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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죄수의 수기
정 비 석
라일락꽃이 한창 피어나는 어느 봄날, 나는 고향 선배인 송파 이시훈(松坡 李時勳) 선생한테서 저녁 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선생 댁 정원에 있는 라일락꽃이 만개했으므로, 고향 친구 몇몇 분과 꽃향기를 나눌 겸 해서 저녁을 같이하고 싶으니, 나더러도 기어이 참석해 달라는 전달이었다. 나는 송파 선생한테 저녁 초대를 받은 것도 황송한 일이거니와, 고향 친구들과 함께 꽃향기를 즐기려는 그의 아취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명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연령으로 보나 나의 선친과의 관계로 보나, 송파 선생한테 저녁 초대를 받을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송파 선생은 연세가 칠십 가까운 분으로 나의 선친과는 막역한 친구였었다. 그는 삼십 년 가까이 판사로 봉직하다가, 해방 직후에 판사의 직책을 물러나서 지금은 변호사를 개업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변호사란 간판뿐이고 실상은 정원에 화초나 가꾸면서 여생을 한가롭게 보내는 분이었다.
아무러나 대선배한테 저녁 초대를 받은 이상 아니 갈 수 없으므로, 나는 시간에 늦지 않도록 부지런히 대어 갔다. 이날 초대를 받은 분들은 칠팔 명 가량 되지만, 모두가 주인의 친구인 백발이 성성한 고향 선배들이었고, 나이를 달리하는 젊은 축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아마 나만은 선친을 생각해서 초대한 모양이었다.
주인 되는 송파 선생은 사랑문을 활짝 열어 젖혀 놓고 초대한 친구들에게 꽃구경을 시키면서,
“향기로운 꽃향기를 나 혼자서만 맡기가 아깝기에 오늘은 자네들을 일부러 불렀네. 삼팔선이 가로막혀서 우리들은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지를 못하게 되었으니 이런 기회에 고향에 대한 회고담이나 마음껏 즐겨 보세!”
하고 쓸쓸히 말하였다:
주안상이 나오면서부터 그들의 회고담은 시작되었다. 사람이란 늙어 갈수록 회고담에 흥미를 느끼는 법인지 누구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소년처럼 즐거워하였다.
그들이 회고담을 즐기는 동안, 나는 잠자코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대한 회고담이 세 시간 가량 계속된 뒤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송파 선생은, 잠잠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나에게 민망한 생각이 들었던지,
“참, 정군! 자네는 요새 소설을 많이 발표하데그려! 나는 소시에는 소설을 별로 읽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간도 한가하고 해서 소설을 제법 많이 읽는 편이네. 특히 신문 잡지에 발표되는 자네 소설은 눈에 뜨이는 대로 하나도 빼지 않고 읽네. 그런 의미에서는 아마 나도 자네의 충실한 애독자의 한 사람일 걸세! 허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신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선생님이 제 소설을 읽어 주신다는 데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아니야, 어떤 것은 매우 재미있던걸. 자네가 쓰는 소설은 대개가 애정소설인 모양인데, 보기에는 얌전한 자네가 어떻게 그 방면에 조예가 깊은가?”
애정 방면에 조예가 깊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는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
“제가 뭐 압니까. 일종의 붓장난에 지나지 않습죠.”
“설마 모르고서야 그렇게까지 쓸 수 있을라구! 내 친구의 아들로서 자네 같은 소설가가 났다는 것은 나로서도 매우 기쁜 일이야. 그런데 참, 자네를 만나거든 꼭 보여 주고 싶은 책이 한 권 있는데, 지금 구경하려나?”
“무슨 책입니까?”
“그 책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걸. 내가 자네한테 보이고 싶다는 책은, 이를테면, ‘어떤 여죄수의 수기’일세. 지금부터 근 이십 년 전, 내가 아직 사법관으로 있을 때, 나는 본부(本夫)를 살해한 어떤 여자 죄수를 재판한 결과, 징역 십 년의 언도를 내린 일이 있는데, 그 여자는 징역을 사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범죄의 동기와 범죄하던 때의 사실 등을 하나도 숨김없이 기록했더란 말일세. 그러니까 보통 책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여자의 수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는지 모르지.”
그 소리를 듣자, 나는 매우 흥미를 느꼈다.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시다면 한번 보여 주십시오!”
“그러잖아도 자네한테는 꼭 한번 보여 주고 싶었네!”
