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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와 기독교의 유형론적 특성비교
[1] 비교방법론으로서 역동적 유형론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있는 두가지 서로다른 유형의 종교 곧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심층적 대화와 협력을 위하여, ‘궁극적 실재’에 대한 두종교의 유형적 특징에서 유래하는 차이/통함을 밝혀보려 한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용어자체가 서구신학전통에서 주조된 어휘이므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진여’(眞如) 혹은 ‘진리 그 자체’(Darma in-itself)와는 풍기는 맛이 다르지만, ‘궁극적 실재’라는 어휘가 기독교전통의 ‘초월적 인격신’을 전제로하는 철학적 언표가 아니라는 점만을 분명하게 해두고자 한다.
20세기 개신교신학의 거장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기독교와 불교를 서로 비교하되 역동적 유형론(Dynamic Typology)에서 비교한 바 있다.1) 필자의 논제서술도 방법론적으로는 틸리히의 ‘역동적 유형론’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연구할 때, ‘역동적 유형론’ 관점에서 연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함의한다.
첫째, 어떤 실재가 어떤 유형(類型, Type)에 속한다고 말할 때, 유형이란 개별적으로는 다양한 현상, 속성, 외형, 특징을 드러내는 어떤 실재의 외적 현상들 사이에 보다 고차원적인 관계성이 파악되어 포괄적인 범주적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실재들과 구별시키는 유형을 구성함을 전재한다.
둘째, 유형들이란 다양한 현상 실재들을 그것들과 다른 실재와 식별(분별)하는 이해를 위해서 인간 마음(정신)이 만들어내는 ‘논리적 이상형’(logical ideals)이므로, 유형은 시공간적으로 실재하는 구체적 실재물은 아니다.
셋째, 현실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유형적 특징들의 합성체로서 구체적 실재들만이 존재한다. 인간정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서 다른것과 구별되는 유형적 특징을 식별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유형론의 약점은 개별자가 지닌 역동성및 개별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을 간과함으로서 경직화되거나 ‘스테레오타입’ 식으로 사고를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
넷째, 역동적 유형론은, 유형론적 사고를 하되 특정 유형안에 내재하는 정태적 경직성(static rigidity)을 극복하고 드러나는 유형과 긴장․충돌을 유발하는 다른 대극(polarity)이 자신이 속하는 유형적 구조안에 내재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자신을 동일율에 유폐시키지 않고 다른 것에 귀기울이며, 유형을 넘어서려는 자기초월적 용기와 개방성을 지닌다. 역동적 유형론은 마치 분석심리학에서 남성과 여성은 각각의 퍼스날리티 안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대극적 실재로서 지니면서 대극을 초월통전하려는 전일성을 지향한다는 융의 이론과 흡사하다.
다섯째, 그러므로 역동적 유형론은, 특히 종교적 유형론에서는, 어느 유형의 종교가 다른유형의 종교보다 더 우월한가라는 ‘우월성 논쟁’이나 ‘진정성 논쟁’은 의미가 없게 된다. 각 종교는 유형적으로 서로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닌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응답이며 체험․이해의 표현적 양식들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틸리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유형적 특징 안에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실재’ 체험의 기본적 대극요소들이 가장 범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존재로서 신성 체험’(the experience of the holy as being)을 강조하는 신비적 요소가 강한 유형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존재해야할 신성 체험’(the experience of the holy as what ought to be)을 강조하는 윤리적 요소가 강한 유형의 종교라고 양자를 대비시킨다.
일곱째, 그 결과 두종교의 대표적 상징은 전자에게서는 무명을 벗어나 해탈자에겐 삼계가 그대로 ‘니르바나’가 되는 초시간적 영원한 현재를 강조하는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한다. 반면에 후자에게는 되어감과 되어감의 과정으로서 시간성을 강조하는 종교, 현재를 변혁해가는 미래지향적 종교, ‘참여의 원리’가 주도하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 대망의 종교를 이룬다. 그러나 그 유형적 특성이 상대 종교 안에는 전무하다는 말이 아니고 다만 지배적 특성이라는 것 뿐이다.
이상과 같은 기본입장을 전제로 하여, 두 종교의 유형론적 특징을 무의 존재론과 유의 존재론, 삼신불론과 삼위일체론, 니르바나와 하나님의나라등 세가지 주제를 비교검토함으로서 폴 틸리히의 두 종교에 대한 역동적 유형론에 입각한 비교연구 논지를 부연설명하고 확인하고자 한다.
[2] 무의 존재론과 유의 존재론: 불교의 공(空)과 기독교의 존재자체로서의 하느님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는 기독교와 불교라고 부르는 두가지 패러다임을 비교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부딪히는 문제는 ‘실재’를 파악하는 근본 발상법이 유형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하나는 무의존재론 이요 다른 하나는 유의존재론이다.
