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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맥(胡貉) 出身, 金日磾, 휴도국(休屠國)은 중아(中亞) 땅 [제4편]
맥(貊)[胡貉•胡貊] ‘동구(東歐), 아주(亞洲)’의 北方地帶 패자(霸者)
2023년 12월 17일
○ 오늘의 “제4편”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었던 “호맥(胡貉)=호맥(胡貊)”에 대해 고전(古典) 원문(原文)을 근거(根據)와 논거(論據)로 이를 설명(說明)하고자 한다.
이 사료(史料)는 우리 카페(Cafe)에 이미 소개(紹介)되어 있는 것들이다. 다만 이를 보충(補充), 보완(補完), 정리(整理), 연결(戀結)을 새롭게 한 것이다. 「1, 2, 3, 4편(篇)을 보면 : “맥(貉)•맥(貊)=호맥(胡貉)•호맥(胡貊)”에 대한 총정리(總整理)라고 해도 무방(無妨)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제5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無妨)한 “다음 게재(揭載) 편”과도 상호보완(相互補完)되는 내용(內容)으로 시대적(時代的)으로 이어지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물론(勿論), 이건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다.
➨ 한참 전(前)에 이런 질문(質問)을 받은 적이 있다. 즉(卽),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 곧 고조선(古朝鮮) 이전(以前)부터 고조선(古朝鮮)과 근대(近代)까지 망라(網羅)한 것이다】가 과연(果然) 동구라파(東歐羅巴) 또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까지 영토(領土)로 했다는 것에 대해 근거(根據)가 너무 미약(微弱)한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필자(筆者)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곧 오늘날의 세계(世界)는 자국(自國)과 자국민(自國民) 중심(中心)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데, 국가이익(國家利益)을 극대화(極大化)하는 것이 가장 애국애족(愛國愛族)인 시대(時代)이다』
중국(中國) 당국(當局)은,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진(秦)과 시황제(始皇帝)의 것”이라고 하며, 선전도구(宣傳道具)로 활용(活用)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진(秦)이나 시황제(始皇帝)”와 관련(關聯)된 그 무엇하나 발견(發見)되지 않았고, 오히려 「도용(陶俑)들은 전형적(典型的)인 조선인(朝鮮人)의 형상(形象)」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조선(朝鮮)”의 것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일로 치부되어 설명(說明)조차 없다.
동구라파(東歐羅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여러 나라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발굴(發掘)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국(自國)과 자국민(自國民) 위주(爲主)로 설명(說明)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고려(高麗) 또는 조선왕조(朝鮮王朝)”와 연결(連結)시키려 하겠는가?
〈「그런 것들이 우리와【한(韓), 고려(高麗), 조선(朝鮮)】 관련(關聯)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지, 그들의 몫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에 논거(論據) 또는 증거(證據) 또는 고증(考證)이 미약(微弱)하다」라는 말은 「매우 적절(適切)치 않은 표현(表現)이다」라고 말하였다. 오늘의 우리 사회(社會)의 현실(現實)이 이렇다.
➨ 한일합병(韓日合倂) 즉 경술국치(庚戌國恥)【국권피탈(國權被奪) : AD 1,910年 8月 29日】 이후(以後), AD 1,945년 그리고 그 이후(以後) AD 2,023년 지금까지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정부(政府)【통칭(統稱) : 삼권(三權)이 모두 포함(包含)된다.】차원(次元)에서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을 적극적(積極的)으로 보호(保護), 육성(育成)하며 온 국민(國民)들에게 “이것이 우리들의 역사(歷史)다”라고 ‘개돼지’에게 먹이를 주듯 던져 놓고… …가르치고 배우게끔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 강제적(强制的)으로 세뇌(洗腦), 주입(注入), 암기(暗記)토록 하였다.
그 결과(結果)가 지금 정치(政治)판에서 ‘되새김’하고 있다. “친일사대파(親日事大派)”들이 득세(得勢)하면서 이 나라의 해방(解放)과 독립(獨立)을 위해 혈족(血族), 가족(家族)을 버리면서, 젊음을 던져, 피를 흘리며, 온몸을 던져 산화(散華)한 의사(義士)【의협심(義俠心) 있는 이로서, 국가(國家), 민족(民族)을 위(爲)해 목숨을 바친 애국(愛國) 열사(烈士)】들이 비웃음당하며, 손가락질당하며 능멸(陵蔑)당하는 현실(現實)이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벌어져야 하는지 누구도 제대로 설명(說明)하지 못한다. 막무가내(莫無可奈), 무대포【앞, 뒤 생각없이 행동(行動)하는 어리석은 짓】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누구도 말하지 못하며 누구도 제대로 설명(說明)하지 못하는 “이 미친 놀음”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망진패조(亡徵敗兆)의 지름길로 인도(引導)하고 있다” 이건 음모(陰謀)다.
이 음모론자(陰謀論者)의 우두머리가 누구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런 “놈”은 : 봉건왕조(封建王朝) 때였다면 : 구족(九族)을 멸문(滅門)하고, 능지처참(凌遲處斬)당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는 형벌(刑罰)을 받고도 모자람이 있을 것이다.
