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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 전문 **
모래 한 줌 속에 있는 세상과 야생화 속에 있는 천국을 보려면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쥐어라.
- 윌리엄 브레이크-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빅뱅, 태초의 "옴"
빅뱅이론은 물리적 우주가 단일성이라고 불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열의 밀도 높은 한 점에서부터나선형으로 퍼져나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늘 끝보다 수십 억배나 작은 것이다.
그 이론에서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뭔가가 신비스러우면 신비스러울수록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중력은 팽창 속도를 늦추든가 아니면 우주를 하나의 커다란 위기상태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허블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이미지는 우주의 팽창이 실제적으로 가속화되고 있고
빅뱅에서 자라 나오면서 점점 더 빨리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어찌 되었든 우주에는 물리학자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많은 질량이 있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질량을 계산하기 위해물리학자들은 이제 우주가 오직 4%의 원자 물질
또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물질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의 23%는 암흑 물질이고, 73%는 암흑 에너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전에는 빈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연결하면서 우주를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경계와 같은 것이다.
고대의 베다 교사들은 나다 브라흐마, 즉 우주를 진동이라고 가르쳤다.
진동하는 장은 모든 진정한 영적인 경험과 과학적인 탐구의 뿌리에 있다.
그것은 성인들, 붓다, 요기들, 신비가들, 사제들, 샤만들과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관찰했던 에너지 장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아카샤, 태초의 옴, 인드라의 보석망, 천체의 음악, 그리고 그밖의
수천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뿌리이며 우리의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1부 아카샤]
3세기의 대승불교에서는 현대의 가장 앞선 물리학자들과 다르지 않은 우주론을 설파했다.
인드라의 보석 망은 우주의 구조가 서로 얽혀 있다고 설명한 훨씬 더 오래된 베다의 가르침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신들의 왕 인드라는 태양을 낳고 바람과 물을 움직인다. 모든 차원으로 뻗어나가는 거미줄을 상상해보라.
거미줄은 이슬방울로 되어 있고 각각의 방울은 다른 물방울을 비추고 있다.
각각의 방울에는 다른 물방울의 이미지가 담겨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거미줄 전체에 반사된 영상이 무한히 연속된다. 인드라의 망은 가장 작은 빛줄기조차도
전체의 완전한 패턴을 담고 있는 홀로그램적인 우주로 설명될 수 있다.
세르비아출신 미국인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는 20세기를 발명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테슬라는 지금은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된 교류전기와 다른 많은 것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대 베다의 전통에
관심을 가지면서 테슬라는 과학을 동양적인 모델과 서양적인 모델 모두를 통해 이해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모든 위대한 과학자들처럼, 테슬라는 외면 세계의 신비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고대의 요기들처럼 테슬라는 모든 사물에 뻗어있는 에테르장을 설명하면서 아카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테슬라는 인도 고대의 가르침을 서양에 가져온 스와미 비베카난다와 함께 연구했다.
베다의 가르침에서 아카샤는 공간 그 자체이다. 다른 요소들이 채워져 있는 공간, 진동과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아카샤는 프라나의 양에 대응하는 음이다. 아카샤 또는 원초적인 실재를 개념화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대적인 개념은 프랙탈이다. 컴퓨터의 발전이 자연 속의 패턴을 수학적으로 재생하고 시각화할 수 있게
해준 것은 1980년에 이르러서였다.
프랙탈이라는 용어는 1980년에 수학자 만델브로트가 만들었다.
그는 어떤 단순한 수학적 방정식을 연구했는데, 그것은 반복될 때 한정된 틀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학적이거나
기하학적인 형태의 배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한정되어 있지만 동시에 무한하다.프랙탈은 부분으로 쪼개질 수 있는
세련되지 않은 기하학적 형태이며 각각은 대략 전체 패턴의 사이즈가 줄어든 모양으로서 자기 유사성이라고 불린다.
만델브로트의 프랙탈은 신의 지문이라고 불려왔다. 당신은 지금 자연 그자체가 만들어낸 예술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델브로트의 형태를 특정한 방법으로 돌리면 그것은 힌두 신 또는 붓다처럼 보인다. 이 형태는 ‘붓다브로트’ 형태라고 불렸다.
고대의 예술품이나 건축물의 형태를 보면 인간들이 오랫동안 아름다움이나 신성함을 프랙탈 패턴에 연결시키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한히 복잡하지만 각각의 부분은 전체를 재생하는 씨앗을 품고 있다.
프랙탈은 수학자들의 우주관과 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켰다.
각각의 새로운 확대의 차원에는 원래의 것과 차이가 있다.
우리가 프랙탈의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로질러가는 동안 지속적으로 변화와 변형이 일어난다.
이 변형이 우주적인 나선이다. 시공간 모체가 새겨진 지성이다.
프랙탈은 본질적으로 소음과 배열로 가득 찬 카오스이다.
우리 마음이 어떤 패턴을 인식하거나 정의할 때, 우리는 그것이 마치 사물인 양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패턴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려고 하지만 그 패턴을 우리 마음속에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프랙탈의 다른 부분을 밀어내야 한다. 프랙탈을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중립적이고, 시간이 없고, 차원이 없다.
패턴을 인식하는 우리의 창의성과 능력은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 파동의 시간 없는 세상과 물질의 고체 세상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다.
주시는 생각의 본래 특질인 제한을 통한 창조의 행위이다.
우리는 이름을 붙이고 라벨을 붙임으로써 사물이 고체라는 환상을 창조하고 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나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름과 라벨을 붙임으로써 당신은 모든 다른 것,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모든 것을 부정한다.
당신은 이름을 붙이고 핀을 꽂음으로써 분자를 하나의 사물 안에 가둬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그것이 존재하도록 정의하고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성은 우리의 가장 높은 본질이다. 사물의 창조와 함께 시간이 나타난다. 그것이 곧 고체의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빈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것은 속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공간에 본래 갖추어진 것은 거의 양을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에너지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한 때 이렇게 말했다.
“단 1제곱 미터의 공간 안에 세상의 모든 바다를 끓일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명상을 오래한 사람들은 고요함 속에 가장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붓다는 그 원초적인 실재를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칼라파스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분자와 같은 것, 또는 일 초에 수조번이나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는 파동과 같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재는 빨리 움직이면서 연속성의 환상을 만들어내는홀로그래픽 필름 카메라에 있는 일련의 화면과 같은 것이다.
의식이 완전히 고요해질 때, 환상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환상을 조종하는 것이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고대 전통에서는 수천 년 동안이나 모든 것이 진동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다 브라마 - 우주는 소리다.
나다라는 말은 소리 또는 진동을 의미하고 브라마는 신의 이름이다.
브라마는 동시에 우주이며 창조주이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분리될 수 없다.
고대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 중의 하나인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마를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창조주라고 말한다.
그가 눈을 뜨면 세상이 존재한다. 브라마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사라진다.
고대의 요기나 신비가들은 의식의 뿌리 영역에 어떤 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곧 아카식 장 또는 아카식 레코드이다.
그곳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와 경험이 항상 존재한다.이 장 또는 모체로부터 모든 존재가 일어난다.
아원자 입자에서 은하수, 별, 행성, 그리고 모든 생명이 일어난다.
