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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묵상글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 이순(耳順).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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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순(耳順)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기가 꺾인 사람들이고,
주님은 그런 우리를 가엾어하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며 그래서 대림절에 이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과 대림절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묵상이랄까 성찰을 하였습니다.
기가 꺾인 우리의 기를 세워주시기 주님께서 오셨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기가 꺾인 사람인가? 기고만장한 사람인가?
어떤 사람인 것이 내게 좋을까? 기가 꺾인 사람인가? 기고만장한 사람인가?
기가 꺾여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과
기가 하늘로 솟은 것이 만장이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좋을까요?
인간적으로만 보면 기가 꺾인 사람은 가여운 사람이고,
기고만장한 사람은 좋게만 볼 수 없더라도 가여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본다면 기고만장한 사람은 분명 가엾고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대림절이어도 주님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만 빼놓고 오실 리 없으시지만
그에게 오셔도 그는 필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자기 기가 센 사람의 특징이지요.
약자나 병자들이 하느님에게든 인간에게든 남의 기를 받지
기가 센 사람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기를 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면에서는 기가 센 것보다 기가 꺾인 것이
차라리 낫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기가 죽어 있을 뿐 주님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지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성찰해봅니다.
옛날의 저는 두말할 여지 없이 기고만장했습니다.
교만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때와 비교하여 기가 많이 죽은 지금이 오히려 전보다 나은 상태라고,
공자가 나이 60이 되면 이순이어야 한다고 한 대로 이순(耳順)의 상태라고
곧 듣기를 순히 듣는 상태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침 오늘 독서 이사야서도 ‘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대림절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너희의 눈이 스승을 뵙게 되리라.”
“뒤에서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그러니 우리의 이순이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도 이순이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데에 이순이어야 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순히 들은 우리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았느니 주라는’ 오늘 마지막 주님 말씀대로 기가 꺾인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고 기를 세워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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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고 합니다.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도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라고 노래합니다.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러니 우리는 그 마음을 ‘이미’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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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써야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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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사제관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같은 서울대교구 신부님들이 있는 곳에서는 며칠씩 더 머물 때가 있습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는 거리가 많기도 하고, 동창 신부님인 경우에는 부담 없이 며칠 더 지내곤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제가 심심하지 않도록 등산을 가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교우들과 저녁 약속을 잡기도 합니다. 저는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편이기에 그렇게 미리 약속을 해 놓으면 편합니다. 그러나 거절도 잘 못하는 편이기에 너무 약속이 많으면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편히 쉬라고 하면서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제가 어디 가자고 하면 그때는 기꺼이 같이 가줍니다. 저도 편하게 책을 읽기도 하고, 강론 준비도 하고 모처럼 푹 쉬는 시간을 가지니 좋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정을 잡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약간 심심하기도 합니다. 저도 신문사에 손님 신부님들이 오면 숙소는 마련해 주지만 제가 일정을 잡아서 안내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식당은 아는 곳이 많으니 같이 가지만 다른 것들은 뉴욕에 살아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젊은 신부님들은 뉴욕에 처음 왔어도 저보다 더 잘 알아서 다니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주님의 날이 오면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불의는 정의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원망과 불평은 감사와 행복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후에 선포했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날이 오면 어떤 일들이 생길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날이 오면 참된 자유와 참된 평화가 시작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날은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나의 삶에서, 나의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주님의 날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주님의 날’입니다. 마리아가 노래했던 ‘주님의 날’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다시 갈망이 생기는 만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 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앓는 이들은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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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기분 나쁠 때는 혼자서 자기감정을 삭힐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더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폭발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 정신건강에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공동체에는 최악이 됩니다. 기분 나쁘고 또 맘에 안 든다고, 그래서 바로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는 절대로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구성원 전체가 불행해지는 것은 금방입니다.
감정을 폭발하면 후련함을 잠시 가질 수는 있겠지만, 더 큰 불편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이라도 걸러야 한다고 많은 심리학자가 조언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유지되고 본인 역시 편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70대의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80대의 할머니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다가가 이렇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왜 젊은 사람만 좋아하는 거예요?”
