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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召西奴)는 한산(韓山)에 이르러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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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
소서노(BC 66~ BC6) 전설 속에서의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은 어딜까?
'召西奴 VS 召西弩'.,'노예인가? 여걸인가?'
소서노(召西弩)는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한.,여걸.
그후, 두 아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창업했던.,여왕.
일설에는 '고구려, 백제, 왜' 삼국창업 위업을 이룩한.,여제.
'칼(刀)을 입(口)에 물고
서(西)에서 온.,철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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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소서노(召西奴)를 소서노(召西弩)라 쓰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소서노(召西奴)'라고 기록.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쓴.,<삼국사기>.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창건한.,왕건.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은 왕건의 맏사위.
(927년 후백제 침공으로 신라 경애왕이 죽었고 )
(후백제 견훤에 의해 신라 경순왕이 즉위했지만 )
(신라 민심은 이미 고려로 기울어.,귀부한 경순왕.)
(즉, 신라 경순왕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
(고려 왕건에게 찾아가 항복을 했던 것.)
(경순왕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하게 되고)
(왕건의 9번째 딸과도 결혼하여, 사실 상., 혼인동맹.)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백제의 역사는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많이 왜곡된듯.
하여, '서쪽에서 온 종년'
소서노(召西奴)'라고 쓴듯..
당나라 이연수가 쓴 <북사(北史)>와 장손무기,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는 소서노(召西弩)를
소서노(召西奴, 서쪽의 종년)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수나라에서 보았을 때 하북성은 서쪽이다.
그들은 고구려와 손잡고 중국까지 진출한 소서노에게
한을 품었기에 소서노(召西弩)를 소서노(召西奴)라 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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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대왕 당시
평양(고구려 수도)에 대비한
남쪽에 있는 도읍 지명.,남평양.
고구려 광개토왕은 정복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백제를 침공.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쟁패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남하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광개토왕 다음왕' 장수왕 때.
장수왕은 427년(장수왕 15)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단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
475년(개로왕 21)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명으로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해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살해 당했다.
백제의 왕도 한성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당했다.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고
북한성(北漢城)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여
별도(別都)를 삼아 뒤에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77년간 고구려의 영토로 삼았다.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잃어버린 한강유역 회복을 위하여
신라와 동맹관계로 국력회복에 힘썼다.
백제 성왕은 551년(성왕 29) 신라와 합동작전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다.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 한성과 남평양 등 6군(郡)을 점령.,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한강 상류 유역 10군을 점령했다.
그 결과 백제는 그동안 숙원이던 한강 유역을 되찾게 되어
지금의 서울 지방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으며, 따라서
북한성 또는 한성 이름이 회복되고, 남평양 이름은 사라졌다.
..................................한산주.................................
한산주 치소 일대는 원래 백제의 수도 한성에 속하는 지역.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하였으나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해 신주(新州)를 설치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산주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한강 이북)으로 이전.
이후 전세(戰勢)에 따라 치소(治所)가 이동해 568년(진흥왕 29년)에
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다가 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현 경기도 하남시 일대)을 설치하였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주의 명칭이 한산주로 정리.
757년(경덕왕 16년) 전국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
혜공왕 때 행정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
한산주는 고려 때에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계속 변화.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영역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 개성을 쌓고, 748년(경덕왕 7년) 14개 군·현을 설치.
762년 6개 성을 쌓고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 826년 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경덕왕이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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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패강(패수)은 대동강을 가리키므로,
대동강 하류와 가까운 황해도 봉산군으로 비정.
한양군은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평양
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
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이니, 일명
북한산군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고구려 초기 수도인 졸본 지역의 소국.,졸본부여.
'졸본부여' 왕이 '연타발'이고 그 차녀가.,소서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주몽설화 중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자 그곳의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비류설화에는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졸본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했다.'는 전승(傳承)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졸본지역에는
주몽집단이 남하하기 이전에 정착한 부여계
이주민이 소국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 백두산.,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오녀산성)
............"삼국유사" 기이편., 고구려 건국이야기.........
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로서,
동부여 금와왕 궁궐에서 자랐으나 금와왕의 아들들과 불화하여
졸본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는 곳이 바로 졸본 오녀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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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성
.....................오녀산성(졸본성)............................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환런 현(桓仁縣) 오녀산에 위치.
높이 200m에 이르는 천연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산세가 비교적 완만한 동쪽과 남쪽에만 성벽을 쌓았다.
산성의 남북 길이는 600여m,
동서 너비는 130~300여m이며,
성안에 저수지와 망대, 병영터 등.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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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조비
.......................졸본성(卒本城)..............................
북부여에서 남하해 온 주몽은 졸본지역에 근거지를 확보.
고구려 초기 수도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문에는 홀본(忽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곳을 ‘졸본(卒本)’이라고 하였고
<위서 : 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되어 있다.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지금 만주 환인(桓仁) 북쪽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지목된다.
주몽왕이 비류수(沸流水) 골짜기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은 도읍지로
혼강(渾江)을 끼고 있는 비옥한 충적지대.
환인분지의 약 800m의 산지에 축조된 오녀산성은
남북 약 1,000m, 동서너비 약 300m 규모의 큰 성인데,
동· 서· 남쪽은 모두 넓적한 돌로 삼면에 성벽을 쌓았고,
북쪽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이루었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3∼6m이고,
성돌 크기는 대체로 30×20×35㎝ 정도이다.
부근에는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적석총을 비롯, 많은 고분군이 있다.
이 오녀산성과 주변 고분군들은
고구려 건국 초기의 국가 성격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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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에서 바라본.,졸본성(오녀산성)
오녀산(五女山)
중국 길림성 환인현에 위치한 오녀산
이곳 오녀산성은 졸본성으로 추정된다.
북쪽과 동쪽에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
높고 험한 800m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축조.
오녀산의 서남쪽에는 넓은 환인분지가 있고
동남쪽에는 압록강 지류인 혼강(渾江)이 있다.
서쪽 산기슭에서 시작되는 험한 협곡.
통화(通化)로 통하는 길이.,지나간다.
동남쪽에서 흐르는 혼강은 여러 산굽이를 지나
오녀산 기슭에 이르러 깎아내린 듯한 가파로운
벼랑 사이를 통하여 환인분지로 흘러든다.
환인에서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집안(集安)으로 가는 데에는
통화로 통하는 육로와 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가 있어
집안에서 심양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인을 거쳐야 했다.
이와 같이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수도 집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대에 위치.
광개토대왕릉비에 '추모왕(鄒牟王)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는 졸본성(오녀산)
이곳 오녀산성이 이 때 쌓았다는 견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이 되어 있지 않다.
............오녀산성 천지..............
성안에는 천지라고 하는 못이 있다.
이 못의 물은 마른 일이 없다고 한다.
못은 동서로 긴 장방형인데 그 크기는
동서 12m 남북 너비 5m, 깊이 2m 정도.
못은 암반을 깎아낸 다음 변두리에 큼직큼직한 막돌을 쌓았으며
지면에 나타나는 부분에만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규모있게 쌓았다.
못의 북쪽 벽 가운데에는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만들었다.
못의 서남 모서리밖에는 이 못과 연결된 조그마한 샘을 팠다.
이곳의 작은 샘 역시 못에 쓴 돌과 같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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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모왕(鄒牟王)이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는데,
이곳이 이때 성인지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되어 있지 않다.
특징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축성법인
굽도리식축조공법이 이용되었다는 점과
고식(古式)의 옹성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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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 협곡
.....................비류국(沸流國)........................
고구려 초기 BC 1세기 퉁자강(佟佳江) 유역.,소국
'다물국' '비류나'로 기록된 '노·나'는 고구려 초기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정치집단·소국을 뜻하는 말이다.
비류국 지배층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이동.
주몽집단보다 빨리 정착한 소국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비류국왕인 송양과 주도권을 다투며 싸우다가 승리.
그곳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해 그 국주로 삼았다고 한다.
고구려 말로 '다물'은 구토 회복을 의미.
송양에 대한 주몽의 승리를 '송양'의 음이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소노와 비슷하다 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교체 사실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비류국은 고구려 초기에 병합된 뒤,
그 국왕 송양의 딸이 유리왕의 비로 들어가는 등
주몽집단과 혼인관계를 맺고 고구려지배층에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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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은 고구려의 제2대 왕.