당신은 그 어떤 것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한다.왜냐하면 그것은 진동의 층이 겹겹이 이루어져 있고 계속 변화하고
아카샤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태양 안에서, 공기와 비와 흙을 마시고 있다.
에너지의 세계는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이 사물의 안과 밖을 움직인다.
생각하는 마음이 고요해질 때, 당신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모든 측면을 함께 보게 된다.
나무와 하늘과 땅, 비와 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과 죽음, 자아와 타아는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산과 골짜기기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다른 토착 전통에서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의 진동하는 근원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통해 움직이는 하나의 의식, 하나의 장, 하나의 힘이 있다.
장은 당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고, 당신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신은 우주 안의 당신이다. 당신은 창조 그 자체를 바라보는 그 눈이다.
꿈에서 깨어날 때, 당신은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것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그것을 창조하고 있었다. 소위 진정한 삶 또한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당신이다.
하나의 의식이 모든 사람의 눈으로, 구석구석 모든 것을, 각각의 분자 안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유럽 분자물리학 실험실 CERN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은 모든 것을 통해 확장하는 이 장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그들은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바라본다.
스위스 제네바의 CERN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들은 힉스 입자, 또는 신의 분자를 발견했다고 공표했다.
힉스 입자 실험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이 진공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CERN의 커다란 하드론 가속기는 원둘레가 17마일이나 되는 고리로 되어 있다.
그 안에서 분자의 두 빔이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거의 빛의 속도로 서로 충돌하면서 질주한다.
과학자들은 격렬한 충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찰한다.
표준 모델은 분자들이 어떻게 질량을 얻는지 계산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진동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스스로 진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댄서가 있는 것 같다.
우주의 발레단에서 숨겨진 그림자 댄스와 같다. 다른 모든 댄서들은 항상 이 숨겨진 댄서 주위를 춤춰왔다.
우리는 그 춤의 안무를 지켜보았지만 지금까지 그 댄서를 볼 수 없었다.
소위 “신의 분자“ 우주의 근본 물질의 속성 우주의 팽창을 조종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질량과 에너지의
원인이 되는 모든 물질의 심장, 하지만 우주의 본성을 설명하기 보다,힉스 입자의 발견은 그 위대한 신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로운 우주를 드러내고 있다.
과학은 의식과 물질 사이의 시발점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시초의 장을 보고 있는 눈과 장이 우리를 보고 있는 그 눈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독일 작가 볼프강 폰 괴테는 말했다.
“파동은 세상을 일어나게 한 원초적인 현상이다.”
사이매틱스는 눈에 보이는 소리를 연구하는 것이다.
사이매틱이라는 단어는 파동또는 진동을 의미하는 희랍어 사이마에서 왔다.
파동 현상을 진지하게 연구한 최초의 서양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에른스트 크랄드니이다.
그는 18세기의 독일 음악가이면서 물리학자였다.
크랄드니는 철판에 모래를 뿌리고, 철판을 바이올린 현으로 진동을 주었을 때, 모래가 스스로 어떤 모양으로
정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어진 진동에 따라서 서로 다른 기하학적인 형태가 나타났다.
크랄드니는 이런 모양을 모두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크랄드니 무늬라고 한다.
자연 세계에서도 이런 무늬가 많이 발견된다.거북이의 무늬나 표범의 점 무늬 같은 것 등이다.
크랄드니 무늬나 사이매틱 무늬를 연구하는 것은고급 기타, 바이올린 등의 악가 제작자들이 악기의 음질을 결정하는
비밀스런 방법이다.
한스 제니는 크랄드니의 연구 성과를 더 발전시켜 1960년대에 다양한 액체와 전자 증폭기를 사용함으로써
소리 진동을 만들어내고 '사이매틱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접시 물에 단순한 사인 파동을 만들면 물 안에 무늬를 볼 수 있다.
파동의 진동수에 따라서 서로 다른 물결 모양이 일어날 것이다. 진동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형태는 더 복잡해진다.
이런 무늬들은 반복적이며 임의적이지 않다.
더 관찰하면 진동이 물질을 단순한 반복적인 파동에서 복잡한 형태로 정렬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물의 진동은 해바라기와 유사한 무늬를 보인다.
(해바라기 씨앗의 배열은 피보나치 수열이다. - 게시자 주)
단지 소리의 진동수를 바꾸는 것만으로 우리는 다른 무늬를 얻는다.
물은 매우 신비스런 물질이다. 고도로 감수성이 예민하다. 물은 진동을 받아들이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공명력과 예민함, 그리고 공명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은 모든 종류의 음파에 즉시 반응한다.
진동하는 물과 땅이 식물과 동물에 있어서 질량의 대부분을 만들어 낸다.
어떻게 단순한 물의 진동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무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고체를 추가하고 진폭을 증가시키면 훨씬 더 흥미로워진다.
옥수수 녹말을 물에 넣으면 더 복잡한 현상을 얻게 된다.
어쩌면 삶 그 자체의 원리는 진동이 옥수수 녹말 방울을 움직이는 유기체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생기를 불어 넣는 원리는 주요 종교에서는 그 당시의 시간을 반영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설명된다.
콜롬버스 아메리카 이전에 최대의 왕국이었던 잉카의 언어에서 ‘인간의 몸’을 뜻하는 단어는 ‘알파 카마스카’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생기가 부여된 흙’을 의미한다.
유태 신비주의 카발라에서는 신의 신성한 이름에 대해 말한다.
말해질 수 없는 그 이름. 그것은 어디에나 있는 진동이기 때문에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단어이며 모든 물질이다. 모든 것은 신성한 단어이다.
4면체는 3차원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모양이다. 물리적인 실재를 갖으려면 최소한 네 개의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삼각형 구조는 자연이 스스로 안정을 취하는 유일한 형태이다.
구약 성서에서 야훼의 4자음문자는 어떤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곤 했다.
그것은 신이라는 단어, 또는 특정한 신의 이름, 로고스, 또는 원초적 단어를 말할 때 사용되었다.
고대문명은 우주의 뿌리 구조는 4면체였음을 알았다.
이 모양에서부터 자연은 평형상태, 시바를 향해 근본적인 추진력을 나타낸다.
그러는 동안 또한 변화, 샤크티를 향해 근본적인 추진력을 나타낸다.
성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로고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BC 500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어떤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
모든 반복, 형태, 모양의 근원이라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을 따랐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우주에 편재한 신성의 생기를 주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수피즘에서 로고스는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 안에 있다.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현현되지 않은 것이 현현하게 되는 그것이다.
힌두 전통에서 시바 나타라자는 ‘춤의 신’을 의미한다. 우주 전체가 시바의 북에 맞춰 춤을 춘다.
모든 것은 파동으로 혼이 불어 넣어졌고 파동이 스며들어 있다.
시바가 춤을 추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진화하고 변화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무로 없어진다.
시바가 우리의 주시하는 의식을 나타내는 반면, 샤크티는 세상의 물질이며 요소이다.
시바가 명상 속에 있는 반면,샤크티는 그를 움직여 춤 속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음과 양처럼, 댄서와 춤은 하나이다.
로고스는 또한 숨겨지지 않은 진리를 뜻한다. 로고스를 아는 자는 진리를 안다.
아카샤가 자신으로부터 근원을 감추면서 복잡한 구조로 소용돌이침에 따라 인간 세상에는 많은 층의 은폐가 존재한다.