그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70대나 80대나 똑같이 본당의 어르신이라고 생각했는데, 70대 할머니들과 80대 할머니들 사이에도 벽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긴 조그마한 꼬마들 사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감정을 폭발하면 이렇게 벽이 세워집니다. 함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벽이 치워집니다.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늘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굳이 부족함이 많은 제자를 뽑아서 이러한 특수한 권한까지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서 힘들어하는 모든 인간을 구원의 길, 참 기쁨의 길인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더 많은 목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함께하길 간절하게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자기감정을 폭발해서 벽을 쌓는 그래서 자기만족은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길로 가면 안 됩니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함께 사는 세상에서 적합한 나의 모습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인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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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증오를 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지만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들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파울로 코엘료, ‘다섯 번째 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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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늘 주님께 배우고 치유받읍시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시편147,3)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평생 배워야 합니다. 으뜸 스승은 주님이시고 눈만 열리면 삶 전체도 스승이 됩니다. 참으로 겸손히 배우는 삶자체가 아름답고 인간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느 수도승 신학자가 말한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공자에게도 호학好學은, 배움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를 설립해야 하겠다”하며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했습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만 46세로 병사하기 까지 참 불꽃처럼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성인으로부터 참 많이 배웁니다. 잠시 성인의 삶을 나눕니다. 예수회 창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절친했던 동료로 16세기 동방 선교에 참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포르투칼을 떠난지 13개월후 1542년 인도에 도착한후 수천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1545년에는 말레시아 말라카를 찾았고 이어 뉴기니와 인접한 몰루카 제도와 필리핀에 가까운 모로타이 섬을, 그리고 일본에서 수년간 선교사로 활약했으며 중국 선교를 앞두고 중국 광저우에서 30마일 떨어진 상천도에서 열병으로 쓰러진후 객사합니다.
흔히 성인은 성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립니다. 성인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했고 성인이 개종시킨 교우 수만해도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성인은 ‘인도의 사도’ 또는 ‘일본의 사도’로 불립니다. 그는 자신의 사부이자 동료인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함께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고, 1927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리지에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톨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성인의 선교에 열정의 노력을 다했던 삶자체가 살아 있는 성경책처럼 감동적이라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은 성인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는 스승이자 치유하는 의사로 묘사됩니다. 배움과 더불어 치유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주님께 많이 배우고 치유받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들으리라.”(이사30,20-22)
그러니 언제나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스승이신 주님께 귀울여 듣는 겸손의 경청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가르침과 더불어 뒤따르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이어지는 치유에 대한 묘사 말씀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무적인지요!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도랑들이 생기리라.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이사30,25-26)
그대로 대림시기 치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께 가르침과 치유를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다음, 말씀 선포의 가르침과 치유에 온힘을 다 쏟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9,7-8)
가르침과 치유가 한 쌍을 이룹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와 동시에 뒤따르는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참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온전한 사람보다는 괴물이나 폐인의 병자들이 참 많고 날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치명적이고 무서운게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신 주님 부재시 무지와 허무주의, 절망의 병입니다.
육신은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영혼들도 많을 것이며 온갖 영적 나병들도, 마귀에 들린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악마가, 마귀가 따로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의 편견이나 이념이 광신적이 되어 극단적이 될 때 바로 그대로 악마가, 마귀가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소통의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온통 악마들이 횡행하는 시대같습니다. 온갖 불통과 분열들 바로 죄의 징후이자 악마의 소행입니다. 분열로 인한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통합도 요원해 보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나 이제나 악순환의 반복같습니다.
답은 최고의 스승이자 의사이신 주님께 겸손히 진리를 배우고 영육이 치유받는 길뿐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시편147,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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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일꾼>
마태오 9,35─10,1.5ㄱ.6-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일꾼>
주님께서 뽑으시니
주님의 일꾼
주님께서 맡기시니
주님의 일꾼
주님의 일을 하니
주님의 일꾼
주님처럼 일하니
주님의 일꾼
주님의 뜻 이루니
주님의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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