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서의 은유>
조지 레이코프, M. 존슨 (박이정, 2006)
15장 경험의 정합적 구조화
- 체험적 게슈탈트와 경험의 차원 : 우리는 은유적 개념이 한 경험을 다른 경험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구조화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했다. 은유적 구조화에 무엇이 관련되는가를 살펴보려면 먼저 하나의 경험이 구조를 가짐으로써 정합성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다 명확히 알아야 한다.
- 논쟁이 ‘전쟁’ 개념에 의해 부분적으로 구조화되는 대화. 전투 중이라는 느낌은 당신이 대화의 우호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실제 전투는 아니라 하더라도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전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데에서 나온다. 당신은 상대방을 적으로 경험하고, 그의 입장을 공격하고, 당신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대화의 구조는 전쟁 구조의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은 그에 따라서 행동한다. 당신의 지각과 행동은 전쟁에 참여한 당사자의 지각과 행동에 부분적으로 대응한다. 대화를 논쟁으로 변하게 만드는 사항들에 정합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을 ‘전쟁’ 개념의 요소에 대응한다는 점이다.
- 대화를 하나의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쟁’ 개념 가운데 일부의 다치원적 구조를 대응 구조인 ‘대화’에 부과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한 다차원적 구조는 체험적 게슈탈트를 특징짓는데 그 체험적 게슈탈트는 경험을 구조화된 전체로 조직화하는 방식이다. ‘논쟁은 전쟁’ 은유에서, ‘대화’ 게슈탈트는 ‘전쟁’ 게슈탈트의 선택된 요소들과의 대응에 의해 더 정교하게 구조화된다. 그래서 말하기라는 활동이 다른 활동, 측 물리적 싸움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우리의 경험을 그런 다차원적 게슈탈트의 관점에서 구조화하는 것이 바로 경험을 정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 개념이 경험에 합치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우리의 개념체계 속의 체험적 게슈탈트의 관점에서 특정한 경험들을 분류한다. 여기서 우리는 (1) 우리가 구조화하는 그대로의 경험 자체. 그리고 (2) 그 경험을 구조화할 때 사용하는 개념들 즉 ‘대화’나 ‘논쟁’ 과 같은 다차원적 게슈탈트들을 구분해야 한다. ‘대화’와 같은 개념은 참여자, 부분, 단계 등 몇몇 자연적인 차원을 명시할 뿐만 아니라 이 차원들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명시한다. ‘대화’ 개념과 실제적인 대화 활동의 측면들 사이에 각 차원마다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개념이 경험에 ‘합치한다’(fit)고 말할 때 우리 가 의미하는 것이다.
- 우리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경험을 개념화함으로써 경험의 ‘중요한’ 측면을 선택한다. 그리고 경험 속에서 ‘중요한’ 것을 선택함으로 경험을 범주화하고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다. 우리가 어제 논쟁을 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참여자인 ‘논쟁’이라는 개념이 각 차원마다 어제의 경험과 합치한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이 된다.
- 은유적 구조화 대 하위 범주화 : 여기서 요점은 하위 범주화와 은유가 연속선상의 양극이라는 것이다. A는 B이다. 형식(예를 들어 ‘논쟁은 전투’)의 관계는 A와 B가 꼭 같은 종류의 대상이나 활동이라면 명백한 하위 범주화일 것이고, 분명히 다른 종류의 대상이나 활동이라면 명백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같은 종류의 대상이나 활동인지가 분명치 않을 때 ‘A는 B이다’ 관계는 연속선상의 중간 지질 어디인가에 들어온다.
16장 은유적 정합성
- 단일 개념의 두 측면 사이의 정합성 : ‘논증은 여행’은 논증에 관한 여러 은유 중 단지 하나의 은유, 즉 논증의 목표나 방향. 진행을 부각하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사용되는 은유일 뿐이다. 논증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 우리는 구조적으로 복잡한 은유인 ‘논증은 그릇’을 사용한다. (경계 표면과 중심, 주변을 갖는) 그릇은 한정된 공간을 정의하고, (양이 다양하고 중심에 핵을 가질 수 있는) 물질을 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논증의 이러한 측면 중 어느 하나를 부각하려고 할 때 논증은 그릇 은유를 사용한다.
- 여행 은유와 그릇 은유는 목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즉 논증의 다른 측면(목표와 진행 대 내용)에 상세히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은유가 완전히 중복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논증의 ‘여행’ (진행) 측면과 ‘그릇’ (내용) 측면에 동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꺼번에 이 두 측면을 보여 주는 어떤 혼합 은유를 얻게 된다.
우리가 두 은유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 일을 수행할 단일한 은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논증의 방향과 내용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일한 은유가 없는 것이다. 이 두 목적은 단일한 은유에 의해 동시에 충족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목적들이 융합되지 않으면 그 은유들도 융합되지 않는다.
- 따라서 융합 불가능한 은유들의 실례는 두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명확히 묘사된 단일 은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기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논증의 방향과 논증의 내용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논증의 내용의 방향과 논증의 방향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장은 불가능하다.
*We can now follow the path of the core of the argument.
(우리는 이제 그 논증의 핵심의 길을 따를 수 있다.)
*The content of the argument proceeds as follows.
(논증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7장 은유들 사이의 복잡한 정합성
- 이제 우리는 동일한 기체가 복잡한 실례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런 복잡성에는 두 가지 원천이 있다. (1) 단일 개념을 부분적으로 구조화하는 다수의 은유가 존재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2) 어떤 개념을 논의할 때 우리는 그 자체가 은유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은유들의 더 많은 중복을 불러온다. 우리는 논증 개념을 더 상세하게 검토함으로써 그런 복잡성을 불러오는 요인들을 보여 줄 수 있다.
- 일반적으로 논증은 이해라는 목적에 기여한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명백한 것과 명백하지 않은 다른 것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 줄 필요가 있을 때 논증을 구성하는데, 그것은 아이디어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수행된다. 이 아이디어들은 논증의 내용을 구성한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논증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보이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다.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때 연결을 형성함으로써 진전을 이룬다.
- 논증이 얼마나 유익한가는 논증의 내용, 연결의 강도, 그 논증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을 이루는가, 그리고 그 연결이 얼마나 쉽게 이해되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다양한 ‘논증’ 은유는 그 개념의 다음 측면들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에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