신성한 숨바꼭질 놀이처럼 우리는 수천 년 동안 감추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놀이를 완전히 잊게 되었다.
우리는 어찌하다 보니 찾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불교에서는 명상을 통해서 직접 로고스를, 자신 안에 있는 변화와 덧없음의 장을 인식하라고 가르친다.
당신 내면 세계를 관찰할 때, 마음이 더 집중됨에 따라서 더 미묘한 감각과 에너지를 관찰한다.
감각의 뿌리 차원에서 '아니카' 또는 덧없음을 직접 깨달음으로써 일시적인 외부의 형태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된다.
일단 모든 종교의 공통된 뿌리인 파동의 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내 종교’라고 말하고
또는 ‘이것이 나의 원초적인 옴이다,’ ‘내 퀀텀 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세계에서 진정한 위기는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위기는 의식의 위기, 곧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사물 안에 있는이 본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보살은 깨달은 불성을 가진 사람이다. 보살은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깨달을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맹세한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를 깨우쳐야 한다.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감각을 가진 존재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깨어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로 맹세한다.
나의 불완전함은 끝이 없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로 맹세한다. 법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법을 알기로 맹세한다. 깨달음의 길은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얻기로 맹세한다.“
** 자막 전문 **
피타고라스학파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하나로 통합하는 황금 열쇠가 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다시 탐구하려는 것이 이 황금 열쇠이다. 황금 열쇠는 로고스의 지성이며, 태고의 "옴"의 근원이다.
그것을 신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제한된 감각으로 자기유사성의 숨겨진 기재가 발현되는 외면의 것만을
관찰하고 있다. 이 신성 대칭의 근원은 우리 존재의 가장 큰 신비이다.
피타고라스, 케플러, 레오나르도 다 빈치, 테슬러, 아인슈타인 같은 역사의 기념비적인 사상가들은 이 신비의 시발점에
도달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근원이다. 이런 감정이 이질적으로 보이고 더 이상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수 없는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눈은 닫혀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된 책으로 가득 찬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가는 어린 아이와 같다.
아이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그 책들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썼는지는 모른다.
그 안에 쓰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진열된 책 속에서 어떤 신비로운 체계가 있음을 희미하게 가늠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정도가 세상에서 가장 지적인 인간이 신을 향해 취하고 있는 태도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주가 놀랍도록 정렬되어 있고 어떤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제한된 마음은 별자리를 움직이게 하는
신비한 힘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주를 깊이 들여다본 모든 과학자들, 그리고 자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 모든 신비가들이
궁극적으로 똑 같은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태고의 나선형.
[2부 나선형]
스톤헨지에 있는 고대의 천문대가 만들어지기 천여 년 전에, 나선형은 지구에 있는 지배적인 상징이었다.
고대의 나선형은 지구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것과 같은 수천 개의 고대의 나선형이 유럽, 북아메리카, 뉴멕시코, 유타, 호주,
중국, 러시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사실상 이 지구의 토착 문화인 것이다.
고대의 나선형은 태양과 하늘 안에 내재된 우주적 에너지와 성장, 팽창을 상징한다. 나선형은 우주 자체가 펼쳐지는
대우주를 반영하고 있다. 원주민들의 전통에서 나선형은 태초의 어머니,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아일랜드의 뉴그레인지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나선형은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보다도 500년 앞선 것이며, 현대의 연구가들에게 불가사의한 것일 뿐이다.
나선형은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땅에 더 연결되었던 시기, 자연의 사이클과 나선형에 더 연결되었던 시기,
사람들이 생각에 덜 동일시하였던 시기로 올라간다. 나선형은 우리가 우주의 회전력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프라나, 또는 창조의 힘은 아카샤를 고체의 연속체로 몰아붙인다. 그것은 대우주와 소우주 사이의 모든 차원에서 나타난다.
나선형의 은하수로부터 기후 예측 시스템, 당신의 욕조에 있는 물, 당신의 DNA, 당신 자신의 에너지를 직접 경험하는 것
등으로 말이다.
태고의 나선형은 생각이 아니라 모든 조건과 생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선형의 다양한 형태는 자연 세계에서 어디서나 발견된다.
달팽이, 바다 산호, 거미줄, 화석, 해마 꼬리, 그리고 조개 등에서. 자연에서 나타나는 많은 나선형은 로그나사선
또는 생성의 나선형으로 관찰될 수 있다.
중심에서 밖으로 움직이면서 나선형의 원뿔곡선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인드라의 보석망처럼 로그나사선은 자기유사성이 있거나 홀로그래픽과 같아서 각 부분의 특성이 전체에 반영된다.
2400년 전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연속적인 기하학적 비율이 가장 심오한 우주적인 끈이라고 여겼다.
황금률, 또는 신성의 비율이 자연의 가장 커다란 신비이다. 황금률에서 A+B의 A에 대한 비율은 A의 B에 대한 비율과 같다고
표현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세상의 영혼은 서로 묶여있는 하나의 조화로운 공명이다.
불가사리 또는 오크라 조각에 존재하는 똑같은 오각형의 무늬를 8년 주기로 도는 금성의 궤도에서 볼 수 있다.
상위에 있는 지적인 세계와 하위의 가시적인 물질세계가 자기유사성의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로마네스코 브로콜리의 자기유사성 나선형 패턴으로부터 은하계의 테두리까지 로그나사선은 도처에 있으며 전형적인 패턴
이다. 우리의 은하계는 몇 개의 나선형 테두리가 있는데 그것은 약 12도 정도 경사진 로그나사선이다.
나선형의 경사가 더 크면 클수록 회전은 더 확고해진다.
식물을 슬로우 비디오로 관찰하면 그것이 생명의 나선형으로 춤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황금 나선형은 황금률로 밖으로 자라나는 로그나사선이다. 황금률은 자연에서 계속 나타나는 특별한 수학적 관계이다.
관찰 가능한 패턴은 피보나치 시리즈, 또는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피보나치 시리즈는 각각의 숫자가 이전의 두 숫자의
합을 나타낸다. 독일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케플러는 자기유사성 나선형 패턴이 식물 줄기에 이파리가 정렬된 식으로,
또는 꽃의 꽃잎이 정렬된 식으로 관찰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파리의 간격이 자주 나선형 패턴을 나타낸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런 패턴들은 ‘잎차례’ 패턴, 또는 이파리 정렬 패턴이라고 불린다.
잎차례 패턴은 DNA 뉴클레오티드에서 볼 수 있으며, 토끼 번식의 계도에서 솔방울, 선인장, 눈송이,그리고 규조류와 같은
단순한 유기체까지 모든 것 안에서 볼 수 있다. 규조류는 먹이사슬 전체에 걸쳐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종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단세포 유기체인 식물 프랑크톤의 가장 일반적인 타입이다.
해바라기나 벌이 되기 위해 수학을 얼마나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자연은 브로콜리를 기르기 위해 물리학자와 상의하지 않는다.
자연 안에서의 구조화는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나노 기술 분야의 과학자들은 DNA 형성의 초기 6각형 단계에서처럼 복합체들이 형성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
‘자가 조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나노기술 엔지니어링에서 카본 나노튜브는 물질의 유사한 정렬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은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이런 타입의 기하학적 도형 배열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자동적으로, 계산기도 없이 말이다. 자연은 정확하고 아주 효율적이다.
