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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韓信, ?~196년) 한고제(漢高祖)를 돕다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농부들도 나라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농사를 그치고 쟁기를 내버린 채 아름다운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귀를 기울여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한신
1. 회음후열전 [卷九十二]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제(漢高祖) 시대의 장군. 중국사의 명장(名將)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뒤늦게 유방에게 합류하였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곧 대장군이 되었고, 이후 한고제가 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훗날 토사구팽을 당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군사적으로는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의 유방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시켜 기반을 마련하였고, 결정적으로는 팽성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 속에서 정예도 아닌 비정예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로 시작하여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6국(六國) 멸망시켜 유방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유방(劉邦)과 여후의 견제와 본인의 처세 문제가 겹치면서, 천수를 누린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 사실상 '토사구팽'이라는 고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는 많은 표현과 말들을 만들어냈는데, 시정잡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고 훗날 용서하고 선정을 베풀어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고, 또 아낙네로부터 받은 작은 은혜를 잊지 않고 후에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으며, 소하가 유방에게 그를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다. 또한 유방과의 대화에서 후세에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으며,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었다. 한편 병법의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전략적 전술 혹은 결사적 각오라는 의미인 배수진으로 재탄생시켰으며, 훗날 항우와의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을 나오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군주를 위해 큰 공을 쌓았으나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버려지는 토사구팽까지.
2. 출신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한신의 출생에 관해서 한(韓)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건 명백한 오류다. 한신의 출생지인 회음현은 서주와 회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전국시대 초나라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역사소설 등을 쓰는 와중에 한신과 동명이인이었던 한왕 신이 이 한신으로 혼동되어 한나라 왕족 출신이라고 묘사하는 작가도 있었고, 이 영향으로 한신이 한 왕족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1980년대에 연재된 고우영 초한지에도 방대한 내용에 걸쳐 한신이 한나라 왕자로 설정되어 있다. 강조하지만 한신은 절대 한(韓)나라와 관련이 없다.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모두 그저 '한신은 회음현 사람이다'라고만 적혀 있다.
3. 막장 시절
3.1. 걸식표모(乞食漂母)
위에 적힌 대로, 한신의 집안은 왕족과는 거리가 먼 별볼일 없고 가난한 집안에 지나지 않았다. 집안 후광이랄 것도 없고, 가난하게 자란 탓에 한신 본인의 품행도 그다지 단정하지 못해 어디서 추천도 받지 못했다. 아래 과하지욕 고사에 나오듯이 일단 한신 본인의 키는 꽤 큰 편으로 보이지만 장사꾼 노릇도 그럴 듯하게 하지 못해 항상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밥을 얻어먹는 안습한 백수 신세였다.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거의 한신을 찌질이로 업신여기면서 싫어했다.
그러다가 한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한신은 장례를 치를 비용도 없었다. 그러나 물기없는 높은 곳에 어머니를 매장하여 마치 그 주위에 1만여 가를 둔 것 같이 했는데,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직접 회음에 가보니 진짜로 그러하였고, 한신이 그때 상황은 막장이었어도 뜻은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묏자리를 잘 쓴다고 해서 당장 없는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비참한 꼴이 된 한신은 알고 지내던 정장(亭長)의 신세를 지며 밥을 빌어먹었는데, 정장의 아내가 한신을 대단히 싫어해 일부러 새벽에 남편의 밥을 지어 먹여 한신이 빈대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신은 그 뜻을 알고 정장과 절교하고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히 밥을 벌어 먹을 수 있는 재주도 없고, 굶주린 채 낚시터를 어슬렁거렸는데, 빨래 하던 아낙네가 그 모습을 불쌍히 여겨 한신에게 밥을 주었고, 한신은 그걸 얻어먹으면서 굶주림을 해결했다. 며칠을 이렇게 얻어먹자, 한신은 아낙네에게 워낙 고맙기도 해서 이렇게 약속하였다.
"내가 나중에 꼭 베풀어준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아낙네는 되려 벌컥 화를 내었다.
"사내놈이 되가지고 지 먹을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뭔 보답을 운운하나? 앞길이 창창한 왕손이 굶는 게 불쌍해서 밥 좀 먹여준 거지, 내가 무슨 보답을 바라 그런 건 아닐세."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3.2. 과하지욕(胯下之辱)
이렇게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까일 지경인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느 날 회음의 젊은 사람들 중 백정 한 명이 대놓고 한신을 욕하면서 소리쳤다.
