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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고쳐라.
2) 일본국왕은 천황으로 바꿔라.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사진설명에서 김구를 삭제하라.
아시아경제 신문기사 내용: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100914095253368&nvr=Y
과거 대한민국 국사 편찬위원회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심사에서 수정권고한 내용이다.
일제의 한국침략을 합법화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국사편찬 위원회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광복 수 십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일제가 채운 족쇄를 지금껏 차고 있다. 1945년 일제는 패망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아직도 해체되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한 이들이 국사학계를 장악하고, 교원양성소를 통해 일제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박사의 강연에서 식민사학, 그 실체를 밝힌다.
대한민국은 해방, 수 십년이 되었으나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까지 일제 식민 역사학이 지배해 왔다. 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주체적 역사관에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해왔다. 상해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백암 박은식 선생, 만주에서 돌아가신 석주 이상용 선생, 여순감옥에서 돌아가신 단재 신채호 선생, 이분들에 대한 공격은 해방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605132000708112066
국가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한국학진흥사업단이란 것이 있다.
연간 수백억 원의 국고를 쓰는 이 사업단의 단장이란 사람이 과거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분야 같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로 시끄러웠겠지만 남한 역사학계는 이 망언에도 조용하기만 했다.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410023002&wlog_tag3=daum
115년 전, 조선이 망할 때 온나라 백성들이 울고불고 목숨을 끊고 망명하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댓가로 부부동반하여 일본에 가서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은 사람들도 있었다.
1908~1909년 무렵 친일파들은 나라 팔아먹는 경쟁을 서로 치열하게 하게 된다. 이 당시 일진회라고 불렸던 친일세력과 인조반정 이래로 250년을 집권한 노론 당파, 일진회와 노론, 양쪽에서 나라 팔아먹기 경쟁에 나서게 된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강경파와 손잡고 바로 조선을 점령하자는 합의를 했는데, 석 달 후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에서 총에 맞아 죽게 된다. 그후 대한제국을 바로 점령하자는 강경파 데라우치가 일본 통감부로 부임한다. 그렇게 되니까 이완용의 마음이 대단히 조급해졌다.
왜냐하면 데라우치가 일진회와 손을 잡고 조선을 먼저 팔아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는 불안감이 든 것이다. 그래서 이완용은 비서인 이인직을 시켜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와 조선을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몰래 주도하게 된다.
이 비밀협상에서 이완용과 이인직은 ‘우리가 나라를 너희들에게 넘기면 우리에게는 뭘 해줄거냐?’고 하니까,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가 하는 말이 ‘나라를 넘기면 조선 귀족령을 만들어서 너희들은 조선의 귀족으로 봉해주고 그리고 따로 특별예산을 편성해서 막대한 돈도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인직이 ‘그렇게 관대한 조건이라면 하등 어려울 것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간 뒤 일사천리로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넘기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115년 전, 조선을 점령하고 10월 7일 약속대로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게 귀족의 작위를 주고 훈장을 준다. 당시 작위와 훈장을 받은 조선의 사색당파로 분류를 해보면 남인들은 한명도 없고 북인은 2명이고 소론은 6명이고 나머지 56명이 전부 다 노론이다.
250년 동안 인조반정 이래로 집권했던 노론이 조직적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가담을 한 것이다. 이 후예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특히 역사학계의 주류를 장악해서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관에 테러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인직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인직을 ‘혈의 누’를 쓴 선각자,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나라 팔아먹는 비밀협상을 한 매국노를 대한민국의 국사교과서는 선각자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혈의 누의 내용은 안 가르친다.
혈의 누의 내용이 무엇인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조선처녀를 일본군이 구해줬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학생들이 선각자로 알아야 하는 이인직의 실체다.
일제 식민사관의 논리구조는 주로 한국의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도 일제식민사관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고대사에 집중돼 있다. 그러면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한국고대사 논리가 무엇인가?
한사군은 한강 이북에 있었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한강 이북은 중국의 식민지로 시작했고, 대한민국의 한강 이남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식민지는 너희 나라의 운명이다.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대한민국 초등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치려면 먼저 무엇을 가르쳐야 되는가?
신사임당, 유관순열사, 세종대왕, 이순신, 을지문덕 장군을 가르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우리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했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쳤다.