국민(國民)들 스스로 이러한 자(者)들의 음모(陰謀)에 당당하게 맞서 : 이러한 놈들의 음모(陰謀)를 낱낱이 파헤쳐 : 그 대가(代價)를 처절(悽絶)하게, 처참(悽慘)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차기(次期)에서는 : 〈이러한 음모(陰謀)를 기필(期必)코 파헤쳐 “그 주모자(主謀者)와 하수인(下手人)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국가기강(國家紀綱)=국기문란(國紀紊亂)”으로 처벌(處罰)해야 한다. 최고(最高)의 형(刑)으로 일벌백계(一罰百戒)해야 한다〉
● 이것은 「이 나라와 이 민족(民族)의 미래(未來)를 위한 것이자, 생존(生存)과 직결(直結)되는 문제(問題)이기 때문에 그 어떤 양보(讓步)도 여기에 끼여들 여지(餘地)는 전무(全無)하다.」 기필코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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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星湖全集 제55권 제발(題跋) / 書大明一統志 :
《事變有難易不同等… …夫國大則才大。其故何也.… …故金日磾胡貉俘虜而爲漢閥閱 : 사변(事變)에는 난이(難易)가 있으니… … 무릇 나라가 크면 재주가 큰 자가 나오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 …김일제(金日磾)가 ➥오랑캐(胡貊)의 포로(捕虜)로서 한(漢) 나라의 손꼽히는 가문(家門)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일단 “김일제(金日磾)”가 아닌 “성(姓)은 금(金)”이 되어야 한다. 위의 글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금일제(金日磾)』는, 『호맥(胡貉)=호맥(胡貊) 곧 맥족(貊族)이었다』라는 뜻이다.
『맥(貉)•맥(貊)=호맥(胡貉)•호맥(胡貊)』은, ‘북적(北狄)이자 융적(戎狄)’이라고 하였다. 『즉(卽), 북방(北方)에 사는 오랑캐, 서방(西方)과 북방(北方)에서 사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한때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 금일제(金日磾)의 “몇 대손(孫)”이라는 이야기들이 회자(膾炙)될 때가 있었는데, 비문(碑文)에 의거(依據)한 주장(主張)으로 알고 있는데, 비문(碑文)대로라면, 또 위의 고전(古典)에 의거(依據)하면 :
「문무왕(文武王)」은, 고구려(高駒驪) 즉(卽) 구려(駒驪)의 일족(一族)인 “호맥(胡貉)=호맥(胡貊)” 출신(出身)이라는 말이 된다. 그게 바로 이러한 연유(緣由)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다.
➤ “금일제(金日磾)”가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는 말은, 곧 『휴도국(休屠國)이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라는 말과 같은데, 문제(問題)는, 『휴도국(休屠國)은 본래(本來)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총령(葱嶺) 서북(西北)쪽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古典) 사료(史料)에 의하면 : 「‘전한(前漢)=서한(西漢)’ 이전(以前), 진(秦) 때에도, 그리고 ‘진(秦) 이전(以前)’에도, 이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까지 “맥(貊)=맥(貉)”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상서전(尙書傳)”에서 이르기를 : 〈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 : 해동(海東)의 여러 이(夷)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族屬)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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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맥(胡貉)=호맥(胡貊)」의 「휴도국(休屠國) 태자(太子) 금일제(金日磾)」는?
➊ 漢書 / 金日磾傳 : 《金日磾字翁叔,本匈奴休屠王太子也.武帝元狩中,票騎將軍霍去病將兵擊匈奴右地,多斬首,虜獲休屠王祭天金人. : 其夏,票騎復西過居延,攻祁連山,大克獲.日磾以父不降見殺,與母閼氏,弟倫俱沒入官,輸黃門養馬,時年十四矣. : 》라고 하였으니,
“금일제(金日磾)”【BC 134 – BC 86년】는, 「휴도국(休屠國) 휴도왕(休屠王)의 태자(太子)였다.」라는 것이 증거(證據)된다. 그렇다면 “휴도국(休屠國)”은,
➋ 通典 邊防傳 北狄 匈奴 上 :《漢使驃騎將軍霍去病將萬騎出隴西,過焉耆山千餘里討之,得胡首虜八千餘級,得休屠王祭天金人. : 한(漢)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일만기(一萬騎)로 롱서(隴西)를 나와, 언기산(焉耆山)을 지나, 천여(千餘) 리(里)를 토벌하고, 오랑캐 8천 여급을 잡고, 휴도왕(休屠王) 제천금인(祭天金人)을 얻었다. 註釋:匈奴祭天處本在雲陽甘泉山下,秦擊奪其地.後徙之休屠王右地,故休屠有祭天金人像也.為天神之主而祭之,即今佛像是其遺法. : 주석(註釋) : 흉노(匈奴)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은 본시 운양(雲陽) 감천산(甘泉山) 아래인데, 진(秦)나라가 그 땅을 쳐서 빼앗아버렸다. 뒤에 휴도왕을 서쪽 땅으로 옮겨갔는데, 휴도(休屠)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금인상(金人象)이다. 이는 천신(天神)의 주인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곧 지금의 불상(佛象)이 그 유법(遺法)이다.》라고 하였다.
