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최소한 알려는 노력정도는 있어야한다.
이런 글을 퍼와서 감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
나 속박당한 언론의 부재속에서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말이다. 현실을 알
아야한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한미행정협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이 존재하
고 자유를 속박당한 언론과 진실을 말해 고문당하는 언론이 존재한다.
서해교전이 일어나서 가장 좋은 나라는 누구인가. 언론이 장갑차 사건에
대한 발언을 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무관심하고 무지한 국민들 아
래에서 짜고치는 고스톱이 벌어지고 있다.
전경들이 눈물을 흘리며 같은 민족과 대응하고 있다. 하물며 대통령이 미국눈치보며 속으로 피눈물흘리지 않겠는가. 대통령은 현재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과 해가되는 것을 구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나서주고 떠들어줘야 정부에서도 나설 수 있다.
아래는 펀글입니다..
>MBC FM 손석희의 시선집중 3,4부 내용..
>
>미국새끼하고 미군내 한국 통역관새끼...웃기지도 않는구
>만…
>
>손석희 : 항의 시위에서 미군들이 기자 2명을 곤봉으로 때리
>고 쇠사슬로 묶어서 데려갔다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
>미국: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무도 쇠사슬에 묶이거나 미군
>기지 안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미군기지 난입자들이 철조망을 뚫고 들어왔다, 난입자 중 등
>록된 기자는 한명도 없었다.
>난입자들은 한국의 경찰들에 의해 끌려 갔고 한국 법률에 따
>라 처벌 받을 것이다.
>
>손 : 그렇다면 미군 영내로 두 사람을 전혀 끌고 가지 않았다
>는 것인가?
>
>미국 : 그렇다
>
>손 :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의정부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 경위
>를 설명해달라
>
>미국 : 그들을 체포한 사람들은 한국 경찰들이었고 그들이 끌
>고 간 것이다.
>
>손 : 그렇다면 한국 경찰들이 미군 영내로 들어가서 체포했다
>는 것인가?
>
>미국 : 그렇다
>
>손 : 다른 나라 군 기지에 우리나라 경찰이 그렇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
>미국 : ….잘 못 들었다, 다시 한번 더 설명해달라… 잠시 침
>묵… 경찰들을 불러서 그들이 온 거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는 것 같다….(머뭇머뭇)
>
>손 : 미군이 한미 합동조사를 통해 어떤 결과를 얻었나?
>
>미국 : 미군측의 일방적인 조사가 아닌 한미 양국의 합동 조
>사였다. 양국 수사관들은 그 누구도 죄가 없다는 결과를 냈
>다.
>
>손 : 미군 내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근래의 반미의식을 의식해
>서인지 추모식을 했다고 하는데 유가족들도 참석했는가
>
>미국 : 촛불 추모식 행사가 미2사단 공병여단에서 거행됐는
>데 공식 사과와 촛불점화가 있었고 유족들을 초청했으나 참석
>을 거부했다.
>
>손 : 유가족들은 사고운전자(마크워커 병장?)와의 면담을 요
>구했으나
>미군측에서 사고운전자가 지금 큰 충격을 받아
>면담이 불가능하다고 거절했다는데?
>
>미국 : 해당부대 책임자가 유가족에게 사과를 했다. 또한 사
>고운전자도 개인적으로 유가족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한미 합동조사결과 그 누구도 실책 받
>을만한 과실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손 : 마크워커 병장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
>미국 : ….(멈칫 멈칫)…. 합동조사는 이미 종결이 되었고 거
>기에서 이미 과실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
>손 : 운전자는 석방이 되서 정상적인 영내생활을 하고있나?
>
>미국 : 그렇다. 합동조사의 결과가 그 누구도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에 그렇다.
>
>손 : 과실이 없다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
>는 사람이 죽으면 고의나 과실 중 하나로 결론을 내리는데
>미국 같은 경우는 과실이 없다고 판단되면 사람이 죽어도 아
>무도 처벌을 받지 않는가?
>
>미국 : 다시 앞에서 말한 것 처럼 합동 조사를 실시했었고 미
>국의 경우와 이 사건을 견주어서는 말할 수 없다.
>
>손 : 난 일반적인 것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미군 내에서
>건 미국 본토 내에서건 사고를 내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고의로 낸 사건이 아니라서 과실이 없
>다는 판단이 나면 전혀 처벌을 받지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
>미국 : 일반적인 경우와 견줄 생각이 없다, 단지 이 경우에
>있어서 합동 조사를 실시했고 결과는 과실이 없다고
>결정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손 : 한가지만 더 물어보자. 일반적인 경우와 이번 경우와 무
>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
>미국 : …..(영어로 씨부렁씨부렁….아마도 또 합동조사결
>과…어쩌구 하는것 같음)
>
>손 : 똑같은 대답만 나오므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
>손 : 사고대책위가 사고 원인이 된 훈련장을 폐쇄하고 대책마
>련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미군의 의견은?
