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때 어느 친척이 남편의 어릴적 별명이 '깨나무 장작'이었다고 일러주며 웃었다. 사전에도 없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경상도 사투리 중에 그런 말도 있는가 보다고 무심히 흘려 들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겠다. 짐작컨대 깨를 털고난 마른 대를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넣으면 남아있던 깨알들이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튀는 것처럼 남편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꽤나 요란하게 투정을 부리던 아이였던 게다. 그건 어쩌면 할머니의 지나친 손주 사랑이 남편을 그런 응석받이로 만들었지 싶다. 청상과부였던 할머니는 유난히 당신을 따르던 셋째 손주를 끔찍이 위하셨다. 자신을 재워놓고 할머니 혼자 마실을 다녀왔다고 비녀를 물어뜯으며 못되게 심술을 부려도 야단치기는 커녕 그런 모습조차 마냥 사랑스러워 하셨단다. 오죽하면 할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남편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좋아하는 찰밥을 해 주라고 당부하셨겠는가. 혹시 할머니의 영혼이 당신을 대신하여 그 사람을 애지중지 돌봐줄 보모로 나를 찜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뭐에 씐듯이 처음 만난 사람과 넉 달만에 결혼을 감행한 것도 그렇거니와 사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아무리 남편이 밉살맞게 굴어도 밥상만큼은 꼬박꼬박 차려내었던 건 아무래도 내 의지가 아니라 할머니의 염원 때문인 것 같다.
남편도 은연중에 나를 제 할머니처럼 생각하는지 길에 나서면 다칠세라 내 손을 줄곧 잡고 다녀 주위의 놀림을 당할 때가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들어줄 것이라고 턱없이 믿고 있다. 특히 자기 부모 형제에 대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문제이든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 주는 게 당연한 듯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구경할 수 없는 눈물겨운 가족애가 좋게도 보여 우리 처지에 넘치는 경제적 부담까지 기꺼이 떠맡았더니 그 후론 으레 시댁의 모든 짐을 내가 지게 되어 지금껏 힘겨운 세월을 살아 왔다. 그렇게 앞만 보고 걸어왔는데, 그럴 나이가 된 것인지 요즘 자주 지난 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남편의 유별난 가족 사랑이 과연 그의 타고난 착한 심성 탓이었을까.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둘째 아들에게 둘리 인형을 선물한 적이 있다. 부드러운 녹색 벨벳의 감촉이 좋았던지 아이는 잘 때마다 그 인형을 껴안고 잤다. 어떨 때는 마치 제 동생이나 되는 듯이 함께 누워서 뭐라고 한참을 속삭이곤 했다. 그러기를 유치원 때부터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계속하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또래보다 우유병도 기저귀도 한참 늦게 떼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스스로 떼게 되겠지 싶어 둘째의 둘리 사랑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런데 다 큰 사내아이가 여전히 인형 놀이를 한다고 누군가 둘리 인형을 빼앗아 가위로 꼬리를 자르는 시늉을 하며 아이를 놀려대었다. 아이는 충격으로 사색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걸 계기로 둘리와 마지못해 이별을 했는데,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마흔이 된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낸다. 나로서도 그런 잔인한 방식을 원치 않았기에 속이 편치 않았지만, 어른이 되려면 그 정도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를 위로하는 대신 애써 침묵하였다. 제 나이에 걸맞는 행동을 가르치는 것도 부모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갑작스레 불행한 사고로 맏아들을 잃은 시부모님이 무슨 정신으로 다른 자식들에게 살뜰한 정을 쏟을 수 있었겠는가.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아이들만 서울로 유학을 보냈으니 심약했던 남편은 공부는 뒷전이고 빨리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갈 날만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 심리적으로 불안한 환경에서 남편이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형제에게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 했다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가 남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자신의 둘리 인형이었으리라. 남편의 성장 과정을 알게 된 나는 그의 결핍을 채워주려고 정성을 다했는데, 지금에 와서 나의 헌신이 그 사람을 도운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평생 응석받이 깨나무 장작으로 살게 했던 게 아니었나 의구심이 든다.
자식에게는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한편으론 말이나 행동, 생활면에서 절제하는 현명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던 내가 왜 까탈스런 남편에게는 끝없는 관용을 베풀며 모든 걸 받아주기만 했는지 나로서도 때론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남편에게 어려서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느끼게 해주어 남편의 가슴 깊숙이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가엾은 아이를 달래주고 싶었던 연민의 정이었을까. 그래서 그 옛날 손주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할머니처럼 굴었던 걸까. 그런데 그건 남편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의 집착과 강박증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결혼이란 두렵고 낯선 세계에 갑자기 던져진 내게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그도 역시 내게는 둘리 인형이었다. 온전한 내 소유로 삼아 늘 내 곁에 두고 싶어서 어리석게도 나는 그가 해야 할 숙제를 몽땅 대신 해주며 결과적으로 그의 성장을 방해한 셈이 되었다. 요즘에 난 그 죗값을 톡톡히 치루고 있다. 수술 후 내 몸도 감당하기 힘들어진 터에 아직도 남편의 보호자로 매일 그의 응석을 받아주며 사는 게 자연 짜증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찍이 둘리증후군에서 벗어난 둘째가 엄마를 대신하여 의젓하게 늙은 아버지의 치기어린 투정을 다독여 주고 있다. 부모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그런대로 어미 노릇은 한 것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되고 뿌듯한 기분이다.
첫댓글 꽤 오랫만에 느티나무님의
수필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벌써 봄기운이 느껴지는데
서향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서
그 좋은 향기가 집안에 화사하게 펴지고 있어요
깨나무장작님? ^^
느티나무님께서도 건강하세요
잘 지내고 있나요? 세월이 많은 걸 바꿔버렸네요. 좋은 시절 만났던 인연들이 늘 그립습니다. 건강하시길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