송파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랫목에 놓여 있는 문갑을 열고 커다란 노트 한 권을 나에게 꺼내어 주며,
“나는 삼십 년 가까운 법관생활을 했지만, 이 수기를 읽어 보고는 사법관생활에 자신을 잃어버렸네. 그래서 그날로 판사의 직책을 사임하였네! 이를테면 이 수기는 내가 판사의 직을 물러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말일세.”
하고 설명하였다.
“어떤 내용의 수기 였길래……?”
“어떤 내용이나마나 재판관이란, 범죄 사실의 진상을 잘 모를 경우에는 제멋대로 판단해 가지고 피고의 심정을 모르는 채 냉혹한 언도를 내릴 경우가 때때로 있는데, 이것도 그런 케이스의 하나였어. 자네는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우리가 술을 먹는 동안에 이 수기나 읽어보게. 이런 것도 자네가 소설을 쓰는 데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를 걸세.”
“감사합니다. 지금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문제의 노트를 받아, 즉석에서 펄쳐 보았다. 대학 노트에 연필로 꼭꼭 박아 쓴 그 노트는 글씨도 제법 깨끗하거니와, 문장도 결코 서툰 편이 아니었다.
이제 그 수기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불행한 여인의 수기
나는 나의 남편을 죽인 죄로 오늘 징역 십 년의 언도를 받았다. 관선 변호인은 나더러 공소를 제기하도록 권고했으나, 나는 재판장의 언도를 달갑게 받을 생각으로 즉석에서 공소권을 포기해 버렸다. 내 손으로 남편을 죽여 버린 내가 이제 무슨 면목으로 재판장의 판결에 불만을 품겠는가. 검사의 논고에도 있었고, 재판장의 판결문에도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십 년 가까이 부부생활을 계속해 온 남편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린 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독부(毒婦)인 성싶다. ‘신인(而申人)이 공노할’ 만치 악독했던 나의 범죄 사실에 비기면, 십 년이라는 징역살이는 오히려 너무도 관대한 처벌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내 남편을 죽인 년이다.’
나는 지금도 그 사실을 생각하면 전신에 몸소름이 끼쳐지는 것을 금할 길이 없다. 내가 그렇게도 악독한 계집이었다는 것은 나 자신도 전연 모르던 사실이었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가 그처럼 악독한 여자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으로 남편을 죽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니, 확고부동한 이 범죄 사실 앞에서 나를 변호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미결수로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는 다섯 달 동안에 나는 자살을 몇 번이나 기도했던 것인가. 내 남편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린 나 같은 년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아직도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다는 증거를 나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마땅히 자살을 했어야만 옳을 일이었다. 형무소 안에서도 자살을 하자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허리끈으로 목을 졸라매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요, 하다못해 이빨로 혀를 깨물어서라도 죽을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자살은 아니 하였다.
내가 자살을 단행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나는 정당한 처벌을 받음으로써 모든 여성들에게 나 스스로가 하나의 경종이 되자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 내 손으로 죽여 버린 남편의 영혼 앞에 속죄하기 위해 나 자신은 언제까지나 살아서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이 죽어 버리면 남편을 죽인 나의 번민과 고뇌는 그 순간으로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편한 길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편한 길을 택하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목숨을 이어 나가면서 한평생을 두고 양심적인 가책에 시달리고 싶었다. 이를테면 남편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고난의 가시덤불길을 걸어갈 결심이었다는 말이다. 내가 형무소 안에서 살아 있을 목적은 그 이외의 아무것도 없었다. 형벌을 조금이라도 가법게 받고 싶다거나, 징역을 살고 나가거든 여생을 또 다시 행복스럽게 살아 보겠다거나 그러한 욕망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었다.
이미 그런 결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검사에게 취조를 받을 때나 재판정에서 심문을 당할 때나 나에게 유리할 듯싶은 답변은 한 마디도 진술하지 않았다. 범죄 사실을 너무도 솔직하게 진술했기 때문에 재판장은 오히려 심상(心狀)을 상한 듯이 보였고, 나의 관선 변호인도 답변에 신중을 기하도록 몇 번이고 충고해 주었으나, 나는 그런 점에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종신징역을 받거나 사형을 당하거나 나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형벌이 두렵다기보다도 사랑하는 남편을 죽였다는 나의 범죄 사실을 나 자신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제니 말이지 내가 어째서 사랑하는 남편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지, 그 순간의 심리를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남편을 죽인 악독한 계집이 되어 버렸으나, 나는 이십 년 가까운 결혼생활 중에 남편을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었고, 다듬잇방망이로 그의 이마빼기를 내리갈기던 그 순간에도 그를 죽이려는 의욕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망이로 남편을 내리갈겨 죽게 만들고 말았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내가 아무리 이런 소리를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내 말을 절대로 곧이듣지 않으리라.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니, 내 말을 곧이듣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 살의도 없이 남편을 죽인 것이 나로서는 엄연한 사실이므로 내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 이 사실을 재판장에게만은 알리고 싶다. 내가 지금 붓을 들어 이 수기를 기록하는 목적은 오로지 그 점에 있을 뿐이다.