인류의 사유패턴에는 두가지의 뚜렷이 다른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그 한가지를 ‘실체론적 패러다임’이라 부르고 다른 한가지를 ‘관계론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실체론적 패러다임은 전통적 기독교 사유체계와 신론에서 유형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며, 관계론적 패러다임은 불교적 사유세계에서 두드러진 유형적 특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틸리히의 ‘역동적 유형론’에서 보면, 기독교의 실체론적 패러다임의 아니마로서 관계론적 패러다임이 신비주의전통 속에 끊임없이 병존해왔고, 불교의 관계론적 패러다임도 그 아니무스로서 부파불교의 하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실유론(實有論)이나 대승불교의 삼신불 사상속에 병존해왔다.
실체론적 사유체계에서 ‘실체’(substance)란 생성․소멸․변화․운동에 휩쓸리거나 메몰되지않고 변화와 생성을 가능케 해주면서도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는 모든 존재의 기체(基體)를 의미한다. 자신이 존재하기 위하여 다른 존재자의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으며 자족 자존하는 것이며, 상대적인 ‘있음’이나 ‘없음’을 넘어서 있는 존재 그 자체, 순수존재로서 하느님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체였다. 실체론적 사유체계에서 ‘궁극적 실재’는 영속성, 자존성, 절대주체성, 영원무궁성등을 핵심적 속성으로 지닌 것이었다.
실체론적 사유체계 속에서, 그리스의 존재철학이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론, 네오플라톤니즘의 일자(一者)철학이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과 위디오니시우스 신비신학을 통해 기독교에 깊숙이 도입됨에 따라, 역사적 사건과 구원사를 통해 자기를 계시한다는 히브리적 사유는 많이 헬라화 되었다. 20세기 신학의 거장들의 신관 속에서, 헬라화된 신론은 성서적․히브리적 사유방식에로 많이 회복되었지만, 기독교적 하느님의 자존성, 절대주체성, 영원무궁성은 지속되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학자들 중에서 예들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그리고 칼 라너에게 있어서 그들의 신론이 정태적이고 군주론적 단일실체론적 하나님은 아니고 매우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하나님 이해로 재해석하여 성서가 증언하는 ‘살아계신 주 하나님’신앙에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세계현실 또는 피조세계 전체와 구별되는 절대주체자요, 절대자존자요, 절대 영원무궁자로서의 ‘하느님 자신’이 신앙적으로 고백된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는 태초에 만물이 형성되거나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 기독교의 신관은 철저히 ‘유의존재론’이 ‘무의존재론’을 압도하는 유형을 지니게 된다.
칼 바르트에게서,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높고깊은 감정․노력 직관을 다 초월해 있고, 인간의 성향이나 가능성에 일치하는 일이 없고, “바로 자신 속에 근거를 두고, 그같이 현실존재를 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주(主)이시며, 진리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이시다. 바르트에 의하며 창조는 은총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구별되는 현실적 존재를 존재하게끔 허락하셨다.
바르트신학에서 다시한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성서적 종교의 특징 곧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차이는 ‘피조물의 현실’ 이란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에 근거한 현실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계현실은 시간, 공간, 인과율에 제한되는 우연성을 지니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자유와 절대능력과 절대자존함 가운데서 오로지 당신의 사랑,은총, 영광 안에서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로 창조하셨고, 창조하고 계시며, 종말론적으로 영화시키실 것이다.
폴 틸리히에게서 하나님은 비존재(nonbeing)를 무한히 극복하시는 존재자체(being itself)로서 존재의 지반(the ground of being)이자 존재의 능력(the power of being) 이다. 틸리히에 있어서 신은 ‘하나의 최고존재’도 아니며, 본질과 실존사이 또는 가능태와 현실태사이에서 긴장갈등 하거나 유동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체계에서 볼 때, ‘무로부터의 창조’ 교의에서 기독교 정통신학이 말하는 무(無, nihil)란 ‘형상이 결여된 단순한 질료로서의 가능태’같은 ‘상대적 무’(me on) 아니라, 글자그대로 ‘절대적 무’(ouk on)라고 해석한다.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존재자체’로서의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은 론리적으로 나 존재론적으로 ‘비존재’(nonbeing)보더 더 근원적이라고 사유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유한성과 우연성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비존재의 충격’을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존재자체이신 하나님만이 시간, 공간, 인과율에 메이거나 비존재의 충격을 받지 않는다.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은 도리혀 시간, 공간, 인과율, 있음체험과 없음 체험, 인격성과 책임성, 자유와 필연의 존재론적 지반이요 탯집이 된다. 비록 틸리히가 현대신학자중에서 가장 많이 ‘부정신학’(the theology of the via negativa)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지라도 ‘무의존재론’에 우선하는 ‘유의존재론’을 강조하는 서구철학과 신학의 전통을 벗어나지 않았다.
