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 그 시절의 아픔들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 하지 아니한가? >
학창시절 그 느낌에 반해 읽고 또 읽었던 내 마음의 글, 이양하의 신록예찬. 이양하의 신록처럼 비록 가난하고 비록 기대할 바도 없었지만은 그 시절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 하나 없고 불안하기 짝이 없고 아찔하기만 했던 어수룩한 그 때인데 그다지 실망도 하지 않았으며 꺾이지도 않았다. 다가올 미래가 그 무엇을 선사할 것인 양 늘 의기양양했으니 한 마디로 이는 겁 없는 자존이라 해둘 것이었다. 지금에선 어찌 버텨 섰던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고 되돌아간다 해도 다시는 그리 못할 것 같다. 역시 청춘은 의기 투철한 힘이고 꿈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누구의 글이나 민태원의 청춘예찬은 그런 점에서 같은 맥락의 글이다. 중년은 왜 아프지 않고 더 아프면 아팠지 노인이 왜 아프지 않겠는가. 청춘이니까 아파도 가능한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말하고 있다. 지금 걷지 않으면 나중에 뛰지 못할 것이고 지금 겪지 않으면 나중에는 버텨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에 걷고 뛰고 생각하고, 사색하라. 만나고, 또 껴 앉아라. 아픔에 무너지는 청춘이 되지 말자...이 말은 백 번 천 번 맞는 소리다.
육십 나이 먹어 이제부터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단순히 오늘 이 순간을 즐기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를테면 스트레스로 상처는 입지 않겠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시절에도 나는 술을 엄청 사랑했다. 하지만 같은 술이지만 경우는 다른 것이다. 젊은 적은 흥에 겹거나 슬퍼서 마실지언정 스트레스로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춘시절을 지나서는 스트레스를 빼놓고는 삶 자체가 거반 성립이 안 된다. 젊을 적 자유의 홀가분함을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유와 삶의 자율은 동질이 아니다.
545-29번지, 처음 장만한 단층 슬라브 집에서 꼭 십년을 살았다. 중학생이 어느덧 대학생 졸업반이 되었으니 빈한하지만 굴하지 않던 내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든 집으로써 5명 가족 모두가 함께 산 마지막 집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청춘이 뜨거운지라 닥치는 대로 마음 가는대로 맘껏 호흡하고 즐긴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때처럼 제멋대로 아낌없이 자유방출을 감행한 적이 없다. 돈도 없으면서 돈을 걱정하지 않았으며 불확실하면서도 두렵지도 않았다. 방임의 시간, 이는 실수도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자면 내 나이 육십에 결심한 현실적 자유론과 젊을 적 시간의 추구와 별반 다른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자유와 자율은 책임으로서 그 구분이 가능하다. 책임 있는 자유가 자율이고 이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나이 육십이니 가능한 말이다. 맘껏 지낸 젊음이라지만 기실 시대가 너무 어두웠고 그로 나라 걱정에 내 앞날의 막막함으로 빈둥빈둥 놀면서도 늘 불안했고 초조했다. 대학교 3학년부터는 거의 수업을 받지 않았고 리포트로 수업을 대신했다. 금속 재료학이란 과목은 기계쟁이에게는 꽤 중요한 기초학문인데 거의 건너 띄고 말았다. 난 그 시기를 생각하면 과유불급이란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우리 집은 그 무렵 고구마 밭으로 새집을 져 이사를 갔다. 그 무렵은 고구마 밭 주변이 꽉 들어차 안양도 전셋집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서울처럼 만원이던 시절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에 내놓으라 하는 공장들은 모두 안양에 포진하고 있었으니 수리산 밑자락 한정된 공간에 집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 무렵부터 연립주택이란 게 성행해서 엄마는 연립주택을 져 집장사를 하면 돈을 많이 벌거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에는 아버지의 명예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때쯤 아버지는 국립동물검역소 소장으로 고위직에 속하는 관직에 계셨었다.