남편을 죽이게 된 나의 심리적 동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결혼생활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정을 모르고서는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 나의 미묘한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남편과 나와의 결혼생활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해 보기로 하자. 미리 말해 두거니와, 아래에 기록하는 사실들은 모두가 추호도 거짓 없는 솔직한 고백이다. 내가 이제 무엇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겠는가.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기 위해서는 남녀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추잡한 사건도 나는 기탄없이 기록할 결심이다.
나의 결혼생활은 이러하였다.
나는 서울서 어느 중류계급의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한문교사인 온건착실한 신사였었고, 어머니는 양갓집 규수인 관계로, 우리집은 언제나 규모가 짜여 있었고, 가정은 어느 때나 평화로웠다. 그러한 가정에 외딸로 태어난 나는 처녀시절에 누구보다도 행복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여학교를 졸업한 열아홉 살 나던 해 봄에, 부모들이 정해 주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김정환(金正煥), 나이는 나보다 세 살 맏이인 스물두 살, 동대문 밖에서 조그만 포목전을 경영하는 집 둘째아들이었다. 요새 세상 같으면 부모들이 정해 주는 결혼에 불평을 말하면서 연애결혼을 주장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나, 나는 연애결혼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염두에도 없었다.
신방을 치른 그날부터 나도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고 남펀 역시 나를 몹시 사랑하였다. 우리들의 결혼생활은 어느 누구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했었다.
결혼생활 오륙 년이 지나도록 자녀 간에 소생이 없는 것이 약간 섭섭하기는 했으나, 우리 내외는 그런 문제에는 별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식이 없다고 첩을 얻는 것은, 남편이 방탕을 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거 아냐!”
어린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남편은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곧잘 그런 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몸소 실천해 왔었다.
나는 남편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선량한 남편 밑에서는 누구나 정숙한 아내가 안 될 수 없겠지만, 나도 누구 못지않게 정숙한 아내였었다.
‘아아, 그렇듯 정숙하던 내가 남편을 살해하다니…….’
결혼생활이 칠 년째 되던 해 봄에 우리 가정에는 커다란 불행이 닥쳐왔다. 전국적으로 밀려오는 경제공황에 휩쓸려서 시부모가 경영하던 포목전이 파산을 선고하고 문을 닫아 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집에서 장사를 돕고 있던 남편은 졸지에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점포를 닫게 되었다고 너무 심뇌는 하지 마세요. 당신과 내가 발벗고 나서면 아직도 젊은 우리들이 무슨 벌인들 못 하겠어요.”
나는 실망에 빠지기 쉬워하는 남편을 그런 말로 위로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충신이 나오고, 가정이 어지러워졌을 때 열녀가 나온다는 옛 성현의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친정 아버지한테서 많이 들어 온만큼, 나는 이런 기회에 남편에게 대해 나의 참된 가치를 보여 줄 결심이었다. 그리하여 시댁에서 파산선고를 내린 지 일주일 전부터 나는 재봉틀 삯바느질을 시작하였다. 남편은 내 얼굴을 대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고,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겹도록 행복스러웠다. 그토록 행복스러운 나에게 삯바느질하는 고생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힘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도와 갈 수 있다는 즐거움―그런 즐거움은 나와 같은 경험을 가져 보지 못한 여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행복이었다.
남편을 벌어먹이는 가정부인들은 까딱 잘못하면 남편에게 건방져지기가 쉽다는 말을 흔히 들어온다. 남자들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판관사또 노릇을 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남편을 먹여살린다고 해서 남편을 홀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남편을 업신여기기는커녕 활동무대를 잃어버리고 어깻죽지가 축 늘어져 있는 남편을 측은하게 생각한 나미지,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나는 그 시절에 남편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였다. 내 손으로 이런 소리를 기록하기는 마음에 꺼리지만, 나는 역경'에 처해 있을수록 더욱 정숙한 아내일 수 있었다. 그것만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다리가 팅팅 부어오르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재봉틀을 놀린 결과, 일년 가량 고생을 하고 났을 때에는 삼백 원 가까운 저축도 생기게 되었다(그 당시의 삼백 원이라면 오늘날에는 백만 환의 가치에 해당하는 금액일 것이다).