"너는 체격도 좋고 칼도 즐겨 차지만 속은 겁쟁이가 아니더냐?" 네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이 길을 지나가고,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지나가라!"
한신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혀서 가랑이 사이를 질질 지나갔다. 마침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한신에게 겁쟁이라고 놀려대었다. 이 사건으로 한신은 고향에서 그야말로 웃음거리 신세로 떨어져버렸다.
이와 관련해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인 항우와 유방에서는 역이기가 팽형당하는 후반부까지 "바짓가랑이 사내"라는 멸칭이 붙여졌다.
4. 한군의 대장
4.1.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다
답이 없는 찌질이가 되어 막장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한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이때, 오현(吳縣)에서 거병한 항량(項梁) 역시 북상하여 회수(淮水)를 건너던 참이었다. 한신은 칼을 하나 차고 서둘러 항량에게 달려가 그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항량의 부하가 되었다고 해서 무슨 대반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신은 철저하게 이름이 묻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훗날 용저가 한신의 안습한 일화들을 들먹인 걸 보면 오히려 안좋은 쪽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곧 항량이 싸움에서 패해 항우(項羽)가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한신은 집극랑(執戟郞) 자리에 임명되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듯 싶기도 했지만, 한신이 무슨 제안을 올릴 때마다 항우는 철저하게 무시했고, 어떤 계책도 써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한신은 항우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마침 그 시기는 유방이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에,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으로 터벅터벅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한신은 그 행렬에 합류해 한군에 귀속했다.
그러나, 한군에서도 한신의 자리는 없었고 거기서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 채 곡식창고를 관리하는 연오라는 낮은 직책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어떤 죄에 연루되어 한신은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고, 한신과 같이 있던 죄수들도 모두 끌려와 눈 앞에서 차례로 처형당했다. 한신 앞으로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이제 한신의 차례가 되자, 한신도 이렇게 죽기는 어이가 없었는지 하늘을 바라보다, 마침 눈 앞에 있는 하후영(夏侯嬰)에게 소리쳤다.
"상(上)께서는 천하를 취하고 싶지 않으신가? 그렇다면 이 장사(壯士)를 참하라!"
하후영이 듣기에 묘한 소리였으므로, 그는 우선 한신이 죽지 않게 했고,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키도 크고 허우대도 좋고 해서 유방에게 한신을 추천했다. 말을 들은 유방은 한신에게 군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 자리를 주었지만, 아직은 한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4.2. 소하가 천거하다
이때, 소하는 한신과 몇 번 대화를 해볼 기회가 있었고, 말을 나눠 본 후 이 사람이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이 당시 한나라는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촉으로 걸어온 유방의 군대가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장수 수십 명이 도망가버리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매일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대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장수들 중에는 한신도 있었다.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유방은 자기를 써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긴 것.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쫓아 추격했다.
이때 유방은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자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해 연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쫓아간 사실을 말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여러 장수들 같으면 얻기 쉽지만, 한신같은 자라면 나라안의 선비 중 그에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 꼭 오래토록 한중(漢中)의 왕이 되려고만 하신다면, 한신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면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왕께선 편안히 결정하십시오."
이때 한신은 그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인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하는 그 진면목을 완전히 꿰뚫어 본 것이다. 유방 역시 이런 벽지에 쳐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한신을 장수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비록 장수로 삼으신다해도 한신은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소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자세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에 유방은 소하의 제안대로 단을 세우고 대장군을 임명하는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번쾌나 조참같이 공을 좀 세운 장수들이 "야 신난다! 보나마나 내가 대장군에 되겠지?"같이 기대감에 부불어 식장에 모였다. 정작 모이고 보니 웬 키만 큰 놈이 단에 오르고 있었다. 이에 장수나 병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한서 한신전의 표현을 빌리면, 한신이 대장이 되자, 일군(一軍)이 모두 놀랐다.고 나온다.