➤ 통전(通典)에서는 분명(分明)하게 “언기산(焉耆山)”이라고 하였는데 다른 곳에선 “언지산(焉支山)”이라고 기록(記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언기산(焉耆山)과 언지산(焉支山)은 전혀 다른 산이다”
즉(卽) ➥ “언기산(焉耆山) : 신강성(新疆省)의 언기(焉耆) 북(北)쪽에 있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한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고, ➥ “언지산(焉支山) : 감숙성(甘肅省) 산단현(刪丹縣)에 있는 산단산(刪丹山)”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中國) 아이들이 아주 헷갈리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런다고 산(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위의 주석(註釋) 편을 보면 : 본래(本來) 흉노(匈奴)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감천산(甘泉山)” 아래에 있다는 말은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이야기다. 「제천금인(祭天金人)은 바로 불법(佛法), 불상(佛象)」이니, 불법(佛法)이 중국(中國)에 전래(傳來)된 것이 「서한(西漢) 말 또는 동한(東漢) 초(初)로 본다」라면 :
「제천금인(祭天金人)이 바로 불법(佛法), 불상(佛象)」이라고 한다면 : “진(秦)”나라는 기원전(紀元前) 수백(數百) 년 전(前)의 국가(國家)로 감천산(甘泉山) 아래에서 흉노(匈奴)들이 하늘(佛法)에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거짓이요, 조작(造作)임이 분명(分明)한 것이다.
휴도국(休屠國)은, 본래(本來)부터 “총령(葱嶺) 서북(西北)쪽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땅에 있었으며, 바로 연독(捐毒)【신독(身毒 : 천축(天竺)이다.】에 속했던 석종(釋種) 왕조(王朝)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언기산(焉耆山)」 : 언기(焉耆)는, 신강성(新疆省) ‘우루무치=오노목제(烏魯木齊)’ 남쪽에 있는 지명(地名)이며, 북(北)쪽으로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서동(西東)’으로 뻗어있는 곳이다.
따라서 ‘곽거병(霍去病)과 1만 기마(騎馬)’는, 〈언기산(焉耆山)을 지나서 천여(千餘) 리를 갔다고 하였으니, 서(西)쪽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래의 원문(原文)을 보면 더욱 확실시(確實視)된다.
여기서 말하는 언기산(焉耆山)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 편의 “은산(銀山)”일 가능성(可能性)이 크다.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여러 봉우리(峰) 중의 하나이다.
• 참고(參考)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銀山 : 即銀山磧口也,亦曰白山。阿羯田山 : 銀山 在焉耆城北。其山連亙綿遠,與龜茲接境。唐貞觀十八年,安西都護郭孝恪討焉耆,出銀山道。焉耆城四面皆水,恃險而不設備。孝恪夜至城下,浮水而渡,比曉登城,遂執其王突騎支。既而西突厥大臣屈利啜以孝恪還,引兵追之。孝恪還擊,又破之於銀山,是也。二十一年,阿史那社爾奉詔討龜茲,自焉耆西出,進屯磧口。去其都城三百里,即銀山磧口也,亦曰白山。山中嘗有火煙,蓋出砂之處。采砂者,着木底鞋取之,皮者即焦。下有穴,生青泥,出穴外即變為砂石,土人取以治皮。《唐志》:龜茲都城北倚白山,亦曰阿羯田山.】
欽定四庫全書 / 欽定皇輿西域圖志卷二十一 / 天山 : 額什克巴什鄂拉(阿羯田山) : 額什克巴什鄂拉在汗騰格里鄂拉南二百里山形寛廣産硫黄哈喇庫勒發源東南麓赫色勒郭勒東一源出西南麓又東一源出南麓是山為庫車北屏距庫車城百里山脈自木素爾鄂拉分支東南行百餘里為阿勒坦呼蘓鄂拉至此北與汗騰格里鄂拉合又東行一支接庫克納克達巴詳見天山南路
︹魏書西域傳︺龜茲國西北大山中有如膏者流出成川行數里入地如䬾餬甚臭服之髪齒已落者能令更生病人服之皆愈
︹隋西域傳︺白山一名阿羯山常有火及烟即是出碙砂之處
︹唐書西域傳︺伊邏羅城北倚阿羯田山亦曰白山常有火
按今庫車古龜兹地伊邏羅城唐龜茲國王居之則今庫車城北之額什克巴什鄂拉應即唐書龜茲國北之阿羯田山隋西域傳所稱阿羯山也史稱阿羯田山出碙砂今額什克巴什鄂拉産硫黄考本草石硫黄一名黄碙砂而字書無碙字疑碙砂即𥓁砂若魏書所云膏流如川能令齒髪更生愈病者今不可考矣又考宋王延徳髙昌行記載北廷北山中亦出碙砂有烟火則隋所謂阿羯山者又疑與今之廸化州為近.
➨ 汗騰格里鄂拉 : 汗騰格里鄂拉在納喇特達巴西五百里特克斯郭勒發源北麓東北距伊犁一百五十里南距庫車三百里山脈自西南四百里之木素爾鄂拉東行分二支其北一支由圖斯庫勒東南折而東北至特克斯郭勒源南其南一支自拜賽喇木庫車之北折而北行逾西裕勒都斯郭勒發源處折而西與北一支合汗騰格里當其交㑹處山勢尊嚴羣巒環拱為天山之主峯
︹唐書西突厥傳︺初曷薩那朝隋被留不遣乃共立達頭號射匱可汗建廷龜兹北之三彌山玉門以西諸國多役屬與東突厥亢
按龜茲為今庫車迤北諸山汗騰格里為大應即唐時三彌山射匱可汗當建廷山北也.[참고(參考), 인용(引用), 끝]
➌ 通典卷 第一百九十二.邊防八.西戎四 / 罽賓 :《罽賓.罽賓在懸度山西,漢時通焉.王理循鮮城,去長安萬二千二百里.不屬都護.戶口勝兵多,大國也.東北至都護理所六千八百里,東至烏秅國二千二百里,東北至難兜國九日行,西北與大月氏,西南與烏弋山離接.昔匈奴破大月氏,大月氏西君大夏,而塞王南君罽賓.塞種分散,往往為數國. ➨自疏勒以西北,休屠,捐毒之屬,皆故塞種也. 顏師古曰,即釋種也. 中略.》라고 하였다.