20세기 가톨릭신학계를 대표하는 칼 라너의 하나님론에서도, 바르트나 틸리히보다 ‘존재의 유비’나 ‘지연의 빛’을 더 많이 포용하여 “유한은 무한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긍정하는 신학전통에 서 있지만, ‘유의 존재론’을 강조하는 사유의 패러다임에 속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칼 라너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무조건 없이 인간성 안에 스스로를 내어주면서 인간성을 존재론적으로 신과 관계맺는 존재로서 고양시킴으로써, 인간을 세계 안에 갇히지 않고 자기초월을 경험하게 하는 존재자체로서 신비자이시다.
이찬수가 요약한대로 칼 라너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무’(Nothingness)가 아닌 절대존재에 근거해 있고, 그 절대존재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이 인간초월의 지향점이다. 이 지향점은 개념화 될 수 없고 불가해한 ‘무한한 충만’이자 ‘무제한의 존재’인 까닭에 그것은 그 무엇에게도 포위당하지 않고 얽메이지 않는다”.7) 칼 라너에게 있어서도 궁극적 실재는 피조물에게 자기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무한히 내어줌으로서 피조물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고, 비존재 위협을 넘어 궁극적 실재를 지향한다는 ‘유의 존재론’ 계열에 서있음을 보았다.
역동적 유형론의 관점에 볼 때,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관이 실체론적 패러다임이라면, 불교는 전형적으로 그에 대비되는 관계론적 패러다임 안에서 궁극적 실재를 이해한다. 관계론적 패러다임은 실재를 창발성, 생성, 유기적 관계망, 그리고 비움에서 파악하는 패러다임이다. 불교의 관계적 실재관은 ‘무 또는 공의 존재론’을 발전시키는데, 결국 그 모든 것들은 불교의 기본적인 제1원리인 ‘인연생기법’(因緣生起法, Pratityasamutpada)의 당연한 결과이다. ‘인연생기법’은 불교의 여러가지 명제적 진리들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불교적 실재관과 사유와 논리의 밑바탕에서 그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다르마 자체’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본자는 법(다르마)을 본자요, 법을 본자는 연기를 본자이다”라는 말이 성립한다.
고다마 싣달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했을 때, 그가 깨달아 해탈을 하고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그가 깨닫고 본 진리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천계적 진리 곧 어떤 초자연적 구원계시가 아니라, 바로 인연생기법 곧 존재하는 보든 실재들은 그 자체의 불변하고 자존하고 영속적인 ‘실체’를 지닌 것이 아니고 상의상자(相依相資)하는 관계구조망 속에서 현성(現成)하는 일시적 실재임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확철할 때, 원시불교의 네가지 기본명제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열반적정(涅般寂靜)이 연역된다.
고다마 싣달다가 가르친 불교적 진리의 핵심이자 초기불교 교리의 근본명제인 ‘인연생기법’은 시공속에 존재하는 유한한 물질적․심리적․정신적 존재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 실재’에게도 해당되는 근본법이다. 다시말해서 한송이 국화꽃, 미움과 사랑의 심적 상태, 천상의 보살들과 제신(諸神)들에게도 예외없이 해당되는 절대기본법이다. 따라서 ‘궁극적 실재’도 만약 불교에서 언급한다면 ‘인연생기법’의 패러다임에 의해 말하질 때라야만 의미를 지닌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표현을 ‘공’(空, Emptiness/ Sunyata)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다름아니라 ‘궁극적 실재’를 실체론적 사유패러다임으로 언표한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사유패러다임으로 언표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진리자체’를 언어․문화적 맥락상에서 볼 때, ‘무의 존재론’이 발전한 힌두교-불교-노장사상-신유학의 형이상학에서 거듭거듭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흔히 반야공사상(般若空思想)과 유식론적(唯識論的)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대승불교의 두가지 특징이라고 강조하지만, 초기불교에 없던 사상이 문득 1세기 전후의 대승불교발흥과 함께 주조된 것은 아니다. 주후 2세기 전후시기에 활동했다는 천재적 불교학승 나가르쥬나(龍壽, Nagarjuna)는 그의 명저 중론송(中論頌, Madhyamika-Karika)에서 저 유명한 팔불게(八不偈: 不生, 不滅, 不去,不來, 不一, 不異, 不斷, 不常)를 말함으로서 모든 형태의 실체론, 모든 형태의 이원론, 모든 형태의 정태적 사고를 희론(戱論) 이라고 비판하고, 진리자체는 오로지 인연생기법 그 자체요, 공(空)인 것이고, 그 진리를 깨닫는 참지혜를 일컬어 분별지(分別智)와 구별하여 반야(般若, Prajna)라 한다. 그러므로, 나가르쥬나의 철저한 ‘부정의 정신’은 대승불교가 말하려는 진리를 인식론적 측면에서 강조하여 파사현정하려는 우상타파 정신이라 말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반야공사상에서 보면, 진리의 본래모습(眞如)․인연생기법․공(Sunyata)․프라쥬나(般若)등은 모두 궁극적 실재를 다른 각도에서 언표한 것들이다.