동명왕 주몽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씨'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비류수(沸流水)에
채소잎이 떠내려옴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
사냥을 하면서 비류국을 찾아가 국왕 송양(松讓)을 만났는데,
송양이 말하길 우리는 여러 대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해왔으나,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려우며 그대가 도읍을 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분노해 송양과 활쏘기 등 겨뤗으나
송양이 항거하지 못하고 이듬해 항복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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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 & 소금우물.
연타발(延陀勃)과 둘째딸 소서노(召西奴).,소금상인.
그들의 재력이 없었다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은 불가.
그당시까지만 해도 소금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얻었다.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 시대부터 소금을 사용.
고조선에는 염수(鹽水)라는.,소금강이 있었다.
현재, 랴오허(遼河) 강 서쪽 상류.,소금우물(井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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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3월 21일.,매장량 10억톤 유전 발견.
한반도 북부 해발 200m지역 부분적인 빙하 흔적들.
이것은 한반도가 빙하의 주변 지역이었음을 대변한다.
빙하기 육지로 연결된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 대만 등.
1만 3천 년 전 동이족 최초의 토기는 이때 만들어졌다.
1만 2700년전 빙하기도 아닌데 혹한기가 찾아온 이 지역.
이때 대륙 동식물 자원 몰락은 인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
인류 역사 상에서
가장 견디기가 벅찼던
혹독한 혹한기가 찾아온 것.
인류는 수렵채취 만으론 겨울에 살아남을 수 없었고,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저장하는 종족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때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출현.
빗살무늬토기
당시 서해는 대륙이었으며 동해도 호수였다.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일 년에 5cm씩 올라오기 시작.
이때 완만한 대륙이었던 곳에 서해(황해)가 생겨난 것.
이렇게 서해는 전부가 대륙붕에 해당되어 수심이 얕은 편.
난류와 한류가 만나 어장이 풍부한 아시아 유일의 대형 갯벌.
인류의 4대 문명발생지는 모두 강 하류에서 발달했다.
물, 식량, 땔감과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홍산지역은 강 하류가 아닌데도 모든 조건을 갖추었던 곳.
특히, 소금호수와 소금강이 있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문명이 다른 곳보다 빨리 잉태되어 클 수 있었다.
초원길 한가운데 홍산문명의 탄생지이자 전파의 고속도로.
당시 중국 대륙은 산악지대와 원시림으로 뒤덮여
수로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통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기원전 4세기 중국 산해경(山海經)., 고대 한국과 관련된 기록들.
“동해(東海) 안쪽, 북해(北海)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내용.
‘동해’는 서해이며, ‘북해’는 발해를 의미.
고조선 영토는 발해만 연안에 있었던 것.
고조선시대 서해 갯벌은 생명체들의 보고.
세계 5대 갯벌 지역은 미국 동부, 캐나다 동부,
아마존 강 하부, 북해 연안 그리고 우리의 서해다.
그중에서 생물 다양성 측면을 고려해볼 때., No1 서해.
예를 들어 새만금에는 어류가 약 155종, 저서생물이 141종,
규조류가 1제곱센티미터 당 20만 개체가 서식하고 있었기에
우리 조상들은 서해 갯벌 해산물로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갯벌에서 좋은 소금이 생산.
염전을 한글로 풀면 바닷가의 소금밭.
당시 서해 갯벌이 좋은 소금을 생산했다.
그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천일염은 만들지 못하고
갯벌에서 증발시킨 소금물을 토기나 솥에 끊여 생산.
하여, 땔감이 많고 갯벌이 좋은 곳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주로 강 하류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인류가 주거.
대부분의 고대 문명이 강 하류에서 발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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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연태(봉래) 지하도로 계획.
직통 90KM, 돌아올 경우 1980KM
2022년 경 지하도로 건설 완공 계획.
옛날부터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고,
증발량이 많으며, 갯벌이 넓어 염전이 발달했다.
고조선은 염전을 일궈 소금생산으로 부강했던 나라.
동아시아에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고조선 천일염은 암염에 견주어 순도도 높고 귀해 그 무렵
최고의 고가품으로 국가 경제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고조선 후대에도 소금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국가자산.
삼국시대 영토 팽창 최우선 순위는 소금 산지인 해안선.
이렇게 고대에는 소금 산지 확보가 국가 건국 최우선 요소.
고조선 영역 랴오닝(遼寧) 성 지방 유적에서는
옥장식품과 청동 솥(cauldron)과 동검 등이 발견.
BC 4500년 이전에 이미 청동 솥이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나라에 무쇠솥이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며,
그전에는 돌솥과 첨저형 토기솥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크고 작은 무쇠솥, 무쇠 화로.
숯다리미, 인두, 절구, 무쇠 차주전자 등.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생필품.
한반도 쇠솥(鐵釜)은 고조선 유적에서부터 발견.
고조선 시대에는 철기문화가 청동기문화와 공존.
이렇듯 고조선에서는 "가마솥" "무쇠 솥"이 있었다.
랴오둥(遼東) 반도.
랴오둥(遼東) 반도 동쪽 해안에 많았던.,제염소.
서해는 조수 간만 차가 커 갯벌과 모래사장이 발달.
서해 갯벌은 세계 5대 갯벌이자 아시아 유일 대형 갯벌.
갯벌 웅덩이에
바닷물을 가두어
소금물 만들기 수월.
고대에는 증발된 소금물을
토기나 솥에 끓여 소금 생산.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기록에
“고조선은 생선과 소금, 대추, 밤 같은 것이 풍족”
해안가에서 어업과 제염이 같이 이뤄진듯 여겨진다.
그리고, 소금에 절인 생선이 널리 유통된듯.
서해는 대륙붕에 해당되어 수심이 얕은 편이며,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물고기가 많았다.
바닷가 백성은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아 팔았다.
소금을 ‘굽는다’는 이야기는 갯벌에서 증발시킨 소금물을
토기나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펴., 소금을 만든다는 이야기.
소금장수는 소금과 절인 생선을 배에 실어
강을 물길로 이용해서 내륙으로 내다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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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연맹체제와 제후국 관계는 소금과 철의 유통.
소금과 철을 통제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소금은 경제적 용도 이외에도 정치적으로 막강한 무기.
소금이라는 말 자체가 귀하다는 뜻.
‘작은 금’, 소금(小金)에서 유래된 말.
실크로드에서 한반도 소금의 수요는 중국 대륙은 물론
대양과 긴 사막을 가로지르는.,무역로를 만들어 냈던 것.
소금교역로에는 도적 떼가 자주 출몰해 각별한 무장이 필요.
대개는 상인들의 안전을 지켜줄 호위대를 구성했다.
당시 상업의 실상은 이처럼 무력과 교역이 혼합된 상태.
소금은 돈으로도 쓰여 소금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소금을 틀에 넣어 굳혀 동전처럼 만든 후
황제의 문양을 새겨 염화로 이용했던 소금이 돈이었다.
중국은 BC 6세기 제나라 이후에 소금 전매제도가 있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 중축은 소금과 철의 전매 덕분.
한나라도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로 국부를 늘렸다.
하여, 시중에서는 소금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없었다.
고조선 때부터 이방 소금상인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레 국경 지대에 시장이 형성된 한반도.
나중에는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게 성장했던 것.
고구려의 유성 국제시장이 대표적인 사례.
역사적으로 조공무역에 의한 교역 품목들은
기록되어 수출입한 흔적이 남았지만 그에 반해
고조선과 고구려는 주로 자유무역 시장이 발달해
소금, 철, 생필품 등이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은 주변 연나라, 제나라는 물론
남방 열대지방의 머나먼 나라와도 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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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세기 랴오둥반도 강상무덤에서 발해만에서 보배조개 출토.
'열대지방 보배조개' 출토는 고조선의 중심지인 랴오둥 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남방 상인들이 몰려와 원거리 교역을 했음을 의미한다.
보배조개.
고조선 각궁의 제조에 쓰인., 남방물소의 뿔.
이는 고조선에서 생산 전매한 소금 덕분이었다.
남방 물소의 뿔로 만든 고조선의 각궁(맥궁)은 유명.
고조선 각궁
고조선 후예.,양궁 선수
남방 물소.
중국 계림.
청해호 헤이마허
남방 물소.
남방물소.,'뿔 가죽' 갑옷.
