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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전설>
6.25가 터지기 두 해전, 1948년 음력 2월 18일, 상주군 낙동면과 선산군 무을면이 등을 맞대는 곳, 해발 700여 미터의 산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동트는 새벽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주군 낙동면 수정리 내이실(內利實) 1022번지이고, 한반도의 좌표상으로는 경상북도 상주군의 남쪽과 선산군의 북쪽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 대한민국 남한의 정중앙쯤 되는 곳이다.
그곳은 나에게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가 이산 저산 흐드러지게 피는 고향산천이다. 누구에게나 다 고향이 없을까마는 이실(利實)은 나의 유·소년기에 수많은 애틋한 추억을 선사한 곳이다. 그곳은 전후좌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하늘만 보인다. 뒷산으로 숲을 헤치고 한참을 올라가야 저 멀리 낙동강 일부가 아련히 보인다. 정월 대보름에 동네 청년들이 그 뒷산에 올라가서 생소나무 가지를 높이 쌓아 불을 지르며 야단법석 노는 것을 보며 덩달아 신나 하던 일, 그것은 일 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가슴 설레는 행사였다.
그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10년 동안, 나는 청리(靑里) 대처로 이사 가기까지 기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비행기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꼬리에서 분출되는 흐트러진 비행운 연기의 꼬리만 몇 번 보았을 뿐이다. 태백산맥 줄기에서 벋어 나온 소백산맥이 구미 금오산 쪽으로 달리다가, 끝까지 가기 직전 잠시 멈춘 곳, 상주의 안산인 갑장산의 오른쪽 어깨쯤 되는 그곳에서 세상의 공기를 처음 맛보았다.
나의 탄생은 그 나름으로 기대를 모으는 사건이었다. 우리 아버지기 17세에, 어머니가 16세에 결혼하여 10년 동안 자식이 없어, 양가 식구들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겨우(?) 태어난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 바람에 내 본의가 아니게 나는 양가의 전 가족뿐만 아니라, 온 동네의 관심과 사랑의 중심에 처하는 운명이 되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분명 흙수저로 태어났으나, 확실히 금수저로 길러졌다.
고향 이실에서 자라면서 나는 수많은 개인적 역사를 만들거나 중요한 일을 접하게 된다. 우선 외가에를 별나게 자주 갔다. 아예 외갓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유는 뻔하다. 자식을 낳지 못하여 소박을 맞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우리 어머니를 내가 기사회생시키는 홈런을 쳤으니 그 역전 드라마의 기쁨이 오죽했겠는가.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님들이 경쟁적으로 나를 안아보고자 하는 바람에 그분들의 손바닥 위에, 큰 볼일과 작은 볼일을 다 보았다고 하는데 기억에는 없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낳으신 뒤로는 쌍둥이를 포함하여 나의 여동생을 셋이나 생산하셨다. 그런데 나에게는 여동생이 연달아 태어난 것이 바로 문제였다. 이 녀석들이 내가 두 살이 되기 전부터 시작하여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속,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내가 먹을 젖을 인터셉트 하여 먹고는, 생후 일 년을 전후하여 모두 홍역으로 짧은 인연을 마감하였다. 그 바람에 나는 충분히 먹을 젖이 없었다. 나는 징징거리고 보채는 때가 많아졌고, 할머니와 고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 잦았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집은 감나무와 밤나무와 살구나무와 고염나무, 그리고 소태나무 등이 마당과 집의 앞뒤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름이면 거목인 살구나무가 땅바닥에 노란 살구를 수시로 뿌려대는 바람에 살구나무 쪽으로 난 출입 통로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가을이 되어 툭 툭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내다보면 마당 한 귀퉁이에 알밤과 홍시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밤나무와 살구나무와 소태나무는 인연과 수명을 다하고 윤회의 다음 생으로 사라졌으나, 감나무와 고염나무는 아직도 한 세기 가까이 빈 집터를 지키면서, 일 년에 한 번 벌초하러 오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동네 뒷산 이곳저곳에는, 6.25 전쟁을 피하여 외부에서 찾아오는 피난민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 동굴들은 밀주 조사가 나오면, 술동이를 이고 지고 부리나케 숨기는 비밀스러운 장소로도 유용하게 쓰였다.
