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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후 1897 년 대한제국을 거쳐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 정치 및 사회구조의 특징은 조선을 건국한 신진유사들이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를 신봉한 세력이었으므로 고려와 달리 유교가 조선 전시대에 걸쳐 일관되게 존재한 지도 이념이었다는 데 있다.
한 시대의 복식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뿐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등을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의례와 절차를 중시한 유교 정신은 복식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에는 의례복과 평상복의 구분이 우리 나라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분명하였다. 그리고 유교에 듸한 관료주의 사회 정비를 위해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관료제도와 함께 관등에 따른 복식제도를 엄격히 명시하여 복식을 통한 왕과 신하, 지배층과 일반 백성의 신분차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유교적 미의식이 확립되어 과장과 허세를 피하고 소박한 성격의 문화가 자리잡게 됨에 따라 조선시대 예술작품은 자연주의적 성격을 갈하게 띠었고, 이러한 점은 당시 남녀 복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 적의
왕비복의 상징이라고도 할 궁중법복(法服)은 조선왕조초 명의 사여관복(賜與冠服)을 통하여 이루어진 중국제 그대로의 왕비복을 예복(禮服) 즉 법복(法服)으로 삼아 「경국대전」에 제도화하고,임진란 이후 국속화되었으며 저고리·치마 등 우리나라 제도와의 이중구조 속에서 전승되었다.
(1)대삼(大衫)
대홍색(大紅色)이고 문식(文飾)이 없는 것이다.
(2)배자(褙子)
청색바탕에 적계문(翟鷄文)을 수놓았다.
(3)하피
청색바탕에 적계문이 있다.하피의 모양은 긴 폭으로 이것을 목에 걸쳤는데 등 뒤에서는 흉배위치 아래까지 늘이고 가슴앞에서는 치마끝까지 늘어뜨려 두폭이 겹치지 않게 추자(墜子)로 맺게 되어 있다.
(4)부수복식
대대,옥혁대,수,옥패,석,말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대삼을 대례복으로 습용하여 오면서 관이 직관인데다 배자나 하피에 적문(적계문)이 있고, 적의는 대홍색이라는 인식이 구례(舊例)로 전해져 오는 점에서 왕비(王妃) 법복(法服)은 대삼(大衫)이 되어 적의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2.원삼
<원삼> 영조대「국정혼례」에는 빈궁의복 안에 노의.장삼과 함께 따로 원삼이 있는데,장구한 시일이 경과하는 동안에 국속화되어 조선후기 이후에는 노의. 장삼등 대의.대수에 속하는 것들이 이 원삼 한 가지로 집약되었다. 우리나라에 있어 원삼은 옷의 깃이 합임이고 목 옆에서 둥글게 달렸으며 원삼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용어로는 환삼이나 단삼을 들 수 있는데, 궁중에서 황후, 왕비가 착용한 황원삼과 홍원삼이 있었고, 비빈의 자적원삼.반가부녀자들의 초록원삼이 있었는데 이 초록원삼은 한때에 신부예복으로 착용이 허용되었다. 왕비의 원삼은 겹으로 자적색 또는 다홍색 길에 뒤가 길고 앞이 짧고 소매가 넓으면서 끝에는 홍황 2색의 색동과 금직단의 백한삼이 붙었으며, 옷과 7척 길이의 홍단대에는 운봉문을 화려하게 직금하였고,앞뒤에는 쌍봉문의 흉배를 장식하였다.
그런데 국말 왕후의 것은 황원삼이고,다홍색과 남색의 색끝동과 백한삼이 달리고,옷과 홍단대에는 5조용의 운용문을 화려하게 금직하였다. 그리하여 국경일과 같은 날에 대례복으로 착용할 때 는 5조용의 운용문을 금수한 원포를 양 어깨와 앞뒤에 가식하였으며,왕실의 경사 때에 소례복으로 착용할 때는 쌍봉문을 금수한 흉배를 앞뒤에만 가식하였다. 여러 예복에 있어 적의만 적말,적석이며,다른 것에는 백말이면서 검은 웅피로 만든 화온혜를 신었다.
