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군 이소봉(李小鳳)등으로 대를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이운용(李雲龍)은 무과에 올라 옥포만호로 임진왜란을 맞아 경상수군(원균)과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간행했고 이휘일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계 파]
-김포파(단활재공파)
-청도파(천룡)(淸道派(天龍)) : 청도파(식성군파)
-청도파(사정공 술)(淸道派(司正公 戌)) : 청도파(사정공파)
-밀양파(생원공 축)(密陽派(生員公 丑)) : 밀양파(생원공파)
-근재공파(맹현)(覲齋公派(孟賢)) : 면천파(교리공파), 인천파(감찰공파), 양주파(현감공파),
그후 이씨문중은 당대 천석의 부를 쌓기 시작했고 여러 석학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본관지]
황해도 재령군
[기 타]
[연락처] 재령이씨서울종친회 TEL 02-777-8246, FAX 777-3110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45,417명이 있었다.
출처 : http://www.rootsinfo.co.kr/index_sub02.html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6) 英陽 이시명 집안
상수리열매로 끓인 죽, 유랑민 200명에 매일 먹여
‘救貧의 철학’실천…병자호란 치욕에 평생 은둔
풍광 좋기로 소문난 미국 캘리포니아의 고급 주택들은 평지가 아닌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집값이 올라간다. 서양인들이 언덕
위쪽의 집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전망의 높이와
통찰력은 비례하게 마련이다. 로마의 고택이나 유럽의 주택이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선 전망이 좋은 위치를
‘○○대’(臺)라고 부른다.
대(臺)는 보통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나 바위 절벽
위를 지칭한다.
조선 선비들이 언덕 위의 대를 좋아했던 이유는 만물(萬物)을
정관(靜觀·고요하게 관찰함)
할 수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의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 종택을 비롯한
재령 이씨 고택들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쪽에서 바라보면 동네 전체가 9~10m 높이의 화강암 암반 층에 자리 잡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석계 이시명은 병자호란 때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수모를 당하자, 산간 벽지로 은둔하여 처사로서 일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가 경북
영해의 본가에서 산간 벽지였던 영양의 석보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40년부터
이다.
원리리에는 대략 100여m의 간격을 두고 4개의 대(臺)가 일렬로 자리잡고 있었다.
동대(東臺)·세심대(洗心臺)·낙기대(樂飢臺)·서대(西臺)가 바로 그러하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 ‘낙기대(樂飢臺)’다. 풍수적으로 볼 때 이 동네의 지기
(地氣)는 낙기대쪽에 뭉쳐있다. 조선 시대 마을 풍수에서 보면 지기가 뭉쳐있는
곳에 그 동네의 가장 중심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낙기대는 지맥도 그렇지
만 이름도 독특하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 있는 수십 개의 이름난 대에 올라가 보았
지만, ‘배고픔을 즐기는 곳’이란 낙기대 이름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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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긴 ‘낙기대 ’.주변 상수리 나무에서 열매를 거둬, 춘궁기때 비상식량으로 활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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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기대는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만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곳이
었다. 주변 사람들의 배고픔에 대한 재령 이씨들의 대응은
낙기대 주변의 상수리 나무에서 찾아볼 수있다.
낙기대 주변에는 대략 50여 그루의 상수리 나무가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수령이 300~400년된 것들이다. 집안 어른인 이병균(72)
씨에게 “왜 유달리 상수리 나무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기민 먹이’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기민(飢民)이란
‘굶주린 백성’이다.
재령 이씨들은 상수리 열매를 통상 ‘기민 먹이’라고 부르고,
상수리 나무를 ‘꿀밤나무’라고 부른다.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가 닥쳐서 인근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낙기대 위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비상식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낙기대와 상수리나무
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보완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보릿고개에 접어들
어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비상수단으로 그동안 모아 놓은 상수리, 도토리
열매를 갈아서 분말을 만든다. 그런 다음, 커다란 솥 단지를 걸어 놓고 이
분말가루에 물을 붓고 죽을 끓였다. 이 죽이라도 한 그릇 먹으면 굶어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을 담당하던 집안이 재령 이씨들이었다. 이씨 집안에서 커다란 솥을
걸어 놓고 죽을 끓이면 이곳 원리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배고픈
사람들도 모두 와서 먹었다. 보통 하루에 끓이는 죽의 양이 2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수리 죽으로 배를 채운 유랑민들은 “다른 집의 쌀죽보다 이씨 집의
상수리가 더 달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였던 그 성의를 고맙게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물론 사라졌지만 광복 이전까지도 기민들에게 상수리 죽을
끓여 주던 전통은 살아있었다. 그 전통은 400년 전 장씨 부인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장씨 부인은 바로 입향조인 이시명의 부인이다.
