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지말에 탕자 이야기를 통해 성령이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아버지의 품 즉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가 아닌 교회 안에 있지만 아버지와의 친밀한 마음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큰 아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 안에 여전히 심각한 탕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조명해 줍니다. 교회에 나오더라도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영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히 종교 생활이며, 단순히 등록된 교인일 뿐 진정한 관계 안에서 주님과 연합가운데 있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칭찬이 전혀 없었던 “교회안의 탕자”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하시는 편지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믿음점검요소)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회개)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하나님안에 거하는 연합의 모습)
첫째 아들이야기를 위해 둘째아들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합니다
물고기가 물안에 있을 때 생명과 자유함을 느끼듯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생명의 연합과 진리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일시적이고 한정적이고 유한합니다. 그가 돈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나름 행복을 느끼지만 부유에서 멀어져 궁핍해지자 고독과 허무와 인생무상을 느끼며 후회하는 감정을 나타내고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눅 15:13-14)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물론 이 둘째 아들은 후회나 자백에 그치지 않고 죄를 인식하며 회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한가지 참고로 알아야 할것은 후회나 자백은 회개로 나아가는데 과정이지 그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죄가 들어오기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영적교통안에서 교제와 대화를 통한 영적친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영이 죽고 우리의 혼(마음)은 영이 아니라 육에 종속이 되어 육체의 본성과 욕구를 따라가 육적인 일을 도모하며 육체의 일을 추구하는 비진리의 사람의 되어버렸습니다. A.W. 토저도 우리의 영안에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는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게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구했습니다. 교회안에서 아버지와의 친밀함의 관계는 단절되고 단순하게 자기의 유익을 위해 구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구함에 응답하고 주었습니다.악한 자식에게도 부모가 좋은 것을 주 듯이,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이가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자녀에게 후히 안겨 흔들어 넘치도록 붓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와 사랑에 예배로 응답하지 않고 둘째 아들처럼 잘못된 선택과 육적반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참고 두팔을 벌려 여전히 기다리시고 우리를 위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는 회개하고 아름다운 열매맺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 은혜의 과정속에서 무한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그의 환경을 흔드셨습니다. 그가 믿고 의지했던 재물을 흔드셨고, 바라는 것을 흔드셨습니다. 그 흔드심이 둘째아들에게는 은혜입니다.우리의 환경을 흔드심으로 주님은 주님을 찾는 기회를 주시고, 거룩한 연단의 도구로 삼으시고, 신앙적인 성숙에 이르는 수단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개인의 종말(죽음)이 혹은 우주적인 종말(재림)이 온다면 그 기다리심도 끝이 납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벧후 3: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그래도 이 아들은 회개의 전 단계인 죄를 인식했습니다. 상대성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죄의 무게와 크기를 실감했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와 비교하여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따뜻하고 큰지 그 영광과 사랑으로 인해 죄를 인식하고 회개의 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안에 거하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 바깥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눅 15: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자신을 죄로 정하시고 저주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의 단절을 십자가에서 맛보신 고통의 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자신의 적은 죄 하나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느끼게 될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주님의 시각으로 보고 죄의 실체를 알게 되고 죄를 인식하며 참 회개로 들어갈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이 돌아오라(회개)는 영적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영광을 봐야합니다. 그 영광의 아름다움만이 진정한 영적어두움과 무지가 노출되고 파쇄 될 수 있습니다.말씀이 거울이 되고, 말씀이 빛이 되는 순간이 성령의 계시와 조명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며, 나의 눈이 열려 주님의 영광안에서 나의 죄된 자아를 보게 된다면 그 영광 아래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고 납작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광아래에서 우리의 연약성과 무능력 그리고 한계성을 느끼게 되며 주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어떠한 행복도 찾을 수 없고 주님 안에 영광은 감추어져 있기에 세상에서 찾을 수 없으며 그 영광이 비추지 않으면 죄를 죄라고 여길수도 없습니다.
(눅 5:8)시몬 베드로가 이를 (주님의 영광)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참 진리를 대면하며 보이는 영광의 실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즐거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며 믿음안에서, 그 영광 안에서 진리의 실체 또한 예수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 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예수)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 다음은 뉴비전교회 까페에 오시면 보실수 있습니다.
유부브설교 검색: 김온유 목사
뉴비전교회는 동탄신도시에 위치한 말세에 깨어 신부단장하는 교회입니다
김온유 목사님 첫번째 저서 " 진짜 한번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쿰란출판사) - 변질된 구원론의 회복과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