<귀인양씨 원삼>
3.활옷
<활옷> 이 활옷은 현재 한국의 전통의 복으로 꼽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고 널리 알려져 있는 옷이다. 홍색의 길에 화려한 무늬의 수를 놓은 옷이 활옷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데, 그 활옷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입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지만 이 활옷이 공주의 대례복 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원삼과 같이 중국 포제에서 나와 국제가 된 것으로 원삼보다 화려하게 꾸민 것이었는데「고려도경」「귀부조」에 "왕비는 대홍의를 입었는데 이에 회수를 놓았다"함에서 활옷의 변모를 볼 수 있다. 또 옷에 꽃무늬가 많은 것을 보고 백화포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백화포의 모습을 활수의 포의에다 대대를 띠었고 화제에서 온 것이라 하였는데,이것은 '화의' 또는 '화의(花衣)'가 우리말 발음으로 '활옷'으로 된 것이라 생각된다.
<활옷>
주로 상류계급에서 착용하던 예복이나 나중에는 서민층에 도 혼례시만은 착용이 허용 되었는데, 이것은 다홍색 비단 바탕에 장수와 길복을 의미하 는 물결,바위,불로초,어미봉, 새끼봉,호랑나비,연꽃,모란꽃, 동자 등의 수 외에 이성지합, 만복지원,수여산,부여해 등의 글씨를 수놓았고 수구에 한삼 을 달았으며 대대를 띠었는데, 이를 노랑 삼회장 저고리와 다홍 대란치마 위에 입었으며, 수식으로는 용잠을 꽂고 뒷 댕기(큰댕기)를 드리웠으며 칠보화관을 썼다.
4.당의
<덕온공주 당의> 당의는 간이예복 또는 소례복으로 평복 위에 착용하였는데 겹이나 홑으로 만들고 솜을 둔 당의는 없다. 계절에 따라 재료를 다르게 해서 만들고 일년을 통해서 계속 착용되던 옷이다. 또 비빈이 입는 직금당의에서부터 금박을 찍은 당의나 민가의 예복으로 입는 민당의도 있다.
황후의 당의는 자색이고 왕비는 홍색당의이며 그 이하는 초록색이나 백색·흑색이다. 초록색 비단에 다홍색 안을 바치고 색에 관계없이 자주색 겉고름과 안고름을 달았으며 소매 끝에는 흰 거들지를 달았다. 또한 계절에 따라 흰색 홑 당의 즉 당적삼을 입었는데, 5월 단오전날 왕비가 흰 당적삼으로 갈아입으면 단오날부터 궁중에서는 모두 당적삼을 갈아입었으며, 또 추석 전날 왕비가 다시 당의로 갈아입으면 추석날부터 궁중에서는 다시 당의로 갈아입었다. 이것은 반가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겨울철에는 자색당의를 입기도 하였다.
<덕혜옹주 당의>
이러한 당의를 그 의미적인 면에서 복식사연구에 중요하므로 살펴보겠는데, 당의의 당자가 중국의 당나라와 같다고 해서 '당나라에서 들어온 옷'이라고 생각하는 종래의 개념에 대해서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한국의 고대의복들이 중국과 관련이 깊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헌이나 신빙할 만한 자료에 당의가 당나라 옷이었다는 증거가 없는 데다가, 한국의 저고리와 같은 계통의 당의를 굳이 중국의 옷이었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
역사적인 자료를 살펴보아도 중국의 당대에 한국의 저고리나 당의와 같은 계통의 옷은 없었다. 당의의 당자는 저고리의 양 귀가 뾰족한데서 '당코'라는 의미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저고리의 깃에서 '당코저고리'라 하는 것도 깃의 귀가 곡선으로 뾰족하게 구성된 데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의는 한국의 전통적인 저고리 중에서 옆트임을 했던 것이, 점진적으로 곡선으로 파여서 근대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본다.