저명한 건축가이자 작가인 부크민스터 퓰러에 따르면 이런 패턴들은 시의 기능이라고 한다.
DNA와 벌집모양은 거품이 둥그런 것과 같은 이유로 된 모습이다. 공최소한의 에너지가 요구되는 가장 효율적인 모양이다.
공간 자체는 모양을 갖고 있고 물질에게 단지 어떤 배치만을 허용한다. 가장 효과적인 것을 당연시하면서 말이다.
이런 패턴들은 축지선 같은 건축학적 구조를 만드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이다.
로그나사선 패턴은 식물이 꽃가루 수분을 위해 곤충들에게 최대한 노출되고 햇빛과 비에 최대한 노출되게 하며
그것이 뿌리를 향해 효율적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한다.
육식조는 먹이를 추적하기 위해서 대수의 나선형 패턴을 이용한다. 나선형으로 나는 것은 사냥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카샤가 물질적인 형태로 춤추며 들어가는 생명의 나선형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대칭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된다.
시인 윌리암 브레이크는 말했다, “생장력 있는 우주는 영원이 있는 지구의 중심에서부터 꽃을 피운다.
우주는 별로부터 평범한 조개껍질까지 팽창하며, 거기에서 다시 안과 밖에서 영원을 만난다.“
자연 속에 있는 패턴에 대한 연구는 서양에서는 그리 친숙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고대의 중국에서는 이것을 다루는‘리’라는 학문이 있었다. [리]는 자연 속의 역동적인 순리와 패턴을 고찰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자이크처럼 어떤 정적이거나 굳어 있거나 변하지 않는 패턴의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역동적인 패턴이다.
이파리의 맥, 거북이의 무늬, 그리고 바위의 맥이 모두 자연의 비밀 언어이며 예술이다.
미궁은 많은 리 패턴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산호 구조, 버섯, 배추, 그리고 인간의 뇌에서 발견된다.
세포의 패턴은 자연에 있는 또 다른 공통된 패턴이다. 세포는 수도 없이 많은 다른 구조가 있지만
모두가 그들의 목적과 기능에 의해 정의된 유사한 질서가 있다. 형태의 지속적인 놀이에 매혹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어떤 원형적인 형태들이 자연의 직물 구조로 짜여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가지의 패턴은 또 다른 [리] 혹은 원형의 패턴이다.
그것은 모든 프랙탈에서, 모든 차원에서 관찰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밀레니엄 런이라고 알려진 슈퍼컴퓨터 시뮬레이션의 놀라운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우주 안에서 암흑 물질이 배분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독일에 있는 막스 프랑크 협회에서 만들어졌다.
암흑 물질은 우리가 빈 공간이라고 이전에 생각했던 그것이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흐르는 보이지 않는 신경계와 같은 것이다. 우주는 글자 그대로 거대한 뇌와 같다.
그것은 과학이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숨은 에너지의 타입을 이용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이 무한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에너지가 우주의 팽창과 성장을 위한 동력을 제공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자연은 우리가 적절한 조건을 만들어주면 자동적으로 가지 패턴을 창조한다.
자연은 예술을 창조하는 기계이거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엔진이다.
여기에 전기가 실버 크리스탈 가지를 성장시키는 데에 사용된다. 이 장면은 그들이 몇 시간 동안 자라는 것을 저속촬영한
것이다. 이온이 은질산염용액으로부터 전착되면서 크리스탈이 알루미늄 극에 형성된다. 이 형성과정은 자율적이다.
당신은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예술품을 보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말했다.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영원히 감춰질 수도 있는 비밀스런 자연의 법칙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의 모든 것은 살아 있고 자율적이다.
전압이 더 높아지면 프랙탈 가지는 더 명확해진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몸에서 나무 같은 구조와 패턴이 도처에 발견된다. 물론 거기에는 서양 의학이 알고 있는 신경계가 있다.
하지만 중국과 아유르베다, 티벳 의학의 에너지 혈은 몸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나디스, 또는 에너지 혈은 나무 같은 구조를 형성한다. 사체해부는 차크라나 나디스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보는 눈을 잘 닦을 필요가 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런 것들을 당신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전기 이론에서는 전선에 저항이 적을수록 에너지는 더 쉽게 전달된다.
명상을 통해 평정심을 개발하면 당신의 몸에 저항이 없는 상태가 만들어진다.
프라나, 기, 내면의 에너지는 당신 내면의 활기이다. 의식을 육체 안에 가져올 때 느끼는 그것이다.
프라나, 나디스를 나르는 당신 몸 안의 미묘한 선은 차크라를 통해서 훨씬 더 많은 프라나 에너지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선은 그것을 사용함에 따라, 에너지를 흐르도록 허용함에 따라 더 강해진다.
의식이 가는 곳은 어디에나 기,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할 것이고 신체의 연결이 꽃피우기 시작할 것이다.
뇌와 신경계 안에서 신체적인 선의 패턴은 그것이 반복됨에 따라 설정된다.
당신의 주의를 내면에 계속 머물게 하고, 경험하고 있는 감각에 대한 저항을 줄임으로써 당신은 에너지 역량을 증가시킨다.
도교에서 음양의 상징은 자연의 나선형 힘이 서로 침투하는 것을 상징한다. 음양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하나라는 고대의 개념은 음양, 또는 나선형 회전을 나타낸다.
그것은 배꼽 아래 안쪽에 있는 힘의 센터이다. 하라는 글자 그대로 에너지의 바다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하단전이라고 부른다.
아시아에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무술에서는 하라가 강한 전사는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한다.
사무라이 전통에서 자살 전통, 또는 세푸쿠의 한 가지 형태가 하라키리였다. 그것은 자주 헤어리 케어리라고 잘못 발음되었다. 그것은 하라를 찌름으로써 자신의 기, 또는 에너지 통로를 자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센터에서부터 움직이는 것은 우아한 동작을 만들어내 무술에서 뿐만 아니라 훌륭한 골퍼들, 벨리 댄서들,그리고
수피 수도승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점에 집중하는 수련된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라의 본질이다.
허리케인의 눈 속에 있는 고요함인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 근원에 연결된 장의 본능이다.
좋은 하라를 갖고 있는 사람은 지구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존재들을 연결하는 직관적인 지혜에 연결되어 있다.
배로 생각하는 것, “하라 데 캉가에나사이”는 내면의 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대 호주 원주민들은 거대한 무지개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배꼽 바로 밑의 똑같은 부위에 집중했다.
또 다시 인류의 진화 에너지의 표출이다. 새로운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 하라 안쪽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의 신경계는 때때로 장뇌라고 불리는데, 머리 안의 뇌와 유사하게 자신의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에 연결되는
복잡한 모체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지성으로 자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장뇌가 머리 뇌의 프랙탈 버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머리 뇌가 장뇌의 프랙탈 버전일 수도 있다.
건강한 곰은 강한 하라를 갖고 있다. 곰이 풀을 찾아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을 때, 곰은 하라 또는 배에 집중된 감각을
통해 기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이것이 곰이 꿈의 장소, 생명의 나선형에 연결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이 거기에서 나오는 자연의 전통의 장소이다. 그런데 현대 과학이 이제 막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고대인들은 그 나선형을 알았을까?
