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민 유진오는 1929년 경성제대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명석했다. 그의 다재다능함은 법학, 문학, 교육, 외교, 정치부문 등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여 현대사의 곳곳에서 그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 1987년 8월 30일 현민이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일간지는 한결같이 "현민의 80 평생은 격동의 연속이었던 한국현대사의 굽이마다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현민은 고대교수, 법학자, 한-일회담대표, 재건국민운동본부장, 구신민당 당수 등을 지냈으며 한때 소설을 쓰는 등 당양한 생을 살아왔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학생 200여 명은 '친일분자'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웬말이냐'고 하면서 고대에 빈소를 마련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보수주의 언론에서는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부도덕' 등을 운운하며 학생들의 태도에 일침을 가하였다.
- 일제시대부터 박정희정권까지 한번도 좌절하지 않고 시대조류에 잘 적응했던 그의 삶이 어떤지 더듬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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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과 경향문학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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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오는 1906년 5월 13일 서울 종로구 제동에서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이며 보성전문학교 강사였던 유치형(兪致衡)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 제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10월에 그는 성진순과 결혼하였다.
-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하였고, 1926년에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경제연구회'에서 공산주의자였던 이강국(李康國), 최용달(崔容達), 박문규(朴文圭) 등과 활동하였다. 1928년 그는 박복례와 재혼하였고,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해 그는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하고, 이강국, 박문규, 최용달 등과 분담집필하여 『조선사회운동사』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형법연구실 조수로 일했고, 1931년에는 25세의 나이로 법철학연구실에 조수로 있으면서, 대학 예과에서 '법학통론'을 강의하였다. 1932년에는 송진우의 주선으로 보성전문학교에서 헌법, 행정법, 국제법의 강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그 대학 전임강사가 되었다.
그는 문학적 자질도 뛰어나 잡지에 『여름밤』『스리』『파악』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여직공』『5월의 구직자』등은 경향주의적 성향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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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의 길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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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오는 1940년 이후에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논문으로「동양과 서양」, 단편으로「남곡선생」과「신경」등을 쓰면서 문화총력진영에서 단체적 경력이 다채로왔다. 문인협회, 문인보국회의 간부, 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으로 결전(決戰)소설 공모를 심사하였고,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대표로 두 번씩이나 참가하였다.
유진오는 김동환(金東煥), 김문집(金文輯), 박영희(朴英熙), 이광수(李光洙), 이태준(李泰俊), 최재서(崔載瑞) 등과 함께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이었다. 이 단체의 활동은 시국강연회, 전쟁문학의 밤, 결전문예좌담회, 만주개척촌(국책이민 부락)시찰, 해군 견학단 파견, 황민문학 건설과 총력운동, 신도실천의 모든 부문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1941년 유진오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위촉되었고, 같은 해 8월 12일 열린 문인협회 간부회의에서는 김동환, 박영희 등과 함께 상무간사로 위촉되었다. 이때 그는『삼천리』등에 친일 논문을 실었고, 학병 지원의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고 다녔다.
당시 문단의 중요 행사로 1942년 이후 매년 1회씩 3회에 걸쳐서 개최된 대동아문학자대회가 있었다. 대동아문학자대회는 일본문학보국회 주최 정보국과 해군군보도부 후원으로 개최되었는데, 대동아의 문예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던 일본의 전시 문화공세의 한 종류였다. 이 대회에 유진오는 2회에 걸쳐 참석하였다. 1943년 제2회 대회에서 그는 영미문학 격멸과 결전문학 확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우리문학자의 사명은 米英격멸정신을 훌륭히 작품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주의 미영문화를 격멸할 중대 차 장엄한 동양의 오래고도 고유한 문화를 확립함이 가장 중요하다(決戰文學理念確立, 임종국,『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1963,144쪽)
- 당시 조선문인협회, 조선배구작가협회, 조선천류협회, 국민시가연맹 등 4개 단체는 해산하여 조선문인보국회를 43년 4월 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성하였다. 조선문인보국회는 해방전까지 존속하면서 '조선에 있어서의 문학자의 총력을 대동아전쟁의 목적에 결집하며 황도세계관을 현현하는 일본문학을 수립'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유진오는 이 단체에서 상무이사, 소설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44년 8월 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전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유진오는 연사로 참가하여「我等必す勝つ」(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를 강연했다.
