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0, 35 - 45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멀리 제주방과 경기방에서 오셨군요.
저는 강론을 하면 질문을 많이 하는데, 평일 미사는 혼자 드리기에 물을 분이 없어요.
서운동에 있을 때는 가브리엘 형제와 죽이 잘 맞았죠.
제가 질문을 할 테니 시청하고 계시는 우리 신자분들도 한 번 대답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철학적인 질문은 아니고 ‘살아오면서 어떤 욕심이 가장 컸습니까?’
그 욕심이 지금은 사라졌을 수도 있고, 또 아직도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또 그 욕심이 선하게 이루어졌다면 욕심이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욕심은 그 욕심을 지님으로써 나와 내 영혼에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안 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떤 욕심이 있었나요?
자식, 무병장수, 돈, 사업에 관한 욕심.
각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됩니다.
그러면 저는 무슨 욕심이 있었을까요?
되돌아보면 욕심이라는 것을 갖은 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는 것이 항상 벼랑 끝에 살고 있다는 느낌, 어느 본당을 가든 해결할 일이 많았죠.
그냥 그 자리에서 여기를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쁘게 만들까 하는 욕심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한 적 있죠.
저는 어느 성당에 가든지 저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들을 거리, 볼거리, 쉴 거리, 먹거리 등은 기본적인 문제지요.
또, 우리 성당을 한국에서 최고의 성지로 만들려는 욕심이 성전을 아름답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굳이 욕심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직무에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은 인생을 어영부영 살기보다는 뜨겁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이 계획대로 잘 안되니 조금 스트레스를 받기는 해요.
아파트에 적응이 아직도 잘 안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인사는 하는데 눈은 마주치지 않고 건성으로 인사해요.
위선 같고, 가식 같이 느껴지죠.
서울은 아예 인사를 안 한다면서요?
며칠 전에는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저와 같은 층을 누르고 있었어요.
앞집이었죠.
그런데 멋쩍은지 땅만 쳐다보더군요.
이런 것들이 내가 살아온 스타일과 참 맞지를 않아요.
오늘 복음 이야기를 하려니 서론이 길어졌네요.
아까 여러분의 욕심이 하나의 고민거리고 골칫거리이고 갈등 거리죠.
부자가 되고 싶은데 부자가 안 돼. 그러면 갈등이죠.
건강해지고 싶은데 가족들이 자꾸 아파. 맘대로 안돼.
딸 시집 잘 보내고 싶은데 맘대로 안돼. 갈등이고 십자가죠.
철학자들도 이야기했는데, 저는 인간의 3대 갈등 문제는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3대 갈등 문제는 권력, 돈, 성욕입니다.
그리고 많은 범죄는 성욕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양면성이 있어서 잘 쓰고 선용하면 축복의 도구가 돼요.
권력을 잡을 사람이 정말 좋은 정치를 하면 국민은 얼마나 행복합니다.
하지만 독재하면 국민이 처참해집니다.
또 본당 신부도 거기 있는 동안 하느님이 준 거룩한 권력이에요.
그것을 잘 쓰면 본당이 발전하죠.
돈도 양면성이 있죠.
죽을 때 수의는 주머니도 없는데, 돈 벌어서 제대로 못 쓰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똑같이 밥 세 끼 먹는 겁니다.
돈 많으면 착한 일 많이 할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게 잘 안 돼요.
재벌들을 몇 명 만나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자기는 주식 등은 있어도 수중에 돈이 없어 남을 도와줄 수 없대요.
핑계죠.
또 성욕이 없으면 어떻게 자식을 낳아요.
출산은 하느님의 명령이죠,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음욕이 되고, 불륜이 되고, 그것으로 많은 범죄가 일어나요.
롯 이야기 아시죠?
롯이 소돔을 탈출하다 마누라는 소금기둥이 되고 딸 둘을 데리고 굴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딸들이 가만히 보니 처녀로 늙어 죽게 생긴 거야.
큰딸이 어떻게 하죠?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실컷 먹이고 인사불성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들어가 자요.
거기서 나온 것이 셈족입니다.
또 둘째 딸도 처녀로 죽을 수 없다 하고 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범죄는 아담과 하와, 그다음 질투로 인한 카인과 아벨의 살인사건이고,
세 번째 범죄는 바로 근친상간이에요.
권력, 돈, 성욕은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중요한 테마입니다.
아무튼 이 3가지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면 추해지고 그 말로는 비참해지고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내가 강론과 피정을 통해 누차 이야기하지만, 영성중 가장 어려운 영성이 포기의 영성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것의 마지막 조각을 포기할 때 일어납니다.
내가 애착하고 있는 것의 반 정도만 포기해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쁨의 기적을 원하면 욕심의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하세요.