>
>미국 : ….(영어로 또 씨부렁씨부렁)…
>
>미군의 통역자 : 미안하다. 다른 대답을 해서.. 다시 한번
>더 질문 해 달라”
>
>다시 질문함..
>
>미국 : 사고원인이 된 훈련장은 한국군,미군이 일년 내내 훈
>련하는 곳
>이다. 여기서 결정을 말할 수는 없다.
>
>손 : 훈련중인 장갑차를 지방국도에서 이동 시킬 때 미군측
>은 어떠한 안전 대책을 수립하는지 궁금하다.
>한국군의 경우에는 …(한국군의 안전수칙을 이야기함)….미군
>의 경우에는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나?
>
>미국 : 지방도로에서 미 육군의 괘도차량을 운행 시에는 고속
>주행을 금하도록 한다. 부대 속도 제한과 CONVOY차량을 둔
>다…(규정설명)
>호송차량의 예규를 계속 강조 할 것이다. 우리는 속도를 줄이
>기 위한 융기부(도로 요철) 설치와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한
>표지판 설치를 요구하였고 도로 폭의 확장과 보호대 설치를
>요구 했었다.
>
>손 : 그렇다면 그 안전수칙 들이 다 지켜졌다고 생각하나?
>
>미국 : 그렇다.
>
>손 :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지켜졌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
>았어야 했는데 그 사고는 도대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나?
>뒤집어서 얘기하면 미군의 과실이 없었다면 두 여중생의 과실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나?
>
>미국 : 그건 단지 비극적인 사건이었고 합동 조사 결과 아무
>에게도 과실이 없다고 결정 났다는 것이다.
>
>광고 후 사고 대책위원장과의 통화 실시 –
>
>손 : 대책위원장은 반론이 있으면 말해달라.
>
>위원장 :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대형사고가 났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대
>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첫째, 기자를 쇠사슬로 묶은 것에 대해서는 변호사와 함께 확
>인을 한 것이다. 경찰들도 확인을 해 주었다.
>쇠사슬이 너무 강해 별도의 커터를 가져다가 끊을 정도로 인
>권유린이 있었다.
>그리고 한미합동 조사결과에서는 이 사건의 1차적인 책임은
>운전자의 과실에 있다.그리고 선탑 했던 관제장교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이렇게 발표를 했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에 와서는 누구도 사고를 책임지지 않는 다
>고 하면 도대체 사람은 죽고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정말로 심각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
>미군: 첫째는 침입자에게 쇠사슬을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는 합동 조사 결과 누구에게도 과실이 없다는 것이 결정
>났다.
>
>손: 이상이냐?
>
>미국 : 그렇다.
>
>손 : 한미 합동조사에서 한국쪽에서는 누가 참석한 것인가?
>
>미국 : 한국 경찰과 한국 육군에서 같이 참여했다.
>
>위원장 : 내가 알아본 바로는 미군의 공무 중에 일어난 사건
>이므로 한국군이나 경찰에서는 자기네들은 관여할 바가 아니
>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명목만 한미합동 조사다….같이 조사했다 하는 것
>은 결국은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계속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
>를 느낀다.
>
>미군 통역관( 미군소속 한국인인데 더 나쁜놈으로 보임) : 질
>문 요지가 뭐냐? 다시 한번 질문 해 달라
>
>위원장 : 미군들 주도로 조사가 이루어졌고 한국군과 경찰은
>조사에 참여 되지 못했다.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
>어봐 달라.
>
>미군 : 한국 육군과 한국 경찰이 합동으로 조사를 했다.
>
>손 : 특별한 내용이 없고 계속 반복적인 내용만 말하고 있
>다. 시간이 없어서 끝내겠다.
>
>
>나 왠만해서는 이런짓 안하는데...이거 라디오 다시 들으면
>서 타이핑하느라
>두시간 정도 소비했다.
>
>정말 웃기지도 않은 미국놈들의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가치관
>을 보았다.
>한국 군인이 미국사람을 탱크로 깔아 뭉겠어도 그따위 주둥아
>리를 놀렸을까....
>
>빈라덴은 역시 이시대의 위대한 영웅이다....