동네의 아래와 위, 앞산 뒷산 여기저기, 평평하고 양지바른 공간은, 초가집이 들어서 있고, 다랑이 식 논과 밭이 빈틈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숲속의 양지바른 곳은 씨족별 조상들의 산소가, 혹은 옆으로 혹은 앞뒤로 나란히 누워 자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다.
자라면서 혼자 뛰노는 나이가 되자, 나는 어른들의 지게 지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고 부러워서 지게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걸음을 걷자마자 지게를 졌다는 평생의 나의 주장은 이때부터 역사적 사실로 시작된다. 네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빈 지게라도 지고 쫄래쫄래 어른들 뒤를 따라다녔고, 한두 살씩 늘어감에 따라 벼 한 단 혹은 보리 한 단, 때로는 콩 한 단, 나무 한 단을 지고 따라다녔다. 칭찬을 들으면 신이 났다.
이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제사가 다가올 때나 명절 때는 낙동, 무을, 청리에 가서 장을 봤다. 장을 갈 때는 언제나 장작이나 곡물을 이고 지고 가서 팔고,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사야 할 물목이 많으면 당연히 지고 가야 할 짐도 커져야 했다.
‘낙동’ 장은 시오리 길이요, ‘무을’ 장은 십리 길이며, ‘청리’ 장은 산길 십 리에 평지 십 리, 도합 이십 리 길이었다. 명절이나 잔치 때를 맞아 큰 장을 봐야 할 때는, 멀어도 오일장이 제법 풍성한 청리 장으로 가야 했다. 그런 때는 친척끼리 또는 이웃과 함께 두세 사람 이상이 모여서 갔다.
장을 본 뒤에는, 미역은 지게 위에 누워서, 조기는 뒤에 매달려서, 신발이나 옷은 보자기 안에 싸인 채 미역을 깔고 앉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 생원처럼, 달빛을 등불 삼아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어느 해 봄, 나도 할아버지 아버지를 조르고, 그러는 나를 작은 아버지와 삼촌이 지원해 주는 데에 힘입어 무을 장에 따라갔다, 작은 장작 한 단을 지고였다. 그 길은 나에게, 앞산 넘어 두 고개 돌아서 가면 있는 외갓집에 가던 길을 제외하면, 인생 최초의 출타 길이고 나들이 가는 길이다. 더구나 짐을 한 짐 지고서 가는 길이다. ‘동네 우물’ 안에서 지고 다녔던 벼와 보리 짐이나 나뭇짐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선 내 맘대로 멈추거나 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체력의 한계와 인내의 한계를 맛보았다. 세상에는 극한상황에서의 위기를 나 혼자 극복해야 한다는 값진 경험도 하였다. 고생에 대한 보상은 그날 장에 도착하고서 기대 이상으로 받았다. 장작을 내려놓고 받은 대가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24원의 거금을 손에 쥐었고, 나는 어른들 틈에 끼어 5원짜리 국밥을 사 먹었다. 큰 가마솥에서 고기와 온갖 재료와 양념이, 며칠은 우려냈을 것으로 보이는 걸쭉한 ‘장터국밥‘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기가 막힌 맛이었다. 국밥 한 그릇을 처음 맛본 나에게 세상은 엄청나게 넓고 크고 멋지게 보였다.
그날의 감동과 감격을 평생 잊지 않고 있다가 성인이 된 어느 해, 나는 차를 몰고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토록 북적거리고 번화했던 그곳은 흔적도 없었다. 편도 일차 선 아스팔트 도로 옆으로 서너 채의 허름한 기와집이 있을 뿐, 시장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장작 한 단을 내려놓고 시원한 기지개를 켜던 때와 같은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5일마다 열리는 장이었으니 그날만은 북적거렸을 것으로 짐작은 된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넓고 크고 깊어진 탓도 있었으리라.
장작을 지고 무을 장에를 갔다 온 뒤로도 나는 나뭇짐과 풀 짐을 지고 수없이 동네 뒷산을 오르내렸다. 나뭇짐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지게 목발이 바위에 걸려, 지게를 진 채로 구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를 어떻게 디뎌야 미끄러지지 않는지, 그때 터득한 노하우는 요즈음 등산을 다니면서 톡톡히 덕을 본다.