유방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만약 유방이 촉에 처박혀 있으려거든 내부 단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서 분란의 씨앗을 심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유방의 야망의 그릇, 혹은 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위기 의식을 보여준다. 둘째로, 도박수이긴 하지만 실제로 유방은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유방의 부하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항우와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0에 가까운 확률이기 때문에 도박도 걸어 볼 만하다. 셋째로, 이 도박에 있어서 소하와의 관계이다. 유방은 소하가 없으면 자신의 세력을 이끌어나가기 몹시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소하의 사람됨과 능력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소하는 유방과 항우의 전쟁 중에 배신은커녕 옛 진나라의 역량을 싹싹 긁어모아 유방을 뒷바라지한 인물이기에 소하 없이 내 야망이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라면 도박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가 자신이 오만무례하다는 혹평을 면전에다 대고 했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그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하는 모습 또한 비범한 면이다.
시간상으로도 한신의 기용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유방이 관중에서 파촉으로 향했을 때가 기원전 206년 2월, 후술하겠지만 유방이 출전 준비를 끝내고 삼진을 공격했을 때가 같은 해 8월이다. 관중에서 파촉으로 이동한 시간과 새로 기용한 한신의 지휘 아래 전쟁 준비를 한 기간을 고려하면 한신이 이 대장군 직에 임명된 것은 한신이 유방에 합류한 지 길어야 2~3달 남짓이다. 진영에 들어온 지 몇달 안 된 외부 인사를 대장군이라는 최고위 지휘관에 임명한 것이다.
4.3. 유방에게 진면목을 보이다
이렇게 임명식이 끝나고 난 뒤, 유방은 따로 한신을 불러들였다. 소하가 하도 칭찬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항우에 대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벽지인 파촉지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단 대장군으로 뽑았으니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신은 감사의 예를 올리며 유방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대왕의 적은 항왕(項王)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선 스스로 용맹함과 날램, 인자함과 강인함을 항왕과 비교해보신다면 어떠십니까?"
이 시기 항우는 거록의 싸움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모든 제후들을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유방은 살짝 머뭇거렸지만 일전에 장량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기에 유방은 솔직하게 "내가 다 항우만 못하다."고 인정했고, 이에 한신은 유방에게 두 번 절을 올리고 유방을 치하하며 말했다.
"저도 대왕께서 항왕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항왕을 섬긴 적이 있으니 그의 됨됨이를 말해보겠습니다. 항왕이 분노하여 갑자기 소리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현명한 장수를 임명하여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에 불과합니다. 항왕은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고 화기애애하게 말을 하며 다른 사람이 병이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주지만, 다른 사람이 공을 세워 마땅히 봉작(封爵)할 때는 아쉬워하며 어쩔 수 없이 인수를 새겨주니, 이는 아녀자의 인자함에 불과합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으나, 관중(關中)에 머물지 않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또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제후들을 고르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제후들은 항왕이 의제를 강남(江南)을 쫓아낸 것을 보고는 각자 돌아가서 주인을 쫓아내고 좋은 땅을 차지해 스스로 왕을 칭했습니다.
항왕은 지나가는 곳마다 잔멸(殘滅)에 잔멸을 거듭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가득하며, 백성들이 스스로 항왕에게 의탁한 것이 아니라 그 위세에 겁을 먹어 강제로 복종했을 뿐입니다. 비록 패왕(覇王)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인심을 잃었으니, 그래서 강성함이 쉽게 약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를 바로잡고 천하에서 무용(武勇)이 있는 자를 임명한다면 어찌 주살하지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성읍을 공신들에게 나눠준다면 어찌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의병의 마음을 쫓아 동쪽으로 거병한다면 무엇인들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또 삼진(三秦)의 왕들은 진(秦)의 장수가 되었는데, 오랫동안 진의 병사들을 거느려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고, 또한 그 무리를 속여 제후들을 항복시켰습니다. 항왕이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항복한 진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속여서 파묻고, 오직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만 살려주었습니다.
진의 부형들은 이 세 사람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에 입성하여 백성들에게 추호도 해를 끼치지 않고, 가혹한 진의 법을 폐지하고, 백성들에게 약법 3장을 약속하여 진나라의 백성들은 대왕께서 진나라의 왕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제후들과의 분봉에서 대왕께서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하며, 관중의 민호(民戶)들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왕께서 관중을 빼앗기고 촉으로 쫓겨나 모든 진의 백성들이 한탄하고 있으니, 이제 왕께서 동쪽으로 거병하여 격문를 돌린다면 삼진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이 말은 파촉에 처박혀 미래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유방에게, 그야말로 막힌 곳을 뻥 뚫어주는 것처럼 시원한 말이었다. 유방은 한신의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신이 한신을 너무 늦게 얻었다고 여겼다. 유방은 마침내 한신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했고, 한신은 유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해 각 장수들이 움직일 곳을 정하여 동진하기 시작한다.