곧 위의 『통전(通典) 서융(西戎) 계빈(罽賓)』편에서는 :《➨自疏勒以西北,休屠,捐毒之屬,皆故塞種也. 顏師古曰,即釋種也. : 소륵(疏勒) 서북(西北)의 휴도(休屠)는, 연독(捐毒)【천축(天竺)이다.】에 속했는데, 모두 옛 새종(塞種)이다. 안사고(顏師古) 이르기를, 곧“불(佛=釋)”을 믿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① 연독국(捐毒國) : 捐毒國,西域古國。國王治所在衍敦谷。西至疏勒千里。離長安9860里。東至西域都護治所二千八百六十一里。東漢以後,成為疏勒的屬地。南接蔥嶺,➨西為休循。西北至大宛一千三十里,北與烏孫接。衣服與烏孫相似,隨水草而居,依蔥領,本是塞種。
【➨ 서(西)쪽에는 휴순(休循)이 있다고 하였는데, “휴순(休循)”이 바로 “휴도(休屠)”이다】
②【휴순국(休循國) : 休循國,西域古國。治鳥飛谷,在蔥嶺西,距離長安10210里。東至西域都護治所三千一百二十一里,至捐毒衍敦谷二百六十里,西北至大宛國九百二十里,西至大月氏千六百一十里。服飾與烏孫相似,因畜隨水草而居,本塞種.】
당시(當時)의 휴도왕(休屠王)은, 『연독(捐毒) 곧 천축(天竺)』에 속해 있으며,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불교(佛敎)를 신봉(信奉)하는 나라였다는 뜻이다. 「소륵(疏勒)의 서북(西北)에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곳은 어딜까?
➤➤➤ 「소륵(疏勒)」은 ‘카슈가르【Kashgar : 카스시(Kāshí) : 喀什】를 말하는 것으로 신강성(新疆省)의 최(最) 서(西)쪽 도시(都市)다. 이곳에서 서북(西北)이라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랄해(Aral, 海)” 방향(方向)이며,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타슈켄트(Tashkent) 지방이다. 이러한 땅에 당시(當時)의 『휴도국(休屠國)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당(唐)나라의 재상(宰相)이었던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말해주고 있다.
➨ 위의 글 ’(1)‘ 에서 『“휴도왕(休屠王)의 태자(太子)였던 금일제(金日磾)”는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라고 하였는데, 곧 「맥족(貉族)=맥족(貊族)이었다」라는 뜻이다.
➥➥➥ 또한 「이들의 근거지(根據地)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한복판 땅이었다」 그렇다면 「호맥(胡貉)=호맥(胡貊)은 누구냐?」 바로 『구려(駒驪)의 일파(一派)였다. 곧 구이(九夷)였고, 동이(東夷)였다』라는 사실(史實)이다.
※ 〈이러고도 동이(東夷)가, 구이(九夷)가 한민족(韓民族)이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었다고 할 텐가?〉 누구 맘대로, 엿장수 맘대로?
➍ 금일제(金日磾) 아버지 휴도왕(休屠王), 그리고 휴도국(休屠國)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嬀水) 주변(周邊)에 있었다【소륵(疏勒)의 서북(西北)】고 하였다.
금일제(金日磾)! 그는 누군가? 그의 열전(列傳)에 따르면 : 〈본래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太子)로, 한무제(漢武帝) 원수(元狩) 중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흉노(匈奴) 우지(右地)의 땅을 공격(攻擊)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고, 휴도왕(休屠王)의 제천금인(祭天金人) 노획(虜獲)하고, 그 여름에 다시 서(西)쪽으로 거연(居延)을 지나, 기련산(祁連山)을 공격(攻擊)하여, 크게 이기고 취(取)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때 그 「어머니 알씨(閼氏)와 동생 윤(倫)과 함께 14살의 나이로 한(漢)으로 잡혀갔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 한서(漢書)에서는 : “거연(居延)을 지나, 기련산(祁連山)”이라고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 『기련산(祁連山)은 곧 천산(天山)이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는, “언기산(焉耆山)을 지나, 1천(千) 여리(餘里)를 서진(西進)했다.”라고 하였는데, “언기산(焉耆山)”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여러 봉우리 중의 하나임이 분명(分明)한 것이다.
언기산(焉耆山) : 언기(焉耆)는, 신강성(新疆省) ‘우루무치=오노목제(烏魯木齊)’ 남쪽에 있는 지명(地名)이며, 북(北)쪽으로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서동(西東)로 뻗어있는 곳이다.
따라서 ‘곽거병(霍去病)과 1만 기마(騎馬)’는, 〈언기산(焉耆山)을 지나서 천여(千餘) 리를 갔다〉라고 하였으니, 〈서(西)쪽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래의 원문(原文)을 보면 더욱 확실시(確實視)된다.
