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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
그들은 로마인들처럼 땅을 점령해 그곳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노예로 삶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제적인 교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와 군사력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이상적이고 원리적인 순수한 방식을 원했습니다. 즉 현실에서는 치열한 경쟁과 투쟁으로 대상을 향해 직접 꿰뚫어보려는 치열한 삶을 실천하면서도 그러한 삶에 매몰되어 살지도 않았습니다. 끈질긴 탐구의욕으로 현실적 대상을 분석하고 종합하며 새로운 개념을 창조함으로서 현실을 벗어난 상상과 추상의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완벽한 지적이해의 완성을 넘어 정신적인 이상향으로 향한 노력의 결실들이었으며 그곳에서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버리는 냉철한 이성에 따른 이데아를 그들의 원형으로 가지려했던 것입니다.
즉 모든 동그라미들은 완벽한 원이라는 하나의 이데아로 집약되어야 했으며 모든 세모꼴들은 단 하나의 정삼각형이라는 이데아로 집약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이데아를 향한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통해 모든 것에 접근하려 했습니다. 그런 이데아를 인간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거기서부터 유출되는 즉 연역을 통해 일상적인 앎을 저절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침략과 정복 보다는 자연스러운 교역을 통해 돈을 주고받으며 이데아적인 거점도시를 건설함으로서 저절로 정복의 효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적으로 통용된 그들의 생각들이 벌어들인 돈을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수전노가 되기보다는 그들 정치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자신의 부를 환원하는 것을 명예로 알도록 했다고 보여 집니다.
아테네 고전주의시대의 정점에 있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전쟁으로 사망한 전사들을 추모하는 추도사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부(富)를 자랑과 허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쓰임새가 있을 때 받아들였습니다. 진정한 치욕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창조적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과 그 너머 세계의 앎에 대한 호기심을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최선의 좋음으로 여기는 그런 시각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연설문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모으는 데에만 기를 쓰며 무지하게 살아가지만 그들은 돈은 모으는 즉 부자가 된 이후의 삶에 더 큰 가치를 둔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라면 당연히 인류 문명의 근원을 차지할만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그런 의욕적인 삶으로 창조를 향한 열정을 발휘할 때에 문명이라는 인류의 텃밭은 일구어진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스스로에게 가능한 성취를 향해 끈질기게 밀고나가는 끈기와 창조를 향한 거침없는 장사꾼적인 과감한 투자의 결실들이 인류 최초의 거대한 문명의 기둥을 세웠으며 영원한 정신적 세계를 창조해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문명의 변치 않는 고전이라는 명칭을 얻은 고전주의 classicism이었습니다. 부유함에 만족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적 문화로 전환시켜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일구어내려는 부지런한 정신 즉 정신적 제국의 건설에 동참하는 것을 아테네인들은 삶의 보람이자 영광으로 여기며 시민 전체가 공유한 시민사회였습니다.
헬라스 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적 인식은 천상에 있다고 생각되는 정신적 제국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사회를 보여준 모범이었습니다. 즉 각자가 현실 너머의 세계에 까지 끈질긴 노력을 통해 그 성과를 달성하려 함으로써 그들 터전이 준 자신의 체질을 산화시킴으로써 궁극적인 이상세계를 맛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욕망의 추구를 벗어난 추구를 위한 추구 즉 무목적적인 추구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집속을 느슨하게 해주는 삶의 무상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결국 개인주의로 나아가게 됨으로서 사회적 결속은 와해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수순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대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하며 지중해 전체를 자신들의 호수로 완벽하게 점유하면서 제국을 향한 꿈을 완성시켜나갔습니다. 식민지 정복전쟁을 통해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속주로 편입시켰습니다.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기위해 거기에 요구되는 모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필요들을 하나하나 마련해나가는 현실적 치밀함이 그들의 경험적인 재능이었으며 그들의 군대를 최강의 전투부대로 육성시켰습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모든 법은 로마에서 나왔습니다. 마리우스의 당나귀로 표현되는 로마의 정예군대는 합리적 규칙과 엄격한 규율로 전투에 최적화된 우월한 군대였습니다. 정복전쟁을 통해 그들은 물리적 이익과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과 노예를 더욱더 확대 재생산시키는 물질적 순환능력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인 추구를 향한 나약함보다는 먹고 마시며 돈의 위력을 권력에 적용시킨 현실적이고 투쟁적이며 정치적인 민족이었습니다. 그것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통치형태를 바꾸는 능력도 카이사르의 순교를 통해 거침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제국으로서 황제에 의해 지배되는 단일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약탈한 전리품들과 노예들은 로마인들의 부와 명예를 위해 재투자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현실에서의 물질적 성취를 자신의 권위와 야망을 보여줄 좋은 기회이자 방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장군들은 자신들의 사병(私兵)으로 군단(軍團)을 거느리며 그들을 입히고 먹이며 월급을 줄 정도의 재력을 가져야 직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사랑한 것은 로마 10군단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교역을 통해 이득을 보며 자신들의 식민 도시국가를 개별적으로 건설하며 정신적인 고결함을 지향했습니다. 자신들의 가문보다는 공동체에의 참여에 자신의 명예를 걸었으며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면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가문의 명예와 제국의 길로 나아감으로서 개인의 현실적 욕망을 위해 국가가 필요했으며 국가를 현실적 명분으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교역을 하며 합리적 계약문화를 달성하기위해 추상적 개념의 통일성과 수학적 지식에 몰두할 때에 로마인들은 원시사회에서 도시국가로 또 거기에서 벗어나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나아가면서 무력을 통한 해적질과 지속적인 식민지 건설을 위해 노예를 이용한 해상전력의 강화에 몰두했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제국에서 욕망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넷 >>>