주후 제4세기에 활동했던 무착(無着,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 형제는 나가르쥬나의 철저한 반야공사상이 론리적으로 집착이나 아집을 끊는데는 장점이나, 지나친 공(空)이나 무(無)사상은 만물의 실체성(substance)을 부정하는데는 능하나 만물의 실재성(reality)까지를 부정하는듯한 오해를 일으킨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공(空)은 단순한 부정의 논리만이 아니라, 묘공(妙空) 또는 충만공(充滿空)으로서 만물을 형성케하는 존재론적 힘과 의미의 탯집으로 보려고 했다. 거기에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唯識思想) 및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꿏을 피우게 되었다. 삼라만상은 일심진여(一心眞如)의 나타남에 불과하며 오로지 실재하는 것은 ‘하나의 근원적인 마음’ 곧 일심(一心)이기에 ‘오직 마음만 실재’(唯識)하며, 마음은 수많은 선악을 창발시키는 잠재적이고도 가능태인 만유의 종자를 간직하고 있다(如來藏)고 봄으로서, 불교사상을 허무주의나 단순한 부정의논리 체계에서 구원하려 했다. 불교의 종파에서 법상종(法相宗)이 바로 이 유식종(唯識宗)의 대표적 종파이지만, 화엄종이나 연기론이 모두 이러한 입장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적인 궁극적 실재 진여(眞如)는 그 체(體)는 공적(空寂)하지만, 그 상(相)과 용(用)은 진여가 지닌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재성 때문에 일체만유는 단순한 허망한 것, 타락한 것,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진실로 반야심경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며, 대승기신론이 갈파한대로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대승불교 기신론 저자 마명의 설명과 원효의 주석에 의하면, 궁극적 실재 진여일심(眞如一心) 은 두측면 또는 양극성이 있는데, ‘실재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心眞如門)과 ‘현상의 측면에서 파악되는 마음’ (心生滅門)이 그것이다. 이 두측면은 각각 개념상으로 구분될 뿐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여래장은 현상계와 경험적 자아를 형성시키는 그 탯집이기에, 진여 그 자체는 아니지만 진여여래(眞如如來)를 가능태로서 감추고 있으며, 종자씨앗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심이란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실재를 파악하는 사유의 패러다임으로서 불교의 유형적 특징인 ‘무의존재론’에서 진리 또는 궁극적 실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간략하게 일별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절대자존자, 절대초월 창조자, 초인격적 유신론적 하나님 이미지와 유형론적 특성이 달라서, 비신론적․비인격적․인연생기적․진공묘유적 실재로 파악되었음을 살폈다.
이상의 비교는 학자들의 교의학적 비교이지만, 종교는 학자들의 머릿속에서 숨쉬고 있지 않고 각종교에 귀의하는 신도들의 심령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교의학적 측면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상이점은 삼신불사상과 삼위일체론이라는 보다 신앙적 차원에서는 놀라울만한 상응성을 나타내 보인다. 아베 미사오(阿部正雄)도 이 점에 주목하였다.
[3] 삼신불론과 삼위일체론
셈족계 종교인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모두 유일신사상을 공유하지만, 기독교가 다른 나머지 두 종교로부터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은 ‘궁극적 실재’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신앙한다는 점이다. 삼위일체교의는 정통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교의중 하나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예수의 가르침에나 원시 기독교의 케류그마에는 없는 교의이다. 물론 주후 80년 전후에 형성된 공관복음서나 그 이전에 씌여져 회람되던 바울 서신속에 예배의식 용어로서의 삼위일체적 축복형태가 나타나 보이지만, 세부적인 교의적 확정은 4세기 제1차 공의회(325년)와 2차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회의(381년) 이후 였다. 제3세기초 이미 터툴리안교부는 삼위일체론의 기본골격을 정립하였다: 한분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세가지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 한 실체 세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e)이며, 구분되었으나 나누이지 않고 구별되어 있으나 분리되지 않으며(distincti, non divisi, discreti, non separati), 삼위가 일체되신(trinitas)다고 표현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가 발생한 이후 신학자들이 만든 교의학적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주(主) 하나님으로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계시적 사건에 기인한다. 삼위일체론은 그 근거와 출발점과 대상을 하나님의 자기계시 안에 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예수의 말씀과 고난,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을 체험했다. 동시에 성령의 강림 체험 속에서 그들은 조상대대로 신앙하던 하나님의 현존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체험했다. 초대 기독교 신앙 공동체들은 세가지 종류의 ‘궁극적 실재’와의 만남체험이 상호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본질은 동일하면서 나타나는 양식이 다른 초월자 경험임을 간파하고, 그 상호관련성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야하는 과제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론, 기독론, 성령론이 구별되면서도 삼위일체론이라는 통전적 이해 속에서 삼위일체론적 유일신론을 정립하게 되었다.