^ 남방물소 자생지
고조선 남방물소 뿔로 만든 각궁은
활의 탄력성이 좋아 사거리가 길었고
1분에 6발 발사 가능, 적중률도 높았다.
당시 중국 활의 사거리가 50~100m인데 비해
고조선 각궁의 사거리는 180~360미터 정도였다.
고조선은 맥궁 하나 만드는데 보통 2~3년이 걸렸다.
고구려 맥궁.
고구려군
주몽과 그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활을 잘 사용했지만
소서노(召西弩) 상단 호위대 역시 , 노(弩)를 잘 사용.
'소서노의 이름 끝자'인 노(弩)는 무기인 '쇠뇌'를 의미.
쇠뇌는 활에 쇠로 만든 발사장치가 있어
그 기계 힘에 의해 화살을 쏘는 고대무기.
쇠뇌(crossbow)는 활을 나무 막대 위에 올려 몇 가지 장치를 통해
보통의 활보다 긴 사정거리와 강한 관통력을 가지도록 개량한 무기다.
활보다 장전시간이 오래 걸려 연사력은 떨어지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시대 원거리 공격 무기로 쓰였으나, 후에 개발된 화승총에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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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弩 : 쇠뇌 노)
소서노 상단이 처음 들어왔다는.,소래.
소금을 확보하기 위해 들어왔던 것일까?
갯벌에 난 물길이 소라 형태를 닮아.,"소래."
기원전 고구려로부터 남하했던., 소서노 일행이
미추홀(彌鄒忽)로 집입했던 포구가 "소래"였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 입증할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스토리텔링'일까?
.....................디지털 인천남구 문화대전................
소서노는 인천 남구를 포함하는 미추홀(彌鄒忽) 지역에
터를 잡은 백제 건국시조 비류(沸流)·온조(溫祚)의 어머니.
소서노는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어머니로
고대 초기국가 백제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인물.
2008년에 간행된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소서노는 177명 인천 여성 중 한 명으로 뽑혔다.
비류는 남쪽으로 내려와 바닷가에 거주하길 원하여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인천)로 가서 도읍 터를 잡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국호는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 없었다.
비류가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기에 뉘우치다가 죽었고,
그후 비류의 백성은 모두 하남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후 온조는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2017년 05월 11일(목) 인천일보.....................
인천 남동구가 추진하는 소서노(召西奴) 스토리텔링 사업.
예산 삭감으로 잠정 중단됐다.10일 구에 따르면 이달 전문
학술용역사를 선정해 소서노 관련 백서를 제작하려 했으나
올 4월 구의회 1차 추가경정예산 심사에서 예산이 삭감됐다.
당초 구는 예산으로 3000여만원을 올렸다.
소서노 백서를 보급해 주민들의 관심을 제고
인천지역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게 할 취지였다.
백서는 소서노 관련 역사기록물·연구논문·영화·보도자료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500부 정도 제작 될 계획이었다.
백서를 관광 콘텐츠로 활용, 소서노 고장임을 알리려 했다.
현재, 소서노를 기록한 학술 자료 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구의회는 소서노 사업이 역사 고증 문제로 논란.
인천광역시 남구의 백서 제작은., 시기상조 의견.
이에 소서노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하며 추경에서
예산을 편성할 만큼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고.,판단.
앞서 구는 백제 시조인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 소서노가
미추홀(인천)에 왔다는 기록을 토대로 소래 지명설을 주장.
지역 관광 사업을 계획했다 - <인천일보 2월21일자 18면> -
구는 사업 추진을 앞두고 '소서노 사업 용역 개발'을 진행
지난해 용역이 마무리 되자 주민 대상 학술 설명회를 개최.
소래포구 축제에 소서노를 접목시켜 체험행사도 마련했다.
그러나 소서노 사업을 두고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
일부 역사학자들은 소서노가 인천에 머물렀다는 기록만으로
지역관광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논란 여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구의회 관계자 "일부 의원들은 소서노 사업이
꼭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제기했다"며
"소서노 라는 인물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소서노 사업 예산을 올리기만 하면 삭감된다."
"예산이 편성되지 않으니, 용역을 끝내 놓고도
사업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
소래포구
소래습지 생태공원
소래습지 생태공원.,일출.
소래 습지 생태공원
소래 염전.
소금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국가자산이었다.
고구려나 신라, 백제 모두 영토 팽창과정에서
맨 처음 확보한 지역이 소금 산지 해안선이었다.
《관자》, 해왕편(海王篇),〈경중갑편(輕重甲篇)〉등
발해의 서해 염전에서 광범위하게 소금생산을 한., 기록.
고대에는 소금 산지 확보가 국가 건국의 가장 중요한 요소.
...........우리나라 최초 염전.,소래(蘇來)...........
'소서노가 남하해 입항한 포구'.,"소래(召來)" 설.
소래는 삼국시대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정벌을 위해
신라와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입항한 포구라.,소래(蘇來).
1907년 9월 22일 우리나라 천일염 탄생을 알리는 첫 번째 기사.
일본 대장성 기사 오쿠겐조를 초빙해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에
시험용 염전 9917㎡[1정보] 일본식 자염 시험장을 만들었는데
주안리 천일염이 중국산보다 양호해 1909년부터 본격적인 생산.
나아가 인천지역 천일염전이 천혜의 자연적 환경을 이용해
인천항과 수도권은 물론 일본에까지 소금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을 위해 수인 철도를 부설, 염전을 확대해 생산 박차.
그 결과 1933년 주안, 남동, 소래 세 염전은
전국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내내 인천은 소금의 산지로 각인.
1945년 광복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계속 소개되었다.
......................................................................
소래포구역은 인천 남동구 논현동 수인선의 전철역.
인근에 소래포구 종합어시장, 과거 복선전철화 이전의
수인선에도 소래역(1937. 8. 5.~ 1994)에 최종적으로 폐지.
소래염전의 소금을 철도로 원활하게 운송하고자 영업을 개시.
한때는 '역~소래염전지선' 전용선이 분기되어 염전까지 연결.
수인선이 화물선 기능마저 잃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운 최대 공로자이며,
훗날, 백제(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세워 여왕이 된 여걸.
그후, 소서노 여제는 동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쳤다고 전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여걸이 고대사에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다가., 드라마 ‘주몽’ 덕에 어렴풋 알게 된 것.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잘못된 탓도 있었으리라.
그보다는., 숱한 전란으로 고대사 기록이 대부분 소실.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겨우 몇 줄 실려 전해 온 것이 고작이었던 탓이기도 하다.
하여, 전설 속에서 만 겨우 명맥을 이어온., '소서노'
고구려 고분.,벽화.
BC 300년~300년 경까지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이 멸망 또는 쇠퇴하고 부여가 건국.
삼국이 건립된 이후., 2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
이 시기에는 철기문화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농경의 개선,
목축의 성행, 어업의 발달 등과 같은 산업의 전반적인 발달.
또한 부여, 삼한, 고구려 등 초기 국가가 다수 등장하게 된다.
...................부여(扶餘, BC 2세기 ~ 494년).......................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여겨지는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 아청, 위수, 눙안,
창춘, 솽양, 지린, 옌지, 훈춘, 치치하얼, 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로부터 기원한 국가로 추정된다.
단군조선이 BC 238년 해체되면서 여러 부여계 나라가
세워졌는데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
해부루와 금와(金蛙)가 세운 동부여,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
.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고리국에서 나온 동명왕이다.
600년 이상 존속한., 예맥계 부족국가.,북부여('~494')
지금의 창춘 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 성,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
BC 57년 10월 주몽(만 22세)은 고구려 동명성왕으로 등극.
만약 그에게 왕후 소서노가 없었더라면 고구려도 없었을 것.
주몽은 그녀의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대했으나 길지는 않았다.
소서노 나이가 44세에 이르렀을 때
주몽은 활기찬 36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주몽 대왕은 40세의 장년이나
소서노 왕후는 48세로 노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왕후 소서노가 큰아들 비류를 태자로 삼아달라고
주몽에게 수차례 간청했으나 쾌히 승낙하질 않았다.
그러던 차에 주몽의 전처 예씨와 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주몽은 동부여로부터 전처와 아들 유리가 오자
이미 작정한듯 그들을 왕후와 태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서노를 소후(제2부인)으로 강등한 것.