- 아시아의 각성은, 그러나, 오늘날 일본만이 아니라, 아시아 10억의 민중 사이에서 해일처럼 팽배하여 일어나 온 것입니다. 미영의 달콤한 유혹에 팔려서, 그리고 아시아 부흥의 대역(大役)을 일본의 손에서 탈취하고 싶은 소승적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중경이라고 할지라도 , 이 역사적 운명의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경이 지금에 와서 집요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다만 국민에 대한 체면과 과거의 타성 때문 그 외의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요는 미영을 격멸하는 한 길이 있을 뿐입니다.…이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小磯내각이 大和一致의 큰 깃발을 내 건 것은 실로 나의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입니다.…1억 大和, 최후의 돌격을 향하여 매진할 것입니다. 대화일치 이것이 전쟁에 승리하는 요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전쟁은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왜냐? 우리는 이 싸움에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 이길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필승의 신념은 단순한 맹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로 이같은 필승의 이치를 자각하고, 대화일치, 서로 힘차게 최후의 단계를 돌파하여 가자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친일문학론』,282-283쪽)
- 유진오는 45년 6월 8일에 출범한 조선언론보국회의 평의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해방되는 그날까지 친일단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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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한 헌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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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이 되면서 보성전문학교의 교수 겸 법학과정이 된 유진오는 경성대학 법문학부의 교수도 겸직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교육방면보다 자신의 표현대로 국내에서 유일한 헌법학 전공자로서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통일된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한 단계로, 먼저 치안유지 단체를 조직한다, 둘째 총선거를 한다, 셋째 총선거의 결과에 의해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조직한다'는 생각이 '현실정치에 대한 무지'로 나온 것으로 특히 공산주의를 모르는 소치임을 밝힌다. 따라서 그는 헌법기초에 관한 어떠한 움지임에도 동원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 총선거에는 좌우양익이 모두 별관심이 없었으나 헌법을 기초하는 운동은 내내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 초기의 움직임은 나는 전연 알지 못한다. 헌법기초에 관련하여 나의 이름이 들먹거려지게 된 것은 1945년 11월 말경 김구(金九)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요인이 환국한 뒤의 일이다. 12월 어느날 신문을 보니 임시정부안에 헌법기초위원회가 조지되었다는 기사가 났는데, 위원명단에 최동오(崔東旿), 신익희(申翼熙)씨 등 임정요인의 이름과 함께 정인보(鄭寅普)씨와 나의 이름이 있었다. 1946년 1월 어느날 박문규가 찾아와서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식안'을 내밀고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박군의 부탁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고 말았다.(헌법기초회고록,13-15쪽)
그러나 유진오는 1946년에「사회와 법률」(법정)을 이듬해에「권력분립제도의 검토」(법정), 「우리헌법의 윤곽」(법정) 등을 발표하였다.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안에 '조선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위촉받자 그는 재빨리 수락했다. 그는 수락이유로 '공적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처럼 미군정의 인정이라는 틀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한단독선거를 추진하는 3대세력, 즉 미군정, 한국민주당, 독립촉성국민회으로부터 헌법초안 작성을 부탁받았다고 기술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는 당시 대법원장 김용무(金用茂), 사법부장 김병로(金炳魯), 검찰총장 이인(李仁), 사법부차장 권승렬(權承烈), 변호사 강병순(姜炳順), 사법부 법률심의국 주석고문 겸 법전편찬국장 퍼글러(Charles Pergler) 등이 참가하였다. 그는 이때 양원제, 내각책임제, 농지개혁, 기업의 자유를 전제로 한 통제경제 등의 기본원칙을 구성하고 회합에 임했다. 법무사로 있었던 황동준(黃東駿), 윤길중(尹吉重), 정윤환(鄭潤煥)의 도움을 얻어 1948년 5월초 법전편찬위원회에 한 부를 제출하였다.