>
>===================================================================
>"민중의 소리"라는 사이트가 있는건 알지?
>(http://voiceofpeople.org/)
>거기에 올라온 글인데
>주한미군에게 억류 및 감금을 당했었던
>이유진 기자의 증언이야ㅡ
>
>
>악몽의 2시간, 미군에게는 짐승만도 못한 대한민국 기자
>
>미군에 불법 연행 당한 한유진 기자의 증언
>
>
>
>민중의소리 기자
>
>
>
>
>
>
>△한유진 기자 ⓒ민중의 소리
>구속될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나오게 되어 글을 쓰게 된 것
>에 대해 너무나 기쁘게 생각하며 저를 도와주신 동료 직원들
>과 대책위 여러분, 그리고 모든 기자 여러분들께 뜨거운 감사
>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미군에 분노하
>며 또 다른 언론의 역할을 자임하며 저의 소식을 알려주고 경
>찰과 검찰이 압력을 느낄만큼 여론을 만들어 주신 수많은 네
>티즌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제가 이글을 남기는 것은 미군의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로
>그동안 저보다 더한 일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고통을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미군의 만행을 사
>실 그대로 생생하게 국민들 앞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단
>지 그 만행을 과장되게 부풀려서 분노만 자아내게 하려는 것
>이 아니라 기자정신에 입각하여 사실을 근거로 제가 느낀 감
>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그런만큼 자
>신의 시각과 다르다고 호도하거나 색깔논쟁으로 끌고가며 저
>의 체험을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
>제가 미군 영내로 들어가게 된 것은(경과는 이후에 서술하겠
>지만) 기자의 첫째 임무인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언
>론자유 앞에 그 어떤 성역이 있을 수 없건만 주한미군은 국민
>들의 알권리에 철저히 가려진채로 정권의 비호와 소파협정의
>우위에서 50년 넘게 국민과 국가위에서 군림하였습니다.
>
>하지만 그간 50년동안 일어난 수천 수만건의 주한미군 관련
>사건과 범죄들을 보면서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채 묻혀버린 사
>건들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고, 전동록씨의 죽음이나 두여중생
>의 죽음을 보면서 뻔뻔하리만치 무책임한 주한미군의 태도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
>거대 보수언론들의 외면속에 묻혀가고 있는 이 문제가 바로
>진정한 언론이 주시해야할 민족의 문제라는 생각에 저희 방송
>국과 기자들은 적극 나서게 된 것입니다.
>
>그날 저는 집회 전반부를 촬영하고 후반부에는 이정미 기자에
>게 카메라를 맡기고 보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잡혔을 당
>시는 이정미기자가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
>4시부터 시작된 집회가 점점 무르익어가면서 관련 대책위 대
>표들이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순서가 되면서 집회대오와 전경
>들의 몸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뒷쪽에서 취재에
>필요한 정황들을 살피고 있다가 정문 오른편에 사람들이 몰
>려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안쪽에 철조망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으
>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철조망 바로 앞에 서게 되었
>습니다. 미군 영내가 환희 들여다 보였으며 일부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여러 사람들이 우루루 저를 밀
>치면서 영내로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그 바람에 저도 얼결
>에 영내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일단 발을 들여놓자 정
>문 뒷쪽의 상황이 궁금했고 5,6m를 더 나아가 정문쪽을 보았
>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바로 미군들 30여
>명 정도가 이쪽으로 우루루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급히 철조망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고 저도 몸을 돌려 철조
>망 앞까지 왔습니다.
>
>그런데 안에서 촬영을 하던 이정미 기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아 뒤를 돌아보니 이 기자가 미군들이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습니다.(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정미 기
>자는 개나 고양이를 무척 싫어하는 성격인데 당시 미군들이
>군견을 끌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발을 뗄수가 없었
>다고 합니다.) 뒤늦게 몇 발자욱 물러났으나 이미 미군들에
>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5,6명의 미군들이 막무가내로 카메라
>를 빼앗으며 이 기자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함을
>알고 그것을 제지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달려갔으
>나 주변에 있던 미군들이 이내 저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
>무슨 설명을 할 겨를도 없이 한 미군이 저의 목을 잡아 조르
>면서 복부를 가격하고 자빠뜨렸으며 넘어진 저에게 2,3명의
>미군들이 달려들어 저를 엎드리게 한뒤 양팔을 잡고 등뒤로
>꺽고, 양다리도 엊갈려 꺽어 꼼짝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팔을 꺽는 것이 힘을 못쓸 정도로 제압
>을 할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만큼 아플정도로 꺽는 것
>이었습니다.