그러자 남편은 그 돈을 밑천으로, 신의주에 있는 친구와 함께 포목전을 개업해 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신의주는 만주와의 밀무역 관계로 포목 경기가 굉장히 좋았는데, 남편의 상업학교 동창생 중에 부자 친구가 있어서, 나의 남편더러 신의주로 내려와서 포목전을 시작해 보자는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실망에 빠져 있던 남편이 이제 다시 용기를 얻어 새 사업에 착수해 보겠다는 것이 하도 고맙고 반가워서 나는 대번에 찬성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에 남편과 나는 포목전을 개업하기 위해, 정든 서울을 버리고 신의주로 내려가게 되었다.
사업은 순조로워서 우리가 경영하는 포목전은 서울에서 경영하던 가게보다 세 갑절이나 큰 것이었다. 남편도 사업에 성공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당신 덕택이오. 지난날 당신이 밤잠을 못 자가면서 삯바느질을 하지 않았던들, 우리는 이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 생각을 하면 당신이야말로 우리집의 살아 있는 신주(神主)님이야!”
하고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남편의 그런 말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사랑하는 남편인데, 나를 그처럼이나 소중하게 여긴다니, 남편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때에는 이미 결혼한 지 십 년이나 되었건만, 우리 내외는 신혼생활과 조금도 다름없이 즐거웠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한평생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인지, 결혼 십일 년째 되는 해에 남편은 천만뜻밖에도 폐결핵으로 눕게 되었다. 의사가 X광선을 찍어 보고 폐결핵이라는 선언을 내렸을 때, 나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남편의 건강을 회복시켜 놓을 결심이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값비싼 한약도 지어다 먹이고, 끼니마다 영양 가치가 풍부한 찬을 대접하였다. 만약 남편이 죽는 경우에는 나도 따라 죽을 결심이었으니까, 병구완에 대한 나의 정성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을 나처럼 극진히 간호한 아내가 이 세상에 그다지 흔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로 나는 남편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결심이었다. 남편은 밤잠도 안 자고 간호하는 나를 볼 때마다,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죽지는 말아야 할 터인데!”
하고 탄식한 적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
그런 때면 나는 눈물이 복받쳐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혀를 씹어 삼키면서도 남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반년이 넘어도 병세에는 별로 차도가 없었다. 일년이 지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년 동안에 남편은 여러 차례 나의 몸을 요구해왔으나, 나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 끝끝내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도 나이가 삼십이고 보니, 일년간이나 남편과의 접촉이 없이 살아오기가 얼마나 괴로웠으랴. 그러나 일시적인 쾌락을 억제하지 못해 남편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나의 쾌락을 남편의 생명과 바꾸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므로, 나는 남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몸을 허락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러기에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된 그날부터, 나는 하루도 옷고름을 끌러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도 완강히 거절하므로, 남편은 어느 날 밤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당신은 나한테 맘이 변했단 말인가. 어째서 나의 요구를 그렇게도 거절하는 거야.”
하고 나무란 적도 있었다.
그런 때면 나는 마음속으로 통곡을 하였다.
“내가 죽기 전에는 어째서 당신한테 마음이 변하겠어요. 모두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고 괴로운 대로 참아 주세요. 당신이 정말 이러신다면 저는 당신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친정에 가 있겠어요!”
사실, 나의 몸을 요구해 오는 남편의 욕망을 무마하기란 용의한 일이 아니었다. 남편을 타이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건강한 나 자신의 생리적 욕망을 억제하기는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끝끝내 그것을 참아 왔다.
일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장사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자 그 무렵에 남편은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폐병에는 아편을 먹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아편을 빨기 시작하였다. 그 모양을 보자 나는 무심중에 몸서리를 쳤다. 아편중독자가 되면 신세를 망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을 병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아편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마약’이어서, 아편을 빤 지 몇 달 만에 남편 병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남편은 이미 아편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병이 문제가 아니라, 아편중독이 문제였던 것이다.