주몽이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 37) 봄 2월에
졸본부여로 와서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고구려를 건국.
소서노가 주몽이 도와 고구려를 세웠기에 그녀를 총애하고
그녀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까지 자신의 자식처럼 대했다.
그러나 이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오기 전까지였다
이에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고구려를 떠날 결심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새 천하를 개척하기로 한 것.
................신채호 作.,조선 상고사........................
소서노 나이 48세로 두 아들, 그리고 10여 명의 심복과
그들의 가솔과 소서노의 보족인 계루부의 백성이 따랐다.
BC19년 9월 그때 장남 비류가 30세, 차남 온조가 25세였다.
정든 고향 졸본을 등지고 남하하여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산에 이르러 옛 대방의 땅에 궁궐터를 잡고 백제 건국.
백제는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制海)’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마한 변한 진한 등 지역을 합한 나라'라는 뜻으로
비류와 온조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으로., 분립하여 건국.
통설로는., 비류는 건국에 실패하고, 온조의 한성백제 번성.
농학자 김성호 박사의 저서 ‘비류백제’설에 따르면 비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서해를 지배하여 남쪽의 마한 땅을 점거.
온조백제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하여, 일본까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한성백제는 소서노가
실권을 쥐고 여왕으로 군림.
이것은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도
소서노가 죽은 해라는 온조왕 13년이
그녀 왕권이 비로서 온조에게 계승된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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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召西奴)는 한산(韓山)에 이르러
비류,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에 올랐다."
.
-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
.
기원전 18년 미추홀(인천)에 거점을 두고 비류백제를 창건.
같은 해 하남(한강 이남) 위례성을 거점으로 온조백제를 창건.
BC18년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을 올라 도읍지를 정했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하남위례성 이전에 백제도읍.
북한산 동편 우이천 유역이나 중랑천 유역으로 비정된다.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백제건국 초~475년' 수도였다.
몽촌토성, 풍납토성 및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등으로 비정.
백제시조 온조 세력은 처음에 서울 강북 지역에 정착했다가,
낙랑, 말갈 등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좋고
땅이 기름진 강남 송파구, 강동구 및 하남 서부로 도읍을 옮긴 것.
그러므로 하북위례성은 오늘날 강북.
하남위례성은 오늘날 강남에 해당되며
한산(韓山)은 '백제 초기' 오백년 도읍지.
또한, 한산은 백제 최초의 도읍지.
부아악((負兒岳)은 인수봉의 옛 지명.
예나 지금이나 범접 어려운.,성지(聖地).
.
고려 말 이성계가 무학과 국망봉에 올라
조선 창업을 구상했다는 곳이 북한산 만경대.
이는 '소서노(召西奴)의 전설'을 모방한듯 하다.
.
해뜰 무렵, 하루재를 넘어 파도치듯 밀려오는 운무.
구름 바다에 반쯤 잠긴 북한산 일대는 다도해 같이 변모.
이때 인수봉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인자한 어머니 모습.
.
부아악(負兒岳) 지명이 가슴에 닿는.,인수봉
전설 속 소서노를 연상케 하는.,위풍당당한 인수봉.
두 아들(비류, 온조)을 거느린듯한 산세.,부아악(負兒岳).
.
1145년 삼국사기 옛 문헌 속 북한산 명칭.,漢山 負兒岳
북한산은 '한강 북쪽에 위치한 큰 산'이란 뜻이 담긴 이름.
조선 숙종 때 남한산성과 대칭된 곳에 축성했던.,북한(산성).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유래된 지명.,北漢(山城)
원래, '백제도성' 하남 위례성을 수호한.,北方 토성.
오늘날, "강남"은 서울에서 한강 남쪽이란 뜻말이고
"강북"은 서울에서 한강 북쪽이란 뜻말로서 통용된다.
마치, 백제 창업 도읍 한산을 남한, 북한으로 구분하듯.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북한산성.
백제 기루왕 5년(132)에,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한편
북방 진출 교두보로 삼기 위해 처음 쌓았던 토성이었다.
오늘날, 북한산성 대서문 밖에 위치한.,노고산(老姑山).
양주시 장흥면 노고산 남쪽에 팔일봉, 은봉산, 앵무봉 등.
이들 400~500m산들은 북한산 국립공원과 맥이 이어진다.
이곳 여러 계곡 신천은 양주 ~ 동두천~ 한탄강으로 유입.
파주시 '법원읍~문산읍' 지방도가 노고산 북편에 걸쳐 있다.
노고산 산줄기가 이어져 북서풍을 막아 주며., 이들 산줄기는
앵무봉~ 일영봉~북한산 상장봉~오봉~ 도봉산으로 이어진다.
필자(선경나라) 견해로는
이곳이 백제시대 노고산이며
노고단이 있던 산으로 추정된다.
북한산 몸통의 머리는 동쪽 끝 부아악(인수봉)이고,
노고산은 그 몸통 서쪽 끝에 위치한.,한미산(漢尾山).
그런데, 조선시대의 한미산(漢尾山)은 이곳이 아니다.
북한산의 서남쪽에는 또 하나의
노고산(老姑山)이 마포구에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의 한미산(漢尾山).
조선시대 북한지 기록에 의하면
부아악은 북한산에서 제1봉에 해당.
북한산 43봉의 모악(母岳)으로 여긴 것.
부아악(인수봉)~ 보현봉 ~ 노고산(老姑山)
이는 곧, 북한산의 머리, 몸통 꼬리를 의미한다.
즉, 북한(北漢)의 꼬리가.,마포구 한미산(漢尾山).
이곳 한미산은 고려 말부터 조선 창업과
긴밀한 유대관계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조선'시대 노고산 자락 광흥창이 그곳.
삼남지역에서 올라오는 세곡미가
마포를 통해 모여드는 곡간.,광흥창.
..............마포 노고산..산신할머니 전설...................
조선시대 "할미산" "한미산(漢尾山)"이라 불리운., 노고산.
노고산은 보현봉에서 마포구 대흥동,신석동에 걸쳐 있는 산.
마포 노고산동 "한미산","할미산"이
조선시대 한양 서쪽 끝에 있는 노고산.
.
"한미산(漢尾山)"이라고 불리우던 것이 잘못 전해져서
"할미산"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노고산(106m)에서 유래.
서강대학교 뒤편 완만한 구릉성 산으로, 북한산의 한 지맥.
보현봉, 형제봉, 인왕산, 무악산, 금화산으로 이어지고,
금화산 이대 뒷산과 신촌역 앞 바람산(風山)에서 이어지는
노고산 일대에는 웃우물·큰우물·논우물·쌍정우물 등 여러 우물.
이 일대에는 산신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고 하여.,노고산(老姑山)
노고성 할머니가 치마로 돌을 옮겨 성을 쌓다가 도락산과 노고산에
걸처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밑에 게가 할머니를 거기를 물어버렸다.
그러자, 화난 노고성 할머니는 게를 파주 너머로 던졌단다.
이로부터 이곳이 노고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곳 노고산이나 노고봉을 할미봉 이름으로도 부른단다.
....................................................................................
老姑山에서 老姑(노고)는., 小西奴(소서노).
소서노는 백제의 창업자이자 수호신.,;老姑.'
노고산(老姑山, 495.7m)에서 바라본.,북한산.
한북정맥 7구간에 속한 노고산은 북한산 전망대.
전국 어디나 노고산 지명은 옛 백제영역의 흔적이다.
늙은 할미, 老姑는 '백제 수호여신' 소서노를 의미.
노고산은 백제시대 천제를 지내던 노고단이 있는 산.
우리나라에서 노고단이 있던 곳은 모두 옛 백제의 영역.
백제 전성기에는.,'천왕성모(天王聖母)' 소서노.
원래, 지리산 노고단은 백제시대 천제를 지낸 곳.
신라는 삼국통일 후, 경주 성모사를 노고단으로 이전.
통일신라시대 노고단은 '신라 수호여신' 선도성모 사당.
475년 고구려 장수왕 3만군이 북한산성으로 처들어오자,
그당시 백제 개로왕은 신라 구원군과 연합해 대항해 싸웠으나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져 탈출하다가 붙잡혀 참수당했다.
이때 아차산성 밑에서 붙잡혀 참수당한 개로왕.
그당시 아차산성은 백제의 한강을 지키는.,요새.
개로왕은 한강으로 탈출하려다가 실패한듯 하다.