>
>그리고 한 미군은 얼굴을 옆으로 꺽어 돌리더니 발로 밟고 목
>을 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도데체 목을 왜 조르는지는 모르
>겠지만 그 흑인 병사는 어느정도 제압이 될 정도로 조르는 것
>이 아니라 숨이 막히다 못해 넘어갈 때까지 조르는 것이었습
>니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숨이 넘어갈 즈
>음 잦아들며 나온 말은 "~살려줘!"라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 흑인병사가 저를 죽이려고 하는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힘을 푸는줄 알았는데 숨통이 트이자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
>며 목을 졸르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이 멈춘것은 뒤에서 팔
>을 꺽던 병사들이 손목에 포승을 채우고 끌고갈 때 쯤에야 멈
>추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언제 포승이 되었는지도 모르
>게 2명의 병사에게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포승이 좀 느슨하게 되었는지 손을 몇번 움직이자 금
>새 풀을수 있었고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
>까의 공포가 떠올라 도망가려고 몸부림 치자 다시 5, 6명이
>달려들었습니다.
>
>이번에는 아스팔트 위에서 제압을 당하게 되었는데 목만 안
>졸랐지 더 고통스럽게 팔을 꺽고 등을 무릅과 발같은 것으로
>짓눌렀습니다. 너무 심하게 꺽고 누르고 등을 짓이기는 바람
>에 저는 이후에 한국경찰에게 인도된 이후 심한 부상을 입어
>야만 했으며 조사과정 내내 서있기도 힘들고, 앉아 있기도 힘
>든 부상을 입어 목 보호대를 하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
>고 한 병사는 첫 진압때와 같이 얼굴을 옆으로 꺽더니 두손으
>로 있는 힘껏 얼굴을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무슨 큰
>저항을 한다고 그렇게 힘껏 누르는지 미군들의 동작 하나 하
>나에서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얼굴 오른쪽에 있는 찰과상은
>그때 너무 심하게 짓눌러져 생긴 것입니다.
>
>하지만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격적인 고문은 그 순간부터 였습니다.
>미군들은 아까 채웠던 플라스틱 수갑을 다시 채우기 시작하였
>는데 그것이 한번 풀렸던 탓인지 이번에는 작심을 한 것처럼
>있는 힘껏 잡아당겨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힘껏 잡아당
>겨 순간 소리를 질렀습니다.
>
>미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저를 양쪽에서 일으키고 한명
>은 허리띠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가는 것인지 허공에 떠서
>가는 것인지 모르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
>팔이 조여오는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그제서야 숨막힘과 팔꺽
>임의 고통에서 벗어나 조금은(?)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으며
>아까 "사람살려"라고 비명을 지르며 미군들에게 둘러싸여 있
>던 이정미 기자 생각이 났고, 이들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풀어줘라", "기자를 왜 잡아가느냐!", "어디로 가는
>거야!"라고 소리쳤지만 알아듣는지 못알아 듣는지 미군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말하며 한 막사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
>막사는 구조가 가운데에 유리로 된 상황실 같은 것이 있
>고 'ㄷ'자 모양으로 복도가 나 있으며 그 한쪽에 바깥과 통하
>는 문이 있고 안쪽에 한명 정도를 수용할수 있는 쇠창살로
>된 유치장이 2개가 있고 유치장 사이는 벽으로 되어 있었습니
>다. 즉 가운데 상황실 같은 곳에서 바깥상황을 볼수도 있고
>안쪽의 유치장과 안쪽 방들의 움직임들을 한눈에 알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였으며 상황실 입구는 유치장쪽 복도에 나 있
>었습니다.
>
>막사에 들어서자 마자 복도에 무릅을 꿇리는가 십더니 누군가
>의 지시에 의해 다시 'ㄷ'자의 맨 끝쪽에 있는 유치장으로 끌
>고 갔으며 안쪽에 있는 유치장에 저를 감금했습니다.