아편중독을 고치기 위해, 나는 이듬해 봄에 남편을 끌고 서울로 솔가해 올라왔다. 비록 친구네 집 곁방살이를 할망정, 그리고 남편이 아편중독자일망정 이태 만에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게 된 나는 다시금 남의 아내로서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오랫동안 중단했던 재봉틀 삯바느질을 다시 시작하기가 을씨년스럽기는 했으나, 남편이 아편만 끊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신의주는 만주가 접경인 관계로 아편이 흔한 곳이다. 그러므로 신의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오기만 하면 아편을 구하기가 어려워서라도 남편은 아편을 끊게 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 보고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를 깨달았다. 돈만 있으면 서울서도 아편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그날 남편에게 아편 자금을 대어 주면서도, 저녁이면 눈물을 홀려 가며 아편을 끊어 주기를 호소하였다. 남편도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아편을 끊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아편중독자의 맹세는 그때뿐이어서 몸에서 약기운만 없어지면 금방 죽는다고 지랄발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정말로 죽어 버리면 큰일이므로, 나는 그때마다 인정에 끌려 돈을 주곤 하였다.
그렇게 비참한 생활이 삼사 년 계속되는 동안에 남편은 아편중독이 골수에 배고 말았다. 아편중독이 골수에 배고 보니 이제는 남편으로서도 불구자나 다름없었다. 열흘 스무 날이 가도, 아니 한 달 두 달이 넘어도 남편은 나의 몸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남편을 사랑하였다. 그럴수록에 나에게는 남편이 불쌍하였다.
몇 해를 두고 삯바느질로 남편의 아편값을 마련해 주자니 살림살이는 아주 엉망이었다. 그래도 남편이 죽은 것보다는 낫다 싶어서, 나는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면서도 남편을 극진히 공대하였다. 수중에 돈이 없을 때에는 남에게서 꾸어다 주거나, 심지어는 입고 다니는 옷을 팔아서라도 약값만은 줄기차게 대주었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주인집 남편도 옆에서 보기가 하도 딱했던지, 하루는 나를 보고,
“아주머니! 아편 장난하는 사람에게 돈을 그렇게 대주면 어떡합니까. 남의 가정지사에 지나친 간섭 같지만, 이제부터는 일체 돈을 주지 마십시오. 아편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단쇠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랍니다.”
하고 충고를 해주었다.
나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편을 못 먹으면 금방 죽는다니 어떡합니까.”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생사람만 괴롭힐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나을는지도 모르죠.”
사실 그것이 옳은 말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돈 때문에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삼사 년을 두고 한집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나는 주인 남자한테 많은 동정을 받았다. 집 주인은, 나의 남편이 동대문 밖에서 포목점을 경영할 때부터 알게 된 사람으로서, 오 년 전에 상처한 이후로 지금은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는 근실한 홀아비였다. 나도 그를 존경했지만, 그 역시 나를 무척 불쌍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그 무렵에 남편은 때때로 집을 비웠다. 밤늦게까지 아편굴에서 마약을 빨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지곤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때면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런 일이 얼마간 계속된 어느 날, 이날도 아편이 잠뿍 취해 돌아온 남편은 아랫목에 드러누워서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였다.
“여보, 주인집 친구가 아마 당신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끼며, 정색으로 남편을 나무랐다.
“오늘 거리에서 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 말이, 세상에 당신처럼 얌전한 마누라가 없는데, 그런 마누라를 왜 불행하게 하느냐고 그러겠지.”
“그게 사실이지 뭐예요.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는지 아세요!”
그러나 남편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아니 하고,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는 모양이니, 당신도. 그 사람을 좋아하구려!”
“뭐요? 당신이 정말 미쳤나 보구려…… 아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요?”
결혼생활 십육 년 만에 내가 남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너무도 지독한 모욕에 치가 떨렸다. 내 심정을 이렇게도 몰라주는가 싶어서 가슴이 쓰라렸다. 그러나 남편은 개구리가 물소나기를 뒤집어쓴 것만치도 놀라지 않았다.
‘아, 남편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까지 전락해 버렸구나!’
아편중독이 심하면 자기 여편네까지 팔아먹는다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남편은 이미 거기까지 도달한 성싶었다.
남편이 아편에 취해 침을 질질 흘리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는 동안, 나는 재봉틀을 놀리면서도 한없이 울었다.
그 후에도 남편은 그와 비슷한 소리를 가끔 입 밖에 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일체 귀담아듣지 않았다. 남편 구경을 못 하면 못 했지, 외방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집 남자도 물론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주인집 남자도 다시없는 신사였었다.