이인직을 선각자로 가르친 그 논리구조, 그 속에서 한사군을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가르쳐왔던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핵심 논거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한사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쓴 중국의 역사서는 하나도 없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색함을 자인한 이병도의 ‘황해도설’이다.
이병도: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대한민국의 찬란한 고대사를 밝혀주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그들이 부정했던 이유
고려 말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행촌 이암(李嵓,1297~1364)선생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조선 중종때 찬수관을 역임했던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고조선(단군조선)과 중국의 9년 홍수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대 단군왕검 재위 50년째인 정사(丁巳,BCE 2284)년에 고조선(단군조선)에 큰 홍수가 발생했다. 단군왕검께서 풍백風伯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높은 산과 큰 하천을 잘 정리하여 백성이 편안히 거처하게 하셨다. 우수주牛首州에 이 내용을 기록한 비碑가 남아 있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재위 51년 무오(戊午, BCE 2283)년에 단군왕검께서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건설하게 하시고
마리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시니 지금의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이 곧 그것이다.”『단군세기(檀君世紀)』
초대 단군왕검과 동시대인 중국의 요堯임금 때에 9년 홍수(BCE 2288~ BCE 2267)가 발생하였다. 요임금은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곤(鯀)이라는 사람에게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9년이 지나도 홍수가 그치지 않아 요堯는 곤鯀을 대신해 다시 순舜에게 맡긴다.
단군왕검 재위 67년 갑술(甲戌, BCE 2267)년에 맏아들 태자 부루를 보내 순舜이 보낸 사공司空 우禹와 도산塗山에서 만나게 하셨다.
태자 부루께서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法)을 전하시고 나라의 경계를 살펴 정사하니 유주(幽州), 영주(榮州) 두 주가 우리 영토에 귀속되고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어 다스리실 때 순舜을 시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셨다. 『단군세기(檀君世紀)』
조선 중종때 역사서를 다루는 찬수관을 역임했던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당시 홍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년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어 우虞나라 순임금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塗山 회의를 소집하셨다.
순舜임금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때 감우소監虞所(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는 곳)를 낭야성琅耶城에 설치하여 구려 분정九黎分政에서 논의된 일을 결정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지금도 낭야산(琅邪山), 낭야구 등 낭야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번한은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BCE 2251)년 3월에 가한성을 개축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이라고 하는데 번한왕 낭야가 쌓아서 낭야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낭야성은 지금의 산동성 제성현 동남에 있다. 원명은 가한성. 번한의 2세 낭야왕이 개축하였다.
일찍이 오늘의 산동,안휘,강소,절강성 일대에 진출하여 살던 동이 조선족을 나누어 다스린 단군조선 분조의 수도였다.(조선상고사 참조)
구려분정九黎分政: 배달倍達시대에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동부와 북부 지방을 점령한 후 회대(淮岱) 사이에 웅거(雄據)하였다.
그 뒤 단군왕검(王儉)이 배달국 지역에 고조선(단군조선)을 세운 후 지역을 3분하여 만주중앙은 진한(辰韓)이, 연해주, 한반도, 대마도,구주 등 동쪽은 마한(馬韓)이, 중국 북부지방과 만주 남부지방 등․서․남쪽은 번한(番韓)이 각각 다스리고, 중국 동부에 있는 회대 지방에는 분조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 분조를 구려분정(九黎分政)이라 불렀다. 구려분정의 치소는 산동성 제성현 동남쪽에 있는 "낭야성(琅耶城)"이었다.
중국 문헌의 왜곡
사공 우禹가 금간옥첩을 받아간 것과 관련된 기록은 [오월춘추]와 [역대신선통감], [응제시주],
그리고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묵자] 등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중국이 중화주의 사관으로 쓴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창수사자(蒼水使者)가 우(禹)임금의 꿈에 나타나 비법을 알려준 것으로 9년 홍수를 극복했다고 기록하여 왜곡하였다.
▶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 不幸所求.... 因夢見赤繡衣男子, 自稱玄夷蒼水使者... 東顧謂禹曰 欲得我山神書者, 齋於黃帝巖嶽之下三月 ... 禹退又齋三月, 庚子登宛委山, 發金簡之書, 案金簡玉字, 得通水之理.
9년 홍수를 다스리던 우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형산에 이르러 백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하여 성공을 빌었다. 그랬더니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스스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칭하면서 우禹에게 “신서가 있으니 재계하고 이를 내어 보라” 하므로 우가 그렇게 하여 금간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의 이치를 알았다 (<오월춘추> 월왕무여외전)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 부분을 이렇게 말했다.