벌들에게 물어보라.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들은 아름다움과 다양성이 번성하게 도와주는 공생계의 일부로서 근원과 특별한 연결이 있다.
그들은 대우주와 소우주 사이의 다리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하나의 심장이 있다. 말하자면 벌집이다.
열린 뇌처럼, 벌집은 자신의 꿈을 세상에 표현되도록 내보낸다.
자연에서는 많은 피조물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어떻게 하나의 영혼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안다.
하지만 모두가 주변의 다른 종에 이득을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메뚜기는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울 것이다.
메뚜기는 메뚜기처럼 행동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메뚜기는 벌이 하는 식으로 꿀을 만들거나 수분을 하지 않을 것
이다. 메뚜기의 행위는 변치 않지만 인간은 벌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메뚜기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우리는 자유롭게 변화하며 세상과 교류하는 패턴을 조작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공생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기생충처럼 존재할 수도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나선형을 이성적인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우리를 생명의 나선형에 연결시킨 것은
결코 생각이 아니었다. 우리는 항상 연결되어 있었다.
생각은 우리를 분리라는 환상 속에 있게, 우리 자신만의 정체성 안에 있게 만들었다.
생각이 분리를 창조한다. 생각이 한계를 경험하게 한다. 생각에 더 연결되면 될수록,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더 멀어져 간다.
생각을 덜 지향했던 고대의 문화는 오늘날의 우리들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을 나선형에 정렬시켰다.
고대 인도에서 쿤달리니는 척추로서 뱀처럼, 또는 나선형처럼 움직이는 내면의 에너지를 나타냈다.
인도의 고대 요가 전통에서는 사람들의 내면세계가 하라 중심적인 문화에 비견되었다.나선형의 힘을 주시하는 의식의
고요함에 균형을 맞추는 것은 당신의 완전한 진화의 잠재력에 맞추는 것이다.
당신은 독특하다면 존재로 꽃피우도록 설계되었다.
이다 (Ida), 여성적 또는 달의 통로는 우뇌와 연결되어 있고, 핑갈라 (Pingala), 남성적 또는 태양의 통로는
좌뇌에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개의 통로가 균형을 이룰 때, 에너지는 척추의 중심을 따라 차크라에 활력을 주고
잠겨 있던 진화의 잠재력을 풀어내면서 제3의 통로, 수슘나로 흘러올라 간다.
‘차크라’라는 말은 에너지 바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이다. 쿤달리니는 당신 인간의 생명을 존재로 춤추며 들어가는
태고의 나선형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른 에너지의 정렬이다.
거친 물질로부터 가장 미세한 에너지로 연결되는 다리와 같다. 당신은 그 다리이다.
쿤달리는 의지나 노력이나 마찰로 인해 강제될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꽃을 키우는 것에 비유된다.
우리가 좋은 정원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흙과 적절한 조건을 준비하고 자연이 이치를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꽃에게 일찍 꽃을 피우라고 강요한다면, 꽃은 망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지성으로 성장하고, 자신의 자율적인 방향으로 성장한다.
외부 세계에 고정된 이기적인 마음은 당신이 진정한 내면의 진동하는 자연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의식이 내면으로 돌아설 때, 그것은 태양광선처럼 되어 내면의 연꽃이 자라기 시작한다.
쿤달리니가 자신의 자아 안에서 깨어나면서 사람은 모든 것 안에 있는 나선형의 중요성을 보기 시작한다.
내면과 외면에 있는 모든 패턴 안에서. 이 나선형이 우리의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 3부 - 뱀과 연꽃 (The Serpent and the Lotus) ]
서양문명과 문자가 시작되기 이전에 과학과 영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위대한 고대 전통의 가르침에서는 지식과 확실성을 얻고자 하는 바깥세상에 대한 탐구는 덧없음에 대한 내면의 느낌과
변화의 나선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균형을 이루었다. 과학적인 사고가 더 지배적이 되고 정보가 배가되면서
우리 지식체계에 분열이 시작되었다. 전문성이 증가되었다는 것은 곧 커다란 그림을 보고 시스템의 아름다움을 전체로
느끼고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더 적어졌음을 의미한다.
아무도 이렇게 묻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생각이 우리에게 좋은 것인가?”
고대의 지식이 여기 우리 한 가운데, 명백히 보이는 곳에 숨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잊혀진 지혜가 내면과 외면, 음과 양, 그리고 중심핵의 고요와 변화의 나선 사이에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길이다.
[3부 뱀과 연꽃]
그리스 전설에서 아스클레오피스는 아폴로의 아들이었고 치유의 신이었다.
그의 지혜와 치유에 대한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그는 생명과 죽음 그 자체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스클레오피스 힐링사원들은 태고의 나선의 힘을 알아냈고, 그것은 아스클레오피스 지팡이로 상징되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선서가 아직도 의사들의 도덕적 규범인데, 아스클레오피스 사원에서 훈련받았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이 진화 에너지의 상징은 미국의학협회와 전세계 다른 나라의 의학협회의 로고로 남아 있다.
이집트 도상학에서 뱀과 새 문양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 또는 양극성을 나타낸다.
아래로 향하는 뱀은 드러난 나선형으로서 세상의 진화에너지이다.
위로 향하는 새는 태양, 각성된 일점의식, 곧 아카샤의 허공을 지향하는 흐름이다.
파라오들과 신들은 각성된 에너지로 묘사되고, 쿤달리니 뱀은 척추 위로 올라가 눈 사이에 있는 아즈나 차크라를 꿰뚫는다.
이것이 호루스의 눈으로 불린다. 힌두 전통에서 빈디 역시 제3의 눈, 영혼과의 신성한 연결을 나타낸다.
투탄카멘 왕의 가면은 뱀과 새 문양 둘 다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마야와 아즈텍 전통은 뱀과 새 문양을 하나의 신으로 연결시킨다.
케찰코아틀 또는 쿠쿨칸, 깃털이 있는 뱀 신은 각성된 진화의식 또는 각성된 쿤달리니를 나타낸다.
자신 안에서 케찰코아틀을 깨달은 사람은 신의 살아 있는 현현이다.
케찰코아틀 또는 뱀 에너지는 시간이 끝날 때 되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뱀과 새의 상징은 그리스도교에서도 발견된다.
그 진정한 의미는 더 깊이 암호화되었을 수도 있지만 의미는 다른 고대의 전통과 같다.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자주 보이는 새나 비둘기는 성령, 또는 쿤달리니 샤크티가 6차크라와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다. 크리스도교 신비학은 쿤달리니를 다른 말로 부른다. "성령"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 또한 반드시 들어 올려야 한다.”
예수와 모세는 쿤달리니 에너지를 각성했다. 인간의 욕망을 충동하는 무의식적인 파충류의 힘에 각성된 의식을 가져갔다.
예수는 사막에서 40일 낮밤을 지냈다고 한다. 그 동안 그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다.
이와 비슷하게 붓다는 지혜의 나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앉아 있었을 때 마라로부터 유혹을 받았다.
그리스도와 붓다 모두가 감각적인 쾌락과 세속적인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돌아섰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악마는 자신의 집착이 인격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베다와 이집트 전통의 관점에서 읽으면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는 뱀이 쿤달리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사과는 우리를 내면세계의 지식, 즉 내면의 지식 나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외적인 감각 세계의 유혹을 나타낸다.