나는 그 무렵 동네에선 알아주는 수학 과외선생이었다. 그런 나는 이재에 밝은 엄마를 닮았던 것인지 엉뚱하게끔 젊은 놈이 이 구석 저 구석 부동산을 보러 다녔다. 어느 날 엄마와 나는 비산동 시장을 찾았다. 이제 막 문을 연 시장이라 허름했고 쌌다. 모은 돈을 갖고 점포를 사겠다는 것이었다. 세무서에서 21살짜리가 점포를 샀다하니 단번에 근거를 내놓으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보부도 당당히 동네 과외공부한 아이들 부모 연대 도장을 받아가지고 세무서를 찾았다. 물론 그 점포는 1년 만에 곱절이 올랐다. 얼른 팔았다.
1980년도에 지은 새 집, 부모님은 권위적 시대에 이에 걸 맞는 집 크기가 필요했다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군수나 안양경찰서 서장이 서기관급이니 이사관이라면 고위직에 속한다. 그 무렵은 집으로써 부를 상징한다 할 정도로 집들이 제법 멋들어지게 변신을 거듭하였었다. 우리 집은 대궐집은 아니라 해도 내가 봐도 안양 시내에서 그리 빠지지 않는 중형의 근사한 집이었다. 점을 무척 좋아한 엄마는 이사 운 때가 안 맞는다고 이모부가 대신 새 집에 들어가 하루를 자게 하라는 주술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 점은 결과적으로 용하게 맞춘 셈이 되었다.
시대의 어둠 속에 아버지는 25년 다닌 직장을 졸지에 그만두고 말았다. 전두환의 부정부패 일소라는 명목 하에 감행된 고위공무원 숙정은 우리 집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2년간 재취업도 금지한 상황, 앞이 안 보였다. 과외수업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아르바이트도 할 수가 없었다. 일시에 모든 것이 사그라져버린 암울한 상황, 새 집으로 이사 올 때의 가족들의 밝은 미소는 단 두 달 만에 울분으로 변하고 말았다. 부정부패자라 하니 억울했지만 말을 할 수도 없는 처지. 엄마는 새 집이 화근이 된 것이라고 호화주택도 아닌 새집을 밤낮없이 나무라고 아버지와의 싸움도 잦았다.
왜 하필 아버지만 당하느냐는 것인데 나는 그런 말 하는 엄마가 무척 미웠다. 나는 공부를 하러 외국으로 나가겠다던 꿈을 접었다. 어쩌면 그 무렵 우리는 세상 닮은 거품을 쫓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정치적 쇼에 걸려든 우리지만 마음 한 편 22평에서 살던 오붓함을 잊어버린 과오가 빚은 아픔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비단 우리만이 아닌 우리나라는 그 무렵 전 국민이 날벼락을 맞았다. 1976년 중동 특수를 맞아 한국경제는 사상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성장률은 1976년 10.6%, 77년 10.0%, 78년 9.3%였다. 78년에는 1인당 GNP가 1000달러를 넘어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앞선다.