5.몸치레
<미인도> 조선시대 여인들의 몸치레에는 패물,이식,지환 등이 있다. 패물은 사람몸에 차는 장식물로 노리개와 주머니를 들 수 있다. 노리개는 궁중, 상류계급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에게 애용되어 온 것으로 계절, 재료, 크기에 따라 패용위치나 사용법이 달랐다. 삼작노리개는 노리개 세 개를 함께 패용하는 것으로 크기나 규모,사용재료에 따라 사용자의 신분과 계급을 생각할 수 있었는데,대삼작은 주로 궁중에서, 중삼작은 궁중이나 상류계급에서,소삼작은 젊은 부녀나 어린이들이 패용하였다. 단작노리개는 하나로만 된 노리개로 경사시는 물론 일상시에도 찼다.
이식은 선조대까지는 남녀를 막론하고 사용하였는데,이는 유교사상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선조의 유시가 있은 후 우리 나라 여인들의 이식은 형태를 달리하였다. 즉, 귀고리가 귀걸이로 바뀌면서 평상시 이식하는 습속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남자의 이식은 사라져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지환에는 가락지와 반지가 있었는데, 계절에 맞추어 겨울에는 옥을 끼지 않고, 여름에는 금을 끼지 않았으며, 춘추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끼었다. 주머니는 삼국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우리 의복에 주머니가 없으므로 실용적인 면에서 만들어 차게된 것이 장식화되는 한편, 만복을 기원하는 상징물이기도 하였다. 주머니의 대표적인 형태는 주머니 둘레가 둥근 염낭 양 옆에 모가 나 있는 귀주머니가 있는데, 사용한 천과 색 부금에 따라 신분의 존비, 귀천, 상하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1. 조복
조복은 경축일,원단,동지 및 조칙을 반포할 때나 진표할 때에 착용하였다. 이는 금관조복으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제복과 함께 조복의 제정이 있기는 태종 16년 정월에 관복색을 설치하여 그 해 3월에 명의 홍무예제에 의하여 만들었다.
<금관조복:흥선대원군>
(1) 양관(금관)
양관이라 함은 관상부의 전면으로부터 정부(頂部)에 이르기까지 종선이 있어 이것을 양이라고 한 데서 온 것이며, 그 수에 따라 품위의 상하를 구별하였는데 일품은 오량금관, 이품은 사량금관, 삼품은 삼량금관, 사품 내지 육품은 이랑금관, 칠품 이하 일량금관이었다. 양관은 둘레의 당초모양문의 부분을 도금하였으며 그 외는 흑색이었는데, 여기에는 목잠이라고 하여 관을 횡관하는 계(비녀)가 있어 이금으로 칠을 하고 있다. 이에서 금관조복의 명칭이 나왔다고 보며,그것은 조복과 함께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위의를 갖추도록 한 것이라 생각된다.
<적초의>
(2) 복
「예전 의장조」에 의하여 조복의 제도를 보면,
-적초의 : 깃,도련,소매 끝에는 청연(선)을 둘렀으며, 일품에는 구품까지 동일하였다.
-적초상 : 모양은 전(前) 삼품, 후(後) 사폭의 상(裳)이되 여기에도 청연을 둘렀으며, 각품이 동일하였다.
-백초중단 : 깃,도련,소매 끝에는 청연을 둘렀으며, 각품이 동일하였다.
-폐슬(蔽膝) : 상색과 같은 적색인 초를 사용하였고 같은 색으로 선을 둘렀으며, 각품이 동일하였다.
-대대(大帶) : 적백단 이색으로써 겹으로 된 것으로 드리우게 되어 있었으며, 각품이 동일하였다.
