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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
이지끼을
다음은 위키백과에 실린 이신칭의에 대한 설명 처음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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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B%A0%EC%B9%AD%EC%9D%98
이신칭의(以信稱義)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해진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말한다. 현대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리는 마르틴 루터에 그 뿌리가 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른 종류의 칭의(의화) 교리를 따른다.
종교개혁 당시 재발견된 이신칭의[편집]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통하여 전 유럽에 전파한 그리스도교 교리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는 한자어 뜻 그대로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중요하고 전부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교리의 발견은 기존의 '공로 구원'으로 점철되어 있던 중세 교회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의 말씀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재발견하였고, 이신칭의로 교리화하여 교회를 정화시키게 된다. 이신칭의의 은혜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로 오는 '의로움의 전가'가 동시에 일어난다.[1]
이신칭의는 로마서의 말씀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구절에 성경적 기반을 두고 있다. 로마서에는 그 구절과 비슷한 표현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말씀이 반복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고, 그 죄 사함의 사건을 믿는 자가 그 '믿음'만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믿는 자의 죄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예수는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였고, 믿는 자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여 천국 백성이 된다. 예수의 구원 사건을 믿는 자는,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서 인정하는 자이고, 그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 이것이 이신칭의이고, 곧 기독교의 복음이다. 이러한 복음의 발견은 기존 교회(로마 가톨릭)의 극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예수를 믿어도 선한 행위가 있어야 천국에 간다는 주장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진정으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한 자는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뿐이므로, 자기의 힘으로 인한 공로로는 절대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적인 은혜로 인간을 구원한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며, 성경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값없이 구원된 자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에 감격하여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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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루터가
그 '믿음'만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된다고 곧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처럼 소개하는데
제가 보기에 이 말은 루터의 말을 오해한 것입니다.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고 말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위의 글이 소개하는 것 처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또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루터의 갈라디아서 3장 27절 주석입니다.
https://ccel.org/ccel/luther/galatians/galatians.vi.html
Martin Luther: Commentary on St. Paul's Epistle to the Galatians
Verse 27. For as many of you as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To “put on Christ” may be understood in two ways, according to the Law and according to
the Gospel. According to the Law as in Romans 13:14, “Put ye on the Lord Jesus Christ,”
which means to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27절.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은 너희는 다 그리스도를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율법과 복음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14절에 있는 율법에 따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put on Christ according to the Gospel means to clothe oneself with the righteousness,
wisdom, power, life, and Spirit of Christ. By nature we are clad in the garb of Adam.
This garb Paul likes to call “the old man.” Before we can become the children of God
this old man must be put off, as Paul says, Ephesians 4:29.
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지혜, 능력, 생명, 영으로 자신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아담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옷을 “옛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바울이 에베소서 4:29절에서 말했듯이
이 옛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The garment of Adam must come off like soiled clothes. Of course, it is not as simple as
changing one’s clothes. But God makes it simple.
He clothes us with the righteousness of Christ by means of Baptism, as the Apostle
says in this verse: “As many of you as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With this change of garments a new birth, a new life stirs in us. New affections toward
God spring up in the heart. New determinations affect our will. All this is to put on Christ
according to the Gospel. Needless to say, when we have put on the robe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we must not forget to put on also the mantle of the imitation of Christ.
아담의 옷은 더러운 옷처럼 벗겨져야 합니다. 물론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단순하게 만드십니다.
사도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었다." 라고
말했듯이 그는[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십니다.
이 옷의 변화로 새로운 탄생, 새로운 삶이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애정이
마음 속에서 솟아납니다. 새로운 결심이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에 따라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을 때, 그리스도를 본받는 망토를 입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루터의 갈 3:27절 주석을 보면, 루터는
"그는[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루터는 세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의롭게 되는 두가지 방법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말을 합치면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의롭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루터의 말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대교리문답 (Large Catechism, page 92)에서
Likewise in St. Mark, the last chapter (v. 16): “He that believeth and is
baptized shall be saved; but he that believeth not shall be damned”
In these words we must notice, in the first place, that here stands God’s
commandment and institution that we shall not doubt that baptism is divine, and
not devised and invented by men. For as truly as I can say no man has spun the
Ten Commandments, the Creed and the Lord’s Prayer out of his head, but they
are revealed and given by God himself, so also I can boast that baptism is no
human trifle, but that it is instituted by God himself, and that it is most solemnly
and rigidly commanded that we must be baptized or we cannot be saved.