하지만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성장’(79년 4월 9일자 동아일보)이었다. 우리는 당시 인플레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살인적인 물가고로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경기 과열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도 극성을 부렸다. 신규 아파트 값은 분양 즉시 폭등했다. ‘복부인’ ‘프리미엄’이란 신조어가 이때 등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명을 지르고 있던 서민들에게 선거 직후인 78년 12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덮쳤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때부터 이듬해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원유가를 올린 것이다. 호황을 노래해오던 유신정권의 경제기조는 삽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모든 물가를 통제하던 정부는 79년 3월에 국내 석유제품 가격을 9.5% 인상한 데 이어 7월에 다시 59%나 올렸고, 전력요금도 35%나 인상했다. 최종적으로 1979년 소비자물가 인상률은 21%나 됐다.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사재기도 판을 쳤다. 유류 값 및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관련 제품 값도 최고 48%까지 인상 발표되자 아파트 등 고급 주택가 수퍼마켓 상가 등에서는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리어카와 용달차로 한 차씩 사들이는 ‘사재기’가 또다시 극성이고 버스요금 인상설에 자극돼 미리 쇠표(토큰)를 사두려는 시민들이 판매소에 줄을 이었다.무엇보다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퍼지지 않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항변이 갈수록 뜨거워져 기폭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 결과 과거에는 대도시에서 야당이 우세하고 지방에서 여당이 우세했는데 야당이 지방에서도 우세하여 소위 ‘여촌야도(與村野都)’ 경향이 현저하게 변하고 말았다. 78년 말 10대 총선은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명백한 패배였다. 총선에서 힘을 받은 야당은 기고만장해지며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 수감되어 서울대병원에서 연금생활을 하던 김대중도 박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8년 12월 27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면서 제일성으로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에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권토중래를 꿈꾸던 김영삼도 박 대통령과의 전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 극한 대립은 결국 막다른 곳으로 다달아 결국 화를 부르고 만 것이다. 78년 재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힘든 판국 인플레까지 가중되던 차에 정치적인 파국이 생기며 우리나라는 나락의 늪으로 추락하고 만다. 급작스런 난국에 경제까지 휘청거리며 나의 살 길 또한 막막하게 되고 만 것이다.
취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 잔인한 80년도에는 어느 회사도 사람을 뽑지 않았다. 그래도 전년도 까지는 000명이란 숫자가 분명히 찍힌 채용공고 활자체를 신문에서 쉽게 보았는데 아예 모집공고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어눌한 그 얼룩진 터널. 광화문 네거리에 나서 자유실천을 부르짖던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 그 중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누가 뭐라 해도 김지하였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그렇게 그 시대 젊은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를 열창했으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하늘 높이 바라보며 황지우의 황무지를 넘어 서 저 멀리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미로를 찾듯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을 택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격동의 시기 7980에 나오는 유명 인물들은 모두 한 결 같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라는 말을 했다. 물론 그럴 것이지만 국민을 앞세운 그 모두는 또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는 그 무렵 어렵사리 취직을 했고 부동산 불패의 신화 강남과도 처음으로 조우했다. 그러면서 돈을 생각했다. 나는 1982년 과천 종합청사가 막 문을 열 즈음 큰 길 건너에 있는 신축건물인 진덕 상가라는 곳을 탐색하였다. 분명 우리 집이 올인 하면 엄마를 쫓는 돈 걱정을 안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다들 장남다운 행실이라고 기뻐 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 그날 나는 호되게 혼이 났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혼난 적은 없었다. 매보다 더한 아픔이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 젊은 놈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벌 생각은 안하고 너 장차 어쩌려고 그러냐." 이는 나를 뿌리 채 흔드는 말이었다. '투자가 투기나 매한가지다. 아니다.' 하는 차원의 말장난이 아닌 것이었다.
투기나 불로소득은 성실함과 대치되는 말이다. 쉽게 버는 돈, 이는 국가정책의 허점을 또 말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과중함은 그 경로를 쉽게 무시하게 한다. 성실하지 않아도 큰돈을 번다는데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불야성을 이루는 강남, 이미 나는 소시민으로써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체념이 먼저 들었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공평정대 하지 못하다. 성실함이 별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병들기 십상이다.
개발 이익이 생기면 철저히 환수되어, 사회 전체와 미래세대를 위해 재투자되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 부정의와 환경 부정의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인데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사실 그 무렵 아버지의 성실함과 엄마의 이자놀이로 대변된 물질 우선 의식은 늘 충동하였고 그로 부부싸움도 잦았지만 원칙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가정은 성실함을 가꾸는 마음의 터전이다. 우리 집이 성성한 데는 끈덕진 검소 절약과 성실이 그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성실하지 못한 의식으로의 전도를 크게 염려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압력이 없으면 기압을 못 견디고 파열된다. 이를테면 세상의 풍파는 인간이 견뎌야할 또 다른 기압이고 삶의 원동력이다. 인간의 정신도 고뇌하는 압력이 없어지면 파괴된다. 평소 우리가 그토록 벗어버리고 싶은 것들은 바로 그 압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압력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사실상 우리는 운명의 짐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산다. 운명의 짐은 일시적인 긴장이나 스트레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멍에를 말한다.
