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의 기원과 발전

① 복싱의 기원
복싱은 인류가 출현함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시인에게 있어서 건강한 신체 및 능력은 생존투쟁에 적응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즉, 무기도 없는 시대의 인간이 생활을 유지시키고 자연의 환경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체력이나 주먹 등을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와같이 주먹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진전되어온 스포츠가 바로 복싱이다.
복싱은 여러 스포츠 종목 가운데서도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3800여년전에 이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평원지방에 살고 있던 스멜리아인들 사이에서 성행되고 있었던 사실이 화석이나 그밖의 발굴물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복싱의 발상은 이보다 훨씬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정확한 기원 연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B.C1500년경에 이르러 이 초창기의 복싱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그리스로 전래되었는데, 여기에서 하나의 스포츠로서의 개념과 경기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B.C8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그리스 전역에 널리 보급되어 당시의 그리스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복서라 해도 좋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이와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예술과 무술을 숭앙해오던 당시의 그리스 남자들, 특히 청장년들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함으로써 남성적인 투지력과 용맹성을 배양하고 공포심을 제거하기 위해 맨주먹으로 싸우는 전투기술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올림픽의 복싱 경기자
② 고대의 복싱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을 제 1회로 해서 4년에 한번씩 개최되었고, 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그간에 등장한 경기는 모두 24종목이었다.
복싱은 제 23회(B.C 688)에 비로소 등장해서 올림픽 경기의 중요한 종목으로서 시민의 주목을 끌었고, 제 41회(B.C 616)에는 소년복싱도 행해졌다고 한다.
특히 이 시대는 복싱의 하드 글러브 시대라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목적: 강건한 신체와 용맹심을 기른다.
-규칙: 두 경기자가 서로 양팔로 맞잡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다.
-링: 경기는 스타디움 가운데의 모래사장에서 행해지며, 링은 없었다.
-시합시간: 시합은 상대방이 투쟁능력을 잃고 말 때 까지, 또는 시합기원의 의사 표시를 할 때까지 계속한다.
-주먹: 초기에는 부드러운 가죽띠를 손에 감아 사용하다가, 직업적 경기자가 나타나면서 부터는 단단한 가죽으로 만든 두껍고 둥근 평판을 손에 감고 했다. 로마의 황제시대에는 두껍고 단단한 가죽띠 위에 금속성의 징 또는 못(세스터스)을 박은 것을 사용하다가, 후에 가서는 팔뚝에 금속성의 판자를 대고, 주먹 가운데에는 금속 또는 돌을 쥐고 경기를 하기도 했다.
-계급: 소년과 성년복싱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체중별로는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상: 최초의 경우는 월계관이 수여되었지만, 직업화된 이후로는 상품(소 등과 같은 동물)이, 후에는 상금도 주어졌고 생활도 보장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매수되어 부정한 시합을 하는 선수도 있었다.
-복서: 복싱의 경기자로서 신체에 무언가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코가 비뚤어져 있는 경우, 이빨이 빠진 경우, 또는 눈에 상처가 나있는 경우, 귀에 상처가 있는 등 모두 흉측한 상처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심판: 심판은 모두 10사람에서 12사람까지 다수제로 행해졌다.
고대 올림픽에 있어서의 복싱은 중반기경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심신의 단련을 목표로 한 시민들이 주체로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노예가 선수로 참가하게 되고, 그 승리자에게는 상금을 주는 프로화나 쇼화로 진전되어졌다. 뿐만아니라 노예로서 승리를 한 자에게는 귀족의 지위를 부여하는 등으로서 프로화, 쇼화되어 복싱은 한층 더 전도다난하게 되었다.(로마?세스터스 시대)
이렇게 되자 당시의 시합은, 곧잘 승리나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사부들의 요청에 의해 로마 황제 호노라스가 이러한 복싱을 금지시켜버렸다.(B.C 404년)
이때부터 약 1200년간 공식적인 복싱경기는 지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경기의 마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세기에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무기를 가지지 않은 맨손(베어 너클)의 호신술로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용맹한 게르만 민족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침입했을 때에 복싱은 게르만 민족에게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③ 현대의 복싱
이와같이 해서 복싱은 16세기에 도버해협을 건너서 영국에서 플라이즈-파이트(Prize-figh,현상권투)로서 출현하게 되었다. 1719년, 제임스 피그로는 최초의 챔피온인 동시에, 세계에서 최초로 복싱학교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자 영국은 복싱경기 육성의 땅으로 되었다.