나는 출생이 늦은 탓에 아홉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갔다. 동네가 있는 산골짜기를 십오 리나 벗어나 있는, 갑장산 동쪽 바닥 ‘낙동서부국민학교’였다. 동네를 통틀어 남녀 7~8명의 입학 적령기 아동이 있었지만, 학교를 보내고자하는 부모들 세 집안의 뜻이 모여서야, 또래 3명이 한 조가 되어 입학할 수 있었다.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서 학교에 가는 길은 똑같은 산골의 냇물을 열 번 이상 건너야 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금방 급류가 되고,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면 얼음이 부풀어, 부모들이 학교에 보내지 않는 날이 많아, 통지표에는 일 년에 결석이 40일, 50일이나 되었다.
학교에 가고 오는 산길은 초등학교 저학년이더라도 반드시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가야 했다. 반찬은 고추장이나 장아찌가 대부분이어서 책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밥 먹듯이 뛰면, 책갈피나 공책이 고추장과 간장으로 붉게 물드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래도 도시락 먹기가 기다려지는 즐거움이 있었으니, 바위 밑의 평상처럼 생긴 곳에서 냇물 소리를 들으며 도시락을 까먹는 일이 즐거웠다.
도시락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개구쟁이들의 해찰 행위가 이어졌다. 버들피리 만들어 불기, 찔레 순 꺾어 먹기, 고들빼기 캐 먹기, 2인 한 조가 되어 남은 한 사람 골려 먹기, 장난이 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재문이가 물고기인지 가재인지를 잡는다고 이 돌 저 돌 밑으로 손을 넣다가 뱀에게 물린 것이다. 손이 부어 겁에 질린 녀석을, 학우는 지키고 있고, 나는 오르막 산길을 뛰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러 갔다. 그는 어머니 등에 업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퉁퉁 부어오른 손이 길옆의 솔잎에 스치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문은 막내로서 자수성가하여 아들 둘을 육군 장교와 경찰로 키우고 자신은 약재상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잘살고 있었는데, 재작년에 어이없는 사고로 돌아갔다. 사고는 이러했단다. 동네 건너 밭에서 인적 없는 비탈에 화물차를 세우고, 핸드폰은 조수석에 놓아둔 채로 재문이 내리다가, 차가 움직이는 바람에, 차와 옹벽 사이에 끼어 구조 요청도 못 해 보고 그대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겪었을 극한의 상황에서의 고통과 공포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부고는 받았지만, 사연은 나중에 안 것이고 나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그와의 이별이 나를 몹시 괴롭게 할 것 같아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그가 우리 학교에 사환으로 취업을 했었는데, 나는 그의 도움으로 커닝을 하고서 발각이 된 후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받았던 일이 있었다. 인생 후반전인 지금, 산골 통학 불알친구 세 사람 중 하나인 그와 옛일을 회상하면서 회포를 풀고 참회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기회를 주지 않고 어이없게 먼저 가버렸으니, 인생은 어김없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 꿈같고 환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이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 이슬 같고 또 번개와 같다)이다.
나는 깡 벽촌 이실에서 2학년까지 다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청리면의 학교 옆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거기서 다닌 4년은 당연히 개근상이고 우등상은 덤이었다. 나에게는 개근상이 더 기쁘고 값졌다.
나는 소년 시절 나의 생가 이실 마을을 불가피하게 떠났지만, 나의 마음은 이실을 떠나지 못했고, 이실의 모든 존재들도 나를 보내지 아니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아버지 내외와 막내 삼촌,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나와 함께 사계절 고향의 산천을 누비던 나의 지게, 썰매, 팽이 등등 어느 것 하나 나를 보내지 않았음을 알았다.
청리로 이사한 뒤에도 나는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이실로 달려갔다. 방학 때 이실을 가면, 내가 할 일은 또 있었다. 나보다 연상과 연하의 아지매뻘 되는 뒷집 두 자매의 방학 숙제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들은 여름이면 세 모녀가 삼베 삼기에 바빴고, 겨울이면 가마니 짜기에 바빠서, 방학 숙제를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내가 가서야 해결하고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기다려지는 진짜 신나는 일은 따로 또 있었다. 집집마다 필수적으로 한 마리나 두 마리씩 소를 몰고 산에 가서 풀을 먹여야 하는 일이었다. 한여름에 소가 할 일은 없었으므로, 매어 놓고 풀을 뜯어다 먹이든지, 산에 방목하여 먹이든지 해야 하는데, 나무와 풀을 빼고는 소에게 줄 것이 없는 산골에서는 산으로 몰고 가서 먹이는 것이 최상의 필연적, 필수적 대사였다.