그러나 주인집 남자가 내 남편에게 나의 칭찬을 무수히 하더라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나도 그에게 까닭 모를 친밀감을 가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인정으로 보아 당연한 감정 이었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 달이 무척 밝은 밤이었다. 이날 밤도 나는 밤이 깊기까지 재봉틀을 돌리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새벽 세시경에야 잠이 들었다. 물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이 들자, 나는 이내 꿈을 꾸었다. 몹시 험악한 꿈이었다. 오동짓 달 설한에 남편이 나의 옷을 발가벗겨 문 밖으로 내쫓고, 칼부림을 하며 따라오는 꿈이었다. 남편이 칼을 내리갈기는 바람에 나는 칼을 피하려고 악 소리를 치다가 고함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전신에는 식은땀이 쫘악 흐르고 있었다.
내가 고함 소리를 어떻게나 크게 질렀던지 안방에서 주인 남자가 자다 말고 대청으로 달려나와 내 방으로 뛰어들어오면서,
“아니,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 순간, 우리들은 환한 달빛을 통하여 서로 보아서는 안 될 상대방의 육체를 보았다. 때가 무더운 밤인지라, 나의 몸에 감은 것이라고는 드로즈 하나뿐이었고, 주인 남자 역시 전신 나체에 사루마다 바람이었다. 숨김없이 말하거니와, 나는 그 순간 그의 건강한 육체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강력하게 끌렸다. 그것은 황홀한 자극이기도 하였다. 모르면 모르되, 주인 남자도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리라.
“아니, 왜 고함을 지르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제가 흉악한 꿈을 꾸다가 그만…….”
나는 당황히 잠옷을 주워 입으며 대꾸하였다.
주인 남자도 자기 자신이 나체나 다름없음을 그제야 깨닫고 적이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해서 내 방에서 이내 나가 버리지는 못하였다. 방 안에 우두커니 선 채 무엇인가 주저하는 빛을 보이는 순간, 나의 가슴은 몹시 뛰놀았다. 나는 그가 일 초라도 속히 나가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빨리 나가 달라고 재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 역시 무의식중에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신경이 찢어진 듯이 긴장된 몇 초가 지나자, 주인 남자는 내 옆으로 조용히 다가오며 무엇인가 중얼거렸으나 그때에는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의 손이 나의 몸에 닿았을 때, 나는 몸부림을 치며,
“이러심 안 돼요! 어서 나가 주세요!”
하고 말한 것만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항거였던지 혹은 수치심이나 양심의 가책에서 치레껀으로 중얼거린 항거였던지, 그것은 자신도 모를 일이요, 나로서는 영원히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주인 남자에게 예기치 않았던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나는 남편과 육체적 접촉이 끊어진 지 일년이 지났으므로, 어찌 생각하면 나의 육체는 무의식중에 주인 남자를 요구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사실 그 순간 나는 전연 의식이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쾌락이 끝나는 순간 나에게는 무서운 고민이 엄습하였다.
‘나는 화냥년이다. 나는 외방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년이다. 나는 무서운 죄악을 범한 년이다!’
주인 남자가 내 방에서 나가기가 무섭게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몸부림을 치며 흐느껴 울었다.
‘사랑하는 남편이여, 나는 당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지었어요.’
나는 그런 넋두리를 하면서 흐느꼈다. 처음에는 나의 죄를 뼈아프게 뉘우치며 남편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그 감정이 나중에는 남편에게 대한 증오감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신이 나쁘기 때문이에요… 당신만 건강하였더라면, 아니 당신이 내 옆에 계시기만 했더라면…….’
사실이지, 나는 내가 그런 죄악을 법할 여자일 줄은 몰랐다.
나는 그 밤을 울어 새며,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고백할 결심이었다. 그 때문에 남편에게 칼침을 맞더라도 나는 조금도 원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형벌을 받아야만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살을 에이고 뼈를 깎아 내는 듯이 고통스러운 번민을 일 분이라도 속히 벗어나기 위해 남편에게 나의 죄상을 고백할 시간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날이 밝아도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재봉틀도 놀리고 조반도 지어 먹고 하던 나였건만, 이날 아침만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아침마다 일찌감치 가게에 나가곤 하던 주인 남자도 이날 아침따라서는 끽소리를 아니 하고 안방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면, 지난밤에 나의 몸을 범한 것을 그 역시 뉘우치고 있는지 모르리라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주인 남자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아무리 용서 못 할 요구를 해왔다 하더라도 나만 몸을 굳게 지켰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 아니던가.