① 漢書 西域 : 《昔匈奴破大月氏,大月氏西君大夏,而塞王南君罽賓。塞種分散,往往為數國。自疏勒以西北,➨休循、捐毒之屬,皆故塞種也。: 》
② 通典卷 第一百九十二.邊防八.西戎四 / 罽賓 :《罽賓. 中略. 自疏勒以西北, ➨休屠, 捐毒之屬, 皆故塞種也. 顏師古曰, 即釋種也. 中略. : 계빈(罽賓), 중략(中略), 소륵(疏勒)의 서북(西北)에, 휴도(休屠)는, 연독(捐毒 : 天竺)에 속했는데, 모두 새종(塞種)이다.》라고 하였다.
③ 해국도지(海國圖志) 30 北印度沿革 [原無今補輯。今克什彌爾,古罽賓國,即北印度也,與西印度皆不屬英夷。其西境之愛烏罕,即古大月氏,亦與北印度犬牙相錯] : 又案:北印度與鄰境各國有大雪山界之,雪山之北,則印度河界之。其南與中印度亦有大山為界,疆域本不難辨,後人不審《西域記》,自作紛擾耳。
[漢書·西域記]:《罽賓國,王治循鮮城,去長安萬二千二百裏,不屬都護,戶口勝兵多,大國也。東北至都護治所,六千八百四十裏;東至烏秅國,二千二百五十裏;東北至難兜國,九日行。西北與大月氏,西南與烏弋山離接。➨自疏勒以西北,休循捐毒之屬,皆故塞種也.》
➨《自疏勒以西北,休循捐毒之屬,皆故塞種也。: 소륵(疏勒)의 서북에 있는, 휴순(休循)은 연독(捐毒)에 속했는데, 모두 새종(塞種)이다》라고 하였다.
➤➤➤ 한서(漢書)에서는 “휴순(休循)”이라 하였고, 통전(通典)에서는 “휴도(休屠)”라고 하였으니, 즉(卽) 『“휴순(休循)은 휴도(休屠)이고, 휴도(休屠)는 휴순(休循)”』이 되는 것이다. 곧 같은 나라를 다르게 부르는 별칭(別稱)이었다는 뜻이다.
곧 「휴도(休屠)는 휴도국(休屠國)이며, 휴도왕(休屠王)은, 맥족(貊族)=맥족(貉族)이었고, 오늘날의 신강성(新彊省) 소륵(疏勒)의 서북(西北)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Amu Darya)’ 남북(南北) 안(岸) 땅에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저자(著者) 역시(亦是) 한서(漢書)를 인용(引用)하고 있다는 것은 그 기록(記錄)을 신뢰(信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위의 글 “(1)+(2)”에서 본 바와 같이 『“호맥(胡貉)은 곧 호맥(胡貊)”이며, 이들이 바로 “맥(貊)”』이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결코 변할 수 없으며, 바뀔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바로 “구려(駒驪)=구려(駒麗)=구려(句驪)=구려(句麗)”의 일원(一員)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貊)”은, 맥국(貊國)을 건설(建設)하기도 했으나, 구려(駒驪)의 강력(强力)한 힘(力)에 복속(服屬)되어 ‘구려(駒驪)의 일파(一派)’가 되었다〉
「호맥(胡貉)•호맥(胡貊)」에 대하여 : 고전(古典)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이들을 지칭(指稱)하여 “북적(北狄) 혹(或)은 융적(戎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서방(西方)과 북방(北方)”을 아우르는 말이다. 즉(卽) 『북방(北方)과 서방(西方) 땅에 사는 오랑캐(胡)』라는 뜻이다.
이러한 종족(種族), 부족(部族)을 손바닥 크기만도 못한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이나 강릉(江陵) 땅에 있었다”라고 한다면 : 「이는 한민족(韓民族)을 능멸(凌蔑)하는 행위(行爲)다」
➥ 또 ‘문무왕(文武王) 비문(碑文)’에 의거(依據), “금일제(金日磾)”의 후손(後孫)이라는 주장(主張)이나 의견(意見)을 개진(開陳)하려 한다면 : 우선적(優先的)으로 “금일제(金日磾)”의 부족(部族)이 누군가에서부터 출발(出發)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결과(結果)로 보면 : “금일제(金日磾)”는, “맥족(貉族)•맥족(貊族)”임이 분명(分明)하다. 그렇다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과 그 후손(後孫)들은 모두 “맥족(貊族)”의 혈통(血統)이었다는 얘기다.
또 중요(重要)한 것은 “김씨(金氏)”가 아닌 “금씨(金氏)”가 되어야 한다. “금씨(金氏)”가 어떻게 “김씨(金氏)”가 되어야 할까? 웃기는 일이 아니냐?
하다 하다 못해 『“고려(高麗)” 때에 “금씨(金氏)를 김씨(金氏)”라고 했다』라면 그것을 깔끔하게 설명(說明)해 줄 수 있는 증거(證據)는 가지고 있으신가?
여기서 왜, “문무왕(文武王)”만이 “금일제(金日磾)”의 먼 후손(後孫)이라는 이야기일까? 김춘추(金春秋)는 아니고… … 또 그 선대(先代)는?