북한산은 예나 지금이나.,전략적인 군사 요충지.
인수봉 귀바위가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는 동네.,우이동.
'우이동 옆 골짜기' 어언동(於焉洞)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우이령. 옛지도 동국여도에서 어언동현(於焉洞峴)이 우이령.
우이동은 마들평야가 열리는 들머리에 위치.
그 아래가 오늘날에는.,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백제시대 초기 도읍지 영역으로 추정되는.,지역.
조선 '숙종~영조'때 북한지 기록에 의하면
북한산 최초의 지명은 "고구려군" 또는 "남평양"
북한산성은 백제 초기 온조가 처음 쌓았다고 기록.
우이동은 초기 백제 궁궐 옛터가
기원 전부터 있던 곳으로 짐작되는 곳.
즉, 백제의 역사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듯.
.
원래, 우이(牛耳)는
‘천하(天下)의 패권'
요새지라는 뜻말이다.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겨룰 때
월 구천을 누른 오 부차는 황지 모임(黃池會)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물로 '소의 귀'를 잘라 올렸다.
.
하늘에 제를 올라고나서
전쟁터로 출정하기에 앞서
용사들 사기를 돋는 음식이
곧, 오늘날 '소머리국밥'이다.
전쟁터에서 적의 수급을 베어오는 것을 대신해
적의 귀를 베어온 숫자만큼 공로로 인정해., 포상.
승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무덤을 만들기도 한다.
.
전쟁에서 승리의 상징.,우이(牛耳 : 소의 귀)
우이령 북쪽은 도봉산, 우이령 남쪽은 북한산.
우이령은 삼국시대부터 전술 전략적 군사요충지.
우이동에서 바라본.,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현재,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5%를 찾이한 면적.
북한산 주봉 3봉이 삼각을 이루고 있어.,삼각산.
그외 95% 면적 대부분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
조선시대부터 군사보호지역.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삼각산 지역 만.,사대부 출입을 허용.
하여, 옛 성현들의 문헌 속에서는.,삼각산.
고려 성종(재위 : 981~997) 이후
1900년대까지는.,"삼각산(三角山)".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3각을 이루어.,"삼각산."
"삼각산" 암봉마다 연꽃 봉우리 같아.,"화산(華山)"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과 더불어.,"오악(五岳)".
한반도에 위치한 5대 명산을 뜻하는.,오악.
'통일신라 ~ 고려~ 조선' 시대까지 쓰여왔다.
오악에 천제를 지내는 나라가 한반도 통일국가.
.
동아시아 해상왕국 다툼을 했던.,삼국시대.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한다."
'서해로 통하는 수로' 한강을 품고있는.,한산.
.
부산, 울산, 마산, 군산, 아산, 안산, 한산, 등.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항구를 거점으로 한 도시.
백제 도읍 한산은 조선시대 한양이고 오늘날 서울.
한산은 삼국시대로 접어들며
그 입지적인 중요성이 부각되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장.
백제가 약 500년간 점령했고
고구려가 약 100년간 점령했고.
그후, 신라 25대 진흥왕이 점령했다.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
.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초 거란이 침략을 하자
태조 왕건의 관을 북한산성으로 옮긴뒤 성을 증축.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 격전장이었던 북한산성.
1388년(우왕5년) 고려 말에 최영장군이
중흥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
그후, '고려 말~ 조선 중기' 지명.,중흥성(中興城).
.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북한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숙종 37년(1711), 대대적으로 축성공사.
.
조선 숙종 때 "북한"은 대외비 북한산성 성안 지명.
남한산성을 축조한 성안 "남한"에 대칭해 명명된 지명.
숙종 때 "북한"은 산성으로 애워싼 피난도성 개념의 지명.
산의 개념이 아닌
산성의 개념으로
불리운 지명.,북한.'
옛부터, 북한산 43봉은 산성, 15성문과 더불어.,군사요충지.
오늘날까지 위치 파악이 되는 않는 지명 뿐인 봉우리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인 출입이 극히 제한되었던 군사 지역.,북한.
.
북한산성 12성문 요소마다 143 상량(초소)에 승병을 배치.
1894.7~1896. 2월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甲午更張)
그후, 승병수비대 제도가 폐지되었고 승영 사찰은 폐허화되었다.
북한산성 내 승병수비대이자 수행처.,승영 사찰.
약 30년 간 산성 승병수비대를 지휘 통솔한., 성능.
도총섭 성능은 산성 내 승영 사찰을 복원, 중창, 창건.
'
....산성 내 13 승영사찰...
태고사 : 화약, 경판 보관소.
중흥사 : 조선 8도 승병 지휘소.
노적사 : 중성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서암사 : 수구산성 일대 수비 및 관리
국녕사 : 가사당암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원각사 : 승병 모집, 양성 및 훈련소,
부왕사 : 부왕동암문 일대 수비 및 관리
보광사 : 소동문(대성문) 일대 수비 및 관리
보국사 : 보국문 일대 수비 및 관리
용암사 : 승병 모집, 양성 및 훈련소
상운사 : 북문 일대 수비 및 산성 관리.
원효암 : 북한산성에서 '북 &서' 파수대
봉성암 : 북한산성에서 '남 & 동' 파수대
두 암자는 산성 밖까지 멀리 보이는 위치.
원효암에서는 구파발까지 한눈에 보이고
봉성암 천해대에서는 도성 안이 한눈에 보인다.
구파발 파발대, 도성 수비대와 연계된 파수대 암자.
.....................................................................
북한산대피소
용암사지는., 용암문 인근.,북한산대피소(무인산장).
그곳에 가면.,용암사 옛탑을 비롯 넓은 공터 등이 있다.
옛 규모를 짐작케 하는.,풍부한 샘물, 화장실, 소운동장.
'병풍암~만경대' 암릉 곳곳에 상량(초소), 여장 흔적들.
오늘날, 인수봉을 즐겨찾는 클라이머 조차 살 떨리는 곳.
약 300년 전 어떻게 그곳까지 올라가 상량에서 근무했을까?
여장(女檣)은 성벽 위에서 조총 사격을 위한.,담장.
조선 숙종때 산성 수비군은 이미 조총으로 무장된.,흔적.
그당시 여장은 4가지 종류이며 용도에 따라 각각 다른 모양.
만경대 초입과 병풍암 초암릉 허리
시야가 트인 곳마다 축조한.,산성 위 여장.
보초가 몸을 숨기기 위해 쌓은 낮은 담.,여장.
그 험란한 곳마다 어떻게 여장을 축조했을까?
그 의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용암사 옛터.
현재 북한산대피소 위치가 조선시대 용암사 옛터.
'병풍암능선 날머리' 용암봉 용머리바위 아래에 위치.
용암봉 옆에 위치한.,일출봉(日出峰)
일출봉 옆에 위치한., 월출봉(月出峰)
월출봉 위에 위치한.,기룡봉(起龍峰)
기룡봉 곁에 위치한.,반룡봉(盤龍峰)
용암사 옛터는 조선시대 숙종 때 승병 훈련장.
.
신라시대 화랑을 길러내듯 강도 높은 체력단련과
조선시대 정예군을 뛰어 넘을 만큼 무공 단련을 통해
엄선된 8도 승병들을 13사찰에 북한산성 수비대로 배치.
그후, 조선시대 북한산성 13사찰에 상주한.,승병.
조선 숙종~영조 재위때 정예군은 십팔기로 단련된 무예 고수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깨달은.,조선.
북한산성 축성 후 산성의 행궁에서 배수진을 칠 각오를 했던.,숙종.
산성 축성때 외곽 12암문 밖 요충지마다 3군부를 배치.
산성 내 정예군과 산성 밖 주둔군과 연계한.,방어진을 구축.
전란 시 산성을 포위한 적을 배후에서 기습 공격 및 방어할 목적.
그 사실을 알려주는.,조선 영조 때 <북한지>
북한산성 축성 책임자 성능이 집필한.,옛 문헌.
30년간 팔도도총섭을 역임한 후 쓴.,인수인계서.
1745년(영조21) 승려 성능이 펴낸.,북한산성 지리책.
조선시대 '숙종 ~영조' 30년간 산성에서 근무한 성능.
<북한지> 기록을 토대로 1990년부터 복원된 북한산성.
........북한지 기록 속 북한산 43봉......
