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서사기행 26 / 엑상 프로방스Aixen provence
: 폴 세잔느Paul Cézanne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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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앙투안 콘스탄틴이 그린 ‘엑상 프로방스 전경’
현재 프랑스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앉으려거든 앉으려거든 밑바닥까지 아낌없이 가라앉으라 마치 일어서면 곧장 별에 닿을 것처럼 |
26. 엑상 프로방스Aixen provence
: 폴 세잔느Paul Cézanne의 추억
나는 모르겠다
세잔느의 고향이 엑상 프로방스인지
엑상 프로방스의 고향이 세잔느인지.
엑상 프로방스 사람들은
자기 사는 고장을 그저 ‘엑스Aix’라고 부른다
‘물’이라는 뜻의 라틴어 ‘Aqua’에서 유래한 말
그러기에 ‘엑상 프로방스Aixen provence’는
‘물이 흔한 프로방스’라는 뜻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통일하기 전에는
프로방스의 수도였던 곳
인구 십오만 정도의 도시
연중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땅
기후가 온화하여 물이 많을까
물이 흔하여 햇살이 맑은 것일까
마르세이유 북쪽 28km 지점
로마시대부터 맑은 광천수로 소문난 곳
다른 대처에 있는 것들이
이 도시에도 있어 별다른 것이 없지만
세잔느가 풍경을 그리고
고흐가 빛을 불러들이고
에밀 졸라가 소설로 그렸기에
작은 도시가 정신적 풍요로 탈바꿈했다
여름에는 유명한 음악제가 열리고
대교구청이 있기에 대성당이 즐비하고
그라네 박물관Granet Museum이 있고
로마시대의 유적이 숨 쉬는 도시라고
이곳 사람들이 줄곧 자랑하지만
나는 그저 이방의 햇볕이 좋고
풍경이 아름답고
숲이 울창하고
예술가들이 우정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예술의 사회참여를 두고 티격태격 다투던
세잔느와 에밀 졸라가 있어 반갑고
햇살에 바랜 고흐의 슬픔이 있어 도시가 정겨울 뿐
올리브와 포도주가 흔해서 미덥고
찬란한 역사보다
물이 흔한 땅이라서 그냥 좋다
엑상 프로방스Aixen Provence -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도시
어느 하늘 밑으로 달아나도 햇살 바른 곳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이 깊고
삼나무가 많고
도시를 에워싼 숲이 건강하여 아름다울 뿐
세상을 떠도는 여러 여행자의 칭송에
나는 아무것도 더 보태지는 않으련다
이방의 아침은 삽상하다
내 인생의 절반은 새벽에 산다
창밖은 사뭇 어둡다
새벽은 만질수록 캄캄하다
어둠은 빛의 다른 이름이다
부드러운 어둠이 나를 감싸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때 내가 반짝인다
그리하여 내 몸은 침묵하는 별이다
옳고 그름이 사라졌으므로
모든 것이 사랑이다
어디선가 먼동이 트고
한 잎의 아침이 조용히 태어난다
어제 푸른 하늘은 오늘도 여전히 푸르다
내가 만일 새처럼 자유롭다면
오늘 하루 나는 무엇을 할까
미라보Mirabeau 광장의
로통드 분수대Fontaine de la Rotonde 로 가서
북적대는 여행자들 속에 한나절 나도 섞일까
화가의 아틀리에 앞에 이젤을 세워놓고
세잔느가 자주 그린
생 빅투아르산을 바라보며 나도 그림을 그릴까
세잔느의 가족 별장
‘자 드 부팡Jas de Bouffan’에 가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나절 들여다볼까
혹은 마자랭Mazarin 지구를 찾아가서
거기 있는 분수와 이름 높은 정원과
미술관과 박물관과 유적지를 둘러볼까
아니면 포럼 광장을 혼자 어슬렁거리다가
카페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냥 한가로이 햄버거를 먹으며
파아란 하늘을 혼자서 바라볼까
저만치 세잔느의 하늘이 있다
폴 세잔느Paul Cézanne -
아버지가 은행가였던 탓에
유복한 집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궁핍을 잊은 유년기를 보냈던 세잔느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화가의 길을 택한 후로는
아버지의 재정지원이 끊길까 전전긍긍하며
슬픈 청년기를 우울하게 보냈었다
그러나 화단에 조금씩 이름이 오르내리고
그림에의 재능이 아버지를 움직였기에
못 본 척하는 아버지의 수긍이
조금씩 아들을 향한 분노를 잠재운 뒤로는
점차 세간으로 들어가는 삶의 문이 열렸다
아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아비 모르게 아들을 낳고
아비 모르게 열정을 불사른 생애
아틀리에의 창을 열면 저만치 보이는
생 빅투아르 산이 유독 영감을 불러일으켰기에
화가의 가슴을 풍요로 가득 채웠었다
부모의 유산을 크게 물려받아
아비가 죽은 뒤에도 물질의 낙원에 안주할 수 있어
오직 그림만을 사랑했던 화가
내가 작품을 평가할 때는
나무나 꽃같이 신이 만드신 물체 옆에 두고 평가한다
만약 작품과 물체가 대립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혼자 남은 공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화가
스스로 그림을 그릴 때는
신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었다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
세잔느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예술의 경지란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만큼 절실해야 했었다
이런 사상은 곧장 피카소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저 유명한 큐비즘의 화가는 말한다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이를테면
세잔느의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란
피카소의 이른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는
입체파 탄생의 예고편 같은 것
그랬기에 저 유명한 ‘입체파의 완성자’는
세잔느를 두고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스승으로 삼았었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원근법의 파기를 선언한
큐비즘cubism의 탄생이 이에서 비롯했다
세잔느를 두고 후세가 붙여준 칭송인
‘추상화의 길을 연 화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아무도 부르지도 않고
아무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던 화가를 두고
파블로 피카소가 한 번 위대하다고 말한 후로는
세잔느의 세상이 달라졌었다
나의 유일한 스승인 세잔느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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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느의 ‘생 빅투아르 산’
엑상 프로방스는 소박하다
그러나 우아하다
예술가의 동력이 물밑에 숨어 있다
만일 고흐를 불러놓는다면
그는 무슨 색깔로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릴까
세잔느를 불러앉히면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를 추구한 그는
오늘을 사는 우리 세상을
어떤 풍경으로 어루만질까
에밀 졸라를 초대하면
어떤 붓으로
앙가주망 engagement의 물결을 우리에게 보여줄까
(이어짐)
첫댓글 프랑스의 대 자연은 역시 아름다운가 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예술가들이 그리도 많으니까요. 프로방스하면 왠지 평온이 떠올라요. 지금의 사회주의화된 파리의 삭막함과는 다른 먼가 말입니다.
기행 서사시를 읽으면, 수박 겉핥기가 아닌 진정한 여행이 무엇인지를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