소를 몰고 산에를 가면 산골짜기에 소를 놓아 보내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은 워낭이 달린 소의 목에 고삐를 적절하게 잘 감는 일이다. 고삐가 풀리거나 나무에 걸리지 않게 감은 뒤 산골에 풀어 놓으면, 소들은 풀어 놓은 골짜기 안을 맴돌면서 절대로 다른 골짜기로 월경하지 않는다. 소들이 지키는 질서가 잘 유지되도록, 사람들도 주의사항을 잘 지킨다면 말이다.
전체 소들이 안정되고 평화스럽게 풀을 뜯기 위해서는 발정 난 암소가 일행에 없어야 한다. 만약에 불가피하게 모르고 그런 암소를 데리고 왔을 경우에는 절대로 황소가 없어야 한다. 모르는 사이에 발정 난 암소가 끼어 있고 동시에 황소가 한 마리 또는 두 마리 이상 왔을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것은 발정 난 암소를 환장해서 따라다니는 황소의 폭력성과 무절제한 덤비기가 그날의 일정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소를 소들끼리 골짜기로 올려보낸 뒤에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제이다. 그것은 감자를 공동으로 돌 구이 해서 먹는 일이다.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감자에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한 뒤, 땅을 파고 자갈을 모아, 속을 비운 돌탑을 쌓아 올린다. 그런 뒤, 돌탑 밑에서 불을 피워 돌을 달군다.
돌이 충분히 달구어지면 구덩이 안의 불을 잘 모으고 탑의 중앙을 찌그려서 웅덩이를 만든다. 달구어진 돌 웅덩이 위에 감자를 넣고, 나머지 돌을 모아 덮은 뒤, 미리 준비해둔 풀과 흙으로 덮는다. 10분 정도 후 흙무덤 가운데를 꼬챙이로 구멍을 내고 물을 살짝 부어 주면 하얀 김이 오른다. 이것이 잘 익기 시작한다는 신호가 되어 구수한 냄새와 함께 올라온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흙무덤을 파헤치면 구수하게 익은 감자가 식욕을 자극한다. 각자 표시한 자기 감자를 찾아 둘러앉아서 먹는다. 얼마나 맛있는지 안 해 본 사람은 모른다.
감자를 다 먹을 때쯤이면 소들도 배불리 먹고, 나무 그늘 밑에서 보살 같은 모습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시간이다. 이때는 워낭 소리가 미약하여 우거진 풀숲 속에서 소를 찾기가 힘들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부지런한 목동은 소를 만나기 전, 도라지를 캐기도 한다.
방학이 끝나고 청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혼자 가는 나를 바래다주러 막내 삼촌이 따라나선다. 못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내가 측은했던지, ‘한 모퉁이만 더’, ‘한 모퉁이만 더’하고 열 굽이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청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용포의 고갯마루 경계까지 오는 일이 벌어진다. 이실에 대한 나의 향수가 이토록 모질고 질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실 마을 생가와 인연의 끈이 연결된 내 개인사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본다.
청리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교내 백일장이 열렸다. 훗날 아동문학가로 유명해지신 선생님(이오덕선생님)의 지도 때문인지 그런 행사가 교내뿐 아니라 군 단위로도 종종 있었다.
그날 백일장의 시제는 ‘종소리’였다. 그다음 날인가 전교 조회 시간에 나는 천 칠백여 명의 학생 중 특선으로 호명되었다. 웅성거림과 박수 소리가 귀에 선하다. 그것은 이실 마을에 대한 나의 향수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었다. 60갑자 이상이 흐른 지금 그 작문의 디테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략 다음과 같은 원고로 기억되는데 전반부는 아슴아슴하고 뒷부분은 대체로 맞는 것 같다.
종소리
땡 땡 땡 땡 땡 땡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우리는
신이 난다
교실은 왁자지껄
책상은 삐뚤삐뚤
먼지는 자욱
다시
땡땡 위이잉---
울어대는 종소리에
벙어리들 되었다.