삼위일체론이 말하려는 진리는 성서종교가 경험하는 ‘궁극적 실재’ 하나님은 군주같은 절대 초월적인 고독한 단독자 이거나, 인격성이 완전히 탈색된 만물의 이법(理法)․원리․ 철학적 근원본체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영존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창조주․구원주․속량주로서 계시하시는 주(主)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신적생명 안에 영원한 자유․사랑․영광 가운데서 상호충만, 상호순환, 상호내주하는 사귀임을 갖는 하나님 이라는 고백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이 경험하고 고백한 유일하신 하나님의 ‘신적존재양식' (seinsweise Gottes)일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여 역사속에서 세가지 구원론적 방식으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삼위일체론의 신앙적-신학적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 자신의 구원사건으로 고백하자는 것이다. 둘째, 성부와 동일한 성령의 신성을 고백함으로써, 성령의 사건을 단순한 초능력사건으로 이해하지않고 하나님자신의 구원사건으로 고백하려는 것이다. 셋째, 삼위일체론은 기독교공동체의 종말론적 비젼과 하나님나라의 대망신앙과 연결되는데,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셨음(Gekommensein)․성령의 현존 안에서 현재적 오심(Kommen)․미래종말적 오심(Kommen-werden)이라는 시간적 세양태속에서 구원체험이 통전되고 통일된다는 신앙고백이다.
AD. 325년 니케야 1차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제2차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이 교의로서 확정되었다는 것은, 제1차공의회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공인되고, 제2차 공의회에서 성령의 신성이 공인된 것이다. 그 속 뜻은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초기부터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하여 그분의 행태(行態)와 존재가 지닌 계시의 투명성(transparency)을 느꼈고, 신성의 충만이 그의 존재 안에 현존함을 체험했기에, 그는 사람이긴 하되 하나님과 인간을 다리놓는 접촉점이자, 중보자이고, 로고스가 육화되신분이라고 교의로서 표현한 것이다. 삼위일체론의 일차적 동기가 예수 그리스도 존재의 신비를 해명하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이후, 예수 공동체가 성령의 임재체험안에서 병치유, 축귀, 예언, 방언등을 경험했을 때, 이런 능력을 일으키는 영이 유일신과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질문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교의형성의 역사적 동기와 진행사정은 불교의 삼신불 사상의 경우에도 매우 유사점을 보인다. 불교의 삼신불사상은 특히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정립되게 되는데, 역사적 인물 고다마 싣달다가 단순한 인간부모의 생물학적 소생으로서, 그 자신의 수행에 의하여 십력(十力)․사무외(四無畏)․삼념주(三念住)․대비(大悲)를 갖춘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본디부터 영원한 진리자체가 역사적 몸을 입고 나타난 것이라는 믿음이 발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다마 붇다가 입멸한 후에, 독실한 불자들의 신행과정에서 경험하는 초자연적 종교체험들은 자연히 시공을 초월하여 자유자재로 신도들의 신행에 감응해오시는 부처가 있다는 믿음을 갖게된 것이다.
삼신불사상이란 불신(佛身)에 세가지 존재양태가 있다는 교설인데 법신(法身, dharma-kaya), 보신(報身, sambboga-kaya),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 nirmana-kaya)이 그것이다. 법신불이란 우주에 편만한 진리와 빛 그 자체 또는 그것의 인격화로서 이불(理佛)인데, 진언종의 대일여래불이나 선종의 비로자나불이 법신불의 범주에 속하는 부처이다. 본래 법신불은 모든 빛깔 형상 속성등을 초월한 언표불가능한 부처이지만, 대중은 그 법신불을 인격화하여 온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이는 부처로 형상화한다. 법신(dharma-kaya)이라는 호칭의 법(dharma)은 영겁토록 변치않은 만유의 본체라는 의미이고, 신(身, kaya)는 본래 적취(積聚)의 의미로서 진리말씀의 총체인데, 우주에 편만한 진리를 인격화하고 체현하는 부처로서 법신불신앙을 형성한 것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 삼위일체론 중에서 성부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메타포를 지니지만, 동시에 엑하르트가 말하는바 신성(Godhead)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보신(報身)은 보살로서의 바라밀의 수행과 서원이 완성되고, 그 보과(報果)로서 얻어진 완전․원만한 이상적인 붇다이다. 보신은 뛰어난 법문, 공덕, 선근, 초능력등을 범부 중생들을 제도하고 교화하고 치유하는데 아낌없이 사용한다. 불자들이 실지로 신앙대상으로서 존숭하는 보신불로서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과 약사여래불이 그 대표적인 부처이다. 불교의 신앙전승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법장보살이라는 분이 48서원을 세우고 오랜세월동안 수행한 후에 서방극락세계에서 성불하고, 그의 보과가 삼세시방(三世十方)에 걸쳐 무한하여 중생을 진리의 빛으로 제도한다는 부처이다. 약사여래불 또한 그의 선근공덕의 수행보과로서 중생들의 고뇌와 병고를 구제하는 부처로 숭앙된다.