-혁대(革帶) : 그 장식에 있어서 품계에 따라 구별이 있었다. 일품은 서대(犀帶),정 이품은 삽금, 종 이품은 소금대(素金帶), 정삼품은 삽은(鈒銀), 종삼품은 소은대(素銀帶)였고, 사품은 소은대(素銀帶), 오품에서 구품까지 흑각대(黑角帶)였다.
-패옥(佩玉) : 형태는 왕·왕세자복의 것과 같고 일품에서 삼품까지 번청옥(燔靑玉)으로 하였고 사품 이하 구품까지는 번백옥으로 하여 품계를 가렸다.
-수(綬) : 수 놓은 문(紋)과 매달은 환(環)에 따라 품계를 가렸다.
-말(襪) : 백포(白布)를 사용하였으며,각품이 동일하였다.
-혜(鞋) : 각품 모두 흑피혜였다.
-홀(笏) : 일품에서 사품까지는 상홀(象笏)이고 5품에서 9품까지 목홀(木笏)이었다.
<금관조복 후수>
2. 제복
문무관의 제복은 왕이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때에 배사시 착용하였다.
<제복입은뒷모습> 이 제복에 대한 상정은 태종 16년 3월 관복색에서 조복과 함께 양관,의상,패수를 만들게 한데서 비롯하였고, 그 해 11월 임자에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명제에 대한 망궐가례를 거행할 때 처음으로 착용한 바 있었다고 하였거니와, 이보다 앞서 태조 4년에 중국관등에 비하여 2등체강 원칙에 따라 제복을 제정했음을 「태조실록」에서 볼 수 있다.
(1)양관
관품에 따른 양관의 양수의 구별은 조복에서와 같다. 단지 그 차이점은 조복에서는 밑의 당초모양문의 부분과 목잠을 모두 금칠하였는데, 제복에 있어서는 경건의 뜻을 표시하여 당초모양문의 전면 소부분과 목잠의 구멍둘레만을 금도하고 그 외는 전부 흑색이었다.
(2)복
조복이 화려한 것인데 비하여 제복은 어디까지나 소상한 것이어야 했으며, 조복에 있어서는 적초의 아닌 소초의를 택한 동시에 그 청초의와 백초중단의 깃,도련,수구와 적초상의 선을 청식으로 하였는데, 제복에 있어서는 의(衣)에 있어 화려한 적초의를 피하고 청초의로 하는 동시에 그 청초의와 백초중단의 깃,도련,수구와 적초의의 선을 흑식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제복은 방심곡령을 한다.
3. 공복
공복은 매일 공사에. 또는 사은 관계로 배알할 때와 재외문무관이 공사에 참여할 때 착용하였다.
<앵삼,복두> (1) 복두
상대사회복식에서 신라삼국통일 직전에 김춘추가 당에 청병하러 갔다가 당태종에게 그 장복의 개혁을 청하여 당의에 쫓은 데서 우리 나라 고유의 관모 대신에 복두라는 것을 착용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시대에 이르러 백관의 공복에 착용하게 되었는데, 국말의 복두를 보면 그 모양이 사각형으로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모체가 방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복(服)
「경국대전」의 예전 의장조에 실린 공복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포:소매가 넓고 깃은 단령이며 길이가 뒤꿈치에 닿을 정도로 긴것이었는데,일품에서 정삼품까지 홍포였으며, 종이품에서 육품까지는 청포였고, 칠품에서 구품까지는 녹포를 착용하였다. -대:일품은 서대,이품과 정삼품은 여지금대, 종삼품 이하 구품까지는 흑각대를 하였다. -흑피대:피물로 만들고 신목이 있는 신이다. -홀:조·제복에서와 같다.
4.상복
상복은 문무관 평상집무시에 착용하였다. 상복의 상정은 세종 8년 2월에 조복,제복,공복과 함께 있었으며, 상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흉배의 제정으로 단종대에 가서 생겼다.