당시의 복싱은 체중 등에 관계없이 맨손으로 상대방이 일어설 수 없게 될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지만, 잭 브로우턴(5대째 챔피온)이 나타나서(1743년), 7개 조항의 복싱규칙(브로우턴 코드)을 제정하면서부터 비로소 스포츠화 되었다.
이 규칙은 링을 규정하고, 쓰러진 상대방을 치는 것, 눈을 찌르는 것, 덤벼드는 것, 무릎으로 치는 것 등을 금지시키는 것으로서 현재로서 보면 상당히 단순한 것이지만 아무튼 스포츠로서의 복싱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할 것이다.
그는 또 상해를 방지하기 위해 글러브를 발명하는 등 여러 방면에 공헌을 함으로써 현대 복싱의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글러브도 연습에만 사용했지 시합에서는 사용하지 않다가, 시합에서도 글러브를 사용하게 된 것은 후의 일이다.
이처럼 영국에서 스포츠의 형태를 갖추어 발달하고 있던 복싱은 식민지 미국대륙의 영국병에 의해 신대륙에 보급되었다.
그렇게 되자 마침내 미국의 복싱은 영국과 패권을 다투는데까지 발전해서 1860년 미국의 챔피온 J.K.휘난은 영국에 건너가, 영국의 챔피온 T.세이야스와 세계 챔피온을 걸고 4라운드까지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서 또 한번 휘난은 시합을 신청했지만 세이야스는 시합에 응하지 않고 챔피온 벨트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당시는 아직 베어너클 파이트(맨손시합)였지만, 1865년 유명한 퀸즈베리 후작이 일반에게는 통제되어 있지 않았던 복싱을 정상화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수단으로서 아마추어 체육클럽 창립과 동시에 새로운 규칙을 발표했다.
그 이래, 그때까지의 런던 플라이즈 파이트 룰로서는, 자칫하면 스포츠의 영역을 이탈하기 쉬웠던 다음의 점들이 크게 수정되어, 점차 복싱은 스포츠로서 올바른 궤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퀸즈베리규정이라 불리워져, 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복싱의 경기규칙의 원천으로 되었다.
퀸즈베리 규정
1. 링은 24피트 평방, 혹은 이의 근사치로 한다.
2. 달라붙기, 부등켜 안기, 던지기 등은 금지한다.
3. 1라운드는 3분간, 휴식은 1분간으로 한다.
4. 쇠약, 혹은 다른 이유로 쓰러진 경우, 타인의 도움없이 10초 내에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이때 상대는 자기 코너로 돌아간다. 10초 이내에 시합이 다시 계속되지 않을 경우, 상대방이 승리한 것으로 한다.
5. 로프에 기대거나 발가락 끝이 바닥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는 다운으로 간주한다.
6. 세컨드, 혹은 여하한 사람도 라운드 중에는 링에 들어올 수 없다.
7. 불가항력의 장해에 의해 시합이 중단된 경우 레프리(심판원,주심)는 시합을 계속할 장소와 시간 등을 가능한 빨리 명시해야만 한다.
8. 글러브는 양질로서 새롭고 정확한 형태의 것이 아니면 안된다.
9. 글러브가 파손된 경우는 주심이 승인하는 것으로 바꿔야만 한다.
10. 한쪽 무릎을 꿇으면 다운으로 간주하고, 만약 진 경우는 상대방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11. 스프링을 단 구두나 부츠를 신어서는 안된다.