>
>저는 풀어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을 다시 나거버리고 상황실
>에 MP완장을 한 미군만 남아있었습니다. 잠시후에 상황실 유
>리 너머로 이정미 기자가 끌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미군
>들은 이정미 기자를 들어온 입구에서 무릅을 꿇리더니 잠시
>후에 제가 있는 옆 유치장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카츄사
>가 와서는 유치장쪽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
>저는 카츄사에게 뒤로 결박한 포승줄이 뭔지 모르겠지만(뒤에
>서 채웠기 때문에 볼수는 없었으나 촉감으로 플라스틱 종류
>의 일종이라 생각했습니다.)너무 꽉 조여져서 아프니 좀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MP완장을 한 미군은 힐끗 처다보더니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
>고 잠시후 카츄사가 와서는 "그냥 있으래요." 하는 어이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
>주머니에서는 핸드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하였는데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옆방에서 핸
>드폰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이정미 기자가 받는 것이었습니
>다. 이정미 기자도 똑같이 포승을 하고 들어온 것을 보았는
>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포승이 조금 느슨하게 되
>어 있어서 요령껏 풀렀던 모양입니다. 전화는 바깥에서 잡혀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두사람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한 전
>화였으며 이정미 기자가 저와 함께 미군 영내 유치장에 있다
>는 것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 핸드폰은 두번째 통화를 하면
>서 미군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
>저는 포승을 풀어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10분, 20분이 지나자 플라스틱 포승이 점점 살을 죄어오는
>것 같았으며 양손이 심하게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욕을 하면서 점점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풀어달란 말이야! 이 XX놈들아! 풀기 싫으면 아프지 않게 조
>금 느슨하게라도 해달란 말이야!" 그리고 계속해서 카츄사에
>게 호소를 하였습니다.
>
>"카츄사! 다시한번 얘기해봐. 아파 죽겠단 말이야. 제발 부탁
>이야."
>
>카츄사가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면서 몇번 더 미군
>에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번번히 그 미군에게서는 "괞찮다. 그
>냥 있어라."라는 말만 되돌아 올 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소
>리치는 저를 보면서 희죽희죽 웃으면서 약올리기까지 하였습
>니다. 옆에서 이정미 기자도 풀어주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소
>용이 없었습니다.
>
>30분 가량 지났을 때 의무병을 좀 불러달라고 요청을 하였습
>니다. 의무병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면 뭔가 좀 말을 해줄거
>라 생각했습니다. 의무병은 여성이었는데 제 손을 철창쪽으
>로 향하라고 하여 돌아서서 보여주었더니 손가락 끝만을 만져
>보더니 괞찮다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는데 팔에
>피멍이라도 들어야 풀어주려는지... 저의 고통은 계속되었습
>니다. 저린 부위가 점점 팔을 타고 올라와 팔꿈치 윗부분까
>지 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손만 안댔지 저는 고문을 당하
>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소리치고 벽을 발로 차며 항의했습니다.
>
>"너희놈들도 규정이 있을것 아니냐. 규정대로 해라. 피의자
>나 구금인에 대해 보호하고 인권을 지킬 것에 대한 규정이 있
>을 것 아니냐! 제발 규정대로라도 해라! 카츄사 제발 다시한
>번 전해줘, 규정대로 하라고 말이야."
>
>하지만 카츄사가 전해오는 말은 계속해서
>"그냥 있으래요." 하는 말뿐이었습니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화장실에 가겠다고 요구하였지만
>"바지에 싸래요."
>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물을 줄수 없대요."
>
>이렇게 미군들은 제가 고문당하며 아파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
>습니다.
>저의 계속되는 외침과 요구속에 의무병이 두번 더 다녀갔는
>데 두번째도 괞찮다며 그냥 가버리고 세번째가 되어서야 상황
>실에 있는 미군에게 풀어주라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때가
>한시간쯤 지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
>하지만 누구도 풀어줄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카츄사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보니 자를 도구를 가지러 갔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0분, 20분이 지나도 절단기를 가지
>러 간 미군은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
>이미 손이 부을대로 부어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수 있
>었고 미군 의무병도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에 풀어주라고 했건
>만, 미군들은 카츄사에게도 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는 카츄사도 너무 미안하고 어쩔줄을 몰라 제가 소리칠때마
>다 난감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카츄사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나라군대
>에 파견되어 군생활을 한다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한사람이고
>국방의 의무감을 느낄터인데 제나라 국민을 고문하는 미군앞
>에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데 대해 민족적 모멸감을 느꼈을 것
>입니다. 저는 제 고통앞에 카츄사의 그런 마음은 전혀 고려되
>지 않은채 그 카츄사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
>"카츄사! 너라도 좀 풀어주라. 이거 풀어주고 징계 한번 받으
>면 되잖아. 우리나라 지키려고 군대간거 맞잖아. 저놈들이 못
>하면 너라도 좀 제발 풀어줘라. 내가 팔병신 되면 너도 좋을
>것 없지 않냐. 제발 부탁이다."