‘문무왕(文武王)’만이 ‘금일제(金日磾)의 후손(後孫)’이라면 ‘문무왕(文武王)’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말일까? ‘조선사(朝鮮史)’는 모두가 이 모양(模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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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여기서 ‘서융(西戎)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의 “고려(高麗), 조선(朝鮮)”과 관련(關聯)된 기록(記錄)을 보자. 【이전(以前)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된 내용(內容)과 보완(補完), 보충(補充), 정리(整理)된 것들이다.】
(3) 『통전(通典) 서융(西戎)』 편에서 이르기를 :
(3)-1) 通典 卷 第189. 邊防 五 西戎 一 :「氐」편의 말미(末尾) 기록(記錄)을 보면: 《滎陽句驪居遼東塞, 正始中, 幽州刺史毋丘儉伐其叛者, 徙其餘種, 戶落百數, 子孫孳息, 今以千計, 數代之後, 必至殷熾 : 형양구려(滎陽句驪)는, 본래 요동(遼東) 새외(塞外)에서 살았는데, 정시(正始) 중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구려(句驪)를 칠 때, 그[관구검(毌丘儉)]에 대항(對抗)하던 자(者)들이다. 그 여중(餘種)이 옮겨가, 백 수십 호(戶)가 흩어졌는데, 자손(子孫)을 많이 낳아【孶: 부지런할 자】 지금은 천(千)에 이른다. 수대(數代)가 흐른 후, 반드시(必至) 크게 성하여 기세가 성할 것이다(熾). 今百姓失職, 猶或亡叛, 犬馬肥充, 則有噬齧, 況於夷狄, 能不為變! : 지금 백성들은 실직【失職 : 직분을 잃어버려】하여, 혹 망하고 배반하였으나, 개와 말을 살찌게 하고, 땅을 갈아 채울 것이며, 곧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이를 것이다. 하물며 이적(夷狄)으로써, 능히 변하지 않을 것이로다!》라고 하였는데.
➨ 「저(氐)」는 : 서융(西戎)의 별종(別種)으로 오늘날의 사천성(泗川省) 서(西), 서남(西南)쪽 땅에 살았던 고대민족(古代民族)이라고 전해진다.
『구려(句驪)』는 말 그대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고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이 침을 튀기며 외쳐대는 “고구려(高駒驪)”를 말하는 것이다.
➨ 관구검(毌丘儉)이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침공한 것인가?” 아니면 “직선거리(直線距離) 2,600km【6,000리】나 떨어져 있던 사천성(泗川省) 서(西)쪽 땅을 침공(侵攻)한 것인가?”
결과적(結果的)으로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에 구려(句驪)라는 나라는 없었다」라는 뜻이고, 그 「“구려(句驪)”라는 나라는 중원(中原) 대륙(大陸)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확인(確認)시켜주는 것이다.
이럴 때, “관구검(毌丘儉)”은 서(西)쪽에서 동(東)쪽을 친 것일까? 아니면 동(東)쪽에서 서(西)쪽을 친 것일까? 흥미(興味)로운 사실(史實)이 될 것 같다.
(3)-2) 通典189. 邊防 五 西戎 : 車師 [高昌附] : 《文字亦同華夏,兼用胡書.有毛詩,論語,孝經,歷代子史,集學官弟子,以相教授.雖習讀之,而皆為胡語.賦稅則計田輸銀,無者輸麻布.其刑法,風俗,婚姻,喪葬與華夏大同,其人面貌類高麗,辮髮施之於背女子頭髮辮而垂. : 문자(文字)는 또한 화하(華夏)와 같았으며(同), 오랑캐(胡)의 문자(書)도 함께 사용하였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등이 있었으며, (중략). 그 형법(刑法). 풍속(風俗). 혼인(婚姻). 장례(葬禮) 등 모두 화하(華夏)와 두루 같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面貌)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頭髮)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라고 하였다.
『➊ 문자(文字)는 화하(華夏)와 같다. ➋ 형법(刑法), 풍속(風俗), 혼인(婚姻)과 상장(喪葬)의 예식(禮式) 모두는 크게 화하(華夏)와 같다. ➌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頭髮)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라고 하였다.
➨ 고창국(高昌國) 사람들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 종류(種類)이고, 문자(文字)와 형법(刑法), 풍속(風俗), 혼인(婚姻)과 상장(喪葬)의 예식(禮式) 등은 모두 “화하(華夏)”와 같다고 하였으니, 곧 고창(高昌) 땅은, 『고려인(高麗人) 곧 화하(華夏)들이 사는 고려(高麗) 땅』이었다는 것이다.
즉(卽), 『당시(當時)의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는 “화하(華夏)였다”』라는 말이다.
(3)-3) 通典 第 192 邊防八, 西戎四 / 于闐 : 《自高昌以西, 諸國人多深目高鼻, 惟此一國, 貌不甚胡, 頗類華夏 : 고창(高昌)의 서(西)쪽 지방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은데, 눈은 깊고, 코는 높다. 유일하게 그 한 나라【우전(于闐)을 칭(稱)】는 얼굴 모양이 호(胡 : 오랑캐)와 같지 않은데, 자못(頗)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위의 글 “(3)-2)”에서 『“화하(華夏)”는 곧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얼굴 모양이 호(胡)와 같지 않은데, 약간(頗)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 : 貌 不 甚 胡, 頗 類 華 夏』라고 한 것은 화하(華夏)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3)-4) 通典 西戎 / 朱俱波 : 《朱俱波, 亦名朱居槃國, 在于闐國西千餘里, 其西至渴槃陀國, 南至女國三千里, 北至疏勒九百里, 南至蔥嶺二百里. 人貌多同華夏, 亦類疏勒 》
위의 글 “(3)-2) + (3)-3”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의 모습【面貌 : 얼굴 모양】이 화하(華夏)와 같은데, 또 소륵(疏勒)의 종류다 : 人 貌 多 同 華 夏, 亦 類 疏 勒』라고 한 것은 : 『화하(華夏)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4) 해국도지(海國圖志) 卷 022 / 北印度各國 :
《聞見錄雲又 : 又一種人圓領大袖, 衣冠類漢唐, 貌清奇似朝鮮, 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문견록(聞見錄)에서 전하기를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고, 얼굴(貌)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닮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한(漢)의 후예 또는 한인(漢人)】의 유종(遺種)인가 하였다》라는 말과 같다고 하면 오버일까?