"북한산은 그 줄기가 인수봉(仁壽峰)에서
남서쪽 백운봉(白雲峰 : 백운대)으로 이어지고,
백운봉에서 산성의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만경봉(萬景峰:국망봉), 노적봉(露積峰), 용암봉(龍巖峰),
일출봉(日出峰), 월출봉(月出峰), 기룡봉(起龍峰), 반룡봉(盤龍峰),
시단봉(柴丹峰), 덕장봉(德藏峰), 복덕봉(福德峰), 석가봉(釋迦峰),
성덕봉(聖德峰), 화룡봉(化龍峰), 잠용봉(潛龍峰),
보현봉(普賢峰), 문수봉(文殊峰)이 연이어 있으며,
나한봉(羅漢峰), 나월봉(蘿月峰), 증취봉(甑炊峰),
용혈봉(龍穴峰), 용출봉(龍出峰), 미륵봉(彌勒峰)
줄기가 대서문(大西門)을 향하고 있다." - 중략 -
"또한 보현봉에서 남동쪽으로 형제봉(兄弟峰)을 거쳐
북악산으로 내달은 주맥이 보이는데, 이 줄기는 예부터
(한양 )도성과 연결된 용의 맥이라 하여 신성시하여 왔다."
...........................................................................
북한지 내용은 도리(道里)·연혁(沿革)·산계(山谿)·성지(城池)·
사실(事實)·관원(官員)·장교(將校)·궁전(宮殿)·사찰(寺刹) 누관(樓觀)·
교량(橋梁)·창름(倉廩)·정계(定界)·고적(古蹟) 등 14개조로 구분되어 있다.
조선시대 자주국방을 위한 대외비 군사 시설물.
.
남한산성, 평양성 축성책임자 '각성'의 제자.,성능.
스승 각성 승려로부터 축성술을 전수 받았던.,성능.
승유억불 조선시대 '축성책임자 승려' 신분이 놀랍다.
의승병 최고 지휘직.,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대사 등
조국과 백성을 위해 전국의 의승병을 모아 총 지휘.
남한산성은 1624년(조선 인조 2) 벽암 각성 스님이 축성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에서 스님들을 모아 2년 만에 완성.
성능 역시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 6개월 만에 북한산성을 완성.
1711. 4. 3 ~그해 9월까지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조선 숙종 때 축성한 북한산성
북한(산)은 조선 숙종 때 이후 오늘날까지 지명이고
한산 부아악은 삼국시대 이전 '소서노 전설' 속 옛 지명.
'아이를 등에 업은 어머니 모습의 산'이란 뜻.,부아악(負兒岳).
인수봉은 고려시대에 일명 부아봉(負兒峰)으로도 불리웠으며,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을 지휘하고 <북한지>를 남긴 성능(聖能)은
북한산 43봉 중에서 제1봉 인수봉은 백제 건국 신화와 관련 있는 봉우리로 추정.
인수봉은 '북한산 43봉의 모산(母山)'이라 여긴.,성능.
.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창건했던 女帝.,소서노(小西奴)
소서노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때 가문의 재물을 총동원.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동북아 최강국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 ~ 기원전 6년)........
아버지는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졸본부여 수장.,연타발.
졸본부여는 부여 일족이 도읍지를 졸본에 정하고 세운 약소국.
소서노는 동북아 최강국인 '북부여'의 왕자 우태와 결혼을 한다.
우태가 죽자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부여로 돌아와 주몽과 재혼한다.
졸본부여 수장 연타발의 둘째딸 소서노.
대규모 상단 수장이자 졸본부여 국왕.,연타발.
해상무역 상단 수장은 재력보다는 군사력이 절실.
졸본부여 소국의 군사력으로는 한계를 느낀 연타발.
주몽을 첫눈에 자신의 후계자로 손색 없는 인물로 판단.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데 필요한 재력을 기꺼이 지원했다.
졸본부여 약소국에서 시작된 고구려는 동북아 최강국으로 성장.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주몽설화 중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자 그곳의 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본기 -
(졸본부여를 달리 이르는 말이.,구려국.)
(고주몽이 구려국 왕위에 오른 후.,고구려.)
"구려는 본래 고조선 땅이었다." - 제왕운기 -
오늘날, 중국 동북부 지역 랴오닝(遼寧)성(省)과
길림성 일대 및 북한 자강도 지역이고 중심지는 졸본.
구려국은 정치 군사 산업 최고통치자가 왕이고
중앙통치기구 제가협의회(諸家協議會)가 있었다.
특권 계층 이익을 대변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협의회.
군의 주력은 기병이었고 철기와 청동기 문화가 발달,
농기구와 공구 등이 생산되었고 중국 여러 지방과 무역
대대로 국정운영과 상단 운영 경험이 풍부한.,소서노 가문.
비류와 온조를 낳고 과부가 된 29 세.,소서노
부여에 임신한 부인을 두고 망명했던 21세.,주몽.
연타발은 딸만 셋이라 사위 주몽의 적극적인 후원자.
소서노는 주몽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창건한 위업을 달성.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여겼다는 주몽.
고구려 동명성왕이 된 주몽은, 친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기원전 19년 4월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 졸본에 도착.)
(그해 9월에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으로 즉위한 유리.)
(유리를 낳은 예씨 부인에게 정궁 자리를 넘긴.,소서노.)
(불과 5개월 동안에 내부 권력 다툼이 치열했던듯.,)
소서노는 장래 두 아들의 신변을 걱정했던 것일까?'
'아니면, 동명성왕 주몽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고구려 보다 크고 원대한 대륙백제 창업을 꿈꿨던걸까?'
사랑보다는 각자의 목적이 앞섰던.,정략 결혼생활.
주몽은 소서노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 입어 동명성왕에 올랐고
소서노는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를 등에 업고 상단 세력을 키워 갔지만
정치는 1인자보다 더 막강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권력의 생리.
.
소서노는 48세에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하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까지 창건.
그후 비류와 온조를 추종하는 세력 간 다툼에 중재 실패.
향년 61세 나이에 왕녀로서
하남 위례성에서 사망했다는
역사 속 전설적인 여제.,소서노
.........................................
소서노는 대대로 동북아 해상무역상 가문에서 성장.
그녀 역시 압록강 수계를 오가면서 낙랑 옥계와 무역.
낙랑군과 마한의 절충지대 황해도 남단에 터전을 마련.
그곳을 근거로 서해연안과 내륙 수로를 오가며
한반도 중남부 지역까지 해상무역 범위를 확대.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미추홀에 비류백제를 창건.
남편 주몽이 동명왕으로 등극 후 前부인 아들 유리를 태자로 삼자
48세 나이에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창업
그 이후 소서노는 왜(현재:일본)까지 3국을 창업했다는 야사도 전해온다.
"서로는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 건너 고구려에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 건너 왜(일본)에 접한다."
- 구당서 백제전 백제 영역 기록 -
진시황 때 일본에 망명한.,서복 뱃길.
'소서노는 기원 전 진시황 이후
'한중일'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
닫혔던 뱃길을 다시 연 여제 아닐까?'
실크로드.
소서노 전설의 고향이라 고려시대 장군바위로 불리웠던.,인수봉.
BC 18년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함께 올랐다는.,부아악.
그 전설 속 구전이 사실이라면, 3인은 기록 상., 인수봉 최초 등정자
과연, 그 옛날에 인수봉을 오를 수 있었을까?
고려 예종 원년(1106) 삼각산(인수봉)에.,두 차례 지진
조선 선조 30년(1597) 삼각산 (인수봉)에.,한 차례 지진.
그후 인수봉은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BC 18년 ~1106년 사이에도
몇 차례 지진이 있었을듯 싶다.
전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인수봉 뒷면인 설교벽능선 아래에는
좌측 사기막골 & 우측에 설교벽 계곡.
집채만한 바위덩어리들이 무수히 많다.
'1천년의 흔적일까?'
'2천년의 흔적일까?'
'그보다 오래 전일까?'
'최첨단 지질학적인 탐사방식으로
지진 연대를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인수봉 정상., 돌탑 흔적 & 고인돌 동굴 속 벽면 마애불 흔적.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에 유실되고 깍여 지금은 희미한 흔적 뿐.
인수봉은 조선시대에도 분명 누구인가 사람이 올랐던 흔적들이다.