현이(玄夷)는 당시 단군조선(고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남 (藍) ·적(未) ·백 (白) ·현 (玄: 黑 ) ·황 (黃 )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玄部)이니 중국인들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玄夷)라고 한 것이요,
창수(蒼水)는 곧 창수(擔水)이고, 주신 (州愼 ) ·숙신(肅愼 ) ·직신(稷愼 ) 혹은 식신(息愼)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고조선(단군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창수사자蒼水使者이니, 이때 중국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가지 옛 역사 기록이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왕검이 그 수재水災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도산에 보내 하夏나라 우禹에게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法)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禹)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중국에 퍼뜨렸으며, 정전井田과 율도량형律度量衡 또한 중국의 창작이 아니라 단군조선(고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 ’고 하였는가?
중국의 기록인 <오월춘추>는 부루 태자를 ‘현이의 창수사자玄夷蒼水使者’ 라고 바꾸어서 말할 뿐 나머지는 <단군세기> 내용과 다른 데가 없다. 우가 현이의 창수사자에게 오행통수의 이치를 전해받아서 치수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꿈이라고 했지만 이정도의 변형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는데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다. 물론 중국 문헌에는 이보다 더 추상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놓은 기록이 많다.
▶송미자세가 홍범구주편에는, "우禹가 치수를 맡으니 하늘(天)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등을 내리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箕子ㅣ 乃言曰 我聞호니 在昔鯀이 陻洪水하야 汨陳其五行한대 帝乃震怒하샤 不畀洪範九疇하시니 彛倫의 攸斁니라. 鯀則殛死ㅣ어늘 禹乃嗣興하신대 天乃錫禹洪範九疇하시니 彛倫의 攸叙ㅣ니라.
기자箕子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옛적에 곤(鯀,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아버지)이 홍수를 막으면서 五行을 어지러이 펼치니 帝가 진노하여 곤鯀에게 홍범구주를 주지 않으시니 이륜이 무너졌다.
곤鯀이 귀양가서 죽자 아들 우禹가 이어서 일어나시니 하늘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를 주시어 이륜이 펼쳐지게 되었느니라.
▶<서경(書經)>‘홍범’ 에서는 “하늘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를 주셨다(天乃錫禹洪範九疇)” 라고 하여 부루 태자를 이번에는 ‘하늘(天)’로 바꿔 말하고 있다.
꿈 속 창수사자 이야기나 하늘로 표현한 것이나 모두 상국上國을 숨기려는 기도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을 ‘하늘’ 같은 나라라고 여긴 것은 좋으나 고조선이나 단군왕검, 부루태자라고 명기되어 있지 않고 숨긴 의도는 명확하다고 할 것이다.
중화 사대주의에 찌든 국내 문헌의 왜곡
조선시대의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리지]는 ‘우禹가 도산에서 제후들과 회동할 때 태자 부루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라고 하여 단군조선(고조선)이 오히려 중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게 기록하였다.
▶『응제시주應製詩註』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고려 말 안향(安珦)이 지은 시詩 〈충선왕을 시종하여 연경에 가는 감회〉에도 부루가 도산에서 우禹임금에게 옥을 폐백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갑술년(하우 18년) 아들 부루를 하夏나라에 보내 조회하게 했다.(홍만종,동국역대총목 단군조선)
우임금 “나를 회계산에 묻어다오‘
우임금이 “내가 죽은 뒤에 나를 회계산에 묻어다오.” 吾百世之後에 葬我會稽之山하라. (『오월춘추』「월왕무여외전越王無余外傳」)
하夏나라의 창업자는 바로 회계산에서 단군조선의 부루태자로부터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아 치수에 성공한 사공 우禹다.
9년 홍수를 해결한 덕에 인심을 얻어 夏나라를 연 우임금은 단군조선(고조선)의 은혜를 잊지 못해 죽을 때 회계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현재 우임금의 왕릉은 회계산에 있다.
우(禹)임금의 대우릉(大禹陵)은 회계산에 있다. 대우릉 풍경구의 진입로 입구에 회계산이란 큰 표지석이 서 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안녕 하세요..온누리님.
일제가 채워준 족쇄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인
온누리님 덕분에..
즐감 합니다....고맙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