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나자와를 떠도는 윤봉길의 혼 이시카와(石川)현 바닷가에는 며칠째 비가 내렸다. 일본 본토 혼슈(本州)에서 동해로 뻗어나간 노도(能登)반도를 넘지 못한 저기압은 늦장마를 몰고 왔다. 호쿠리쿠(北陸)의 여름비는 가늘고 지루했다. 정말 그의 묘가 있는지가 궁금했다. 있다면 어떤 모습인지 비석은 세워져 있는지 마음이 바빠진다. 호텔에서 잡아준 택시의 지긋한 기사는 정확히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몰랐다. 쏟아지는 빗속에 공동묘지를 가자는 이방인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다. 비탈진 전몰자 묘역 돌비석 밭을 두어 바퀴 돌고 나서야 우뚝한 석비를 만날 수 있었다. 윤봉길의 혼은 거기에 살아있었다.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일본군의 점령승전식은 피로 물들었다. 시라카와(白川) 사령관 이하 수십명이 그의 폭탄에 전멸했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전체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감격했다. 아시아와 세계를 뒤 흔든 대사건 이었다. 폭살 현장에서 붙잡혀 시작된 운명의 행로. 중국에서 곧 바로 사형선고를 받고 동물취급 당하면서 일본군 9사단의 본거지인 이곳 가나자와(金澤)로 압송 되었다. 그 고통에 무슨 상상이 필요하겠는가. 갖은 악행을 거듭하던 일군은 그해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쌓인 12월 아침 가나자와 서쪽 부대 공터에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김구선생은 정부의 이름으로 특명을 내렸다. 재일동포들에게도 협조를 구했다. 윤봉길의 시신을 찾아 서울로 옮겨 달라는 부탁이었다. 압제가 끝난 조국에 유골로 돌아온 매헌(梅軒)은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양재동 숲속에 동상과 기념관으로 남아 오고가는 서울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잊혀 질 만 하던 1992년 이시카와 민단이 나섰다. 이국땅 가나자와에서 처형된 윤봉길의 추모비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고기를 구워 팔고 파친코로 모은 정성들이 이어졌다. 다른 지역 교포들도 힘을 보탰다. 이시카와 전몰자 묘원에 마련된 윤 의사 묘지와 추모비 건립 사연은 아프고 길다. 윤봉길이 해낸 것처럼 순국 60주년을 넘기지 않고 추모 사업을 마무리해낸 교포들의 충정에 가슴이 더워진다. 가매장터에 정식 묘를 만들고 70미터 떨어진 언덕에 육중한 순국비를 세웠다. 우리의 광복절은 일본의 패망일이다. 추모비 옆에는 작은 알루미늄 상자가 놓여있었다. 방명록 노트 보관함이다. 2014년 광복절에 이곳을 찾은 사람은 없었다. 민단의 이시카와 지역 책임자 한 사람이 하루 전 14일에 다녀갔을 뿐이었다. 찾는 이 하나 없었던 광복절 하루를 매헌의 외로운 혼은 그렇게 떠돌고 있었다.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 망명길에 오르면서 본인이 직접 쓰고 가슴에 품었던 말이다. “사나이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不生環)”. 25살 불타는 청년의 일생은 뜨겁고 짧았다. 그냥 애국심이었을까. 시대가 만들어낸 용기였을까. 아니면 그만의 어떤 신념이었을까. 알 수 없는 어떤 뜨거움으로 묵념을 대신했다. 그 기상 앞에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과거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 짓밟히면서도 꺾이지 않고 외치고 저항했다. 묘지를 내려오니 가나자와 시가지는 다시 차들로 분주하다. 에도시대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일본 5대 도시이면서도 유일하게 폭격을 면한 이곳은 그들이 자랑하는 유산들로 가득하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바퀴 속에 돌고 있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아베수상의 평화연설이 낯설다. 원폭은 반문명적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초라해 보인다. 고개 돌린 한일 두 나라. 긴장과 불편함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식민지 탄압과 위안부 문제가 거짓말이라고 둘러대는 보수의 기세는 거침이 없다. 그러면서도 패전일마다 전범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의견을 낸 인도인 판사는 대대적으로 추모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일본의 또 다른 영웅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거대한 기념비가 있고 곳곳에 세워진 비석에 꽃이 넘쳐난다. 역사를 포장하는 일본인들 앞에 가나자와의 윤봉길은 철저히 잊혀져가고 있었다. 100만 명의 재일한국인이 살고 있고 엄청난 숫자의 방문객들이 매년 간사이와 고마쯔, 가나자와를 찾는다. 방명록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는 정성으로는 매헌의 영혼을 달랠 길이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아픈 시대를 불사르며 살다간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그 역사가 반복될 수도 있다. 언어도 뿌리도 다 잊고 살아가는 재일한국인들에게 매헌을 찾아 달라는 것은 무리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 기억들은 다음 세대로 끈질기게 이어져야 한다. 미래를 위해 공존하되 잊지 말아야 하고 용서하되 마음까지 내던지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 꽃다운 청년 윤봉길이 꿈꿨던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작은 의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