>
>이미 제 팔의 상태는 '제발'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말이 안될
>정도로 심각해져 어깨까지 고통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카츄사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아마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괴로와 뛰쳐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
>또 20분 가량이 흘러 소리칠 기운도 빠져 탈진의 지경에 이르
>렀습니다. 그리고는 혹 조용히 있으면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얕은 생각이 들어 머리를 벽에 기댄채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팔이 아파 움직이지도 앉아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
>그때 6명 가량의 미군들이 들어오더니 이정미 기자가 있는 방
>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기자의 외침소리와 함께 우당
>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정미 기자를 바닥에 엎어놓고 다시
>포승을 묶으려 하자 이 기자가 소리치면서 저항을 했던 것이
>었습니다. 포승이 곧 채워졌는지 미군들이 나오고 철창을 채
>웠습니다.
>
>하지만 제 포승을 풀어줄려는 미군은 아무도 없었으며 조금후
>에 10여명 가까운 미군들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중 카메라
>를 든 미군도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
>다.
>
>먼저 이정미 기자가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이 기자가 저항을
>심하게 하는지 이 기자의 비명과 고함같은 것이 들렸고 목적
>달성을 한 미군들이 제가 있는 방 앞으로 왔습니다. 이미 탈
>진한 저는 미군들에게 제발 좀 풀어달라고, 풀어주면 사진 찍
>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미군들이 풀어주겠다고 해서 순순히
>사진을 찍게 하였는데 미군들은 또 그냥 나가 버리는 것이었
>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짜피 이놈들은 풀어줄 놈
>들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속에서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래서 마구 욕을 하며 벽을 차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츄사에게 총
>을 가져오라고 너무 고통스러우니 차라지 총으로 쏴 달라
>고...
>
>그러던 중에 한국 경찰들이 왔습니다. 아마 바깥에서 우리를
>풀어줄 것을 거세게 요구하니까 자기들이 처리하기가 싫었던
>지 경찰을 요청한 듯 싶었습니다.
>어떻게 들어왔든지 저에게 그 경찰들은 한줄기 빛과 같이 느
>껴졌습니다.
>
>저는 경찰들에게 다시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왔다
>갔다 하면서 미군들과 얘기만 할뿐 좀체로 이쪽으로 오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한참후 오더니 먼저 이 기자에게 신상을 대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기자는 미군들에게 무슨일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인데 신상이 중요하냐며 빨리 풀어달라고 요구
>하였습니다.
>
>경찰들은 처음에는 신상을 대야 나갈수 있다고 설명을 하더
>니 이 기자가 계속 거부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응을 보이
>다가
>"그럼 계속 여기 있어!"
>하면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믿
>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저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
>도데체 이고문을 끝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기
>가 막혔습니다.
>조금후에 문을 박차고 나갔던 한국경찰들이 다시 들어와 저
>와 이정미 기자에게 신상을 알려달라고 다시 요구하였습니
>다. 저는 제발 포승부터 좀 풀고 얘기하자고 애원을 하였습니
>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말하던 경찰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
>습이 불쌍했던지 미군들에게 자신들의 수갑으로 대치를 할테
>니 풀어달라고 하였지만 미군들은 거절하였고, 그럼 가위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미군은 빌려줄수 없다며 가위로 잘라줄 때
>에 그 가위를 뺏어 위협하거나 흉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
>니다. 할수 없이 경찰도 인계되면 풀어주겠다는 말밖에 할수
>가 없었고 미군과 인계에 대한 대화가 끝났는지 들어온지 1시
>간 40분 가량 지나서야 철창이 열리고 경찰에게 부축이 되어
>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묶여진 포승의 아픔을 참을수
>가 없었습니다. 보다못한 경찰들이 경찰차에 도착하자 막사
>에 있던 가위를 가지고 와서 잘라볼려고 하였지만 워낙 단단
>했는지 제 손을 헤집는 고통만 더하고 자르지는 못했습니다.
>
>온몸에 땀이 흥건했고 양팔과 어깨가 쑤시는 듯이 아팠고 경
>찰들도 애가 탔는지 주변에 있던 소방차를 보고 절단 장비를
>좀 빌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소방차는 미군 소속의 소방차
>였지만 다행히 직원들이 한국사람들이서 쉽게 부탁을 하였
>고, 조금 후 소방수가 절단기를 가져오고 있는데 호송차 앞
>에 있던 미군이 갑자기 경찰에게 주지 말것을 명령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리고 미군 영내에서는 포승을 풀어서는 안된다
>고 하는 것입니다. 경찰들도 더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그저
>답답해 하며 빨리 나가는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저와 이정
>미 기자를 실은 차는 경찰 5명과 같이 출발을 하였습니다.