화신(化身)은 일명 응신(應身)이라고도 호칭하는데, 진여로서의 진리자체가 역사적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한 부처이다. 석가모니불이 대표적인 화신이다. 불교의 신앙전승에 의하면 고다마 싣달다 안에서 성불한 화신불 이전 과거 역사속에 여섯분의 부처가 있었다고 전하며, 미래에 오실 민중메시야 부처로서 미륵불도 화신불의 범주에 속한다. 법신․보신․화신이라 호칭하는 대표적 삼신불 사상은 불교종파에 따라서 다르게 이름 불러지기도 하는데, 예들면 법상종에서는 자성신(自性身)․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삼신불론과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닮은 구조적 유사성보다는 차이가 더 많지만, 가장 공통적인 특징은 역사적 인물인 예수와 고다마 싣달다를 진리자체의 역사적 화육체라고 보는 점이다. 말하자면 역사속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한 진리체인데, 불교에서는 굳이 그러한 성육신한 부처가 고다마 싣달다 한분이어야 한다는 제한성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회성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성령은 보혜사이시며, 성도들을 감화․교화․치유․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에 상응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보신불이다. 그러나, 보신불 역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불, 약사여래불등 다수이다. 한국불자들의 염불신앙에서 유독히 “남무 아미타불․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함으로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불)을 동등한 또는 동일한 보신불로 신앙하는 민중불자들의 마음이 나타나 보인다.
성부하나님과 법신불은 본래 언표불가능한 ‘진리 그 자체’․‘존재 그 자체’로 이해하되, 본체에 인격적 의의를 붙여 법신, 성부하나님이라 부르는 메타포는 서로상응한다. 삼신불론과 삼위일체론이 닮은 구조를 지니면서도 고유한 특징을 담지한 것은 두 종교의 유형적 특징에 기인한다. 유일신 신앙의 탯집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삼위의 일체성(Unity)을 강조하지만, 인연생기설에 기초한 불교에서는 아예 삼신불론만이 존재하지 굳이 삼신의 일체성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두 종교의 차이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두 종교의 구원표상인 니르바나와 하나님의 나라 상징의 대비에서 드러난다.
[4] 니르바나와 하나님의 나라
역동적 유형론을 주장한 폴 틸리히는 불교와 기독교의 유형적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두가지 상징으로서 두 종교의 궁극적 목표를 상징하는 니르바나와 하나님의 나라를 심도깊게 분석하였다. 그리스어 텔로스(telos)란 실재와 실존의 존재와 생성운동 속에 본래갖추어진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가치 지향적 목표를 의미한다. 텔로스란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최종목표라는 의미도 아니고, 외부로부터 첨가하거나 부대적인 어떤 목적 가치가 아니다. 그런의미에서 불교의 텔로스는 니르바나이고, 기독교의 텔로스는 하나님의나라 이다.
두 종교의 유형적 특징을 텔로스 명제정식(telos formulars)으로 표현하여 틸리히는 이렇게 총괄적으로 짧게 요약하였다: “기독교에서는 만인과 만물의 텔로스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통일되고, 불교에서는 만물과 만인의 텔로스가 니르바나 안에서 성취된다”
위에서 틸리히가 ‘텔로스 명제정식’으로 갈파한 두 종교의 상징적 특징은 다름 아니라 두종교의 유형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강조점은 기독교는 ‘만인과 만물의 통일’이라는 어구이며, 불교는 ‘만물과 만인의 성취’라는 표현이다. 하나님의나라 상징은 사회적․정치적․인격적 상징(social-political-personalistic symbol)인데 반하여 니르바나는 존재론적 상징(ontological symbol)이다. 하나님의 나라 상징은 ‘정의와 평화의 다스림’을 갈망하는 공동체의 희망의 상징이고, 니르바나는 존재의 궁극적 지반안에서 유한성, 소외, 무명(無明), 고(苦)가 극복된 상태를 갈망하는 인간실존의 구도적 상징이다.
하나님의나라 상징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유토피아적인 나라, 특히 억압받은 자들과 소외된자가 모두함께 자유․정의․평화․해방을 체험하는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상징 안에는 현재의 존재상태를 ‘저항’(protesting)하면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적 현실 곧 ‘마땅이 그러해야 할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사회윤리적 파토스가 강하다. 시간은 불가역적 특성을 지니고, 미래를 지향하면서 앞으로 흘러간다. 기독교의 아가페 모티브는 용납 할수 없는 것을 용납하면서, 인간실존과 사회구조를 변혁해가는 ‘거룩한 분노’와 ‘숭고한 광기’를 용납하는 역동성을 지닌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참여의 원리’가 주도한다.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상징에서는 역사가 중요하며, 역사 안에는 새로움이 창조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젼이 말하는 바처럼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러나, 니르바나 상징에서는 만유실재가 타락해있거나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미완성의 그것이 아니며, 만물 자체가 이미 깨달음의 맑은 눈으로 보면 원융회통하고 원만온전한 “존재의 성스러움‘이다. 만물은 그것자체로서 이미 목적에 도달해 있는 것이고 ’신성한 것‘(sacramental) 이기에 문제는 오로지 무명(無明)에 휩싸여 고해(苦海)속에 허덕이는 인간실존의 관점이 해탈로서 바꾸어져야 한다. 시간은 미래로 달려가는 직선적 그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라는 호수 위에서 동그라미 파동을 일으키는 물결파와 같을 뿐이다.
