은 바둑이가 강추위에도 지붕 있는 집에 절대 안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을텐데...
제가 이 웃기는 체험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 신비의 열쇠가 제 작은 체험 안에 어느 정도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가련한 우리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려고, 우리와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시려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
아마도 그것이 육화강생의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성탄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둑이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정말로 강아지가 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고개를 가로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고개를 세로로 흔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정녕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당신 키를 극도로 낮추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포기하시고 나와 하나되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강론>(2023. 12. 25. 월)(요한 1,1-18)
<성탄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로 시작해서(창세 3,23),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입니다(묵시 22,3).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창세 3,17), 묵시록 22장을 보면,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묵시 22,3).
이것은 ‘죄’로 시작해서 ‘해방’으로 끝나는 구원 사업의 처음과 끝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그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증언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요약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한처음에’ 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입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의 영원함을, 즉 창조 이전의 영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첫 등장을 나타내는 말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인데(창세 1,3),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과 ‘하느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한처음부터 함께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서 저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즉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에게로 오신 날”이고, 종말과 재림의 날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죄’ 라는 것은 한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예수님은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죄가 생기기 전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이고,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 때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루카 7,16).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셨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메시아 강생은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수련과 수행을 통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원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도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죄를 짓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라고 고백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을 감사드리는 날이고, ‘참 해방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뒤를 더욱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