그 짐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어 파괴시킬 수도 있고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켜 성장시킬 수도 있다. 운명의 짐은 전적으로 자신의 짐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그 단련의 기본이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쉬이 번 돈이니 그렇게 성실할 필요도 없으며 무기력이나 나태함도 별 문제가 아니다. 그로 삶이란 압은 점점 강도가 약해지고 말 것이다. 돈과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삶의 진정한 가치, 성실함은 믿음이고 신뢰다. 굳이 성실하게 일했지만 허탈하다는 말로 불로소득을 나무랄 때 성실함을 인용하지는 말자.
지금에선 어찌 암울한 그 시대를 버텨 섰던 것인지 아득하기만하고 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이 어제 인 양 주마등처럼 스친다. 취직하여 올라 선 신사동 길,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비내리는 영동교 노래가 내게는 달리 느껴지는 것은 지금은 아스라하게 잊는 과거지만 슬픔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너무 순진했다.
1.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
역사를 말할 때 줄곧 변함없는 나날들의 반복이라 한다면 이는 장구한 세월일 뿐 역사의 시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역사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굵직한 사건이나 사고가 있으며 도도한 물줄기가 바뀌어 시간의 구분으로 이정표를 말하고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말이 필요한 때 비로소 역사의 매듭을 가지며 진정한 역사라 말 할 수 있다. 수만 년의 석기시대로 일괄하여도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긴 시간이지만 아는 게 없고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이라는 것은 바로 주어진 어느 시간을 말하며 그 시간 열차 속에 동승한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의 그 대상은 너무도 많아 일일이 담기도 추려서 살펴보기도 어렵다. 당시의 엄청난 센세이션이나 아픈 상처를 깊게 남긴 사건이나 사고들만 추려도 그 끝이 없다. 긴 시간도 아닌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그로 그 사건 사고로 그 시절을 기억하는 편이 어느 면에서는 수월하고 생동감이 있다.
클로즈 업하고 7980년도를 말하자면 우선 1978년 동일방직 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을 말하여야 한다. 이는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고양시킨 사건이었다.그 해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앞지른다. 이는 민심의 이반(離反: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현상이 표출 된 것이다. 이에 집권여당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극단적인 강경 대응 이외에 여타의 대응책을 찾지를 못했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의 정면충돌을 야기시켰고 그해 8월의 YH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YH노조의 여공들은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내로 진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한다.
YH사태는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어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李哲承)을 1979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하였었다.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하였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승계의 인물들이 전당대회 결과의 무효를 제소해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국회는 더 나아가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였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틀 밖으로 내모는 형국을 초래하였다.
그러자 그 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폭발한다. 1979년 10월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부마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알다시피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다. 그리고 끝내 10.26사태가 발생한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우리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휩싸인다. 12·12 군사 반란 또는 12·12 사태 발생.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당시는 대통령의 권한으로서 특별히 취할 수 있다는 특별조치, 긴급조치란 게 있었다. 살벌한 긴급조치 9호는 그중 제일 악랄했다.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등에 대해서는 엄격히 처벌을 한다는 조항인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격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든 처벌이 가능한 무소불위의 초법적 조치였다.
1979년 그 무렵의 어느 한 기억이 나를 지금도 아프게 옭아맨다. 하루는 같은 과 동기인 Y가 단체 교련 행사 날을 틈타 데모를 하기로 하니 적극 협조 해달라는 말을 해왔다. Y의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전단지를 받아 챙겨 넣었다. 그는 블랙리스트에 이미 오른 상태라 일을 그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공대건물 계단에 전단지를 슬쩍 남겨 놓았다. 드디어 제식훈련 행사 날 우리는 연단을 향하여 연대장이 우향우를 행할 때 정반대로 좌향좌를 하고 군가 대신 투쟁의 노래를 불렀다.