5. 전설의 시작
5.1. 삼진 정벌, 관중 평정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군이 동진하기 위해서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관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적이 옹왕(雍王) 장한(章邯)이었다. 이는 진(秦)을 멸한 후 항우가 각 제후들에게 분봉할 때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삼고 파촉의 벽지에 몰아 넣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삼진 땅에는 옛 진나라의 장수였던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를 각각 옹왕(雍王), 색왕(塞王), 적왕(翟王)으로 삼아 삼진 땅에 봉하여 군을 주둔시킴으로서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그 중 옛 진의 명장이었던 장한에게 관중의 8백 리 진천(秦川)을 봉해 유방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유방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파촉에서 나가지 못할까 두려워 했고 한신을 등용하기 전까지도 딱히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허나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는데, 이때 한신이 제안한 전술은 성동격서에 기초한 것으로서 당시 유방은 파촉에 들어올 때, 항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웠는데 이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한군이 잔도를 모두 불태웠으니 장한은 당연히 한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잔도를 수리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충분히 대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과 장한의 저런 심리를 이용하여 잔도를 대대적으로 고치면서 장한의 주의를 끌고 다른 길을 통해 몰래 기습을 했는데 이때 나온 말이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이다.
이에 대해 흔히들 그냥 '잔도를 고치는 척하며 다른 길로 나아갔다'라고만 알고 있으며, 그 진격로나 길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 과정은 한군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로 한군의 관중 진출에 중요한 고비인데, 이에 대한 자료나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여기서 참고로 설명하자면, 한중(漢中)에서 관중(关中)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일단 관중으로 나가려면 한중의 북쪽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한중의 북쪽과 관중 사이에는 해발 3,000m의 거대한 진령산맥(秦嶺山脈)이 있다. 훗날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북벌을 할 때 항상 넘어야했던 곳이 바로 이곳인데 이 진령산맥은 매우 험준한 곳으로 그 긴 산맥 중에서도 제대로 된 길이 거의 없었으며 최단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잔도를 만들어 넘어야했다.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 쓸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으며, 이 당시의 한중은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 그나마 있는 길들 또한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가장 동쪽에는 자오곡(子午谷)이 있는데, 후에 촉한(蜀漢)의 위연(魏延)이 북벌 당시 제안했던 자오곡계책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 길의 북쪽 구역을 자곡(子谷), 남쪽 구역을 오곡(午谷)이라 하여 자오곡(子午谷)이라 한다. 자곡의 입구가 장안(長安) 남쪽에 있어서 당시에는 함양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며 간혹 한신이 이 자오곡을 통해 장한을 습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길은 한중에서 바로 장안으로 가는 길이라 그 길이가 660리에 달하고 높은 산과 계곡들로 이루어져 거의 죽음의 길이라 불리었으며,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으로 아직 개발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는 진한교체기로서 장안성은 유방이 항우를 쓰러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후에 지었으며 함양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기에 출격하더라도 거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중간에는 당낙도(儻駱道), 즉 낙곡이 있었는데 계곡 길이가 420리로 장한이 도읍으로 둔 폐구와 가까워서 이 길로 나아가면 가장 위협적이었지만 당낙도 또한 길이 험한데다가 자오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않아 대군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서쪽에는 포야도(褒斜道)가 있는데 이 포야도는 관중으로 가는 길 중 상대적으로 넓고 평탄했으며 길이가 470리로 당락곡보다 조금 더 먼 길이다. 남쪽 구역을 포곡(褒谷)이라 하였고 북쪽 구역을 사곡(斜谷)이라 하였는데 사곡(야곡)의 입구는 미현의 남쪽으로 진한교체기 당시 이 길은 관중에서 한중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유방도 이 길을 통해 한중으로 들어왔는데 유방이 군을 이끌고 들어간 것처럼 대군을 이끌기에 좋은 길이었는데 장량의 계책에 따라 포야도의 잔도를 모두 불태워서 포야도를 통해 출병하려면 반드시 잔도를 복구해야 했다.