1711. 4. 3 ~그해 9월까지 숙종때 북한산성 축성.
그후 구한 말 '유북한산기'에도 임검이 올랐던 기록.
'조선시대~ 구한 말' 임검은 오늘날 경찰에 해당된다.
숨은벽능선 정상부에서 보이는.,인수봉 설교벽능선.
그곳이 조선시대 지진발생 이전 옛 등산로로 추정된다.
숨은벽 능선을 오르다보면 발 아래 좌우로 거대한 여근곡.
좌측.,설교벽 계곡.
우측.,숨은벽 계곡.
설교벽계곡 곳곳에 옛 지진 흔적으로 추정되는.,
집체만한 바위들과 수북하게 겹겹이 쌓인 낙석들.
수천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곳 바위벽.
자칫, 잘못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산세.,여근곡.
숨은벽계곡은 초입부터 폭포와 미로의 연속인 여근곡.
자칫, 길을 잘못 들어가면 엉뚱한 곳에서 헤메이기 쉽다.
'아름다운 여인의 베일 속 신비'처럼 유혹적인 비경의 연속.
인수봉은 두 여근곡 사이로 우뚝 솟은.,남근 형태.
숨은벽능선은 거대한 여근곡 핵심부 클리스토리 형상.
억만년 Z기류 비바람이 깍아 빚어낸 여근과 남근의 조화.
북한산 동쪽의 남성다움.,인수봉.
북한산 서쪽의 여성스러움.,숨은벽.
Z기류 출몰 다발지역.,숨은벽 정상부.
정상에 다가갈수록 몸을 날릴듯한 바람.
태고의 신비가 피부로 느껴지는.,숨은벽.
'오랜 세월 비바람이 깎아 빚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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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수줍은 속살 같은 숨은벽 정상부.
그곳 하얀 바위벽이 노을에 붉게 물들어 가면
천신을 유혹해 가뭄에 단비를 갈구하는 여신의 자태.
북한산 동쪽 하루재에서 바라보는 인수봉은 우람한 남근 산세.
숨은벽능선 허리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정상 주변은 여근곡 산세.
마치, 성숙한 여인이 하늘을 향해 한껏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산세.
계곡미와 암릉미가 잘 어우러진.,북한산 제 1 비경.
500){this.width=500;} ">
.
좌측 설교벽능선과 우측 염초봉능선 사이에 숨은벽 능선.
바람골 숨은벽 암장 야영장에서는 해가 지며 동시에 달이 뜬다.
여근곡 비좁은 공간 틈 사이에서 일몰 월출 현상은 신비롭기만 하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천신과 여신이 사랑을 나누는듯
바람이 울부짖으면서 흐느끼는.,바람골.
숨은벽계곡 정상부에 위치한.,바람골.
바람골 숨은벽 정상 아래.,숨은벽 암장.
숨은벽 클라이머들이 즐겨 찾는.,야영장 터.
바람골 동쪽에 해가 뜨면 서쪽으로 달이 기울고
바람골 동쪽에 달이 뜨면 서쪽으로 해가 기울면서
이때 급변하는 기상변화로 돌풍이 인수봉을 맴돈다.
때로는 몸을 허공으로 날릴듯한.,.Z기류.
'해의 나라'로 자처한., 고구려.
'달의 나라'로 불리우는.,대륙백제
'바람의 나라'로 일컬어지는.,대륙신라.
'동아시아 해상왕국'.,고려(korey).
'해와 달의 나라'로 자처했던.,조선.
궁궐 왕좌 뒤 '일월도'는.,조선의 상징.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상징이리라.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이자 격전지.,북한산.
숨은벽계곡 초입은 전사자 넋을 달래주던 서낭당터.
지금은 전설 속에서 겨우 명맥을 잇는 옛 지명., 부아악.
부아악 정상 동굴 벽에 불상 암각화 흔적. 說.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이미 깍여 사라진듯.
'혹시, 숙종 때 도총섭 성능이 남겼던 흔적 아닐까?'
'만경대 ~ 병품암' 암릉 바위길 험준한 구간마다
축성한 석공이거나 또는 도총섭이라면, 가능할듯.
조선 말, "부아악을 오른 군사를 보았다." -유북한기-
'고독의 길'로 올랐던 것일까?
1927년,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 박사가 초등한 루트.
기록 상으로 '고독의 길' 초등은 1929년 9월에 오른.,아처.
"내가 올랐을때 이미 누군가 전에 오른 흔적이 있었다." - 아처-.
1995년 영국의 산악회가 찾아낸 아처 등반 기록
1936년 아처가 영국 알파인 클럽에 제출했던 기록.
59년간 영국 알파인 클럽 캐비넷 안에 묻혀있던 기록.
“인수봉 북면으로 등반을 시작해
'초등 루트' 둘째 마디 동굴을 통과해
O字 크랙을 통해 인수봉 정상에 올랐다.”
고독의 길.,O字 크랙.
O자 크랙은 女性 그것과 恰似한 핑거 포켓 홀드.
그곳 실크랙 선상 구멍 중에서도 가장 잘 생긴 구멍.
여체의 신비를 연상케하는 0字 형태의 핑거 포켓홀드.
'고독의 길' 하일 라이트.,영자 크랙.
'영자크랙'은 '아처'의 기록에서 유래.
알파벳 O字 - 숫자 0字 - 영(O).,영자크랙.
하여, '아처 루트'라고도 불리우는 "고독의 길".
"고독의 길"이라 불리운 후에야 발견된.,아처 기록.
"고독의 길"은 누가 언제 명명했는지 밝혀진 바 없다.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고독의 길."
그래도, 인수봉에서 가장 인기 높은 고독의 길.
난이도 5.8로 초보자들이 많이 찾아 항상 붐빈다.
주말이면, 붐비므로.,평일에 오르는게 좋을 것 같다. .
인수봉 매니아 클라이머들의 애환이 담긴.,'고독의 길'.
인수봉 초등 루트이지만 클라이밍 루트 아닌 리지 코스.
'고독의 길'은 '설교벽 리지'와 더불어 인수봉 리지 코스.
'인수봉 루트' 족보에는 없지만
클라이머들에게 가장 인기 높다.
인수봉 동쪽 오른쪽 끝에 위치한.,'고독의 길'의 들머리.
인수봉에 음습한 여근곡이 있다는 사실이 늘 새삼스럽다.
들머리부터 남심(男心) 유혹하듯.,살떨리게 치솟은 하늘벽.
"감히, 오를 자신 없다면, 처다보지도 말라." 는듯.
이곳을 찾을 때마다.,동정을 간직한 숫총각의 설레임.
마치, 꿈에 그리던, 여인의 신비를., 난생 처음 겪는 느낌.
과연, '숫총각 첫경험' 같은 하늘벽을 무사히 오를 수 있을까?
첫마디 15m크랙과 둘째마디 30m 크랙.
두마디 크랙 바위벽을 오르면.,읍습한 동굴.
거대한 동굴 루트를 통과하면, 셋째 마디 출발점.
하늘을 찌를듯 우뚝 솟은.,인수봉.
거대한 남근 형태의., 화강암 덩어리.
그안에 큰 동굴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로 같은 동굴을 빠져나오면, 넓고 탁 트인 벽
귀바위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다섯째 마디.
소귀 같아 산 아래 동내 우이동 지명 유래가 된.,귀바위
귀바위 아래까지 도착하면, 까다로운 침니 바윗길.
침니를 통과하면 '고독의 길' 크라이막스.,영자 크랙.
영자크랙 앞에 복도 같은 통로가 정상부 침니 속 바람길.
인수봉 상단을 동서로 관통한.,통로.
귀바위 아래에서 오아시스 상단까지 관통.
Z기류가 오랜 세월 인수봉을 깎아 빚은 바람길.
영자크랙 통과 후
참기름바위를 지나면
정상으로 가는 숲속 오솔길.
인수봉 정상부 하얀 바위벽 위에
은밀한 숲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숲속 사이 오솔길따라 오르면.,정상.
거대한 남근 형태로 우뚝 솟은.,부아악.
정상에 오르면, 거대한 버섯 형태의 바위.
버섯바위 아래 동굴 속은 클라이머들의 쉼터.
.
'소서노'의 발자취를 따라
부아악 등반도 흥미로울듯..
덧 말
백제는 건국설화가 다양하고 그 시조에 대한 이견이 분분.