라고 말하였는데
막 16: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말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루터가
and that it is most solemnly and rigidly commanded that we must be baptized
or we cannot be saved.
우리는 세례를 꼭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장 엄숙하고
엄격하게 명령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루터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말은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대교리문답(Large Catechism, page 95)에서
But as our would-be wise, new spirits declare that faith alone saves, and that works
and everything external avail nothing, we answer: It is true, nothing in us is in any way
effectual but faith, as we shall hear still further.
그러나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영들은 믿음 홀로 구원한다고, 그것이 효과가
있으며, 외부의 모든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함에 따라, 우리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더 들어야 할 만큼, 믿음 외에는 어떤 식으로든 효과가 있는 것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But this these blind guides are unwilling to see, viz. that faith must have something
which it is to believe, something of which it may take hold, and upon which it can stand
and rest.
그러나 이 소경 인도자들은, 믿음에는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서서 쉴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Thus faith clings to the water, and believes that in baptism is pure salvation and life;
not in the water (as we have said plainly enough), but in the Word and institution of
God incorporated therein, and the name of God which inheres in it.
그러므로 믿음은 물[세례]을 믿으며, 세례에 순수한 구원과 삶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분명하게 말했듯이)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통합된 하나님의 말씀과
제도,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If I believe this, what else is that but believing in God as in him who has given and set
his Word in this ordinance, and proposes to us this external element wherein we may
apprehend such a treasure.
내가 이것을 믿는다면, 이 의식에 자신의 말씀을 주셔서 정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서 그러한
보물을 이해하도록 이 외적인 요소를 우리에게 제안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루터의 이 말을 보면,
루터는 믿음 홀로 구원한다 곧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영들이라고 지칭하고,
또한 이런 사람들을 소경 인도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칼빈(A)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이 보여 주는 [믿음]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합니다.
곧 이 [믿음]은 [세례]라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루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믿음]을 이와 같이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루터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소경인도자들"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루터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쯔빙글리와 칼빈(B)은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저의 지난 글
(세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 https://cafe.daum.net/1107/Y4PX/1111)에서 말씀드린대로
쯔빙글리와 칼빈(B)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는 말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쯔빙글리와 칼빈(B)은,
그 과정은 같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세례에 대해 같은 이해(B)를 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쯔빙글리와 칼빈(B)이 바꾼 말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는 말을 보면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그리고 [세례]는 [구원]에 상관이 없습니다. 선택사항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든, 안 받든, [구원]받음에 지장이 없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막 16:16절에서 말씀하신 믿음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그 믿음의 행위, 그 믿음으로 인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쯔빙글리와 칼빈(B)이 바꾼 말에서 믿음은
세례없이 (또는 세례받기 전에)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곧 이 믿음은, 믿음의 행위없이,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와 칼빈(B)은 유례가 없는 새로운 믿음, 곧 다른 믿음을 더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의 믿음은,
곧 루터와 칼빈(A)이 이해한 믿음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쯔빙글리와 칼빈(B)이 이해한 믿음은, (세례없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루터와 칼빈(A), 그리고 쯔빙글리와 칼빈(B)은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했다 할 수 있는데
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루터와 칼빈(A)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라고 말했다면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반면에
쯔빙글리와 칼빈(B)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라고 말했다면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루터와 칼빈(A), 그리고 쯔빙글리와 칼빈(B)은 모두 "이신칭의"를 말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신칭의를 모두 말했다고 해서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의 "신" 곧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루터와 칼빈(A)이 말하는 믿음은 세례를 통해 의롭다함을 받게 하는 믿음이고
쯔빙글리와 칼빈(B)이 말하는 믿음은, 세례없이 의롭다함을 받게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쯔빙글리와 칼빈(B)이 말한 믿음을 성경적인 믿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는 루터의 말을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루터의 말을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는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이신칭의"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소개드린 위키백과 첫 문단에
"현대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리는 마르틴 루터에 그 뿌리가 있으며," 라고 하였는데
어떤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런 이신칭의는
루터의 이신칭의가 아니라 쯔빙글리와 칼빈(B)의 이신칭의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리는 마르틴 루터에 그 뿌리가 있으며," 라는 말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신칭의와 같지 않은 루터의 이신칭의를, 같은 "이신칭의"인 것으로 오해하여
루터로 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기독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루터와 칼빈(A)이 말한 "이신칭의"는 쯔빙글리와 칼빈(B)이 말한 "이신칭의"와 같지 않습니다.
오해없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