니르바나 상징에서는 동일성의 원리가 주도하여 언제나 ‘여기․지금’(Here &Now)이 중요한 것이지, 역사의 미래목표나 목적이 중요하지 않다. 불자들도 자비행(慈悲行)을 강조하지만, 불교의 핵심은 참지혜(般若智,prajuna) 안에서, 그것과 더불어 해탈이 중요하지 현실세계의 구조적 변혁이 일차적 관심이 되지 않는다. 불교의 자비행은 해탈자가 무명속에 헤메는 인간 실존의 고(苦)에 즉하여 동병상린함으로서,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닫도록 돕는 자비행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나마 두 종교의 ‘텔로스 포물러’를 통해 유형적 특성을 대비해 보았다. 그러나, 두 종교는 다른 상대종교가 지닌 유형적 특성을 조금도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예들면, 기독교가 역사변혁적 해방모티브가 강하다고 해서 사회구조적 변화 곧 ‘외면적 해방’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지않고 ‘내면적 해방’과 ‘지금․여기’를 강조하는 존재의성스러움에 눈뜸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네 맘 속에 있다”고 예수는 말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불교 역시 계․혜․정(戒 慧 定) 삼학을 동시에 강조하고, 연기설(緣起說)에 기초하고 있는 한, 인간사회와 만물의 유기체적 관계성을 한시라도 간과하지 못하기에 사회윤리적, 구조적 변화에도 참여하는 민중불교운동이나 생태환경변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두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유형적 특성들은 서로 평행성을 그으면서 영원히 병진하거나 서로 대립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종교안에서 주도적인 유형적 특성이 다른 종교 안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안으로 숨겨져 있는 대극구조로서 상존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두 종교의 유형적 특성은 대립적 배타관계인가 상보적 수용관계인가? 필자는 견해는 후자의 입장이다. 그 점을 본 엣세이의 나가는 말로서 간략히 다음에서 진술해 본다.
[5] 맺는 말: 상보성원리와 개성화에서 본 역동적 유형론의 의미
앞에서 우리는 불교와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관의 특징과 차이성을 ‘공과 하나님’, ‘삼신불론과 삼위일체론’, 그리고 ‘니르바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작은 주제로서 일별하였다. 서로다른 궁극적 실재관을 어떤 해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가? 일단 발제자는 물리학자 닐스보아의 ‘상보성원리’을 원용하여 이해하는 길과, 칼 융의 심충심리학에서 ‘개성화 지향원리’를 원용하여 설명해보려고 한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자연현상 설명이론의 하나인 ‘상보성 원리’를 ‘궁극적 실재탐구’ 라는 고차원의 정신적 영적 체험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미있는 은유적 시도인 것이다. ‘상보성 원리’(complementary principle)란 물리학에서 원자차원이나 빛과 전자 같은 극미적 물리현상에서 그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정합적으로 설명하려면,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서술하고 그 양성질이 상호보완적 관계임을 주장하는 원리이다. 빛이나 전자는 실험조건에 따라 파동처럼, 입자처럼 행동하는 파동입자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세가지 점이다. 첫째, ‘실험조건’에 따라 입자성과 파동성이 나타나므로, 본질규명이 실험조건에 의해 영향받는다는 점이다. 둘째, 빛이나 전자의 파동측면과 입자측면을 동일한 실험조건에서 동시에 관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셋째, 파동측면과 입자측면을 상호보완적으로 합쳐 이해하면, 어느 한가지 측면만을 취하는 것보다 빛과 전자현상을 설명하는데 보다 완전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궁극적 실재’를 이해 설명하거나, 체험하는 방식에서 빛의 입자파동 이중성 처럼, 두가지 측면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말한다면, 불교를 ‘궁극적 실재’에 대한 파동적 측면이라보고, 기독교의 그것을 입자적 측면이라고 볼 때, 물리학에서 ‘실험조건’이란 종교에서 ‘궁극 실재’를 체험하거나 이해하는 ‘해석학적 패러다임’인 것이다. ‘실험조건’이 실험도구나 실헙방법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듯이,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의 근본조건들 곧 기후지질풍토, 역사적 경험, 언어, 문화, 정치사회적 조건등등 다양한 것으로 구성되는 해석학적 안경렌즈와 같다.
