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적시는 비
허 열 웅
비는 하늘과 땅이 서로에게 녹아드는 그리움의 밀어다. 뜸했던 연인들을 돕는 조력자이고, 목마른 술꾼들의 벗이고 예술의 꽃이다. 김수영 시인은 ‘움직이는 비애’라고 했고 장석주는 ‘끝마무리를 못한 여덟 줄의 詩’라 했다. 비는 사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선량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남쪽에서 온 손님이다. 때로는 몽상과 회한의 시간을 선물하며 잠시 우울함에 빠지게도 한다. 내 마음의 악보 위에 내리는 비의 리듬은 심장박동을 뛰게 하여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시들은 사랑을 떠올리게 하여 바깥으로 뛰쳐나가 게 유혹한다.
비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물감이고, 현絃을 조이며 고르는 거문고 소리이다. 시인과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고, 작곡가에게 주는 오선지五線紙악보다. 신명나는 타악기 연주자이기도하다. 비를 피하던 소년과 소녀가 원두막과 수숫단 속에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되기도 한다. 세찬 빗줄기는 취한 화가의 붓질처럼 세상의 공백을 빽빽이 채워가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고, 연인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무선전화기이며 완행열차를 타고 오고 있을 허물없는 옛 친구다. 빗줄기끼리 어깨동무를 하여 샛강으로 모여 흘러가면서 꿈틀대는 바다가 된다.
저처럼/ 종종 걸음으로
나도 /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 (비 - 황인숙)
70년대 젊은이들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초우草雨”란 영화가 있었고 주제가는 오랫동안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간 적이 있다. 프랑스에 나가 근무하는 대사의 집에 가정부로 있는 꿈 많은 처녀가 있었다. 유학중인 딸이 귀국했다 돌아갈 때 유행하던 고급 비옷(우비)을 가정부에게 주고 갔다. 어느 비 오는 날 시장에 갔다가 젊은 청년을 만난다. 서로의 신분을 묻는 과정에서 대사관 집 딸로, 고학을 하는 대학생으로 변신을 한다.
젊은 청년은 대학생이 아니라 공사판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였다. 변변한 옷 한 벌 없는 가정부와 비가 오면 일을 할 수 없는 두 사람은 비 오는 날에는 무조건 만나기로 한다. 대학생이라는 이상형과 권세 있는 부잣집 딸을 선망하여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면이 벗겨져 서로 신분을 알게 된 날, 비는 세차게 퍼붓고 분노와 허탈이 천둥 번개가 되어 한 바탕 아수라장으로 변해 눈물이 빗물이 되고 사랑의 아픔도 흠뻑 젖는 영화였다.
봄날에 제비들이 땅에 닿을 듯 저공비행을 하거나 할머니가 팔다리가 쑤신다고 아랫목에서 몸살을 하면 일란성 쌍둥이처럼 비가 내렸다. 우리는 비 예보를 듣고 우산을 챙기면 이미 늦은 것이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면 우산부터 챙겨야 한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나름대로의 규칙과 운율과 침묵을 갖추고 있다. 따뜻한 우전차雨前茶를 한 잔 마시다보면 영감靈感이 찾아와 비를 노래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몇 줄의 에세이도 써본다.
오던 비가 그치는 날엔 자주 우산을 잃어버리지만 나 자신은 멀쩡하게 데리고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노트에 옮겨 적다가 지은이의 이름을 빠트린 시를 읽는다.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비를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비는 수증기로 지상을 떠나 하늘을 맴돌다 다시 돌아오는 윤회輪回를 거듭한다. 뜨거운 여름 날 먼지 풀풀 날리는 길가에 노랗게 핀 애기똥풀이 목말라 칭얼대거나 연인이 몹시 그리울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천사 같은 존재다. 쏟아지는 그리움에 마음이 젖고 있으면 빗속을 달려오는 옛사랑이 있다. 그런 날엔 조용한 찻집에 홀로 앉아 흰구름 푹신하게 떠다니는 카프치노나 칠흑빛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채은옥의 노래 ‘빗물’을 듣는다.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 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 날이 생각이 나네
옷깃을 세워주며 우산을 받쳐준 사람/ 오늘도 잊지 못하고 빗속을 혼자서 가네
첫댓글 오늘처럼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는날 회장님글 마음을 적시는 비
읽으니 더욱 마음이 촉촉해 집니다.
열심히 글을 쓰시는 모습 보며 본받아야지 마음 먹지만 잘 안됩니다.
마음을 적시는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하시지요
그 동안 쓰신 김선생님의 글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 편을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써 놓으신 글이 제법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정리도하고 퇴고하셔 내 년 쯤 책을 내시도록 하세요
혹 제가 도움이 된다면 퇴고라든가 발간 경험 등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즐거운 명절보내시기 바랍니다.
@워낭소리 참 인사를 빠뜨렸네요,
지난 번 제 출판기념회에 멀리 제천에서 서울까지 오셔 축하해주신 그 마음
오래 오래 간직할게요.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