나무는 단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나디스 또는 에너지 혈의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온 몸에 나무와 같은 구조를 형성한다. 외적인 만족에 대한 이기적인 탐구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면 세계의 지식, 아카샤와와 지혜의 근원으로부터 연결을 끊어냈다.
용에 대한 많은 역사적 신화는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내적 에너지의 은유로서 읽혀질 수 있다.
중국에서 용은 아직도 행복을 나타내는 신성한 상징이다.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자신의 진화에너지를 각성한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날개달린 뱀, 또는 용으로 표현되었다.
옥황상제, 또는 천상의 황제의 토템은 송과샘 또는 도교에서 상단전이라고 부르는 곳을 각성하면서 이다와 핑갈라, 도교의
음양과 비슷한 균형을 보여준다.
자연은 서로 다른 빛을 감지하고 동화하는 장치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성게는 커다란 눈의 역할을 하는 뾰족한 몸체로
사물을 볼 수 있다. 성게는 빛이 자신의 척추에 닿는 것을 감지하고 그 빛의 강도를 비교하여 주변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
녹색 이구아나와 다른 파충류들은 머리 꼭대기 송과샘에 눈이 있는데, 그것은 위에 있는 적을 감지하는 데에 이용된다.
인간의 송과샘은 각성과 수면 패턴을 조절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작은 내분비선이다. 송과샘은 비록 머리 안쪽 깊숙이
감춰져 있어도 빛에 민감하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송과샘이나 제3의 눈이 의식과 물질의 접촉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육체 안에서 대칭을 이룬다.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그리고 뇌조차도 두 면이 있다.
하지만 뇌에는 짝이 없는 부위가 한 곳 있다. 이것이 송과샘과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에너지 센터이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DMT 같은 독특한 분자들이 송과샘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DMT 또한 탄생의 순간과 죽음의 순간에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DMT는 깊은 명상과 삼매, 또는 약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아야와스카는 남아메리카의 샤만 전통에서 내면과 외면 세계의 장막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된다.
송과샘pineal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솔방울 pine-cone과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송과샘이 나선의 잎차례와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명의 꽃 패턴으로 알려진 이 패턴은 깨달은 존재를 묘사하는 고대의 예술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솔방울 이미지가 성스런 예술품에 나타날 때, 그것은 각성된 제3의 눈, 진화에너지의 흐름을 지휘하는 일점의식을 나타낸다.
솔방울은 수슘나가 아즈나 차크라와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서 활성화되는 높은 차크라가 개화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수스를 경배하는 자들은 머리모양이 솔방울처럼 된, 나선형의 덩굴로 둘러싸인거대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디오니수스 에너지 또는 쿤달리니 샤크티가 척추를 따라 올라 6차크라에 있는 송과샘으로 올라가는
것을 나타낸다. 바티칸의 중심부에는 예수나 마리아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실제로는 거대한 솔방울 조각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차크라와 쿤달리니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것은 대중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교회에서는 솔방울이 재생의 상징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13세기의 철학자이자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했다.
“내가 신을 보는 눈과 신이 나를 보는 눈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 예수는 말했다.
“육체의 빛은 눈이다. 만일 그대의 눈이 하나라면, 그대의 몸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육체는 눈이다.”
삼매의 경지에서 사람은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다.우리는 자신을 자각하는 우주이다.
쿤달리니가 활성화되면 6차크라와 송과샘이 자극되어 이 부위가 진화의 기능 중 일부를 얻기 시작한다.
어둠 명상은 송과샘 부위의 6 차크라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다.
이 센터가 활성화되면 내면의 빛을 보게 된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은둔하는 요기나 샤만, 도를 닦는 도인이나
마야 전수자,또는 티벳승들은 모두가 일정 기간 동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을 한다.
송과샘은 미묘한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관문이다.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깊은 심연을 오랫동안 응시하면, 결국에는 그 심연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인돌, 또는 고대의 돌무덤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속한다.
대부분은 BC 3천 년에서 4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서유럽에 있는 일부는 7천 년이나 되었다.
고인돌은 인간이 내면과 외면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은 방법으로 영원한 명상으로 들어가는 데에 사용되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명상하면 결국에는 제3의 눈이 활성화되면서 내면의 에너지, 또는 빛을 보기 시작한다.
태양과 달의 경로에 지배를 받는 24시간 주기의 리듬은 더 이상 육체의 기능을 통제하지 않으며 새로운 리듬이 만들어진다.
7 차크라는 수천 년 동안 "옴"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요소들을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 상징이다.
쿤달리니가 6 차크라를 넘어서 상승하면 에너지 후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후광은 전 세계에 걸쳐 서로 다른 전통의 종교적인 그림에서 시종일관 나타난다.
깨달은 존재 주변에 묘사되는 후광, 또는 에너지 상은 세계 도처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차크라 각성의 진화 과정은 어느 한 그룹이나 어느 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 존재의 타고난 권리이다. 크라운 차크라는 신성과 연결되는 곳이다.
그것은 이중성을 초월하고 이름과 형태를 초월한다.
아케나톤은 네페르티티를 아내로 둔 파라오였다. 그는 태양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쿤달리니와 의식을 통합하면서 "아텐”또는 신의 언어를 자신 안에서 재발견했다.
이집트 도상학에서 각성된 의식은 깨달은 존재들이나 신들의 머리 위에서 보이는 태양 원판으로 나타난다.
힌두교와 요가의 전통에서는 이 후광을 "사하스라라", 천 장의 연꽃잎이라고 부른다.
붓다는 연꽃의 상징에 연결되어 있다. 잎차례 패턴은 개화하는 연꽃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그것은 생명의 꽃 패턴이다. 생명의 씨앗, 그것은 모든 것이 형태를 이루는 근본적인 패턴이다.
그것은 공간 그 자체의 형태, 또는 아카샤에 내재된 특성이다.
역사의 한 시대에, 생명의 꽃 상징은 지구 전역에 널리 유행했다.생명의 꽃은 중국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가장 성스런 곳에서 사자에 의해 보호받는 형태로 발견된다.
역경의 64괘는 생명의 꽃을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인 음양의 상징을 둘러싼다.
생명의 꽃 안에는 모든 순정신적인 입체,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위한 기하학적 기초가 있다.
고대의 생명의 꽃은 다윗별의 기하학적 형태, 위 아래로 마주 보는 삼각형으로 시작한다.
3D에서는 이것이 4면체 구조이다. 이 상징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프로그램, 즉 얀트라이다.
그것은 우리의 프랙탈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계이다. 얀트라는 수천 년 동안 의식을 각성시키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얀트라의 시각적 형태는 영적인 발현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밖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서로 엇갈리는 기하학적 형태와 간섭 패턴으로 구성되어 가시적으로 만들어진, 우주의 숨겨진 음악이다.
각각의 차크라는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경험될 수 있는 연꽃, 얀트라, 정신생리학적 센터이다.
티벳 전통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얀트라는 많은 의미의 층으로 싸여있으며 때로는 완전한 우주론과
세계관을 구체화한다. 얀트라는 순환의 반복, 반복의 힘을 통해서 작용하는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패턴이다.