그만큼 백제를 형성한 지배집단의 계통이 복잡하다는 방증.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는 형제관계로 강조하기 위한 연맹설화.
비류가 형으로 기록된 것은 초기에 온조계 보다
비류계 집단의 세력이 우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온조계 세력이 위례지역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후기에는 비류계 집단을 포섭하여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
BC 18년은 온조계 집단이., 비류계 집단을 아울렀던 시점.
............................온조..................................
온조왕은 백제의 성장을 위협하는 낙랑군(樂浪郡)과
낙랑의 사주를 받은 말갈의 침공을 수 차례 막아냈다.
또한 마한 일부를 복속시켜 낙랑 침공계획까지 세웠다.
백제는 낙랑· 말갈· 마한 등 외부 세력을 효율적인 방어
새로 편입된 영토에는 지방통치구획으로 부(部)를 설치.
삼국사기에 백제발전 온조왕 치세(治世)를 소급해서 언급.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언급.
그러나, 마한 전체를 정복한 것은 근초고왕 때의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 대인 것도 의문.
백제연맹체 강력한 왕권은 훨씬 후대인 고이왕 무렵.
이러한 견해에 반하여 풍납토성의 발굴 성과에 힘입어
온조왕 치세 업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도 제기.
........................................................................
온조 원년(BC 18년) 한수이북에 위례성 도읍을 세우다,
온조 14년(BC 5년) 한수이남(하남 위례성)으로 천도(天道).
개루왕 5년(132년) 북진정책 일환으로 광주(북한산성)로 천도.
근초고왕 371년 '한산' 천도.
문주왕 475년 '공주'로 천도.
성왕은 538년 '사비'로 천도.
의자왕 660년 온조백제 멸망.
.........................비류(沸流)..................................
백제 미추홀(彌鄒忽 : 인천 부근)에서 일어난 왕족의 시조.
삼국사기에는 온조 시조 설화와 함께 비류 시조설도 전한다.
비류는 미추홀에서, 온조는 한강 유역에서 지배세력으로 성장.
한편 삼국사기 등에는 비류 계보는 전하지 않으며,
백제왕들은 모두 온조(溫祚) 계보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비류계 설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존재한 때문.
‘비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송양국(松讓國)을 비류국이라고도 하고
고구려 송양국 강(江)의 이름도 비류수라 하고 있다.
또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는
비류를 ‘피류(避流)’로, 온조를 ‘은조(殷祚)’로 표기한다.
..........................................................................
비류와 온조는 삼각산에 올라가 서로 살 곳을 정하기로 했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으므로 미추홀의 문학산에
동생인 온조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십제를 세웠다.
그런데, 비류가 세운 곳은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르며,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 어려워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비류는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에 가 보았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넓어 나라의 기틀이 잡혀 있었다.
이에 비류는 의기소침하여 미추홀에 돌아와 죽고 말았단다.
......................
......................
.
이는 비류가 국가경영에 실패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결.
비류의 백성이 온조의 십제에 흡수· 병합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
비류의 능을 에분(恚墳)[분해서 죽은 사람의 무덤]이라 불렀다.
그의 능이 문학산 정상에 있을 것이라 하나 위치를 알 수 없다.
새 국가 건설을 위해 고구려를 떠나 남하한.,비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아우인 온조와도 결별.
이 과정에서 신하들의 간언을 물리쳐 이들과도 갈라서
비류를 따르는 신하가 없었다는 것은 장차 미추홀에서의
국가 경영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임을 이미 예견한 사건.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추홀로 옮겨
문학산 주변을 근거지로 하여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은
미추홀이 도읍지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산성.................
건립 연대는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고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나
문학산성 안팎에서 백제 토기 조각이 발견.
문학산 동쪽 구릉에서 청동기시대 주거 유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문학산 일대에 청동기시대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
문학산 주변에는 초기백제 타날문[두드림무늬] 토기 조각이 많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때 삼국 시대에도
대규모 주거지가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인천광역시에서 실시한 문학 산성 지표 조사와
2002년 인하 대학교에서 문학산 일대 문화유적 지표 조사.
수습된 토기와 기와 등은 대개 삼국시대 후기와 통일신라 것.
그 중에 초기 백제 토기 조각들도 적은 수가 수습되기도했다.
이를 볼 때 산성을 쌓은 시기는 삼국시대 초기까지.,올라간다.
문학산성은 삼국시대 영토 분쟁이 치열했을 당시에 건립된 것.
확실한 점은 삼국 시대 이미 문학산 주변에는
대규모의 주거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산성과 여기서 발견된 출토 유물들은
백제 건국기 비류(沸流) 세력이 터를 잡았던 미추홀이
인천이었음과 문학산이 서해안 요충지였음을 대변한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문학산성은 문학산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 정상 중심으로 성곽이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이 되도록 한 바퀴를 둘러쌓는 방식) 석성(石城)으서,
처음 쌓을 당시는 토성(土城)의 형태로 쌓았던 것으로 추정.
둘레 577m 석성으로 남북 간 길이와 비교하면
동서 간 길이가 더 긴 타원형 형태를 하고 있다.
이중 동문은 군부대 들어서기 전 1959년까지 확인.
서문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이미 조선 시대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내 시설은 수구 두 개 만이 남아있다.
문학산 정상 쪽으로 오르면 정상부 군부대가 위치.
산성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군부대의 안쪽에 있고
그 남쪽으로 조성된 등산로에서는 남벽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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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전망대.,문학산 정상.
......................백제의 해외진출........................
항만이 매우 발달한 한반도의 서해안을 차지한 백제.
해양강국 ·바다의 제국으로서, 특히 일본 열도에 진출.
왜국의 문화적 모국으로 대륙영토를 지배했다는 주장들.
옛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부여를 공격하는 등
만주에서 활동했던 사례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4세기 중엽 백제가 요서 지역(요서군, 진평군).,통치.
당시 백제는 한강 유역 중심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육로보다는 해상으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4세기 요서 지역은 전연, 후연 등이 지배하였기에
백제가 이 지역을 지배했더라도 매우 짧은 기간이었을 것.
그렇다 하더라도 백제의 발자취가 이곳에 남은 것은.,사실.
490년대 백제가 제나라를 도와 북위의 기병을 대파했다는 기록.
<남제서> <백제전>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을
상륙작전을 통해 격파한 뒤 광양, 성양 등 7개 군을 지배했다고 한다.
현재 백제의 대륙 지배는 100% 영토 지배였다는 주장과
상업적인 거래를 위한 진출이라는 주장,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주장 등이 분분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측 기록에 나타난., 백제의 지배 사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통해 백제가 활발한 대외진출을
할 만큼 충분한 국력과 해양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4세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 열도로 진출하여
선진 문물을 전수하고, 왜의 군사들을 편의에 따라 이용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일본 곳곳에 백제의 자취가 남아 있다.
백제는 앞선 항해술과 해외교역을 통해
한정된 국토를 벗어나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친 나라였음을 옛 기록 상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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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 설.
첫댓글 연속극 주몽을 보았을때 소서노의 이름은 익히 알았지만 이렇게 큰인물인줄은 이제야 알았네요...
선경님의 해박한 역사의 흐름으로 이제 좀 눈을 뜬것 같아 기쁨니다...
.
덕담 덧글., 감사합니다.
영봉에서 바라본.,인수봉.
인근 육모정길.,아름답지요.
노고산 예비군훈련장 정문 건너편이.,상장봉.
'상장봉~왕관봉~육모정~ 영봉' .,'상장봉능선'
'도봉산과 북한산' 사이를 가로지르는.,천연 성곽.
'송추~우이동' 4km구간 군사도로.,우이령.
도봉산 오봉과 상장봉 능선 사이.,작전도로.
'1군단 휴양소' 겸 '1군단 유격훈련장'이 위치.
예나 지금이나.,수도권 군사적 방위 요충지.
5.29(화)에는 '송추 ~사패산 ~ 회룡사'
4명 모두 우연히 소망교회 홍대 동문들.
사패산 정상에서 그 사실을 알고 파안대소.
그곳에서 내려다본.,마들평야.
20/30년 전까지 곡창이었지요.
오늘날,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아..오집사님이 전에한 그코스로 다녀오셨군요..
모두들 동문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니..더더욱 친근감을 갖을 수 있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