금세 행사장은 난리가 났고 이를 기화로 큰 데모가 벌어졌다. 나는 겁이나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휴교령이 떨어졌고 Y는 잡혀갔다. 그쯤에 나는 Y가 나를 참여 명단에 껴 넣지는 않을까하는 조바심으로 애를 태웠다.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늘 부끄럽다. 이후 나는 Y를 본 적이 없다. 선거 때 다들 그 시절의 훈장으로 출마를 하기도 하여 그 중에 혹시 껴 있지는 않을까 하며 훑어보지만 그의 이름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게 내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긴급조치위반으로 잡혀 들어가 징역을 산 친구들도 있고 경미한 가담자는 바로 군에 입대해 일선에 배치되었다. 그해 봄 부터 시작한 데모는 여름을 지나자 더욱 극렬해져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기던 그 무렵이었다. 뉴스위크잡지를 들고 다니며 이를 파는 척 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형사들이 무더기로 보이더니만 예상대로 휴교령이 떨어졌는데 생각지도 않은 10. 26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중앙청 앞에 느닷없는 탱크가 나타난 12.12가 터져 정국의 앞날은 그야말로 한치 앞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유신독재가 종언을 고하였으니 마음 한 편으로는 그 다음 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를 하였는데 3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 기지개를 펴던 80년 민주화의 봄은 그리 오래가지를 못했다. 한 사람은 가택연금을 당하고 한 사람은 제주 감귤농장을 빼앗기고 또 한 사람은 5 18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사형을 언도 받으며 정치의 장에서 모두 멀어져야 했다.
80년 봄 군부독재 정권타도를 외치는 데모는 한껏 가열 찼는데 광주에서 아무래도 무슨 변고가 난 것 같다는 말들이 시중에 돌기 시작했다. 동네 친구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연락이 안 되자 다급해진 그 애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쩌든 소식 좀 알아보라 했었다. 누군가는 가는 길목이 차단되어 광주 진입이 어렵다고도 했다. 당시 외신보드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겨우 전화 연결이 되기는 했는데 잘 있다는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총소리가 들리고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그로 더욱 애가 타고 걱정이 되던 4대 독자인 그 친구였는데 다행히 그 친구는 무사하였지만 나도 잘 아는 내 친구의 친구는 그때 죽고 말았다. 요즘 관객 천 만명을 돌파했다는 객관적 입장에서 광주를 지켜본 택시운전사란 영화가 꽤 실감이 난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삼청교육대란 기관을 설치하여,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하여 폭력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하기 위하여 죄질에 따른 순화교육, 근로 봉사, 군사재판 등을 병행함으로써 이의 근절을 선언했다. 그리고 5. 18과 12.12 쿠테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1980년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그해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헌병대 요원과 검찰, 경찰서지역 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 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하게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한 무시무시했던 그 시절 이야기다. 이와 병행하여 공직자 숙정작업을 대대적으로 하였는데 그 바람에 우리 아버지도 졸지에 해직공직자가 되었던 것이다.
1981년에는 비상계엄령 해제. 전두환 대통령 취임. 제5공화국 수립이 이루어졌던 때로 전두환정권이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려는 심산이었는지 올림픽 서울 유치 결정이 되고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됐었는데 당시의 지구촌은 미국 우주 왕복선 발사 성공, 프랑스 미테랑 사회당 정권 출범. 폴란드 자유노조 활동 정지. 이란 억류 미국 인질 석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 같은 굵직한 사건이 도처에서 터졌다.