1948년 4월 신익희로부터 헌법초안작성에 관하여 만나자는 요청을 받아 그는 행정연구회와 또다시 안을 기초하였다. 행정연구회는 1945년 말 경에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자들이 모여 조직된 것으로 중요 회원은 장경근(張璟根), 최하영(崔夏永), 이근기(李根基), 강명왕(康明王), 윤길중, 박근찬(朴根燦), 김용근(金龍根) 등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1946년 1월 10일부터 3월 1일까지 헌법초안작성을 완료했는데, 제2단계의 헌법심의 때에 유진오를 참가시키기로 하였다고 한다. 유진오는 협력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첫째 이승만-신익희 추축(樞軸)은 한국민주당과 함께 그때 5·10선거를 추진하고 있는 민간세력의 양대산맥이었으므로 그분들과 합작하는 것이 무용의 마찰을 피하고 손쉽게 헌법제정사업을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과, 둘째로는 행정연구회 멤버들은 나를 '학교에서 아무 법률이라도 다소 강의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밖에 평가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들을 행정사법의 실력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협력을 얻음으로써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헌법기초회고록,35쪽)
- 행정연구회의 헌법초안도 유진오가 작성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작성된 헌법초안은 5·10선거로 국회가 개원되자 곧바로 30명의 기초위원과10명의 전문위원을 선정하여 제헌작업에 착수하였다. 유진오는 전문위원에 위촉되었다. 따라서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내각책임제 헌법제정이 거의 마무리되어 갔다. 내각제 헌법제정은 이승만이 "국회가 만일 내각책임제나 양원제를 채택한다면 국민운동이나 벌일 것이며 정부수립에도 참여 않겠다"는 발언으로 좌절되었고, 23일 대통령중심제로 변경되었다. 그가 자신의 표현대로 '정치에 무감각했던 학자'를 강조하려면 하룻 밤에 내각제가 대통령제로 변경되었던 헌법심의 과정에 나타나지 말었어야 했다. 곧바로 이승만에 의해 법제처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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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회담의 수석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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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5·16 쿠데타를 인정한 이유에는 '이승만 정권이 일본과 군사·경제적 지역통합전략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하였다.
-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이었던 51-53년 간에 일본과 제1,2,3차 회담을 가졌다. 이때 회담 주선에 힘쓴 이가 유진오였다. 유진오는 51년 여름에 임송본과 함께 동경으로 파견되어 50일 동안 한일회담 개최에 대한 기초조사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차회담에서는 재일 한국인들의 법저 지위문제, 문화재반환 문제, 재산청구권 문제에 어업문제가 추가되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1952년 5월에 결렬되었다. 2,3차에는 소위 구보다(久保田)의 망언으로, 4차 회담 중에는 재일동포 북송문제가 발생하여 진전되지 않았다.
한일회담은 다시 민주당 정권으로 넘겨져 구체적으로 토의하려고 했으나 5·16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미국은 무모한 대외팽창과 군사비 지출, 경제원조로 적자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동아시에서 군사·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일본을 하위동맹자로 삼고자 하였다. 세 나라를 묶는 지역통합 전략은 1960년 1월에 미일신안보조약체결과 한일국교정상화로 나타났다.
- 유진오는 1961년 1월『동아일보』에「한일관계와 우리 태도」에서 한일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일본이 우리의 존립을 말살하려는 공산권 국가군의 일원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일본은 자유국가군의 일원이요, 더욱 우리의 맹방(盟邦)인 미국의 맹방인 것이다.…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비단 한일 양국의 이해에만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미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길이며 나아가서는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도 기여하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이 과업에서 실패한다면 대한민국은 언제까지나 모든 자유국가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한국의 평화적 통일이 아니라 한국전의 재판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커다란 마이너스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유진오,『젊음이 깃칠때』,휘문출판사,1978년,215-217쪽)
- 군사정부에 의해 61년 10월 20일부터 6차회담이 진행되자 수석대표였던 유진오는 '혁명정부' 운운하면서 한일회담에 대한 결단을 주장하였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일회담과 같은 중대한 결정은 양국정부에 비상한 결단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혁명정부는 한일회담의 최후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의 정부라고 생각이 되니 만큼 나는 6차회담은 성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나는 양측에 대해서 이것이 성공하는 경우의 중요한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한다. 우리측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들이 일본과 국교를 조절하는 대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유진오,「한일회담의 회고」『시사』1961년 11월호,9쪽)
- 현민은 1959년에 학술원 공로상과 1962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1966년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신민당 총재였다. 그는 1980년에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카멜레온 처럼 끊임없이 시류에 자기변신을 해온 그에게 '대학자'라는 호칭은 무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