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3) 상계종택 / 묘소 /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 소수서원
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3)
2015. 12. 4~5. 안동
상계종택 / 묘소 /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 소수서원
상계 종택
상계종택 망와
'공손히 생각하니 천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 이 글귀는 중국 남송의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중 한 구절이다. 1천500여년 후 공자의 도학(道學)을 다시 이은 주자가 공자의 마음,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하고 있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의 '추월한수'는 이 시의 한 구절인 '추월조한수'에서 온 말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의 도학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마음 또한 '추월조한수'와 같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퇴계의 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은 퇴계에 대해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상서로운 구름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항아리다"라고 표현했다. 성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이다. #퇴계를 기려 지은 정자 안동시에서 봉화 방향으로 가다가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에 못 미쳐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토계리 상계(上溪)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야산을 등진 평탄한 지형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다. 정자 앞으로 토계(兎溪)가 흘러간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沖齋) 권벌의 5세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퇴계가 자라고 공부하며 은퇴 후 머문 곳을 찾아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정신과 소중한 가르침을 받들어 배우고, 또한 그 가르침을 영원히 후학들이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을 것이다. 창설재는 자신의 선조가 세운 봉화 닭실의 '한수정' 이름에 '추월'을 더해 '추월한수정'이라 명명했다. 또한 정자 안에 걸려 있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이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의 현판 이름도 창설재가 명명한 것이다. 추월한수정과 인접해 있는 퇴계종택의 명칭인'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이름도 창설재가 당시에 붙인 것이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라는 뜻이다. 산남궐리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강학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려온 것으로, 퇴계를 기리는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운재의 뜻은 창설재가 지은 시 '이운재'에 잘 나타나 있다. '보갑에 든 옥거문고(寶匣瑤琴)/ 줄이 끊어진 지 오래이네(絃絶多年)/ 퇴계 선생이 멀리 이어(先生遠紹)/ 그쳐버린 거문고 소리 다시 전하였네(輟響再專)/ 경전을 대한 매화창에(黃卷梅窓)/봄소식이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幾回春信)/ 힘쓸지로다 후생들이여(勖哉後生)/ 오히려 여운을 다스려보세(尙理餘韻).' 거문고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성인의 도학이 이어지지 못한 것을 상징한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진시황 때 분서갱유로 단절돼 그 글만 복원돼 전해오다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송나라 때 정명도·정이천 형제가 공자의 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밝혀내게 되었고, 남송 때 주자가 집대성함으로써 공자의 도학이 새롭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정주학이라 불렀다. 고려 충렬왕때 회헌(晦軒) 안향에 의해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200년이 지난 뒤 퇴계에 이르러 정주학이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을 창설재는 퇴계가 끊어진 거문고 소리를 다시 이었다고 비유하면서, 그 여운을 받아 다스리자는 뜻으로 이운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완패당에 관한 창설재의 시도 전한다. #450여 문중이 중건한 현재 건물창설재가 창건한 추월한수정은 안타깝게도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다 타버렸다.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단소(道南壇所:도남서원이 대원군 때 철폐되면서 성현을 모시기 위해 제단만 설치했을 때의 이름. 현재는 서원이 복원돼 있음)에서 추월한수정을 복원하자는 도회(道會)가 열린다.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정자를 포함해 정침과 사당을 완성했다. 지금 정자에 있는 '산남궐리 해동고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이 썼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의 제자인 홍락섭의 글씨다. 그리고 '도학연원방'은 퇴계의 15세 종손 이동은옹(98)의 숙부인 원대(圓臺) 이원태의 글씨다. '추월한수정'과 '퇴계선생구택'은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이 썼다. 모두 복원 이후에 다시 쓴 글씨들로 퇴계의 글씨를 보는 듯 단정하다. 추월한수정의 대들보는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볼 때 시제를 걸던 나무를 100여명의 인부가 운반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이동은옹이 들려줬다. 창설재가 창건한 정자건물은 사라졌지만, 후학들의 복원을 통해 퇴계의 가르침과 혼을 전하고자 했던 그 마음과 업적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갈암의 문인으로 유학에도 정통하고 시·서·화에 능했던 창설재는 퇴계의 언행을 모은 '퇴도언행통록'을 저술하고, '계문제자록'을 정리하기도 했다. 현재 추월한수정은 학생과 일반인들의 전통 예절교육이나 문중 모임의 장소 제청(祭廳)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퇴계의 차종손(16세 종손) 이근필씨(75)는 '도산서원 허시회(虛施會)'를 만들고 거경(居敬)대학설립을 준비하는 등 퇴계의 정신과 가르침을 교육하고 보급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퇴계 15代 종손 이근필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추월한수정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퇴계의 도학道學을 추모하여 창건한 정자로
추월한수란 말은 주자의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에서 온 말이다.
즉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는 의미로
옛 성인들의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고 이동흠의 글씨이다.
退溪先生舊宅
추월한수정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바깥쪽 처마 밑에는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해서체로 향산 이만도의 손자이며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의 글씨이다.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강약의 조화로움이 탁월하고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시원스런 행서로
현 종손의 셋째 삼촌인 이원태씨의 글씨이다.
산남궐리山南闕里
일필휘지의 달필로 시원스러우면서도 멋스러운 행서체이다.
해동고정과 병렬로 게첨된 현판으로
대필서大筆書에 뛰어났던 海岡 金圭鎭의 작품이다.
궐리는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공자의 출생지로
산남궐리는 이곳이 공자의 유지인 궐리와 같다라는 의미이다.
해동고정海東考亭
필력의 힘이 저절로 나타나는 아름답고 자연스런 해서로 海岡 金圭鎭의 작품이다.
고정이란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건현의 서남西南에 있는 지명으로
송宋의 주자가 여기에 있으므로 후세에 이르러 주자의 호號가 되었다
완패당玩佩堂
예쁘면서도 단아하며 안정되고 편안한 해서체이다.
삼척三陟 사람으로 해강 김규진의 제자로 알려진 홍낙섭의 글씨이다.
이운재李韻齋
안정되고 단아하며 모나지 않은 행서로써 예쁘장하다.
홍낙섭의 글씨이다.
의재정아
의리는 나를 바르게 하는데 있다
종손 길사 이근필 글씨
김락이 살던 하계마을의 기적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은 수몰되고 이 비만 남아 독립투쟁 내력을 전한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원장 김종길
이사장 김병일
조각상 8천만원과 제막비 2천만원
도합 1억원을 기업은행에서 협찬 함
소수서원
소수서원 紹修書院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했다. 이 시기의 서원은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황은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했다.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사적 제55호.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