‘나는 겉으로는 정숙한 여자인 척하면서도 실상은 누구보다도 더러운 화냥년이다!’
나는 정신까지 미쳐 버린 화냥년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나의 정신을 완전히 배반하고 제멋대로 화냥을 놀아먹은 것이었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에서 오는 무서운 범죄의 이중성격자 ― 그것이 바로 나였다.
나는 나의 육체에 베풀어진 더러운 죄악을 깨끗이 씻어 버리기 위해서도, 남편이 돌아오면 그 즉시로 모든 것을 솔직대담하게 고백할 결심이었다. 그 때문에 바느질도 아니 하고 조반도 굶은 채 남편이 돌아오기를 일각이 여삼추로 고대하였다.
남편이 돌아온 것은 조반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대문 안에 남편이 들어오는 인기척을 깨닫자, 나는 나의 죄악을 고백할 결심을 새삼스러이 굳게 먹으며 마음을 굳게 가다듬었다. 김정환이라는 남자가 비록 남의 눈에는 형편없는 아편중독자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사랑하는 남편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나는 방 한복판에 두 손을 모아 잡고 서서, 남편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나의 남편은, 내가 어젯밤에 저지른 죄악을 고백하기에는 너무도 불쌍한 몰골이었다. 그는 어젯밤을 어디서 드새었는지, 어제 아침에 새로 갈아입힌 노타이 샤쓰가 수세미처럼 더러워졌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날씨가 삼복염천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나의 남편은 학질 환자처럼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몸을 와들와들 떠는 것은 약기운이 떨어진 증거였었다.
내 남편이 아무리 추악스러운 꼬락서니를 하고 들어왔더라도 사시나무같이 떨지만 않았던들 나는 서슴지 않고 입을 열어 나의 죄를 고백했을는지 모른다. 아니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도 잠자코 들어오기만 했더라도 입을 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진실로 불행하게도 남편은 나에게 죄악을 고백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는 길로, 나의 고민하는 표정 같은 것은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댓바람에,
“어이구, 사람 죽겠어…… 여보, 돈 좀 줘, 돈!”
하며 손바닥을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의 나의 처량한 심경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내 남편이었던가?’
아내는 불의의 죄악을 범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밤을 새워가며 고민하였건만, 그러다가 마침내는 수치를 무릅쓰고 고백할 결심까지 먹고 있었건만, 남편은 아내의 고민을 아랑곳도 아니 하고, 아편값을 내놓으라고 야료만 부리고 있으니, 그런 남편 앞에서 나는 나의 죄악을 엄숙히 고백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돌각담처럼 왈칵왈칵 무너지는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콱 주지앉으며 흑흑 느껴 울었다. 내가 별안간 흐느껴 운 이유는, 이제는 의지할 곳 없이 되어 버린 나의 신세가 서럽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구원의 길이 완전히 막혀 버린 남편의 신세가 측은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내 남편에게 만약 조금이라도 사랑의 정신이 남아 있었다면, 그는 나더러 울기는 왜 우느냐고 물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흐느껴 울면서도, 최후로 그런 기대만은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남편이 그렇게 물어본다면, 나는 그때야말로 어젯밤의 일을 고백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흑흑 느껴우는 나의 눈앞에 와들와들 떨리는 손을 내밀어 흔들면서,
“빨리 돈 줘, 돈― 어이 죽겠다! 사람 죽겠다는데 돈은 안 주고 무얼 꿈질거리는 거야!”
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던가.
“돈은 웬 돈 말예요!”
나는 남편에게 생전 처음 말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감정에는 전연 무감각한 표정으로,
“이년아! 사람 죽겠다는데 돈은 안 내놓고 무슨 잔소리야!”
“돈이 한푼도 없어요! 당신이 언제 나한테 돈을 맡긴 일이 있었습디까?”
“아, 이 우라질년 좀 봐…… 이년아, 오금이 쑤셔서 사람 죽겠구나, 으후흐흐…… 잔소리 집어치고 빨리 돈 내놓으라니까!”
남편은 그렇게 말하며 가뜩이나 떨리는 어깻죽지를 나더러 보라는 듯이 일부러 떨어 대었다. 남편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면 내가 서슴지 않고 돈을 주곤 하는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날만은 나는 돈이 없기도 했거니와, 설사 돈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날름 주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 기회에 남편으로 하여금 단단히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없는 돈을 어디서 내놓으라는 거예요.”
“이년아! 내가 죽어도 좋단 말이냐. 빨리 돈 줘, 돈.”