그리고 포야도의 서쪽에 진령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 진창(陳倉)에 도달하는 길이 또 하나 있는데 일찍이 관중에서 한중을 드나들 때 사용되던 주요 길이었으나 포야도가 개통되면서 점차 버려지고 잊혀졌다. 이 길이 바로 고도(故道)인데 당시에는 진창으로 가는 길이라 하여 진창고도(陳倉故道)라 불렸다. 포야도만큼 바른 길은 아니지만 군을 이동시키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양호했으며 포야도에 의해 가려진 길이라 장한 또한 경계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B.C 206년 6월~7월 사이 한신은 병사와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포야도의 잔도를 복구하는 작업을 거하게 펼치며 장한의 주의을 포야도 쪽으로 집중시켰다. 하여 장한은 군을 사곡 쪽에 집중시켰으나 잔도 복구의 시일과 유방의 세력 안정, 복구 후에도 피로에 한군은 지쳐있을 거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해 8월, 한신은 충분한 시간차를 두어 장한을 안심시킨 후 몰래 진창고도(陳倉故道)를 통해 군을 이끌고 진창을 기습하였다. 진창은 교통이 발달하여 진나라 시절 최초의 현으로 설치된 곳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옛날부터 성곽을 축조하고 많은 물자가 비축된 곳이었는데 한군은 이곳을 기습해 대량의 군량과 군수품을 얻었고 진창의 견고한 성곽을 함락시켜 대승을 거둔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장한은 한군을 막기 위해 진창(陳倉)으로 달려나왔으나 패했고, 이후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물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 다시 패배했다. 그리하여 장한은 결국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한 채, 유방은 그 사이에 다른 장수들을 시켜 한 달 사이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그리고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적왕(翟王) 동예(董翳)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이에 항우가 제나라 정벌에 발이 묶여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유방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한신(한왕 신)이 정창을 격파하여 한나라 땅을 탈취하였고,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하자 유방은 그곳에 하남군을 두었다. 그리고 장한의 동생 장평(章平)과 조분(趙賁)은 농서와 북지로 퇴각해 저항하며 항우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한군이 농서를 공략하고 이듬해 정월, 북지를 공략해서 장한의 동생 장평을 생포하고 후에 폐구성을 수공으로 수몰시키자 장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유방은 관중 지역을 모조리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 동예, 장한, 신양 등을 격파한 공을 모조리 한신의 공적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한 가지 알아둘 점은 이 때의 공적은 한신 뿐만 아니라 한군 전체에게 공적이 있다는 점이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이 진격 과정이 잘 나와있지 않는데 예를 들면 번쾌는 폐구 수공에서 활약했고, 주발은 함양 일대를 장악했으며, 역상은 북지군을 함락시켰다. 즉, 당시 한신의 지위가 대장군이었기에 삼진 정벌과 관중 공략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한중대책) 분명 한신이지만 총지휘는 유방이 맡았고 빠른 시일 내에 여러 곳을 공략해야 하는 과정에서 직접 성이나 군을 공격하거나 함락시키는데 여러 장수들이 나섰어야 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수들의 공 또한 크다는 것이다.
이때 한신이 개별적으로 움직인 경우에 대해, 당시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던 한왕(韓王) 정창(鄭昌)을 격파했던 일을 한신이 독자적으로 움직인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 한신은 그 한신이 아니다. 한자까지 완전히 똑같아서 헷갈릴 수 있지만 이 사람은 한왕 신이다. 한서 고제기에 한(韓)의 태위(太尉)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
여하간에 마침내 삼진이 평정되었고 관중이 유방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즉, 이제 항우와 한번 싸워볼 만해진 것이다.
5.2. 팽성대전, 한군의 대패 - 한신의 책임소재는?
이후 유방은 위왕(魏王) 표(豹),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격파하며 순조롭게 진격을 거듭했다. 당시 항우는 북쪽에서 제나라와 싸우고 있었고, 유방은 다섯 제후를 끌어모아 무려 56만이라는 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에 진입했다. 이때, 제나라에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항우는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한군을 그야말로 개박살냈다. 한군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이 죽고 수수(睢水)에서 또 10만, 도합 30만 이상이 죽었다.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전을 당한 것.