마지막 찌꺼기라도 있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기쁨의 순수성과 순도가 떨어집니다.
또 내 몸 안의 암 덩어리가 낫는 기적을 원한다면 어떻게 하라 했지요?
제가 수혈을 잘못해서 들어 온 C형 간염 바이러스,
18년 만에 화해하며 오늘부터 내 몸의 일부라고 인정한 다음부터는 기뻤어요.
의사도 원망하지 않고, 수혈해준 병원도 원망하지 않았고, 몇 년 후 약이 나와 치유가 되었잖아요?
매일 벽만 보고 미사 하다 신자들과 함께하니 오늘은 힘이 나네요.
오늘 복음을 봅시다.
복음 첫 마디에 ‘제베대오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제베대오는 신약에서 활동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또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가 있었을 텐데, 유난히 요한과 야고보 이야기를 할 때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죠.
그래서 제가 생각했을 때는, 오늘 나오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요한과 야고보의 욕심이라기보다는
제베대오가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들 둘을 민 것이죠.
‘저 양반, 뭔가 세상을 뒤집을 분이니, 지금부터 자꾸 이야기해야 해. 좌청룡 우백호.’
이것이 아버지 마음이겠죠.
아무튼 야고보와 요한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권력을 달라고 합니다.
인간의 3개 문제 중 하나인 권력을 달라고 합니다.
대개 권력이 오면 권력도 따라오고, 권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성적으로 타락할 수 있죠.
이렇게 셋을 몰려오기 때문에 세쌍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그대로 저희에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기도에 관한 이야기할 때마다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을 자판기로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야고보와 요한처럼 기도하죠.
‘하느님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하소서.’
찔리지 않으세요?
청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항상 기도 끝에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안되면 아직 때가 아닌 것으로 알고,
또 응답이 없으면 다른 쪽으로 축복 주셨음을 믿겠습니다.’ 해야죠.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셨을 겁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알면서도 묻습니다.
그랬더니 더 노골적으로 답을 하죠.
‘영광 받으실 때 오른쪽, 왼쪽에 앉게 해주세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서열 1위고, 자기들은 서열 2위, 3위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거죠.
제가 가끔 쓰는 속담에 ‘도끼 등 위에 면도칼 세우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로 생각이 다를 때 하는 말입니다.
도끼 등 위에는 그 얇은 면도칼이 안 섭니다
이렇게 예수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사실 이 제자가 예수님께 권력을 달라는 이 순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으로 당할 모욕과 죽음을 내다보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생각을 한 겁니다.
스승은 괴로워하고 있는데 제자는 왕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십니다.
순교의 잔, 십자가의 잔입니다.
하지만, 두 제자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스승께서 왕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로비하고 있는 판에 무슨 십자가와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까?
잔의 의미를 전혀 몰랐죠.
구약에서 ‘잔’은 생명과 경험을 뜻해요.
둘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죠.
후의 역사를 보면 그대로 되었지요?
사도행전 12장에 야고보는 헤로데에 의해 가장 먼저 목 잘려 죽었다 나옵니다.
본인들이 ‘예’ 했기에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말조심하십시오. 그대로 되는 거예요.
하지만 잔머리 굴리다 대답하면 천국 못가요.
이 세상에서 십자가와 고통은 피해갈 수 있어도 죽은 다음 세상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대답은 잘 해야 하지만, 예수님이 ‘해야 하지 않겠니?’하고 물으시면 ‘네’하고 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명입니다.
사제들은 순명의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모들도 하느님께 순명하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한편 요한은 100살이 넘게 살며, 요한복음과 요한묵시록을 기록하면서
초대교회의 산증인으로 많은 고생을 하며 신자들의 믿음의 초석 역할을 합니다.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70여 년 동안 초대교회를 지키는 십자가를 주신 것이죠.
제상의 지위와 안전을 위해서도 우리는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에서 높은 지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은 알려주고 계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첫째 자라와 둘째 자리를 달라고 하니, 다른 열 제자는 아마 화가 나을 것입니다.
‘아니, 저것들이 벌써 선수 치네?’
왜냐? 다른 제자들도 이미 똑같은 마음이었어요.
또 자기뿐 아니라, 친척들 명단 적어서 예수님에게 기회가 되면, 등원시켜 달라고 했던 거예요.
예수님은 권력을 갖고 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우리 각자 하느님에게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권력, 돈, 성에 대한 욕심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왜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합니다.
하지만, 영생을 믿는 그리스도 신자이기에, 살면서 순명의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맙시다.
그렇게 산다면 하늘나라 예수님 책에 잘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살면서 억울하고 힘들고 괴로웠던 것, 다 죽은 후에 보상해 주실 거라는 것을 믿도록 합시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2021년 연중 제29주일 (10/1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첫댓글 이 고운 손길에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