영남 유학의 거봉이었던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로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훈도를 받고 성장했다. 특별한 훈도란
남자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과 유교적 교양을 전수받았음을 말한다.
그 결과가 굶어죽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나타났고, 보릿고개를 당해서 도토리 죽을
끓여서 같이 먹는 나눔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체적인 살림의 운영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의 비중이 더 크게 마련이다. 안방에서 틀어 버리면 곤란한
법인데, 이 집안의 경우 안방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민구호 사업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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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붕 끝에 마감재를 쓰지 않은 재령 이씨 고택.사치를 경계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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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의 재산은 어떠했는가. 16세기 중반 이시명의 조부가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노비가 700명 가량 있었다고
나온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700명이 모두 노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비라기 보다는 라틴어의 ‘클리엔테스’로
개념으로 보는 게 적당할 성싶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로마의 클리엔테스란 특정한 귀족의 보호를
받는 평민으로,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가신(家臣) 개념에 가깝다.
가신은 어느 정도 예속되어 있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노비는 아니다. 기민 먹이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700명이란
숫자는 이씨 집안에서 최소한의 호구를 책임을 져야 하는
클리엔테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반이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했다.
원리리 이씨 고택들의 지붕을 보면 한 가지 어색한 부분이 발견된다.
석계종택, 석계서당을 비롯한 기와집들의 지붕 끝에 마감재로 사용하는
앙와(仰瓦)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앙와로 마감을 하지 않으니 기와지붕의
양쪽 끝이 매우 어설퍼 보인다. 집을 짓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집안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집을 지을 때 앙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수백년 내려오는 재령 이씨들의
전통이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이유 때문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미완으로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미완이란 겸손을 뜻하기도 한다. 앙와를 설치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이 집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사치스럽게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전통 기와지붕에서 멋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앙와이기도 하다. 궁궐 지붕의 끝에 설치하는 치미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기도 한데, 화려하고 맵시 좋은 앙와로 지붕을 단장하는 것은 선비정신에
어긋난다고 간주한 것이다.
낙기대와 앙와 없는 지붕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 (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
♣ 서청원 VS 이재오
한나라당 대권주자인 이명박과 박근혜의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다 보니 양 캠프에 관련된 의원들의 사소한 움직임마저도 신문에 가십거리로
보도된다.
엊그제 홍준표 의원 장모 상가에서 박근혜 캠프의 고문으로 합류한 서청원 전 대
표와, 이명박 캠프의 이재오 의원이 서로 소주잔을 권하면서 ‘농담반 진담반'의
기 싸움을 벌였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필자에게는 몇 줄 안 되는 이
러한 가십성 기사가 또한 칼럼거리가 된다. 수백 년 내려온 두 사람 집안의 역사
와 족보가 순간적으로 현재의 상황에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서청원은 우리나라 현역 정치인 중 문벌이 가장 좋은 집안 후손이다.
대구서씨(大丘徐氏) 집안으로서 소위 ‘3정승 3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의 후손인 것이다.
“삼정승(三政丞) 불여(不如) 일대제학(一大提學)”(정승 3명이 대제학 1명만 못하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집안은 영의정은 물론이고 대제학을 연달아 3명이나 배출한 명문이다.
특히 정조대인 18세기 후반에 대제학을 지낸 서영보(徐榮輔)는 당시 과거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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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차석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서영보는 다산을 제치고
수석을 한 수재였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고 하는 군왕의 필독서를 남겼다.
서청원 집안의 정치적 노선은 소론(少論)이었다.
소론은 집권여당인 노론(老論)과 야당인 남인(南人)의 중간에 있었지만,
서청원의 집안은 노론과 매우 가까운 노선이었기 때문에 조선후기에 혁혁한
벼슬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재오 집안은 야당인 남인이었다.
남인 중에서도 그냥 남인이 아니라 ‘골수 야당’이라 할 수 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안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바로17세기 후반에 야당인 경상도 남인의 울분을 대표
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재리’(載李)들은 벼슬길을 봉쇄당했다.
이재오는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인 경북 영양의 답곡(畓谷)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재리’의 가풍을 아는 정치인이다.
조선후기에 가장 화려했던 대제학’3정승 3 집안의 후손 서청원과, 골수 야당인
재령이씨 집안의 후손 이재오의 앞에 놓인 인생행보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