이 팽성대전에 대해서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유방이 한신의 군지휘권을 빼앗고 자기가 해먹으려고 하다가 된통 당해버렸고, 한신이 이를 수습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이는 사기나 한서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이러한 언급은 대부분 소설 초한지 등에서 유방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에피소드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싸움에서는 유방이 한신의 지휘권같은 것을 박탈한 경우는 없고, 한신이 이 전투에서 관련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고조본기, 항우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등등 관련 기록을 모두 살펴 보아도 딱히 둘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 그냥 이 싸움은 유방이고 한신이고 한군을 비롯한 제후국 전부가 항우에게 영혼까지 쳐맞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때 한신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초나라군을 격파하여 그 동진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다만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해서' 유방과 만났다는 점에서 '역시 한신은 후방에서 패전에 관련되지 않았다가, 유방이 삽질한걸 수습한거 아닌가?'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만약 한신이 후방에서 "패잔병을 수습"했다면 팽성에서 패배한 전투를 하남성인 형양보다 뒤에서 수습해서 형양에서 "유방과 만나" 그 수습한 패잔병으로 초나라 군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뭔가 이상한 이야기이다.
또 회음후열전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우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패잔병을 모으고 수습한 게 한신만의 공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소하가 관중의 인력을 모두 끌어모아 형양으로 미친듯이 보내고 있었다.
즉,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한신은 이 엄청난 패배의 똥물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다. 다만 패잔병을 수습하고 경색전투(京索之战) 등에서 초군을 겨우 저지하긴 했으나 경색전투의 경우 기병대였던 관영의 활약이 컸다. 그렇기에 적어도 '유방 개색히가 한신 물먹여서 한군이 대패함 ㅈㅈ'라고 보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이야기다. 애초에 저 당시는 유방과 한신의 관계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유방 또한 자기 입으로 "내 휘하에서 용병술로는 한신을 따라갈 자가 없다."라고 했을 정도로 한신의 중요성과 강함을 알고 있었으니, 한신의 병권을 빼았다거나 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여기까지의 한신의 모습을 정리해 보자면, 분명 전략적인 식견은 있으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 처럼 독보적으로 엄청난 활약을 한것은 아니었고 팽성대전이라는 참패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결코 나쁘지는 않은 모습이지만, 수많은 공신들을 제치고 대장군에 임명된 장수의 활약상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한신의 진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5.3. 위표를 박살내다
팽성에서 한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항우의 지릴듯한 포스에 정신이 번쩍 든 제후들은 죄다 편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가 모두 항우에게 도망쳤으며, 제·조·위나라가 모두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 붙어먹었다. 특히, 위왕 위표(魏豹)는 부모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구라(...)를 치고는, 유방의 곁을 떠나자마자 항우의 편으로 갈아탔다(...).
이때, 유방은 위표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을 해봤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그러자 유방은 무력 행사로 나가기로 하고, 한신을 좌승상으로 임명해서 위표를 치게 했다.
당시 역이기는 위표를 회유하는 데 실패했지만 위나라를 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군의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왔는데 유방이 역이기에게 물었다. "적의 대장이 누구이던가?" 그러자 역이기가 "백직(栢直)이라는 인물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크게 기뻐하고 웃으며 "그 놈은 젖비린내나는 더벅머리일 뿐이다. 그 놈이 어찌 한신을 당해낸단 말이냐?"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위표를 치기 위해 군을 이끌고 가던 한신 또한 위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역이기를 만났는데, 한신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경계하고 있어서 역이기에게 혹시 위표가 주숙(周叔)을 대장으로 삼지 않았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역이기는 위표가 주숙이라는 인물 대신 백직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재차 답해주자, 한신은 "어린놈일 뿐이군!"이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이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신은 일부러 군을 나누어 임진 쪽에 일부 군을 두고 대군으로 보이게 끔 하여 도강하려는듯한 움직임을 보여주어 속이는 한편, 그 사이에 한신 자신과 실질적인 주력은 포판보다 더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이동시켜 목앵부(항아리를 나무에 엮에 만든 급조 뗏목)를 타고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위표가 갑작스런 한군의 공격에 경악해서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자,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군이 위나라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했다. 앞뒤에서 공격받은 위나라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위표는 사로잡혔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것. 이 안읍 전투에서 위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그곳에 하동군을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