바로 그 해 5월 14일 경북 경산군 경부선 상행선 건널목에서 부산 발 서울행 특급 열차가 건널목을 건너던 오토바이를 친 후 급정거, 사고현장을 확인하던 중 뒤따라오던 동대구행 보통열차가 추돌했다. 이 울산 열차 추돌 사고로 54명이 사망하는 등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역사적으로 실감이 안나 두고두고 기억하는 뉴스가 있다. 아마도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여 그러했으리라. 1974년 광복절 날 청평 유원지를 제물포고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친구들하고 놀러 갔는데 나는 솥단지를 들고 강변을 향할 때였다. 육영수여사가 저격을 당하였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밤 대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것이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긴박하고 숨 막히게 살아가던 그 시절 박대통령의 죽음은 큰 빈자리였다. 방송 또한 그 뉴스밖에는 없었지만 그가 죽는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뉴스를 되풀이해서 들었는데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그를 무척 싫어했다. 그의 독단으로 무수히 꿈 많았던 젊은 친구들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품은 뜻마저 버려야 하는 것을 증오의 마음과 애처로움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에 나왔던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래는 그 때의 참담했던 어눌한 영상미를 그리움으로 진하게 남겨준다. 분개하던 젊은이들의 가슴이 한 순간 아무 느낌 없는 공허한 바람처럼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그 속에 있고 그의 덧없는 인생도 그곳에 숨어 있는 듯도 싶다. 실제로도 젊은 적 시월의 끝 무렵은 무척이나 많은 갈림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계절의 훈풍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다가선 것은 많은 이별이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한해 말 보다 혹독한 추위였으며 고독이 자리하는 긴 하루였다.
교정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 입영열차에 몸을 실어야 할 때가 그 무렵이었으며 그 누군가를 기다림으로 버티다가 현실의 면사포를 써야 할 결정을 할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러기에 무수히 많은 것을 숙명이란 이름으로 간직한 채 날밤을 세우며 마지막 그리움의 눈물을 진한 소주에 담아 가슴에 묻어두었다. 그래서 과거가 그립다하면 대개가 그때가 많이 떠오르고 과거가 많다하여도 그때의 낙엽 지던 그림자처럼은 선명하지 않다.
경복궁의 돌담길에 가지런한 은행잎이 지금도 곱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보단 어림도 없을 것이란 생각도 그래서 하게도 된다. 지우지 못할 그리움의 미학은 어느 아름다움보다 곱고 애틋하다.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면 가을 낙엽 다 지던 때 황혼 빛이 미련으로 돌변하고 흔들리는 갈대가 내 마음 같기도 하여 먼 하늘 기러기가 되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사는 내내 사건사고가 너무 많아서일까, 정말이지 요즘 같은 무감하고 삭막한 일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이 사는 존재들과 같이 존립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우두커니 창 밖에 시선을 두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그 뭔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일 것 같고 연민이 인다. 하지만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듯 세월 쫓아 그들 또한 가고 있기에 단지 이런 생각은 가을 바람에 스치는 단순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연민이라 한들 말을 해 또 무엇할까. 이러한 사유 자체가 권태로운 삶의 청승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한 심사이기도 할 것이다.
꼭 그래야만 세월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지 지나온 세월, 사건도 사고도 너무 많고 여직 가슴속에 많은 것들이 잠들지 않고 남아 있다. 그간 무사 무탈한 것을 고마워라도 하여야 하는 것일까. 연관된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시련의 나날들이었을까 새삼 돌아보게 된다. 뒤를 몰아보는 요즘, 그때 그시절을 아련히 기억하는 것 부터서 이제는 내가 삶의 가장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도 된다. 그래서 너무도 바삐 지난 가혹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지고 그래서 가는 세월이 매정하고 아쉽기만 하다. 억울한 세상 꼴이라고 야속해 했던 그 시절의 숨 막히는 긴장된 젊음이 다시 보고만 싶어진다. 불안정했지만 그리운 그 추억의 길을 찾아 단풍같이 야울야울 불같이 내 마음도 불 살라 진다면 좋으련만.... 오늘도 가는 세월은 지나간 꿈을 기억하지 말라하며 어디론가 싣고 바람처럼 무작정 떠난다.
2. 나는 그 시절 순진했다
나는 내 인생 통 털어 직장을 세군데 다녔다. 지금 직장에서 근무한지 30년이 넘었지만 첫 직장이 아니다. 79년도 여름, 대학교 3학년 때 실습으로 대우중공업을 찾은 것 까지 포함하면 4번째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교생 실습같이 실습이란 것이 있어 2학점을 부과하였는데 나는 안양에서 가까운 부곡의 철도차량기지가 있는 대우중공업을 청하였었다.