12. 기타 다른 덤에 관해서는 런던 플라이즈 링 룰에 의한다.
이와같이 해서 근대 복싱의 기원이 된 영국의 복싱계도, 시합에 금전적 현상이나 보수가 행해지면서부터는 직업적인 선수가 나타나고 스포츠로서의 복싱은 고대 올림픽과 공통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국민의 관심은 많이 쏠리게 되었지만 영국 복싱의 정상적인 발전은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미국 복싱계의 방향은 더욱 발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시 군대의 신체단련을 위한 수단으로서 복싱이 채용되어 신체의 조정력, 순발력, 결단력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1880년, 하버드 대학에서는 복싱이 정식 스포츠 활동으로 행해졌고, 그 후 1940년경에는 학생층에 널리 보급되어 약 100개의 대학에서 복싱이 행해지게 되었다.
복싱의 과감한 남성적인 요소가 미국인의 기질과 잘 매치가 되어, 점점 육성?발전되어, 후에는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불리워지는 하나의 형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복싱은 유럽 각국에 전해져, 각지에서 그 전통을 계승하여, 유럽 스타일로서 발전해 왔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이 개최될 때 쯤 세계 각국에서 복싱 연맹이 결성되어 국제적인 교류가 시작 되었다. 그래서 1946년, 국제 아마추어 복싱 연맹(A.I.B.A)이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시합은 공통의 룰로서 세계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④ 한국의 복싱
우리나라에 복싱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12년 10월 광무대 단성사 주인 박승필씨 등에 의해 유각 권투구락부가 조직되면서부터이다.
1916년 미국의 선교사 길레트(Gillette)씨가 복싱용구를 가지고 들어온 뒤, YMCA에서 해마다 실내 운동회의 한 종목으로 거행했다. 1924년 9월 YMCA에 복싱부가 창설되면서 차츰 경기로서의 복싱이 보급되었고, 1934년 전 조선 아마추어 권투연맹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프로 복싱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32년 일본 선수 다가야쓰로와 필리핀 선수 보비 월스를 초청하여 김동준씨가 시합을 시킨 것이 처음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프로복싱 경기를 가진 것은, 1934년 미국에서 수련을 쌓고 돌아와 서울 운동장에서 시합을 가진 서정권 선수가 처음이다.
1964년 대한 아마추어 복싱 연맹 대의원 총회에서 권투라는 딱딱한 용어를 원어 그대로 복싱이라 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복싱은 역대 올림픽 경기나 아시아 대회 및 세계 군인 복싱 경기 등 여러 국제 경기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으며, 프로 복싱에서도 여러 사람의 세계 챔피온을 낸 바 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대회부터 국제 무대에 나서게 된 우리나라 복싱은 입상권에 드는 등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신준섭 선수(미들급)가 금메달을, 안영수 선수(웰터급)가 은메달을, 전칠성 선수(라이트급)가 동메달을 획득, 빛나는 전적을 세우기도 했다.
※ 복싱 역대 올림픽 한국 기록
14회 1948년 영국, 런던
동메달 1개(플라이급)
15회 1952년 핀란드, 헬싱키
동메달 1개(밴텀급)
16회 1956년 호주, 멜버른
은메달 1개(밴텀급)
18회 1964년 일본, 동경
은메달 1개(밴텀급)
19회 1968년 멕시코, 멕시코시티
은메달 1개(라이트플라이급) 동메달 1개(밴텀급)
23회 1984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금메달 1개(미들급) 은메달 1개(웰터급) 동메달 1개(라이트급)
24회 1988년 한국, 서울
금메달 2개(라이트미들급,플라이급) 은메달 1개(헤비급) 동메달 1개(페더급)
25회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동메달 2개(60kg급,75kg급)
26회 1996년 미국, 아틀란타
은메달 1개(라이트헤비급)
28회 2004년 그리스, 아테네
동메달 2개(57KG,69KG)
참고문헌 : 권투(Boxing) , 송현규저, 신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