얀트라의 힘은 오늘날 거의 상실되었다. 우리가 의미를 외적인 형태에서만 찾고 의도적으로 우리의 내적인 에너지에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자들, 수도승들, 요기들이 전통적으로 금욕생활을 해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왜 그들이 금욕생활을 수행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당신의 에너지가 더 많은 정자나 난자를 생산하는 데에 들어가고 있다면,
상위 차크라를 활성화시키는 쿤달리니의 상승에쓰일 것이 많지 않게 된다. 쿤달리니는 생명 에너지이며 또한 성 에너지이다. 의식이 동물적인 충동에 덜 집중하게 되고, 상위 차크라를 반영하는 대상에 투여될 때, 그 에너지는 척추를 통해 그 차크라들로 흘러 올라간다. 많은 탄트라 수행은 성 에너지를 상위의 영적 진화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통달하는 법을 가르친다. 당신의 깨어있는 의식 상태는 당신의 에너지가 성장할 수 있는 올바른 조건을 만든다. 깨어있는 의식 상태에 들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하듯이,자각과 현존은 항상 지금 일어난다.
신이 뭔가가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당신은 그것에 대한 저항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저항을 제거할 때 진화 에너지가 펼쳐진다.
고대 요가의 전통에서 요가 자세는 육체를 명상에 준비시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하타 요가는 오직 운동만이 아니라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산스크리트어 “하타”는 태양 “하”와 달 “타”를 의미한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서 요가 8단계의 목적은 붓다의 팔정도, 즉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과 같다.
이원적인 세상의 양극성이 균형을 이룰 때, 제3의 것이 탄생한다.
우리는 자연의 진화하는 힘을 열어주는 신비한 황금 열쇠를 발견한다.
태양과 달의 경로를 통합하는 것이 우리의 진화하는 에너지이다.
우리 인간들이 지금 자신을 생각과 외면 세계에만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쿤달리니가 자연스럽게 깨어나도록
내면과 외면의 힘의 균형을 달성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환상에만 동일시 하는 사람들에게 쿤달리니는 에너지와 의식의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은유나 생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내면의 세계 외부의 세계 - 4부 생각을 넘어서
** 자막 전문 **
삶,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 우리는 행복을 “저 바깥”에서 추구하며 살고 있다.
마치 행복이 일용품인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갈망의 노예가 되었다.
행복은 싸구려 양복처럼 구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이 마야, 환상, 형상의 끊임없는 놀이이다.
불교 전통에서, 삼사라, 또는 고통의 끝없는 사이클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면서 영원히 지속된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쾌락의 원리”라고 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쾌락을 만들고 우리가 원치 않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밀어내는 것이다. 짚신벌레 같은 단세포 생물조차도 이렇게 한다. 그것을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부른다.
짚신벌레와 달리 인간은 더 많은 선택이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딜레마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내면 의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과학적 수단과 생각을 이용함으로써 외부세계로 인식하는 것을 수량화하고 한정한다는 점
이다. 생각은 더 많은 생각과 더 많은 질문으로 이끌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이끌어가는가장 내면에 있는
힘을 알려고 한다. 그런데 이 본질을 우리 자신의 본성에 내재된 것,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밖을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깨어있고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행복을 밖에서 찾는 것이다.
[제4부 생각을 넘어서]
2010년 8월 4일, 캘리포니아 레이크 타호의 테코노미 협의회에서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는 놀라운 통계를 발표했다.
매 이틀 동안 우리는 문명의 시작부터 2003년까지 만들었던 것 만큼의 정보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5 엑사바이트 분량의 데이터와 같다. 인류역사상 그렇게 많은 생각이 있었던 적이 없었고, 이 지구상에 그렇게
많은 혼란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우리가 어떤 문제 하나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할 때마다 또 다른 두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 모든 생각이 만일 더 큰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그것의 좋은 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더 행복한가? 더 평온한가? 이 모든 생각의 결과로 더 즐거운가? 아니면 그것이 더 깊고 더 의미 있는삶의 경험
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고 떼어놓고 있는 것인가?
생각과 행동은 존재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인간 존재'이지 '인간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하면서 동시에 안정을 원한다. 우리의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를 안정과 안전과 감각의 평정으로 몰아가면서
우리의 심장은 생명의 나선형, 변화의 법칙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우리는 살인과 쓰나미와 지진과 전쟁을 병적으로 열광하며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계속 우리 마음을 정보로 채우려 한다. TV는 모든 상상 가능한 장치로부터 나오는 영상을 보여준다.
게임과 퍼즐. 텍스트 메시지. 그리고 모든 있을 수 있는 사소한 것들. 우리는 감각을 애태우게 하고 갈증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정보, 새로운 방법들의 끊임없는 흐름에 최면이 걸리게 되었다.
조용히 내면을 돌아볼 때, 우리의 가슴은 우리에게 삶에는 현재의 실재 이상이 있다고 우리가 지금 굶주린 유령의 세상에,
끝없는 갈망과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을 고치고, 마음이 만들어냈기 때문에존재하는 문제를 고치기 위한 더 많은 아이디어와 더 많은 생각을 가능케
하기 위해 지구 주위를 돌면서 데이터의 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생각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큰 혼란 모두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질병과 적과 문제와 맞서는 전쟁을 한다.
역설은 우리가 저항하는 것은 무엇이나 계속 존속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저항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강해진다.
근육운동을 하는 것처럼, 당신은 실제로 제거하고 싶은 바로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생각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기재가 무엇인가?
현대의 서양 문명이 생각과 분석을 이용해 물리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반면에
고대의 문명은 내면의 공간을 팀구하는 데에 똑같이 복잡한 기술을 개발했다.
우리 지구에 불균형을 가져온 것은 우리 내면과의 연결 상실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옛 경구는 형태의 외적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명함에 무엇이 적혀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에서 당신은 당신 의식의 내용물이 아니다. 당신은 단지 생각과 아이디어의 집합체만이 아니다.
그 생각 배후에는 그 생각을 주시하고 있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선의 공안, 대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결국 마음은 대답을 찾으려다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꼬리를 물려는 개처럼, 대답, 목적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에고일 뿐이다.
당신이 누구인가의 진실은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질문은 이기적인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아니다.
진실은 더 많은 대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질문에 있다.
조셉 캠벨이 말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이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만큼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당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이렇게 간단히 말했다.
“나는 깨어있다.” 깨어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붓다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각 개인의 삶이 피우는 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한 가지는 말한다.
그것은 고통의 끝이라고. 모든 주요한 종교 전통은 깨어있는 상태에 대한 이름이 있다.
천국.
열반.
또는 모크샤.
고요한 마음이 당신이 깨달아야 할 모든 것, 흘러가는 것의 본질이다.
일단 당신의 마음이 고요해지면, 모든 다른 것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가 깨어나
당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한다.
도교에서 말하듯이, "기는 의식을 따라 흐른다.”
고요해짐으로써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지혜를 듣기 시작한다. 고요함은 꿈속에서 속삭인다.
그리고 사람은 그 꿈들이 물질적 형태로 나타나는 미묘한 기재를 배운다.
도덕경에서 이런 삶을 “위무위”라고 한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
붓다는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길로 “중도”를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움의 길로서"중용" - 양극 사이의 중간을 말했다.