인천에서는 포크레인등 중장비를 만들고 부평에서는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하던 때인데 나는 기차 만드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한 일이 있을까. 아무 것도 없다. 나중에는 떼거지로 제작을 해 검사를 기다리던 우등 열차에 몰래 올라타 낮잠을 자다가 퇴근하곤 했다. 그래도 실습비라고 공돈이 생겨 친구들을 데리고 안양 시장통 순대 국밥집에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세상 한탄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년 후 취직을 해야 하는데 세상이 어두우니 막막하기만 했다.
가을만 되면 모집공고가 신문에 1면을 장식했는데 정말 숨 막히는 현실이었다. 그 당시는 졸업을 하기 전 미리 취직을 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업에 빠져도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는 그 무렵인데 그해에는 거의 대부분이 자리를 채웠다. 게다가 데모다 휴교다 하여 거의 1년을 놀고먹었으니 전공과목 몇은 아는 것도 별로 없던 무지한 상태의 졸업 대기생들이었다.
매일 들리는 학과 게시판, 나는 눈이 나빠 군대에서 면제를 받았기에 복학생 우선순위에 밀려 회사 추천서가 올라와도 순번에서 밀렸다. 지금 생각해도 아득한 나이 23살 , 게시판에 롯데 추천이 올라왔다. 기계공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유망한 직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기회마저 순탄치가 않다. 지난 번 한국타이어 대전공장도 10명 추천으로 과거에 비하면 1/3도 안되는 숫자인데 면접에서 반이 떨어졌다고 하니 전체 공대생 20명 추천에서 타과를 빼면 우리 과는 4명 정도 배당에 2명이 될까 말까한 상황이다.
나는 겨우 추천을 받아서 롯데쇼핑센터에 접수를 했다. 눈 나쁜 게 문제가 될 것 같아 그 당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콘택트렌즈를 끼고 면접을 보러 갔는데 눈이 아파서 화장실에서 눈을 살피다가 그만 한쪽에 렌즈를 잃고 말아 한쪽은 잘 보이고 한쪽은 눈이 충혈되고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면접을 치뤘다. 나는 80년 11월 9일부터 롯데를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롯데기공이란 곳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곳에서 신규로 추진한다는 헬리콥터 제작 사업이 중단되면서 곧바로 지금의 롯데건설에 배속이 되었다. 나는 국내 기전부라고 하는 파트에 기사로 발령이 나서 제 3한강교 바로 앞에 설악아파트 라고 하는 동네에 위치한 건설본사에 출근을 하였다. 그 당시 20명 정도 각 학교에서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같이 들어갔는데 해외파트로 발령이 난 사람들은 끌탕을 하고 걱정을 많이 했다. 결혼을 목전에 둔 처지로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상급자는 발주예정 공사 였던 부여 조폐창 공사도면을 주고는 펌프 용량 산출을 해 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내가 사회에서 받은 첫 번째 오더였다. 일에 재미를 느끼고 어느 정도 업무 파악이 될 때 쯤 부서의 신입사원 환영회가 열렸다. 아마도 1달 정도 다니는 것을 보니 그만 둘 것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 근무처 동네가 어디인가.
우리나라 유흥 1번지 신사동 사거리가 끼어 있는 동네다. 주현미의 노래처럼 신사동 그 사람은 당시 이제 막 용솟음치며 줏가를 팍팍 올리고 있었다. 여의도 일대의 탈렌트 출연 업소들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때 정부는 강남으로 옮기면 세금을 감해준다든지 조사를 안 한다는 특혜까지 베풀고 있었다. 신사동 사거리에 강변회관이라는 술집은 조용필이 운영을 한다고 당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어느 날부터는 이주일의 얼굴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영등포의 꽃마차나 서울 구락부 남태평양 무랑루즈 초원의 집 같은 극장식 밤무대가 성행 할 때인데 당시 밤무대의 황제는 단연 이주일이었다.