(1)사모
사모의 제도는 명이 송제를 이어받아 이를 그대로 고려에 사여한 것으로 일품에서 구품까지 모두 착용하였다. 사모는 복두제도에서 처음 출발한 것으로 처음에는 연각이었으나 차차 경각로 변천했는데, 조선왕조 초기의 사모는 연각도 아니고 좌우에 각이 없으며, 뒤에 흑영을 드러웠는데 조선왕조 중엽 명조대부터 각이 달리고 또한 경각으로 되었다. 이 사모는 국말까지 가장 많이 쓰인 관모였던 것이며, 고종대 복장개조시에도 그 대례복,소례복에 사모를 착용케 하였다.
<남자혼례복>
(2)복(服)
- 포:공복의 포와 같은 것인데, 영조대에 와서 당상 삼품 이상은 담홍포를 하고 대소조의 때 상복에는 현녹색의 사·단을 사용하고 당하 삼품 이하는 현녹색이되 사, 견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국말 고종 때 흑단령으로 되었고 다시 주의(周衣)로 바뀌었다.
- 대:대는 조복의 대와 같은 것이었다.
- 백 말
- 화:협금화였는데, 이것은 흑피화의 바닥에 징을 박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국말에 와서 조복,공복,상복은 목화로 통일된다.
- 흉배:흉배는 조선왕조시대에 있어서 왕,왕세자복 및 백관의 상복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상복의 단령포에는 네모진 흉배를 가슴, 등에 붙였다.
흉배의 제정은 단종 2년에 문관 일품은 공작, 이품은 운학,삼품은 백한,무관일품은 호표,삼품은 웅비로 정했는데, 연산군대에 와서 일품에서 구품까지 모두 흉배를 달게 되었으며, 고종대에 와서는 문관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무관 당상관은 쌍호,당하관은 단호로 하여 국말까지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유물흉배를 통해서 보면 시대가 올라갈수록 흉배의 크기가 크고 문양의 수도 적은데 후기로 내려올수록 흉배는 작아지고 문양은 복잡해졌다.
1.면복
조선시대 왕복의 종류를 보면 대례, 제복에는 면류관, 곤복이고, 조복에는 원유관, 강사포가 있고,상복에는 익선관, 곤룡포가 속하며, 연거시에는 편복을 입었다.
<면복 구장복> 면복은 군왕의 표신으로 삼았던 것이며, 왕이 종묘, 사직등에 참예할 때나 제사 때 착용하는 제복 및 대례복이다. 면복의 구성은 면류관에 곤복을 말하는데, 곤복의 구성은 의, 상, 폐슬,혁대, 대대, 패옥, 수, 말, 석으로 여기에 규로 이루어졌다.
(1)면류관
면류관은 한민족(漢民族)의 전형적인 관모(冠帽)였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서례「제복도설(祭服圖說)」에서 보면, 평천판은 앞이 둥글고 뒤는 네모났으며,겉은 현색증으로 덮고, 안은 훈색증으로 쌌다. 그리고 앞이 뒤보다 이촌(二寸) 숙었으며, 평안복(平天板)과 관신(冠身)을 옥형으로 연결시키고 금잠도를 꽂았다.
<면류관>
면류는 구류로서 매류마다 오채옥으로 꿰었으며, 류의 길이는 구촌이었다..평천판 옆에서는 현색(玄色) 담이 있었고, 또 굉은 자조 두 줄을 한 줄은 턱 밑에서 맺어 늘어뜨렸으며, 또 한 주조 줄은 양쪽 계에 턱밑을 돌려 연결시키고 늘어뜨렸다
<창덕궁유물 구장복> (2)곤복
면류관에 곤복을 면복이라 하는데, 면복은 군왕의 표신으로 삼았던 것으로, 중국 황제는 십이류면 십이장복, 우리 국왕은 중국의 친왕례에 따라 구류면 구장복을 착용하다가 국말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곤복에는 장문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산, 용, 화충, 화, 종이,조,분미,보,불의 구장에 황제를 표시하는 일, 월, 성신을 더하여 십이장이 된다. 곤복의 구성은 의, 상, 중단, 폐슬, 혁대, 대대, 패옥, 수, 말, 석, 규로 되어 있는데, 이를「국조오례의」서례「제복도설」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는 현색으로 되어 있으며 오장문이 있는데, 용은 양 어깨, 산은 등뒤, 화, 화충, 종이는 양 소매에 각각 3개씩 그리고, 현령에, 도련,수구에는 현색 선을 하였다.