중학교에서는 재건학생회장 선거에서 여학생반의 몰표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 몰표의 비밀은 뒷날 성인이 된 후, 동기생 모임에서 여학생 동기가 귀뜸을 해주어서 알았다. 그때쯤에는 청리 동네 토박이들한테서 나를 ‘이실 내기’라는 놀림도 잦아들었고, 나 스스로도 이실의 향수병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 있었다.
청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졸업생 중 유일하게 혼자 사학 명문으로 소문난 김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김천은 나에게 엄청나게 크고 경이로운 대도시였다. 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이 김천고등학교 시절은, 산간 벽촌 초립동이 출신인 나에게 큰 변화를 준 시기이었다. 이후 내가 대천지 서울로 진출하는 튼튼한 교두보가 되고, 훌륭한 자양분이 되고, 디딤돌이 되는 중대한 시기였다. 김천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제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학습 지도와 입시지도를 하였다. 그때 학습한 모든 것들은 나의 일생에서 나의 지식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는 것들이 많았다.
주지하다시피 당시는 농경사회였다. 집집마다 소가 없는 집이 없었다. 논을 갈고 밭을 갈고 곡식과 나무와 풀을 운반하는, 힘이 드는 일은 모두 소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소의 가치와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재산목록 일호인 동시에 최상의 일꾼이었다. 그런 소가 병이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는 소를 고쳐주는 ‘소 침쟁이’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수의사였다.
할아버지는 동남쪽의 무을면과 낙동면의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동네에 불려 다니시면서 소가 병이 나면 고치셨다. 소를 고친 후의 보수는 화폐의 유통이 귀한 산간이라 대부분 막걸리로 대신했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지면서 술에 취해 산골을 오르시다가 넘어지는 일이 잦았고, 기별을 받은 작은아버지와 삼촌에 의해 업혀서 귀가하시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런 일이 있던 어느 날, 작은아버지 형제의 반복된 잔소리에 화가 나신 할아버지께서 다짜고짜 곡식과 도토리가 담긴 그릇과 화로까지, 눈에 띄는 대로 마당에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날 내 눈에 비친 할아버지는 폭풍우 같은 박력의 화신이었다. 나를 업고 동네 사랑방엘 다니시던 인자한 할아버지는 아니었고, 할머니의 사진과 함께 확대하여 보관 중인, 갓을 쓴 사진 속의 할아버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사대천왕 같은 위엄으로 넘쳤다. 그날 작은아버지 형제는 옴짝달싹 못 하고 싹싹 빌었었다.
나의 생가는 넓은 세상의 문화와는 등진, 산으로 울타리가 쳐진 격리된 공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득히 멀리 보이는, 꿈을 키워주는 낙동강 줄기와, 훌훌 노루처럼 뛰어다니던 붉은 산등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친숙한 것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도라지, 고사리, 고들빼기, 찔레꽃, 할미꽃, 머루, 그리고 산에는 노루와 꿩, 오리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소나무, 싸리나무, 참꽃과 철쭉, 무성한 억새 풀숲, 계곡의 물에는 가재와 개구리알, 개미집까지…. 모두가 내 기억 안에서 살고 있다. 이들 모두가 나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 냈던 전설들이 숨 쉬고 있는 곳, 어찌 잊으랴, 이실 마을은 참으로 정다운 고향산천이다.
2020. 4. 10. 法 海
첫댓글 법해는 그가 태어나 자란 생가가 있는 이실 마을에 대한 추억을 다사롭게 펼쳐 놓고 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첩첩 산골 마을, 그의 고향 이야기이지만, 시대의 고통을 함께 겼었기에 우리들 모두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읽게 됩니다.
이 글의 끝 부분, 그가 고향을 아득하게 회상하고 추억하는 대목은 마치 이효석의 소설 '산'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생가의 전설>이란 제목은 법해가 직접 붙인 제목입니다.
역시 박교수입니다. 같은 시절 모두 수모를 받고 자람이라 공(절)감하다. 법해를 모르고 걍- 수모와 흥얼대던 때가 징하다.
글 한 편의 힘!
순식간에 60년을 건너 뛰게 만듭니다. 글솜씨가 대단합니다. 사벌주 출신은 역시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