너무 많은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적은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닌 것. 음과 양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
마야 또는 환상에 대한 베단타의 개념은 우리가 환경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생각으로 만들어진 투사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신의 생각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진동하는 세상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 내면의 평정은 외부적인 사건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인식하는 주체와 독립되어 외부세계를믿는 것이
과학의 근본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우리에게 간접 정보만을 준다.
마음이 만들어낸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항상 감각을 통해 걸러지며 따라서 항상 불완전하다.
모든 감각의 밑에 깔린 하나의 진동장이 있다. 공감각이라고 불리는 조건 하에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이 진동하는 장을
다른 식으로 경험한다. 공감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소리를 색깔이나 형태로 보거나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과 연관시킬
수 있다. 공감각이란 감각의 통합, 또는 감각의 얽힘을 말한다. 차크라와 감각은 진동의 연속체를 걸러내는 프리즘과 같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진동하고 있지만 비율과 진동수는 서로 다르다.
호루스의 눈은 여섯 가지 상징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각각의 감각을 나타낸다.
고대의 베다 체계처럼, 생각은 감각으로 여겨진다. 생각은 감각이 몸에서 경험될 때 동시에 들어온다.
생각은 똑같은 진동의 근원에서 일어난다. 생각은 단지 하나의 도구이다. 여섯 가지 감각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을 너무 높은 지위로 올려놓아 우리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을 여섯 가지 감각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가 깊다.
우리는 생각에 너무 몰입되어 있어 생각을 하나의 감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물, 어떤 물?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나, 그로 인해 눈이 볼 수 있으니, 그것이 브라마, 영원임을 알라.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이 브라마가 아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뇌 연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신경가소성을 발견했다. 뇌의 물리적인 선은 그것을 통해서 움직이는 생각에 따라서 변한다는 개념이다.
캐나다 심리학자 도날드 헤브는 이렇게 말했다. “함께 점화된 뉴런은 함께 선을 배치한다.”
뉴런은 사람이 지속적인 집중 상태에 있을 때, 대부분 함께 선을 배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당신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지휘 감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생각이 두려움, 걱정, 불안, 부정성에 대한 것이라면, 당신은 그런 생각이 더 늘어나도록 선을 배치한다.
만일 당신의 생각이 사랑, 자비, 감사와 즐거움에 대한 것이라면, 당신은 그런 경험을 반복하는 선을 배치한다.
하지만 우리가 폭력과 고통에 둘러 싸여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하겠는가?
이것은 일종의 망상, 또는 소원을 비는 생각이 아닌가?
신경가소성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실재를 창조하는 뉴에이지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붓다가 2,500년 전에 가르쳤던 것과 같은 것이다.
비파사나 명상, 또는 통찰 명상은 스스로 유도하는 신경가소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 그것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하지만 그것을 감각의 뿌리 차원에서 경험한다. 편견이나 생각의 영향 없이, 진동과 에너지적인 차원에서.
의식의 뿌리 차원에서 지속적인 주의를 통해, 실재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인식의 선이 배치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것을 거꾸로 해왔다. 우리는 계속 외부세계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신경망을 형성하도록 했다.
하지만 우리 내면의 평정은 외부의 사건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주변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나의 의식 상태만이 중요하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명상은 이리저리 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모든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어떤 것이 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당신은 어떤 다른 것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괜찮다.
물리적인 영역의 고통을 넘어서는 방법은 그것을 완전히 품어 안는 것, 모든 것에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당신이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무엇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의식이 그 내용물과 더 이상 충돌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어떻게 가슴에서 사소한 야망을 비울 수 있는가?
의식에 완전한 혁명이 있어야 한다. 바깥 세상에 대한 지향으로부터 내면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
그것은 의지나 노력만으로 하는 혁명이 아니다.
놓아버림으로 하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열린 가슴 이미지는 모든 고통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강력하게 전달한다.
진화하는 근원에 열려 있으려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매조키스트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고통을 바라보지 말고, 불가피하게 고통이 찾아올 때, 어떤 다른 실재를 갈망하는 대신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와이 사람들은 가슴을 통해서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믿어왔다.
가슴은 뇌가 그러는 것처럼 확실하게 자신의 지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뇌가 아니라 가슴이 지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가슴이 영혼과 인격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신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가슴을 통해 진정한 길을 알려 주었다.
이 파피루스는 가슴의 무게를 다는 것을 묘사한다. 가벼운 가슴으로 다음 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당신이 잘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가슴 센터를 각성시키는 과정을 경험하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단계는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우주의 에너지로 경험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 사랑을 느끼고 이 사랑이 될 때, 당신의 내면세계를 외면세계와 연결할 때,
그때 모든 것은 하나다. 어떻게 우주의 음악을 경험하는가? 어떻게 가슴이 열리는가?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는 말했다.
“신은 당신 안에, 당신으로 거주한다. 신을 깨닫거나 자아를 깨닫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이미 당신의 진정한, 본래의 상태이다. 찾으려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주의를 안으로 돌려라.
그리고 당신 존재의 가슴을 밝히면서 마음을 하나의 자아에 쏟아부어라.
이것을 당신의 현재 살고 있는 경험으로 만들기 위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은 자아를 탐구하는 것이다."
내면의 감각과 내면의 살아있음을 명상하고 관찰할 때, 당신은 사실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의 힘은 에너지가 형태를 변화시키면서 일어나고 지나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화하고 깨달음을 얻는 정도는 각각의 순간에 적응하는 능력을 얻는 정도,
또는 계속 변화하는 환경과 고통과 즐거움의 흐름을 환희로 변환시키는 정도이다.
“전쟁과 평화”의 저자 레오 톨스토이는 말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윈은 종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특성은 힘이나 지성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적응에 능숙해져야 한다. 이것은 “아니짜”라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한다.(제행무상) 끊임없이 변한다.
고통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형태에 집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당신 자신의 주시하는 부분과 연결될 때, 아니짜에 대한 이해와 함께 환희가 가슴 속에서 일어난다.
역사를 통해서 성인, 현자, 요기들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합일을 한 목소리로 말한다.
십자가 성 요한의 글이든, 루미의 시든, 인도 탄트라의 가르침이든, 이 모든 서로 다른 가르침들이
가슴의 미묘한 신비를 표현하려고 한다. 가슴 속에 시바와 샤크티의 합일이 있다.
생명의 나선으로 들어가려는 남성의 통찰과 여성의 변화에 대한 포기,주시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받아들임. 가슴을 열기 위해서는 변화에 자신을 열어야 한다.
단단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것과 함께 춤을 춰라. 그것과 함께 엮여라.충분히 살아라.
충분히 사랑하라. 하지만 아직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으며궁극적으로 모든 형태는 흩어지고 변한다는 것을 알아라.
환희는 고요함에 반응하는 에너지이다. 그것은 의식의 내용물을 모두 비우는 데에서 온다.
고요에서 태어난 이 환희 에너지의 내용물은 의식이다. 가슴의 새로운 의식. 존재하는 모든 것에 연결된 의식.
당신은 결코 존재하는 실재와 투쟁함으로써 사물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뭔가를 변화시키려면 현존하는 모델을 구식으로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라.
- 버크민스터 풀러-
출처 : 세계신문명운동연합 | 글쓴이 : 율려 | 원글보기
첫댓글 고맙습니다 아미타불
그냥 참고삼아 보는게 좋을듯 합니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