당시 사거리에서 압구정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5층건물 전체가 룸싸롱으로 여종업원이 2백명이 넘는다는 백제회관이란 곳이 있었는데 지금도 건재한지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거나해지자 2차로 우리가 찾아 들어간 곳은 한강클럽이라고 우리과장의 단골 술집이었다. 1차가 끝나자 차장급 이상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4명 정도 남았는데 23살 짜리 군대도 안 갔다 온 숙맥은 배당된 미모 아가씨가 무척 고역이었다. 취기가 오른 나를 황홀과 긴장을 연출하며 무아지경으로 몰고 가는 바람에 오줌을 찔끔찔끔 저리며 교태에 그만 취해 버리고 말았다. 화장실로 도망친 나를 본 김 대리는 내주머니에 뭔가를 쿡 찔러 넣었다. 순간 나는 팁으로 주라는 돈임을 직감했다.
건네준 돈은 십만 원이었다. 당시 대기업 대졸 초임 임금은 245,000원으로 공평하게 정하여 지키던 때이다. 순간 정신이 버쩍 들었다. 나는 5만원을 빼 내 들고 들어왔다. 통행금지가 있던 때였다. 말죽거리의 비닐하우스가 자기 땅이라고 말하던 김대리도 일어서고 있었다. 눈치를 보다가 파트너의 치마 옆에 터진 호주머니에 돈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런데 글쎄 그녀는 치마 속에 아무 것도 안 걸쳤는지 맨살이 내 손에 잡히고 말았다.
나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안양을 향하는 98번 태광교통 버스 막차는 이미 늦었고 어디를 가든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려 하자 그녀도 불쑥 차에 올랐다. 나는 그녀를 이태원동네 근처에 내려주고 북아현동에 사는 친구네 집을 향했다. 그 친구는 바로 본 문 제일 처음에 쓴 글에 나오는 대문으로부터 한참을 들어가야 현관에 도착했다고 한 바로 그 친구다. 당시 친구 아버지는 국제방직에 사장이셨는데 안양에 동양나일론 사장도 했었고 삼성의 제일모직에서 이병철 시대 때 과장을 했었던 국내 섬유기술사 1호인 분이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내 주머니에는 계산상으로 도저히 맞지 않는 3만원이 더 들어 있었다. 나는 출근해서 별명을 하나 얻었다.
쪼다! 굴러온 떡도 못 먹는 그대는 쪼다!! 3만원은 아마 잠자리 값이었던 것 같다. 김대리는 야화가 꽃피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잠자리를 마다한 것도 그렇지만 돈도 되돌려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사실 그때는 윗사람들 앞에서 얌전한 체면을 유지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주는 술만 낼름 받으며 얼굴도 제대로 못 보았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강변회관 맞은 편에는 당시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 뒤편의 좁은 골목으로는 저녁 때 포장마차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우리는 퇴근 무렵 그 골목에 들러 딱 소주 한잔 한다하며 닭똥집을 시키고 소주반병을 마시곤 했는데 그때 그녀들은 출근을 하기위해 그곳에 들러 우동을 말아먹고는 했다.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그녀, 나는 우동 값을 대신 내주는 것으로 인사치례를 했다.
그리고 몇 번인가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며 여심에 빠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하면서 나는 당시 기생과 살았다는 이효석 같은 용기가 내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그녀도 내게는 다른 마음이 있었는지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 주었다. 당시는 어쩔 수없이 가난 때문 호스티스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순애보 영화가 많았다. 우물쭈물하다가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을 울산에 현대로 옮기자 나를 수소문했다고 하는 그녀이니 아쉬움도 남는 그녀이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자면 아름다운 추억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슬픈 기억도 무뎌져 곱게 보이는 이쯤이지만 직업 상관없이 그녀는 되바라지지 않은 마음 착한 여성이었다. 그래봐야 그 나이 21살의 앳된 처녀가 아니었던가.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란 노래를 들으면 부스스 앳띤 그녀가 떠오른다. 어디서 살든 아마 그 여인은 지금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준 선물을 한동안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시절 너무 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