>
>차는 뒤좌석이 마주보게 되어있는 봉고차였는데 저는 팔에 무
>언가 닿기만 해도 고통이 가중되어 의자에 똑바로 앉지도 못
>하고 바닥에 무릅을 꿇고 머리를 시트에 파뭏은채로 부대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
>그 견고한 포승을 풀은 것은 경찰서로 가는 도중 길거리에 있
>는 한 꽃집에서 절단가위를 빌려서 풀게 되었습니다. 급한 고
>통은 멈추었지만 팔을 움직일수가 없었고 온몸이 뻐근하고 비
>오듯 땀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양
>손과 팔이 풀리지 않은채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저리고 쑤
>시는 지경입니다.
>
>나중에 경찰서에서 경찰들이 잘라낸 포승을 보여주었는데 그
>것은 도저히 사람에게 써서는 안될 도구였습니다. 질긴 플라
>스틱 재질로 길이가 50Cm정도 폭이 1Cm정도 되는데 컴퓨터나
>전선 같은 것을 함께 묶을때 쓰는 '타이'라는 공구와 비슷한
>것으로 한쪽면이 일정한 요철로 되어있어 조이는 기능만 가능
>할뿐 풀르거나 느슨하게 하는 기능은 없는 것으로 뺀치나 절
>단기가 없으면 잘라내기도 힘든 것으로 사람에게는 써서는 안
>될 도구입니다.
>
>저는 병원에서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목과 등 주변의 근육이 심하게 상한 상태이고 손과 팔
>의 저림과 마비증세도 목과 등에 입은 상처가 완치되어야 같
>이 풀릴 것이라고 합니다.
>
>
>이제 고통과 악몽의 순간을 벗어나 다시 한번 반문해 보게 됩
>니다.
>비록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군들에게 잡혀있던 나
>는 어떤 존재였는가? 기자에게 성역이란 있을수 없다고 생각
>했으며 기자가 탄압받는 것만큼 비정상적인 사회는 없을 거
>라 생각했는데,
>진정 미군들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때 나는 대한민국 기자도, 한나라
>의 국민도, 인권을 가진 인간도 아닌....
>
>한마리의 짐승에 불과했을 것이다.
>
>
>2002년07월01일 ⓒ민중의 소리
>
>================================================================
한미행정협정이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
한 시설과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
한 협정(Agreement under Article 4 of the Mutual Defenc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Regarding Facilities and Areas and
the States of United Armed Forces in the Republic of
Korea)
약칭으로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협정이라고 부른
다.
한미행정협정은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한 협정이다.
일반적으로 국제법상 외국군대는 주둔하는 나라의 법률질서
에 따라야만 한다. 다만 외국군대는 주둔하는 나라에서 수행
하는 특수한 임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쌍방 법률의 범위 내
에서 일정한 편의와 배려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것은 해당국가
와 미군간에 행정협정의 체결로 보장된다. 이에 따라 맺어진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 바로 한미행정협정이다. 그런
데 한미행정협정은 미군들에 대한 편의제공 차원을 넘어 한국
의 주권을 상실할 정도로 지나치게 불평등하다.
한미행정협정은 본문과 후속문서인 합의의사록, 양해사항 등
3개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3개 문서는 31개 조와 각 조
에 따른 수십개의 조항들로 구성된 방대한 구조를 가지고 있
다.
체결 및 변천과정
1. 대한민국 대통령과 합중국 군대 사령관간에 체결된 "과동
기에 시행될 장점정 군사안녕에 관한 행정협정"(1948. 8.24.)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최초의 협정이다. 미군정시대에는 한
국의 주권이 없었고, 1948년 8우러 15일 이남에 단독정부가
세워짐에 따라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문제가 제기되자 맺어
진 협정이다.
한국정부가 미군의 기지 및 시설 사용권은 물론 일체의 권리
를 포기하는 내용으로 된 협정은 1949년 미국의 (일시적인)철
수로 종료되었다.
2.대전협정(1950. 7. 12.)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미군이 진주하게
되어 미국의 요구로 전시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미군에게 일체
의 재판권을 부여하는 대전협정(정식명칭:주한미군 군대의 형
사재판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을 1950년 7
월 12일 체결. 1952년 5월 24일 한국의 미군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마이어 협정(정식명칭:경제조정에 고나
한 협정)을 채결하여 미군의 특권 더욱 강화
3.1967년 한미행정협정(1967. 2. 9.)
