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순간부터 오늘이 여행 날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지순 씨는 연노랑 원피스를, 주현 씨는 백바지를, 선영 씨는 회색 바지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왔다.
각자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온 것이다.
복장에서부터 여행의 설렘이 흘러나왔다.
버스터미널로 이동해서 대구 서부 정류장까지 가는 표를 끊었다.
주현 씨는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매표소로 달려갔다.
선영 씨는 주현 씨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각자 자기 표를 끊고 내 표만 김수경 선생님께서 끊어주셨다.
지난 광주 여행에서 지갑을 분실한 여파다.
버스에 탑승하는 순간 지순 씨와 주현 씨는 맨 뒷자리로 향한다.
천장에 머리가 닿아 불편할 텐데 뒷자리만의 매력이 있나 보다.
선영 씨는 편한 자리를 택한다.
잠들기 좋은 자리를 골라 앉은 것 같다.
나도 지순 씨, 주현 씨 따라 뒷자리에 앉았는데, 주현 씨가 내 옆자리로 좌석을 옮긴다.
주현 씨에게는 편안함보다 함께 추억을 짓는 일이 훨씬 중요한 모양이다.
한 시간 남짓 이동한 끝에 서부 정류장에 도착했다.
서부 정류장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김광석 길로 이동하기로 했다.
지순 씨와 주현 씨는 몇 차례 지하철을 이용해본 것 같았지만, 선영 씨는 오늘이 처음이다.
표를 끊고 개찰기 앞에 선 선영 씨가 우왕좌왕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펼쳐진 차단기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자꾸만 뒤를 살피면서 주춤주춤 걸어가다 마침내 개찰기를 넘었다.
탑승구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는 어디에 발을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선영 씨가 웃으며 말한다.
“재밌다.”
좌충우돌하며 탑승구에 도착했다.
안내 방송과 함께 안전문이 열리고 지하철에 탑승했다.
손잡이가 잡고 싶었던 선영 씨가 양쪽 팔을 펼친다.
왼편과 오른편에 있는 손잡이를 양손에 잡고 매달리듯 서 있다.
놀랍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김수경 선생님이 사진기를 들었다.
지하철이 처음인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경북대병원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가는데, 선영 씨가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질주했다.
그것도 하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로.
역행하는 계단 위에서 선영 씨 다리가 방황한다.
올라도 올라도 제자리걸음인 게 의심스러웠는지 조금 이따 뒤를 돌아본다.
“선영 씨! 거기 아니에요. 그건 내려오는 거예요.”
선생님들의 다급한 손짓을 보고 선영 씨가 뒤돌아 내려왔다.
이정표를 따라 김광석 길에 다다랐다.
지순 씨는 안내판에서 팸플릿 몇 장을 꺼낸다.
주현 씨는 저 앞을 향해 뛰어가고, 선영 씨는 내 옆에서 느긋하게 걸어간다.
세 자매는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벽 곳곳에 김광석 노래를 소재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거리에는 김광석 노래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김광석이 생전에 남긴 말과 글도 읽을 수 있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그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사랑은 소리 없이 내리는 빗물같이 조용히 말없이 내 몸에 스며든다.’
지순 씨가 소개한 김광석 길은 볼거리 생각할 거리로 넘쳐났다.
점심은 선영 씨가 사준 매운 돈가스를 먹었다.
선영 씨가 한 달간 고생했다고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스파게티를 주문한 선영 씨는 내게 먼저 한입 먹어보라고 제안했다.
선영 씨 덕분에 배부르게 식사했다.
이후 주현 씨가 가고 싶어 했던 네이처파크에 갔다.
네이처파크의 첫 관문은 비버처럼 생긴 커다란 동물 곁을 지나가는 것이다.
주현 씨가 먼저 용감하게 다가갔다.
두 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한다.
“안녕.”
연이어 지순 씨가 들어갔다.
김수경, 박소영 선생님과 나는 멀찍이 지켜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들어섰다.
선영 씨는 박소영 선생님 뒤에 붙어 망설이고 있었다.
동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앙칼진 비명이 들린다.
“아아아아아아!”
선영 씨가 겁에 질린 눈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박소영 선생님 목을 꼭 부여잡고 한발 한발 걸어갔다.
옆에 있는 사람이 비명을 질러도 비버처럼 생긴 동물은 태연하다.
평온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다.
선영 씨가 동물을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유리에 갇힌 동물에는 겁을 안 내는 것 같았다.
온몸을 칭칭 감고도 남을 기다란 뱀과 공룡처럼 생긴 이구아나 앞에서는 사진까지 찍어달라고 했다.
그래도 거리를 쏘다니는 동물은 확실히 무서워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공작새 앞에선 걸음을 주저했다.
허리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까지 했다.
거리감의 표현이었을까.
고개를 쭉 내밀고 돌진하던 거위 앞에서는 나와 선영 씨 모두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선영 씨만큼이나 나 역시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
네이처파크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고, 날은 더웠다.
온몸이 땀 범벅이 되었을 때 에어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열을 식혔다.
우리 옆에는 작은 미어캣들이 복닥거리고 있었다.
선영 씨는 이날 따라 많은 사진을 남기고자 했다.
미어캣 옆에서, 예쁜 꽃과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찍으려 했던 건 아니다.
한 번은 김수경 선생님, 다른 한 번은 나와 찍고 싶다고 했다.
이별 전, 소중한 사람과 추억을 남기려는 것 같았다.
이제 활동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걸 실감했다.
선영 씨는 내 팔목을 잡고 길을 걸었다.
지칠 때는 내 등 뒤에 기대 잠시 쉬기도 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준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니깐.
선영 씨와 나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앞으로 공작새와 거위를 볼 때마다 선영 씨를 떠올릴 것 같다.
선영 씨도 거위만 보면 소리치며 뛰어가던 나를 생각할 것 같다.
떠올리고 생각할 사람 한 명을 얻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갈 이유 하나를 더 얻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2022년 8월 4일 목요일, 전채훈
첫댓글 거위 이야기 들으며 한참 웃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선영 씨와 나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선영 씨와 전채훈 선생님은 서로 마음을 열었군요. '한 사람을 얻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갈 이유 하나를 더 얻었다는 뜻이다.' 전채훈 선생님이 쓴 글을 곱씹어봅니다.
역행하는 에스컬레이터 타고, 지하철 양쪽 손잡이 잡고..다시 떠올리니 웃음이 납니다.^^
선영 씨가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어 달라고 한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전채훈 선생님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쉬워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었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