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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노래(눅2:25-35)-2024.12.29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제사장 사가랴의 노래, 예수님을 잉태한 모친 마리아의 노래,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직접 예수를 만난 시므온의 노래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메시아의 3대 노래입니다. 노래라기보다는 찬양이라고 할 수 있지요. 본문은 시므온의 찬송입니다. 시므온에 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25절에 나오는 정보가 전부입니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인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의로운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정보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믿는 자에 대한 프로필이 그 정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다가 그는 메시아를 간절히 사모하여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무엇보다 시므온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은 중간기 400년의 침묵기를 거치면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강력한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지요.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예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 주님을 반드시 만나 본다는 것이지요.
신구약 중간기 400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침묵하신 기간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었던 기간이지요. 아무 말씀도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시므온같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개입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켜보고 계셨고, 이스라엘을 향한 크고 놀라운 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 주인공이 시므온입니다.
한마디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남은 자의 사상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당신의 구속사를 중단하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죄악이 관영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하던 때도 남은 자를 남겨두셨고, 유황과 불로 심판하던 소돔 성의 심판 때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관통하는 구속사입니다. 그런 차원으로 볼 때 시므온도 역시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하나님의 400년 침묵기 속의 남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시므온의 기다림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메시아의 기다림이었지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메시아를 기다렸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시므온은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이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므온의 기다림은 노아가 하나님의 홍수심판을 대비하여 방주를 짓던 그런 기다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를 비웃었을는지 모릅니다.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 메시아를 무작정 기다리는 시므온의 기다림이 그 옛날 막연하게 방주를 지으며 홍수심판을 예비하던 노아의 기다림에 오버랩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요? 시므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그동안 중간기 400년 동안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 뜬금없이 메시아가 오신다구요? 그리고 그 메시아를 자기가 반드시 볼 것이라구요? 언제 오실지 모를 그 메시아를 마냥 기다려야 한다구요? 아마도 주변 사람들은 그런 시므온을 비웃었을는지 모릅니다.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 한다고 말입니다.
(1) 시므온은 메시아에 대한 언약을 듣고 기다렸습니다(26절)
시므온은 성령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노아도 반드시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신다는 예언을 들었고, 시므온도 분명히 살아생전 메시아를 볼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5절에는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는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희귀하게 역사하는 시대였지요. 성령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마무리되고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을 통해 보편적으로 각 사람 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지상에 보편적으로 강림하신 시대는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일을 위하여 특별한 사람에게 간헐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시므온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성령이 그로 하여금 확신을 주셨습니다. 살아생전 반드시 주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26절). 시므온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다린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시므온의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자생한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통해 갖게 된 믿음입니다.
그는 그 믿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성령의 확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그리스도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시므온은 직접 성령의 지시를 받았으니 얼마나 큰 확신을 가졌겠습니까? 그 위에 성령이 임하여 계셨으니까요.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은 성령의 확신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영적 흑암기를 통과하면서 이렇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은혜였던 것이지요. 그에게 남다른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사모함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위로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향한 구원의 소망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소망입니다. 구약 말라기 이후 400년간 침묵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위로였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위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다시 찾아주시는 것이고, 자기 백성으로 회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복원 시켜주시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400년 동안 냉랭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므온은 그런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반드시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로 돌아오신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성령의 음성을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2) 시므온은 성전에서 메시아를 직접 만났습니다(27-33절)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직접 만났습니다. 물론 그가 성전을 찾은 것도 하나님의 이끄심 때문이었을 테지요. 성령이 그를 감동케 하심으로 그가 성전에 들어간 것입니다(27절). 그가 성령께 민감했기 때문에 성령이 그를 이끌어가신 것입니다.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가니 마침 예수의 부모가 성전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를 따라 아기 예수를 안고 들어온 것이지요. 정결례식을 하기 위해 들어왔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태어나신 예수님은 율법의 전례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른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21절). 그리고 난지 33일 차 되는 날에 성전에서 결례식을 치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이른바 율법 아래 나셨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조건을 무시하지 아니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셨고, 정결 예식을 치르셨으며, 장자로 태어나신 것에 대한 헌아식을 하시고 대속을 위해 다섯 세겔을 드린 것입니다. 거기에 관한 증거는 누가복음2장22절에서 2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결례식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서12장에 보면,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합니다. 8일 만에 양피를 베고, 여인은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함을 입습니다. 도합 40일이 지나야 여인이 정결함을 얻는 것이지요. 그전에는 절대 성전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여자아이를 낳으면 이 칠일 동안 부정합니다. 이 칠일은 2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함을 입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결케 되는 기간이 차면 여인은 성전에 들어가서 정결 예식을 치러야 합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지요.
본문 27절에 보면, 당시 예수님의 부모가 정결 예식을 치르러 성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이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이지요. 시므온은 그가 메시아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당시 성전에 찾아오는 부모들은 요셉과 마리아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은 한눈에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성령이 주도면밀하게 인도하신 것이지요. 그의 찬송은 시므온 개인의 감정에서 나온 감탄사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메시아 앞에 바치는 찬송시였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향하여 고백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기다려온 구원을 친히 보았다고 말입니다(30절). 그러면서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31-32절). 한마디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이지요. 이제 자기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시므온의 나이가 상당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으니 종을 평안히 놓아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동안 메시아가 언제 오실는지 노심초사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제 메시아를 보았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기다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을 통해 메시아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주 단순한 논리로 불신자들이 드리는 기우제는 반드시 이루어진답니다. 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드리기 때문이지요.
(3) 시므온은 메시아의 관한 정보를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34-35절)
시므온은 메시아에 관한 정보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아의 정보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지요. 당시 시므온의 고백을 듣고 있던 예수의 부모들도 그 아기에 대한 찬양과 예언을 듣고 기이히 여겼습니다(33절). 구체적으로 그런 정보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부모들도 잘 정리된 복음을 처음으로 들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통하여 아기 예수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들과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을 통해서도 듣게 하셨고,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통해서도 듣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므온을 통해 너무나 선명한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친히 시므온의 입에 복음을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듣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아마도 시므온이 전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정보는 복음을 훨씬 더 구체화시켜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부모들이 시므온의 찬양과 예언을 기이히 여겼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서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깊어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더 깊은 믿음이 심어졌을는지 모릅니다. 시므온을 통해서 말입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을 찬양함과 동시에 예수의 부모들을 축복했습니다(34절). 그러면서 모친 마리아에게 더 깊이 있는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아기 예수에 대한 정체를 드러내 준 것이지요. 34절과 35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흉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내용인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세상은 양분될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
34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넘어짐이나 세워짐의 결정적인 기준이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고, 결정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패함이나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결정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처럼 어떤 이들에게 예수님은 넘어지는 걸림돌이 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흥함이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패함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거기다가 모친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예언합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장차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으로 인하여 모친 마리아의 마음이 칼이 뚫고 들어가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부성애보다는 모성애의 아픈 마음 때문에 마리아에게 직접 예언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마리아에게 미리 심어줌으로서 메시아의 영광과 고난을 동시에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뭇사람들로부터 환대만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와 박해를 당하셔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 것은 결국 뭇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뭇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드러남은 심판이 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요,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심판을 면제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감추어진 생각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각 사람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음과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우리는 시므온의 노래를 통해 메시아의 신앙을 보다 돈독히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께 집중하듯이 우리 또한 구주 예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집중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혼탁할지라도 내 마음의 주가 되시는 주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날마다 주님 안에서 사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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