“글쎄 돈이 없다는데 왜 이리 야단이오!”
“이년아! 돈이 없거던 몸이라도 팔아 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용수철을 퉁긴 듯이 펼떡 일어섰다.
“뭐 어쩌구 어째요?”
“이년아! 아편 사먹게 돈 내놓으란 말야!”
“돈이 없기도 하지만, 인젠 있어도 못 주겠어요!”
내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은 방구석에 놓여 있는 다듬잇방망이를 집어 들더니 어깨 위에 잔뜩 올려 메면서,
“이 화냥년 같으니라구, 사람이 죽는대도 돈을 못 주겠단 말이냐!”
남편이 방망이를 둘러멘다기로 조금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이미 피골이 상접한 남편은 방망이를 힘차게 내리갈길 기력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남편이 내리갈기는 방망이에 맞아서 아예 죽어버린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스러우랴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상반신을 내밀며,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려거든 차라리 나를 때려 죽여요!”
하고 앙탈을 부렸다.
그러자 남편은,
“아, 요년이!”
하며 정말 방망이를 내리쳤다.
그러나 와들와들 떨리는 그는 방망이조차 제대로 내리갈기지 못해서 방망이는 나의 왼편 팔을 때렸을 뿐이었다.
이제는 송장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린 비참한 남편을 깨닫자, 나는 또 한번 설움이 왈칵 솟았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방망이를 빼앗아버렸다.
남편은 방망이를 빼앗기자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뎌니 내 앞에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아이구 죽겠다. 제발 사람 좀 살려요. 정말 돈이 없거든 당신 치마라도 벗어 주구려!”
일찍이 젊었을 때에는 누구 못지않게 씩씩했던 남편의 입에서 오늘날 그처럼 비굴한 말이 새어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완전히 절망감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로 남편의 이마빼기를 내리갈겼다. 그것은 증오감에서 때렸다기보다도,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남편을 죽이기 위한 행위였다기보다는, 남편에게 최후의 각성을 주기 위한 기막히는 채찍이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단 한 번의 방망이에 어이없게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본부 살해의 독부라는 죄명을 쓰게 된 것이었다.
나를 심판하신 이정환 재판장님이시여! 제가 남편을 살해하게 된 경로는 대략 이상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에 나선 저는 자세한 내막을 일체 말하지 않고, 오직 제가 남편을 때려 죽였다고만 답변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수기의 첫머리에 쓴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이제 앞으로 한평생을 속죄의 가시덤불길을 걸어가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수기를 쓰게 된 동기는, 제가 징역살이를 끝마친 뒤에 재판장님께서만은 제 사정을 자세히 알아주셨으면 싶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뿐, 그 이외에는 아무 이유도 없사옵니다.
어떤 ‘여죄수의 수기’는 여기서 끝났다.
수기를 다 읽고 난 나는 비상한 감동에 잠기며 송파 선생을 보고,
“선생님! 이 수기의 주인공이야말로 지금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정숙한 부인이 아닙니까?”
하고 말하였다. ˙
“음ㅡ 다 읽었는가? 그럼 자네 감상이 어떤가?”
송파 선생은 불그레하게 취한 얼굴을 나에게로 돌리며 물으신다.
“저는, 이 수기의 주인공을 보기 드문 정숙한 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런 정숙한 여자에게 나는 가혹하게도 십 년 징역이라는 형벌을 내렸네그려. 그러니 재판이라는 것도 믿지 못할 것이지. 그러기에 나는 그 수기를 읽고 난 즉시로 판사라는 직책을 버리고 변호사로 직업을 전환했단 말야.”
“이 수기는 어떻게 해서 선생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해방 직후에 나한테 우편으로 부쳐 왔데그려! 나는 수기를 읽고 나자 그 즉시로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보았더니, 그 여자는 해방 즉시로 며칠 전에 가출옥이 되었다는 거야.”
“그럼 그 후의 소식은 모르십니까?”
“나는 그를 직접 만나 속죄라도 할 생각에서 백방으로 행방을 알아보았지만 여태 모르고 있네. 떠도는 말에 의하면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속리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것도 모를 소리야!”
송파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정원에 활짝 피어 있는 라일락꽃을 내다보며 뜻모를 한숨을 지운다.
나도 문제의 수기책을 손에 든 채 라일락꽃을 내다보며 꽃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마치 라일락꽃 향기가 그 여자의 정신에서 풍겨 오는 그윽한 향기인 듯한 착각조차 느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 여원사,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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