지금의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지중해연안의 튀니지도 기원전 8세기부터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는 모두 다 도시국가로 출발했으며 그리스가 동쪽의 에게 해를 중심으로 헬레니즘의 제국을 이룩하였다면 로마는 지중해 서쪽에서의 교역을 두고 카르타고와 숱한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을 통해 카르타고 도시 시민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자신들만의 영광된 로마도시를 건설해 아프리카에 거점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 전쟁이야말로 로마가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확정시킨 중요 고비였으며 여기서부터 그들은 제국으로 나아갈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을 통해 제국의 길을 보았으며 그런 영광의 준비를 위해 모든 걸림돌들은 제거되어야 했고 소멸시켜야 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시민들에게 영광된 제국으로 나아가는 성소가 되어야 했으며 결국 로마제국에 포함된 서구적 고대 도시국가로 재탄생 되었습니다.
최장 20년씩이나 군대에서 보낸 퇴역군인들에게 고향은 이미 타향이 되었고 결국 부대생활을 했던 인근도시에 안착해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실용성에 걸맞게 그들은 새로운 계획도시 즉 신도시를 구 도시와 구분시켰으며 완벽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퇴역군인들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들은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연금을 받으면서 그처럼 조성된 신도시에서 노예여성을 맞이해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결국 지중해는 돈과 무력이라는 헤게모니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으며 제국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 장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라는 종교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중세 내내 유럽의 문명은 지중해에서 이루어졌으며 최초로 지중해를 벗어난 문명이 등장한 것은 바로 북유럽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고딕양식의 등장이었습니다. 결국 서구의 고전고대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이었습니다.
고전고대세계에서 지중해는 세계의 전부였으며 그곳의 지배자가 당연히 세계의 지배자였습니다. 서구의 고전고대시대는 해상을 지배하는 국가가 헤게모니를 가졌습니다. 헤게모니는 이처럼 초기에는 다른 도시국가에 대한 정치와 군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지배하는 패권적인 방식을 말했으나 제국으로 나아가는 알렉산더대왕에 와서는 문화와 군사력이 헤게모니가 되었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로마 시민권과 군사력에 의한 헤게모니로 변화하기도 했습니다. 즉 평화적으로 항복하면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주었지만 저항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점령하고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키거나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이후 가장 커다란 통치의 문제점은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야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이었습니다. 특히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비잔티움은 제국이 시작되면서부터 서로의 종교적이고 문화적 이질성이 제국의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제국을 유지하기위해서는 정치적 공동체에 단일한 통치이념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도입된 것이 보편적 체계를 가진 가톨릭(기독교)의 국교로의 승인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종교와 군사력으로 제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서방세계의 헤게모니의 변천사로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고전 헬라스 시절에 헤게모니는 한 도시국가가 다른 도시국가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패권국으로서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기원전 8세기에 이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도시국가란 도시와 그 주변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주권국가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은 서구 역사시대 최초의 문명사회의 근간을 이룩했으며 그 이후의 서구사회의 팽창은 그러한 패권적 전철을 당연시하며 전통으로 이어왔다고 생각됩니다. 교역과 무력으로 외부세계를 제압하였으며 그 가능성을 최초로 역사에서 보여준 것이 헬라스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구 역사에서 세상의 최초들은 헬라스 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처럼 세계 최초로 고전주의라는 문명을 꽃피웠던 헬라스 사람들은 모두 도시국가 체계였습니다. 그것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인들의 인본주의 사상과 지금의 터키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에서 일어난 보다 동양적이고 세속적인 화려한 자연주의가 혼용되며 일어난 인간지성의 개화를 최초로 펼쳐 보여준 서구문명의 출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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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의 재해석은 이상적인 민주주의 체계정립에 충분조건이건만
고도화 되어가는 물질문명의 발달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기만 하네요
갈대생각님의 생각속으로 함게 해 본 시간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하루되세요^^
격려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은영님도
좋은 하루되십시요.^^
감사~
고은 삶 멋과 맛 향기로 즐겁고 행복하게 건강 조심하며 살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