곧 「계빈(罽賓) 땅」에 『조선인(朝鮮人)’을 닮은 종족(種族), 부족(部族)이 살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좀 더 그 범위(範圍)를 넓혀보면 :
➊ 〈의관(衣冠), 의복(衣服)은 한당(漢唐)과 같은 종류이고〉,
➋ 〈얼굴이 맑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같았다(似)〉
➌ 〈사람들은(人), 혹은 후한(後漢)의 유종(遺種)이지 않을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설명(說明)한 내용(內容)의 “➊+➋+➌”을 모두 대입(代入)시키면 :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의관(衣冠)이나 의복(衣服)도 아닌 “사람(人)”임이 분명(分明)한 것이므로, 즉(卽) “한(漢) 또는 후한(後漢)이나 당(唐) 모두가 조선인(朝鮮人)들의 왕조(王朝)였다”라고 하면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일까?
➨ 필자(筆者)는, 그동안 ‘전한•서한(西漢)’과 ‘후한(後漢)•동한(東漢)’과 ‘당(唐)’은, “조선(朝鮮)의 별칭(別稱), 이칭(異稱)”이라고 주장(主張)했으며,
〈‘전한•서한(西漢)’과 ‘후한(後漢)•동한(東漢)’의 땅은, 고구려(高駒驪) 땅이요, 당(唐)의 땅은 신라(新羅)의 땅이었다〉 곧 그들은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자(者)들이라고 반복(反復)해서 말해왔다.
이를 뒷받침해 주듯, 오늘날 21세기(世紀)에도, “북인도(北印度)의 땅에 조선인(朝鮮人)과 꼭 닮은, DNA도 아주 근접(近接)한 부족(部族)들이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은, 엄연(儼然)한 사실(事實)이다.
“삼한(三韓)인들이 점점(漸漸) 동천(東遷)”하면서, 이때 동천(東遷)에 참여(參與)하지 못한 부족(部族)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存在)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은 논리(論理)를 제외(除外)시키면, 이들에 대한 설명(說明)은 불가능(不可能)하다,
(5) 『월지국(月支國)』은 또 또 뭔가?
“총령(葱嶺) 서북(西北)” 땅에 “휴도국(休屠國)=휴순국(休循國)”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곳은, “아랄해(Aral, 海)” 방향(方向)이며,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타슈켄트(Tashkent) 지방이다. 이러한 땅에 당시(當時)의 『“휴도국(休屠國)=휴순국(休循國)”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이 주변(周邊)에 있었던 많은 불교유적(佛敎遺蹟)은 ‘7 – 8’세기(世紀)의 회교(回敎)가 전파(傳播)되면서부터 대부분(大部分) 파괴(破壞)되어 흔적(痕迹)조차 찾을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휴도국(休屠國) 주변의 『월지국(月支國)』은 또 뭔가? 삼한(三韓)의 우두머리였던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월지국(月支國)에서 54개 속국(屬國)을 다스렸다”』라고 하였잖은가!
어떻게 “월(月)”자가 “목(目)”자로 보이나? “한글” 세대(世代)도 아닌 한자(漢字)를 국어(國語)로 쓰던 사대부(士大夫)들이 사는 나라가 바로 조선(朝鮮)이 아니었나? 그래서 “月” 자(字) “目” 자(字)로 보입니까?
우리가 아주 친숙(親熟)하게 말할 수 있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니, ‘발해(渤海)=발해(勃海)’니, 해동제국(海東諸國)이니 하는 말들은, 반도(半島) 땅과는 직접적(直接的)인 관련(關聯)이 하나도 없다.
「투후(秺侯) 금일제(金日磾)」가 문무왕(文武王)의 “몇 대손(孫)”이라는 주장(主張)을 하기 전에 휴도국(休屠國)은, 어떤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의 나라였는가가 우선(于先)일 것이며, 이런 주장(主張)을 한다면, 신라(新羅)는 반도(半島) 땅에 있었을 수 없다는 것 정도(程度)는 상식적(常識的)인 일이다.
“총령(葱嶺) 서북(西北) 땅이 어딘가?” 『금일제(金日磾)의 “휴도국(休屠國)=휴순국(休循國)”은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라는 것이다. 이걸 알고도 “문무왕(文武王)의 선대(先代)는 ‘금일제(金日磾)’라고 하고 싶은가?”