상은 훈색증으로 만들고 전 삼폭, 후 사폭이었는데, 앞폭에는 조,분미,보,불의 사장문을 수놓았다. 중단은 백색증으로 하였으며, 청색 선으로 깃, 도련, 수구를 둘렀으며, 깃에도 불문 11개를 그리고있다. 폐슬은 상색과 같은 훈색증으로 하였으며, 위에는 비, 아래에는 순이라고 하는 선이 있었고, 양쪽에 조, 분미, 보, 불의 사장문을 수놓았다.
패옥은 위에 형이 있어 그 위에 금구가 다렸고, 가운데에는 거와 우가 있고, 아래에는 쌍황이있으며,그 사이에는 충아가 있고, 또 충아와 쌍황 사이에 쌍적이 있었는데 모두 민옥으로 하였다. 대대는 비색과 백색을 합쳐 꿰맨 것이었으며, 홍화금수였고, 규는 길이 구촌인 청옥규였다. 말은 겉을 비색단으로 하고, 안을 비색 초로 하였으며,석은 겉을 비색 단, 안을 백색 증으로 하였는데 모양은 같은 것이었다.
2.조복
왕의 조복은 원유관, 강사포였는데, 국미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원유관은 중국천자가 착용하던 통천관을 바뀌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서례「관복도설(冠服圖設)」에서 원유관(遠遊冠)을 보면, 현색 나로 만들고 구양이었는데, 각 양마다 오채옥으로 구옥씩 전후 십팔옥을 장식하였다. 양쪽에 2줄의 실조가 있어 턱밑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렸으며, 금잠을 꽂았다. 포(袍)는 강라로 만들었다. 상(裳)과 폐슬(蔽膝)도 강라로 만들었으며, 모양은 구장복에서와 같다. 중단은 백라로 만들었는데, 적령에 불문11개를 그렸고, 도련,수구에 적선을 하였다. 패옥,수,말,석은 구장복과 같으나 장문이 없고 백나로 만든 방심곡령을 달았다.
<원유관,강사포>
3.상복
<왕복> 왕상복은 익선관에 곤룡포로, 익선관은 복두에서 연유한 것인데, 양대각 위에 양소각을 첨부하여 향상시킨 것이다. 곤룡포는 대홍색의 단(여름에는 사(紗))으로 지었으며, 포의 전후와 좌우 어깨에 금색오조원룡보를 첨부하였다. 옥대를 띠고 흑궤자피, 여름에는 흑칠피를 신었다. 곤룡포 밑에는 답호와 첩리를 받쳐 입었는데, 이것은 융복도 된다.
답호는 첩리 위에 입던 것으로 소매, 무, 앞섶이 없으며,뒷솔기가 허리 아래로 터져 있다. 첩리는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상의하상식으로 허리에서 주름을 잡아 연결하였다. 소매는 두리소매인데, 한쪽에는 단추를 달아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었다. 국난시(國亂時)에는 전립에 첩리로 된 융복(戎服)을 착용하였는데, 융복에는 보를 가식(加飾)하였다.
4. 편복
조선시대 왕의 편복은 우리 고유의 저고리, 바지 위에 상복의 밑받침옷인 답호, 철릭 등을 착용하였으며, 일반 사대부들이 입던 편복을 왕도 같이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