한국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
방위조약을 통해 계속 주둔하게 됨. 한국정부는 한미상호방위
조약 체결협상 때 부터 주한미군의 지위에 괂나 새로운 협정
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미군은 대전협정, 마이어 협정
에 보장된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계속 회피하였다. 그런
데 1950년대에 계속하여 발생한 주한미군의 범행과 만행으로
한국 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비로소 미국은 협상에
응하기 시작해 1966년 7월 9일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어 같
은 해 10월 14일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쳐 1967년 2월 9일 발
효.
그러나 이 협정은 협상과정만 13년 (53-66)이 걸렸을 뿐만 아
니라 미국이 협상체결에 대한 조건으로 제시한 한국군의 월남
파병과 한일협정 체결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더구나 1967년
한미행정협정은 그 내용에 있어서 이전의 대전협정이나 별다
른 차이점이 없는, 국제법에서 가장 후진적으로 평가받는
미 - 이디오피아 협정과 유사한 치욕적인 협정이었다.
4. 1991년 한미행정협정(1991. 2. 1)
현행 한미행정협정이다. 1967년 소파에 대한 대대적인 과장선
전과 6, 70년대를 지배했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한
미군의 수많은 범죄와 탈선행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눈과
귀가 가리워져 왔다. 그러다가 80년대를 들어서면서 광범위하
게 확산되기 시작한 반미의식의 성장에따라 미군의 각종 범죄
행위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한미행정협정은 또다
시 도마위에 올라 88년 12월부터 개정협상이 시작되어 2년여
만인 91년 1월 4일 개정서명 후 2월 1일 발효되었다. 이때도
미국은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정부의 방위분담금 지원을 관철
시켰다. 91년 개정은 제 22조 형사관할권 중 한국의 형사재판
권 자동포기조항의 삭제 제 1차적 재판권 대상범죄의 확대
등 부분적인 진전에도 불구하고, 실제 한국측의 권리행사를
제한시키는 조항을 손대지 않음으로서 기존의 협정과 거의 변
함없는 불평등구조를 온전시켰다. 사실상 '대국민 사기극'애
불과했다.
5.현행 한미행정협정에 대한 개정 협상
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 95년 충무로 지하철 난동사건 등 연
쇄적인 미군범죄로 인해 한미행정협정의 전면개정을 요구하
는 국민들의 비판이 날로 거세지자 한미 양국은 95년 11월말
부터 다시 개정협상을 벌였다. 96년 11월 30일부터 시작된 협
상은 미군피의자 인도시기, 기소시점, 검찰 상소권, 미군피의
자의 반대신문권, 참고인진술 증거능력 등 형사재판권 관련문
제에 이견을 보여 96년 9월 10일 7차 협상을 마지막으로 결렬
되었다. 그리고 97년 5월 27일 미국측이 "양국의 입장이 맞서
고 있는 상황에서 협상할 필요가 없다. 올해는 소파 협상을
하지않겠다"로 일방 통보를 해옴에 따라 협상은 사실상 중단
되었다.
그러나 소파 개정문제는 현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새정부
100대 과제'에 포함될 정도로 외교 현안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에 따라 한미간이 마찰이 있을 때마다 소파개정문제가 첨예
한 문제로 떠올랐다.
홍순영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1999년 4월, 한미협회 주최 오
찬 연설에서 소파개정협상 재개와 무상사용 건물의 조속한 반
환을 요구하는가 하면, 같은 해 10월, 유엔 총회 참석차 미
국 방문중 가진 연설에서 소파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한
번 강경하게 발언하였다.
(중략)
말만 무성하던 소파 개정협상이 구체화된건 2000년 2월 19일
이태원 외국인전용클럽에서 한국인 여종업원이 미군에게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이를 계기로 소파개정의 필요성
이 다시한번 제기되었고, 한미 양국은 3월 18일 양국 국방장
관간에 가진 회담에서 4월 말 소파 개정협상을 재개키로 합
의 하였따> 그러나 협상안 마련 지연, 6월 남북정상회담 등
의 이유로 연기를 거듭해오다 정작 협상이 재개된 건 8월 2
일 7차 협상이 끝난 뒤 약 4년만의 일이었따>
(중략)
1950, 50년대에 주한미대사관의 문정관을 지낸바 있는 그레고
리 핸더슨(하버드대)은 그의 논문 "주한미군 작전지휘권의 정
치적 위험요소"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해도 미국 현지의 반대여론에 부딪히면
서도 강행할 수 있는 곳은 한국 이외에는 아무데도 없다. 한
국은 장군에서 졸병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이 물질적 향락을
만끽할 수 있는 나라다. 그런 향락 중에는 몇 만명 단위로 공
급되는 젊은 연성의 육체도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