〈만약(萬若) “문무왕(文武王)”이 “금일제(金日磾)”의 후손(後孫)이라고 한다면 : “호맥(胡貉)=호맥(胡貊)”과 “신라(新羅)”사이의 골육상잔(骨肉相殘)은, 처절(悽絶)하고, 비참(悲慘)하고, 참혹(慘酷)한 전쟁(戰爭)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 몇 편의 글 내용(內容)이 서로 중복(重複)되고, 비슷한 내용(內容)이 있는 것은 하나의 뿌리로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재차(再次) 설명(說明)하지 않고는 시대적(時代的)으로 이어지는 역사(歷史)를 해설(解說)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讀者)들의 양해(諒解)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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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댄가? 1990년댄가? 경상도(慶尙道) 출신(出身)의 한 작가(作家?)로 기억(記憶)되는데 : 그의 “말”만은 생생(生生)하게 기억(記憶)이 된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신라(新羅)의 직계후손(直系後孫) 운운(云云)』한 것을 말이다.
이런 “어리바리한 인사(人士)”의 말이 바로 “친일사관(親日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극치(極致)를 이루는 말이다. 신라(新羅)인의 직계후손(直系後孫)이라는 말은 누구를 지칭(指稱)하는 건가? 지배계층(支配階層)인가? 지배(支配)를 받고 있던 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인가?
➊ 사서(史書)에서는,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여 노역(勞役)과 전쟁(戰爭)을 피하고 배고픔에 유랑(流浪)하던 집단(集團)이라고 하였으며, 오죽 불쌍하면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동(東)쪽의 땅을 떼어주었다고 기록하였겠는가!
➋ 너무나 작은 나라【소국(小國)】로 백제(百濟)의 사신(使臣)을 따라 외교(外交)를 할 정도로 조그만 나라였다는 것이고,
➌ 혁거세(赫居世)는 서(西)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럼 서(西)쪽의 백제(百濟)인이라는 것인가? 서해(西海) 바닷속에서 왔다는 말인가?
➍ 경주(慶州)의 동(東)쪽 장인(長人)들의 땅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수십(數十) 리 협곡(峽谷)과 철문(鐵門)의 잔해(殘骸) 또는 흔적(痕迹)이라도 찾을 수 있는가?
➎ 동남(東南)쪽 왜(倭)의 땅은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사라진 것일까?
➏ 문무왕(文武王)이 금일제(金日磾)의 후손(後孫)이라면, 당(唐)과 연합(聯合)한 신라(新羅)의 고구려(高駒驪)와의 전쟁(戰爭)은 곧 “골육상잔(骨肉相殘)”이었다는 것이다.
또 이후(以後)의 신라왕(新羅王)들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이라는 뜻이다. 뭔가 연결(連結)고리가 웃긴다고 생각지 않나? 비문(碑文)에는 금일제(金日磾)의 후손(後孫)이라고 해 놓았다면서, 그 조상(祖上)이 ‘호맥(胡貉)=호맥(胡貊)’이었다는 것도 몰랐다는 말인가?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이렇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발목을 잡는다. 늘 주장(主張)하는 것이지만 : 지형지리(地形地理)는 누구도 이것을 왜곡(歪曲)한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다.
반도(半島) 땅에서 5 천년(千年)이면 : 그 이후로 전개(全開)되는 그 어떤 왕조(王朝)였다 하더라도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그 땅이 그 땅이요, 그 백성(百姓)이 그 백성(百姓)이기 때문이다.
수만리(數萬里) 영토(領土)가 일만(一萬) 리(里)로 바뀌고, 그 일만(一萬) 리(里)가 다시 일천(一千) 리(里)로 바뀔 수 있다면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가능(可能)하다. 그러나 지세(地勢)를 늘이고, 줄이는 것은 천지창조(天地創造)일 때나 가능(可能)한 것이다.
➥ “이래도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주창(主唱)하며,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 화려(華麗)한 강산(江山)”을 노래할 건가? 이러고도 경상도(慶尙道)인들은 신라(新羅)의 직계후손(直系後孫)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뭘 좀 알고 말하자.
“상서전(尙書傳)”에서 이르기를 : 〈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 : 해동(海東)의 여러 이(夷)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族屬)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삼천여년(三千餘年) 전(前)의 일이다. 이때의 “신라(新羅)”의 선조(先祖)는 누군가?
신라(新羅)는 어느 날 외계(外界)에서 낙하산(落下傘)을 타고 내려온 자(者)들의 후손(後孫)들인가? 알을 깨고 나왔다는 이야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자, 이는 한민족(韓民族)을 능멸(陵蔑)하는 얘기다.
까놓고 말해, 솔직하게 말해서, AD 1,910년이면 바로 일백여년(一百餘年) 전(前)의 일이고,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었던 95∼96%가 「중인(中人) 이하(以下)의 상민(常民)이었다」라는 통계수치(統計數値)가 거짓이었다면 좋겠다.
• 아무리 ‘우리 역사(歷史)에 대해’ 관심(關心)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주장(主張)하고 싶다거나, 상대방(相對方)에게 이해(理解)를 구(救)하려 할 때는, 역사(歷史)를 좀 알고 말하자.
2023년 12월 17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게재 내용은 AD 640년에 '교하도행군대총관 후군집'이 점령하고 속국화한 "고창국"에 대해 "고려(高麗)인의 나라"임을 알려주는 내용을 가지고 논거(論據)와 함께 설명하려 합니다.
*** 덧붙여 당시의 '서토 또는 서역' 땅의 "동이=구이=맥족"과 관계되는 이야기와 '華夏(화하)'의 '주인공은 누구냐?' 하는 문제제기를 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