물리실험에서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단일한 실험조건아래에서 동시에 관찰할 수 없는 것처럼, 불교적 패러다임과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파동성과 입자성을 인정하고 상호보완적으로 이해 할 때, 빛의 현상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처럼, 궁극적 실재에 대한 두 종교의 유형적 특징을 상호보완적으로 이해 할 수는 있다. 불교와 기독교가 지녀왔던 ‘궁극적 실재관’을 상보성원리에서 파악한다는 해석학적 은유의 뜻은 두 종교의 유형적 특징을 피차 존중하고, 자기에게 없거나 부족한 면을 상대로부터 배워 자신의 것에다 보완하겠다는 자세를 말한다.
불교의 무의 존재론과 기독교의 유의 존재론, 공(空)과 하나님은, 니르바나와 하나님의나라등의 대비는 비유하건데 조각기법에 있어서 양각기법과 음각기법에 상응한다. 양각(陽刻)이란 글자나 그림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이고, 음각(陰刻)이란 평면에 글씨나 그림따위를 옴폭들어가게 새기는 기법이다. 양각된 도장이 글씨를 드러내는 이유는, 움픅파헤쳐 없애버린 무 때문에 글씨가 돋보이는 것이다. 무(無)가 유(有)를 드러나게 한다. 반대로 음각도장을 보면, 글씨가 드러나는 이유는 이름 글씨부분이 옴폭파들어가게 조각한 것이므로 나머지 평면(有)이 글씨(無)를 드러낸다. 그런데, 도덕경 첫머리에서 말하듯이 “차양자동출이이명(此兩者同出而異名)”이다.
그러나 두 종교의 유형적 특성을 물리학의 상보성원리 은유로서 이해하는 방법과 달리, 칼 융의 심층 심리학의 ‘개성화의 과정’(the process of individuation)을 은유로 삼아 이해하는 접근법이 있겠다. 개성화란 인간정신의 긍극적 목표를 ‘자기실현’ 이라고 보고, 자아(the ego)와 자기(the Self)의 통합,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남성 또는 여성이 내 속에 있는 아나마 또는 아니무스와의 통합을 이루어가듯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인격의 전일성(全一性)․통전성(通全性)을 실현해가려는 삶의 지향성 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과 이해를 ‘개성화의 과정’ 이라는 심층심리학적 은유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을 지니는가? 그 가장 핵심적 의미는 불교․기독교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극성(極,polarity)과의 자기 안에서의 심층대화를 통한 전일성 회복, 통전성 회복을 의미한다. 소위말하는 ‘종교간의 대화’(inter-religious dialogue)가 아니라 ‘종교내의 대화’(intra-religious dialogue)로 전환하는 태도가 발생한다.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불교적 유형의 특징은 타종교에만 있는 낯선 어떤 것,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성서적 종교의 저 깊은 곳에 ‘아니마’같이 거기에 은폐되거나 억압되어 있었던 것이다. 역으로 불교안에도 기독교적 실재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특성같은 ‘아니무스’요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학자들과 기독교 학자들의 이론적 틀 안에서는 도저히 이해되기 어려운 삼신불론이나 삼위일체론이 종교를 이론체계로서가 아니라 구원체험과 삶의 길로서 살아가는 신도들의 마음 안에는 스스럼없이 형태구조적 유사성을 지니고 나타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주의 전통과 부정신학의 전통 속에서 체험하고 깨닫고 이해하는 ‘하나님’이 불교의 ‘공’(空)과 꼭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전혀관계없는 다른것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의 토착신앙의 한 형태로서 다석 유영모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신앙유형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 글 서두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체험과 이해의 특징을 폴 틸리히가 제시한 ‘역동적 유형론’의 관점에서 파악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역동적 유형론’은 위에서 언급한 ‘상보성원리’나 ‘개성화과정’이 지닌 실재파악의 해석학적 눈을 , 두종교의 상호관계성 패러다임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보다 심층적인 역동적 유형론의 접근이라면, 불교와 기독교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두견해가 ‘상보성’을 넘어 개성화론에서 보았던 것처럼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진리체험 또는 진리 이해의 모습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드릴 때, “종교간의 대화를 넘어서 창조적인 변화에로” 라는 죤 캅의 화두가 바르게 이해될 것이다. 거기엔 두 종교의 위대한 특성이 약화되는 조잡한 종교혼합주의가 자리잡을 틈이 없고, 각각 자기만족적인 과거 전통유산 안에 고답적으로 칩거하면서 은폐된 우월감에 사로잡힌 배타적 입장도 자리잡을 수 없다. 오직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열린자세, 상대방의 진리체험과 이해에 대한 겸허한 경청자세, 지구촌의 고난과 죄를 극복하려는 공동 연대와 협동자세, 그리고 진리의 무궁성과 신비로움이 새시대에 던지는 미세한 소리를 새롭게 들으려는 빈 마음등이 더욱 요청되는 문명단계에 우리는 이미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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